10화
전문 병원 실적표가 눈에 띄었다.
이제 한 달도 안 된 상황에서 수시로 확인하다니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었다. 신현수와 윤서연 일가의 몰락을 그만큼 바란다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진상건이 대소를 터트렸다.
“그동안 간 이식을 한 건도 못했고, 예약 자체가 없단 말이지. 하긴 고만한 병원에서 누가 간 이식처럼 큰 수술을 받겠어. 역시 의사보다 병원 규모를 보고 온다는 말이 맞아. 이거 괜히 정 국장님을 번거롭게 한 것 같습니다.”
“만사불여튼튼 아닙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쥐 한 마리를 잡아도 최선을 다해야겠죠. 분위기가 좋다고 하셨는데 보험 적용을 제한하겠다는 제안이 통과될 수 있는 겁니까?”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긴 합니다만, 한계까지 밀어붙여야 우리가 원하는 결정이 나지 않겠습니까?”
정한득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방법이 또 있다는 말씀 같습니다.”
“수가를 차등 결정하는 겁니다. 신생에 규모가 가장 작은 병원이 똑같은 돈을 받을 수는 없죠. 이미 시행하고 있는 제도인 데다 정부는 물론 의료계를 뺀 나머지 모든 단체 대표와도 이해가 맞아떨어집니다. 삼 개월 후면 전문 병원 분위기가 백팔십도 바뀔 겁니다. 그도 안 될 경우 공단에 적절한 조치를 취해 보험 지급을 늦추는 것도 가능합니다.”
“삼중 안전장치라! 한두 달만 돈을 못 받아도 심각한 위협이 되겠군요. 아버님과의 인연이 제게까지 이어져 정말 다행입니다. 민 부원장도 어깨가 가벼워졌어.”
민정호의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두고 봐야죠.”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이 정도까지 노력하면 민 부원장도 호응을 해야지. 몇 달 내에 끝장내. 오늘 가져온 실적을 보니까 엉망이던데, 눈치 못 채게 비용만 살짝 늘리면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어느 일에든 변수가 있기 마련입니다.”
“예측 못할 변수가 있다고 해도 한낱 병원이야. 환자가 어느 날 갑자기 폭발적으로 늘 일이 있겠어?”
진상건이 돌연 민정호를 뚫어지게 보았다.
“혹시 지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강호성인가, 그 애 일을 말하는 거야?”
민정호에게 모든 일을 맡긴 것처럼 보였지만 마냥 손을 놓고 있지 않았다. 고의든 아니든 전문 병원 상황을 전해 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 관심이 대단합니다. 잘못 대응했다간 이사장님에게도 불똥이 튈 수 있습니다. 형식적이라고 해도 같은 재단 산하 병원 아닙니까?”
“비난이라도 한단 말이야? 그따위 말에 신경 쓸 것 없어.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흐지부지될 사건이야. 우리나라 사람 기질 알잖아? 다른 사건 하나 터지면 또 그리 우 몰려가고도 남아. 곧 잊힐 거야.”
“틀린 말씀도 아니군요.”
“혹시 개입한 거야?”
민정호가 조용히 커피만 마셨다.
“하긴 돈도 안 되는 일에 개입할 이유가 없지. 보너스 두둑하게 쥐여 줄 테니까 빨리 해결해.”
무언의 긍정이라 여긴 모양이었다.
“계약만 지키시면 됩니다.”
“내가 언제 실수한 적 있나? 걱정하지 마.”
진상건이 이내 관심을 돌렸다.
정한득과 함께 이미 게임 끝났다는 듯 연신 큰 웃음을 터트리며 즐거워했다.
“이사장님, 민간 병원이라 해도 대학 병원 브랜치기 때문에 전문 병원을 폐업시키는 일이 만만치 않습니다. 대책은 있으신 겁니까?”
“정 국장님이 계신데 걱정할 일이 있겠습니까? 자금은 충분히 대 드릴 테니 소리 소문 없이 처리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아!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하하하! 편법도 합법이죠. 제 인맥이 지금도 여기저기 많이 남아 있습니다. 지원만 충분히 해 주신다면 쉽게 풀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정한득이 파리 새끼처럼 손을 비볐다.
“믿고말고요. 뒤탈만 나지 않으면 됩니다.”
“한 가지 걱정이 더 있습니다. 그런데 폐업이 결정되어도 직원들 반발이 상당할 텐데요. 머리 띠 두르고 데모라도 하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구조 조정 전문가인 민 부원장을 부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겁니다. 반발하는 놈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인데 어련히 알아서 할까요? 민 부원장, 안 그래?”
민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전문 맞습니다. 폐업이 결정되면 최대한 깔끔하게 정리해야죠.”
“정 국장님, 마음이 놓이셨습니까?”
“역시 치밀하십니다. 그다음 일은…….”
“폐업만 되면 거치적거릴 일이 없습니다. 다 같이 잘 먹고 잘살자는데 누가 싫다고 하겠습니까?”
“하하하! 아무렴요. 다 이사장님 덕분입니다.”
