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083화 (1,083/1,329)

9화

다음 날 점심.

김지훈이 제시간에 밥 먹고, 고경아와 함께 한낮의 햇살을 즐기는 호사를 누렸다. 강호성이 조금이나마 호전된 데다 엄마와의 면회도 경찰 입회하에 이뤄져 여러모로 마음이 편해졌다.

다만 수술하는 날임에도 시간이 남아돈다는 사실, 다른 파트는 서서히 궤도에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에 찜찜하긴 했다. 하지만 이런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고 고경아와의 시간을 즐기려 애썼다.

“서울 병원은 좁아서 앉아 쉴 자리도 없었는데 여기는 넓어서 좋네요. 이렇게 쾌적한데 왜 환자가 안 올까요? 아니지. 나만 없구나.”

“호성이도 잘 깨어났으니까 쉴 때만이라도 환자 생각은 미뤄 둬요. 간 이식까지 일부러 연기했잖아요. 그러다 병나겠어요.”

“월급 값은 해야 하는데 찝찝하네요.”

“잘 놀 줄 알아야 일도 잘하는 법이에요. 참! 희연이 선물은 전해 줬어요?”

“친구조차 없어서 그런지 머리맡에 잘 모셔 놓고 있네요. 불쌍하고 안타깝고 그러네요. 우리 딸은 정말 예쁘게 잘 컸어요. 경아 씨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밥만 잘 먹으면 좋겠는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고경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정문 쪽을 바라보았다.

“누가 꽃을 갖다 놓았네요.”

“꽃이요?”

강호성의 회복과 행복을 응원하는 장미 한 송이와 카드 한 장이었다. 오랜 시간 병원에서 근무했지만 이름 모를 사람의 마음을 접하기는 처음이었다.

아직 살 만한 세상이었다.

김지훈이 먹먹한 가슴에 콧등을 찡그렸다.

코끝이 찡했다.

“누군지 몰라도 고맙네요.”

고경아는 말없이 눈시울을 붉혔다.

아이 키우는 입장에서 더욱 가슴이 아픈 모양이었다. 강호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너무 화를 내 말려야 했을 정도였다.

시작이었다.

하나둘 꽃이 쌓였다.

마음이 담긴 손 편지가 늘어났다.

결코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에 사람들의 관심이 점점 늘어만 갔다. 차갑게만 느껴지는 민정호도 한동안 정문 앞을 서성이며 사진까지 찍었다.

‘그래. 마음이 안 아프면 사람이 아니지.’

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민정호의 인간적인 모습에 내심 미소 짓던 김지훈이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아 입맛을 다셨다.

중앙 일간지부터 작은 지역 신문사 기자까지 몰려들어 취재에 열을 올렸다. 급기야 방송국까지 나타나 직원들이 통제를 해야 할 지경이었다.

어째 민정호의 눈이 번쩍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또 다른 강호성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관심이 필요했다.

김지훈이 적극적으로 취재에 응했다.

‘민 부원장의 의도가 뭐든 간에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해. 양은 냄비처럼 빠르게 끓었다 식기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대부분 주치의이자 집도의며, 최초로 아동 학대 사실을 인지하고 신고한 김지훈을 만나고자 했다. 하지만 운 좋은 몇몇을 빼고는 만나지 못했다.

김지훈이 오전 마지막 환자 진료가 끝나자마자 이준영 교수와 함께 서울로 출발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송진우의 얼굴이 시뻘겋게 불타올랐다.

“송진우 선생, 얘기 잘해.”

손일석은 물론 신현수까지 등을 떠밀었다.

간 이식 보험 적용을 논의하는 중대한 날이었다.

도착하는 즉시 멀리 부산에서 올라온 전문 병원 의료진, 간 이식 센터 설립에 사활을 건 H 병원의 진충기 교수와 함께 최종 의견을 조율했다.

“생체 이식의 경우 총수가가 반드시 일억 이상 돼야 합니다. 이천 정도 더 요구된다는 것이 우리 추산입니다. 장기 기증을 받은 경우 역시 신장 이식 비용을 상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은 흔치 않은 수술이었다.

더구나 막대한 인력과 새로운 장비 및 시설이 필요했다. 초기 투자 비용은 물론 경직성까지 높아 수술이 없으면 고정 비용만 발생할 뿐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결코 많은 액수가 아니었다.

반면 환자 부담이 적지 않았다.

수술 및 기타 비용을 합치면 삼사천만 원이 훌쩍 넘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별다른 문제 없이 퇴원한 경우에 국한된 비용이었다.

애초 다소 낮은 수가를 주장했던 김지훈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손해 보며 수술할 수 없다는 말을 반박할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결국 민 부원장 뜻대로 되네.’