나이 먹은 사람이 한참 어린 이사장에게 잘도 고개를 숙였다. 배알이 꼴려도 버텨야 하는 직장이라 해도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다.
커피를 다 마신 민정호가 일어났다.
“제가 들어야 할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말씀 나누시죠.”
고개 한 번 까딱이고 사라졌다.
정한득이 혀를 찼다.
“이사장님께 인사도 제대로 안 하다니 참 무례한 사람입니다. 많은 돈을 들여 저런 사람을 쓰신 이사장님의 아량이 놀라울 뿐입니다.”
“내 말만 잘 따르면 상관없습니다. 돈값만 확실하게 하면 되는 사람입니다. 아쉬우면 언제든 머리를 수그리지 않겠습니까?”
“역시 맺고 끊는 것도 확실하시군요. 회장님 피를 그대로 받으신 것 같습니다.”
여유로운 미소를 짓던 진상건의 눈이 가늘어졌다.
‘민정호, 네가 개입했다는 걸 빤히 알고 있는데 대답을 안 해? 어울리지 않게 아동 학대 때문에 나섰다 이건가? 민정호, 무슨 짓을 하든 계약만 확실하게 이행해. 그게 바로 네가 해야 할 일이야.’
민정호만큼 돈에 민감한 사람은 없었다.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철저히 피했고, 어떻게든 계약을 이행해 왔다. 덕분에 많은 득을 본 것 또한 사실이었다.
누구나 놀랄 정도의 성공 보수를 제시한 이상 이번 역시 다를 리 없었다. 신현수의 뒤통수를 제대로 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국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되게 돼 있어.’
진상건의 얼굴이 풀리자 정한득이 뇌 없는 사람처럼 마냥 즐거워했다. 은밀하게 오늘 나눈 대화를 열심히 녹음하며 말이다.
***
토요일 오전까지 회의가 이어졌다.
김지훈이 내리 삼 일을 서울로 향했다.
왕복 거리가 상당한 데다 양측 주장이 첨예하게 맞섰지만 간 이식을 포함한 다른 장기 이식의 미래까지 걸린 일이었다.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한때 의료계 대표 모두 정한득의 끈질긴 주장 속에 담긴 의도를 알아차려 극심한 불안에 시달리기도 했다. 병원마다 이해관계가 다르고, 의사만큼 병원 하나 죽이기 쉬운 자리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때 진충기 교수가 나섰다.
“눈앞의 이득을 위해 특정 병원의 불이익을 감수한다면 결국 스스로 발등을 찍게 될 겁니다. 파이 전체를 키우지 않으면 공멸밖에 더 남겠습니까?”
든든한 동료임이 분명했다.
이준영 교수까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마침내 최종 결정이 났다.
합의가 아닌 거수 투표였다.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가는 하한선에 근접해 결정됐다. 김지훈이 애초 주장했던 비용에도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삼 개월 후 평가해 차등 지급한다는 안까지 통과됐다. 그도 모자라 기준 자체가 애매모호해 자의적인 평가가 가능했다.
분위기로 볼 때 정한득이 주도할 가능성이 무척 높아 보였다. 정부는 분명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일을 피하려 들 것이다.
김지훈에게는 치명적인 결과였다.
‘수가가 낮으면 무조건 환자에게 좋다는 논리가 어떻게 통할 수 있지? 수익 보전을 위해 비급여 항목을 늘려야 한다면 결국 환자가 피해를 본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 걸까? 내가 왜 민 부원장과 충돌했을까? 차라리 처음부터 동의했으면 이렇게 후회할 일도 없었을 것 같네.’
의료계에는 절대 경제 논리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정작 자신들은 수가에만 집착하는 행태가 모순으로 보였다. 편법이 동원되는 악순환이 벌어질 것이다.
이준영 교수도 잠시 말을 잇지 못했지만 이내 평소 얼굴을 되찾았다. 제자의 버팀목이 스승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다.
“김 과장, 실망하긴 일러.”
김지훈도 스승에게 걱정을 끼칠 수 없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어떤 면이 긍정적이야?”
“어찌 됐든 환자 부담이 줄었지 않습니까? 애초 부담이 커 큰 차이가 없다고 해도 체감이 다를 것 같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수술받을 수 있겠죠.”
“우리 병원을 목표로 삼았지만 삼 개월이란 기한 역시 짧지 않은 시간이다.”
“예. 이미 두 건은 예약돼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마음이 놓입니다.”
턱도 없는 말이었지만 제자는 웃었고, 스승은 말없이 응원했다. 지난 시절 이보다 더한 어려움을 이겨 냈기에 실망하고 비관할 이유가 없었다. 의료 환경을 생각하면 예전과 달라진 것도 없었다.
‘정한득이란 사람이 너무 신경 쓰이지만 할 일만 하면 된다. 결코 우리를 방해할 수 없어.’
김지훈이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웃었다.
“스승님, 곧 퇴근 시간인데 병원에 갔다 다시 오실 필요가 있을까요? 결과는 제가 설명해도 되고요. 집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니다. 오후 회진 돌아야지.”