타 병원의 입장과 현실을 무시하면 보험 적용이 결정되기도 전에 분란만 일어날 상황이었다. 과도한 이윤을 남기는 것도 아니고, 적정한 이윤이 있어야만 지속 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최종안을 작성했다.

남은 일은 분명 현실과 동떨어진 수가를 제시할 정부와 수요자 측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이준영 교수를 비롯해 공급자인 의료진을 대표하는 의사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회의실에 도착했다.

가벼운 인사와 웃음이 오갔지만 은근한 긴장이 감돌았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진충기 교수와 함께 대표로 선정된 김지훈이 생각을 정리했다.

‘정확한 수치를 근거로 주장해야 한다.’

서류를 확인하며 커피 한 잔을 마시던 김지훈이 불현듯 눈에 들어온 누군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찬찬히 기억을 더듬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머리가 희끗해져 기억 속 인물보다 훨씬 나이를 먹었지만 분명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얼굴까지 떠올랐다.

부리나케 이준영 교수를 찾았다.

“선생님, 저분이 위원장 맞죠?”

“정부 측에서 선정한 민간 위원 대표 맞다. 공무원 출신이라는데, 아는 사람이야?”

“보건복지부 국장이었던 정한득이 분명합니다. 정갑수 아버지예요. 데메롤 투여에 간호사와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수련도 못 마친 전공의 기억하시죠?”

“기억한다.”

“감정이 안 좋을 수도 있는데 영향이 없을까요?”

금경태, 진평호와 붙어먹었던 사람이었다. 권한과 힘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취하려 했던 인간이 어떻게 정부 측 위원이 됐는지 모를 일이었다.

공무원 사회의 병폐일까?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순리나 정당한 절차에 따른 인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더욱이 김지훈과 이준영 교수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도 어느 병원을 대표하는지 모를 수 없었다. 호의적이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위원장 혼자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야. 감정이 개입될 여지가 적은 자리니까 신경 쓰지 마. 우리 할 일만 하면 된다.”

말과 달리 이준영 교수가 눈가를 찌푸렸다.

우려하는 것이 분명했다.

정한득의 눈길이 스쳐 간 것 같았다.

불안한 가운데 회의가 시작됐다.

정부 측 및 위촉받은 민간 위원, 수요자, 공급자 대표가 각기 동수로 구성되지만 사실상 정부와 공급자인 의료계 양측의 주장이 충돌하는 자리였다.

예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정부 및 수요자 단체가 내민 안은 수용이 불가능했다. 보험료를 내는 국민의 입장을 대변하기 때문에 이해는 갔지만 터무니없을 정도였다.

이준영 교수와 진충기 교수 등이 근거 자료를 제출하며 적정한 합의를 도출하려 했지만 완강한 자세를 버리지 않았다.

특히 민간 위원 대표인 정한득이 문제였다.

“병원은 영리 단체가 아닙니다. 이윤보다 국민의 건강과 치료받을 권리에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습니까? 제 오랜 경험으로 볼 때 다른 부분에서 상당한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데 아닙니까? 간 이식만 봐서는 안 됩니다.”

그럴듯한 말이었다.

실제 많은 사람이 싸면서도 최고 수준의 의료를 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싼 게 비지떡이란 말 공연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의사, 간호사를 망라한 의료진 상당수가 열악한 근무 환경에 시달리고 있었다. 시간당 급여를 계산하기도 민망한 수련의나 전공의가 없으면 병원 운영이 불가능하다는 말도 과장이 아니었다.

의무감이나 사명감으로 요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언젠가 곪아 터질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의 몫이 될 것이다.

그 모든 사실을 차치하고 발언 당사자가 정한득이란 사실에 김지훈이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까지 잘 먹고, 잘산 것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적정 수가에 못 미치긴 마찬가지인데 다른 부분 수익을 전용하라고? 제발 여기까지만 했으면 좋겠다.’

정한득은 멈추지 않았다.

이준영 교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수가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일부 병원은 간 이식 능력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적정 의료진과 병원 규모도 제대로 못 갖추고 동일한 대우를 받으려 하면 곤란합니다.”

당연히 반발이 터져 나왔다.

“능력이 안 되는 병원이 있다는 말입니까?”

“의료계에서 더 잘 알지 않습니까? 이 자리에 언급한 병원이 있을 수도 있어 구체적인 자료까지 오픈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쨌든 국민 부담을 고려해서 수요자 측 안을 수용하길 바랍니다.”

의도가 보였다.

병원 하나를 노골적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김지훈이 몸담고 있는 전문 병원이었다.

극력 반발하려 하자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감정에 휘말리는 순간 논의가 아닌 싸움이 벌어질 테고, 불리해지는 쪽은 무조건 의료계였다.

“침착하고, 객관적으로 설명해.”

훅 숨을 내쉰 김지훈이 발언을 청했다.

“제시한 수가를 도저히 수용할 수 없습니다. 최악의 경우 간 이식 수술 시행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로 인해 벌어지는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에게 돌아갑니다. 수술을 받지 못하면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인데 책임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많은 국민들이 원하는 보험 적용을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방침입니다. 책임은 의료계에서 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수술 비용조차 보장되지 않는데 어떻게 환자를 치료합니까? 예전처럼 눈과 귀가 막힌 세상이 아닙니다. 합리적인 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터무니없는 수가를 제시한 측도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겁니다.”

정한득의 입꼬리가 말렸다.

‘합리적인 안이라! 진상건 이사장과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내 아들을 그 지경으로 만든 이준영, 김지훈, 너희들을 확실하게 밟아 주마. 겸사겸사 내 노후도 보장받아야지.’

“좋습니다. 한 가지 대안을 제시하죠.”

“말씀하십시오.”

“규모와 치료 능력에 따라 1차, 2차, 3차 병원으로 나눠 수가를 차등 지원하는 것처럼 간 이식 병원도 치료 결과에 따라 차이를 두고자 합니다. 규모는 물론 수술 건수가 기준에 못 미치면 경험 부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겁니다. 고도의 실력이 요구되는 간 이식이 아닙니까?”

어떤 병원을 말하는지 보다 명확해졌다.

정한득의 시선이 김지훈과 이준영 교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겐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김지훈에겐 아니었다.

‘도대체 언제 적 일인데 우리를 목표로 삼는 거지? 정말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환자들도 불안해할 겁니다. 자칫 실력도 없는 병원이 욕심을 부리면 치명적인 피해가 발생할 개연성까지 무척 높습니다. 그런 병원은 국민을 위해서라도 퇴출시켜야죠.”

“퇴출이라니요?”

“삼 개월의 유예 기간을 둔 후 기준에 미달하면 보험 적용 병원에서 제외한다는 말입니다. 무분별하게 적용했다간 환자는 환자대로 피해를 입고, 보험료만 올라가게 될 겁니다. 간 이식 수술 하나 때문에 국민의 호주머니를 털 수는 없는 노릇이죠. 공공의 이득을 위해 충분히 제한할 수 있는 사유라고 봅니다.”

문제가 많은 발언이었다.

유달리 공공성을 강조하는 의료보험 체계의 특성과 어떻게든 재원을 아끼려 하는 정부와 수요자의 입장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당연히 반론이 제기됐다.

“간 이식을 시행하는 병원 대부분 민간 병원입니다. 건수가 적다고 제한하게 되면 결국 의료의 질을 떨어트리고, 발전까지 막을 겁니다. 무엇보다 의료보험 적용은 강제 사항이 아닙니까?”

“알고 있습니다만, 보험이 적용되면 몇 년 내에 연간 천 건 이상의 수술이 벌어질 것이라 예측됩니다. 단 하나의 수술로 천문학적 금액이 소요되는데 최소한의 안정 장치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행선을 달렸다.

애초 합리적인 논거보다 각 주체의 입장이 앞서는 자리인 데다 칼자루는 사실상 정부가 쥐고 있었다. 더구나 보험료가 인상되는 것을 반기는 사람도 없었다.

협상이 결렬됐다.

하루 뒤 다시 논의하기로 했지만 최종 결정 시한을 불과 삼 주 후로 잡았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몰라도 연관된 기관의 행정적인 문제를 처리하기에도 벅찬 기간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회의장을 나온 의료계 인사들의 얼굴이 좋지 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뿐이었다. 정한득의 주장 또한 명확한 기준을 세우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자리를 옮겨 숙의를 거듭했다.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우리의 안을 끝까지 주장해 최소 적정 수가라도 보장받아야 합니다.”

“그간 마음에 안 들긴 했어도 이 정도로 무리한 제안을 하지는 않았는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정한득이란 사람의 발언권도 의외일 정도로 강해 보이고요.”

과거를 안다고 도움 될 일은 없었다.

인간성을 기준으로 결정하는 사안도 아니었다.

이준영 교수가 입을 열지 않는 한 김지훈도 정한득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할 자리가 아니었다. 사실 전문 병원을 망하게 하려는 의도가 보인다는 것을 증명할 길도 없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지?’

김지훈이 눈가를 비비며 고심을 거듭했다.

그 시간.

진상건, 정한득, 민정호가 한자리에 모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