“현수에게 맡기시면 되잖아요?”
“내가 수술한 환자에게 지켜야 할 약속이야. 너 주말 당직 아니야? 빨리 안 가고 뭐 해?”
김지훈이 밝게 웃었다.
영원한 스승이었다.
과장이란 말보다 너, 혹은 지훈이라 불리는 것이 훨씬 기분 좋았다. 문득 큰 스승님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오늘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건강하시다는 소식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병원에 도착했다.
김지훈이 올 때까지 당직 자리를 지키고 있던 손일석이 쪼르르 달려왔다. 회의 결과가 궁금했는지 이혁원과 고경철도 고개를 들이밀었다.
김지훈이 결정 내용을 설명했다.
정한득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갑수가 누구 피를 받았는지 확실해졌네. 야! 진짜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그런 사람이 위원장이 될 수 있지? 하여튼 대가리들이 문제야. 사람들 눈치 안 보고 지들끼리만 서로서로 돕고 사는 데 선수라니까.”
“그러게 말이다. 별일 없었어?”
“김 과장 일이 별일이지 뭐 있겠어? 어젯밤에는 환자 좀 있었는데 오늘은 또 적막강산이네. 시간이 일러서 그런가? 아니면 일복의 화신 대신 내가 있어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나 회진 돌고 올 테니까 그때까지만 봐줘. 참! 혈관 수술은 몇 개나 했어?”
손일석이 씨익 웃었다.
한 손으로 부족했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시며 중환자실부터 들렀다.
마침 면회 시간이었다.
강호성이 엄마의 손을 꼭 잡은 채 잠에 빠져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송진우 선생, 어때?”
“어제보다 훨씬 좋아졌습니다. 오늘 아침 복부 절개창 실밥도 풀었고요. 주말 잘 넘기면 드레인 빼고 물을 시작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토록 애를 태웠던 강호성의 상태가 하루하루 달라지고 있었다. 수술 전 상태가 워낙 나빴다는 점을 고려하면 의사 입장에서도 놀라운 회복 속도였다.
“정말 불안했는데 알 수가 없네.”
송진우가 휴대폰을 꺼냈다.
정문 앞에 놓인 꽃과 응원 메시지를 찍은 사진을 보여 주며 강호성 머리맡에 놓인 젤리를 가리켰다.
“호성이가 이 사진을 보며 정말 활짝 웃었습니다. 가장 먹고 싶은 게 젤리라고 하면서요. 엄마가 옆에 있는 덕도 큰 것 같습니다.”
“사람들 마음이 전해진 덕인가?”
“안호석 선생님 말이 결정적이었는지 모릅니다. 어린 시절 겪었던 아버지 얘기를 하는데 저도 눈물이 날 뻔했거든요.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의 존재가 위안이 됐을까요?”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강호성을 위해 안호석의 아픈 구석을 끄집어낸 당사자로서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 원하지 않았다면 되살릴 기억이 아니었다.
이해해 주기만을 바랐다.
“시간 되는 대로 같이 술 한잔하자. 주말 당직이 나니까 이제 그만 퇴근해. 고생했어. 푹 쉬어.”
“일복 너무 심하게 터트리지만 마십시오.”
“뭐?”
“아닙니다.”
이 주 가까이 등을 떠밀어도 곁을 떠나지 않았던 송진우가 순순히 가운을 벗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강호성의 호전을 알 수 있었다.
고마울 뿐이었다.
보험 논의와 정한득 때문에 망가졌던 기분이 경찰을 만나며 한결 좋아졌다. 엄마에 대한 처분은 미뤄지고, 아비라는 작자는 기대하기 힘든 속도로 구속됐다.
재판을 거쳐 엄벌을 받는다면 강호성도 공포에 떨 일이 없을 것이다. 다만 영구 격리가 될 리 없기에 때 이른 걱정이 다가왔지만 이후의 일은 사회의 몫이었다.
장풍연 환자는 기쁨이었다.
서도훈이 안전하게 음식 섭취를 진행했다.
어떤 문제도 없었다.
“다음 주에 퇴원 날짜 결정하겠습니다. 따님도 이경석 선생님께 수술 예약하시죠.”
“호호호! 그래도 되나요? 감사합니다.”
입원할 때는 세상 무너진 것처럼 무거운 표정을 짓지만 퇴원할 때가 되면 활짝 웃는 사람이 환자와 보호자였다. 건강을 되찾았다는 의미기에 그만큼 뿌듯한 일도 없었다.
김지훈이 어깨를 폈다.
‘오르락내리락하지만 환자 문제만큼은 잘 풀리는 것 같다. 아비라는 작자를 다시 볼 수 없단 말이지? 혹시 풀려나 행패 부리면 냅다 꽂아 주려고 했는데 아쉽네. 응급실에서 한 방 날릴 걸 그랬나?’
되도 안 될 상상을 하며 고경아에게 오늘의 일을 보고한 김지훈이 느긋하게 응급실로 향했다.
오늘도 조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