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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082화 (1,082/1,329)

8화

강호성은 친구가 없었다.

학교는커녕 집 밖에도 나가지 못한 탓이었다. 그 때문인지 얼굴도 모르는 희연이가 준 희망의 선물을 손에서 놓지 않는 모양이었다.

말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다.

배가 아프다고 호소했다.

천만다행 절개창과 드레인은 깨끗했고, 췌장 효소가 유출된다는 어떤 징후도 없었다.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육신이 주는 고통일 것이다.

때때로 울었다.

“엄마!”

“곧 올 거야. 엄마는 무섭지 않니?”

고개를 저었다.

‘자식에게 이 정도 폭력을 가했는데 아내라고 무사할 리 없었겠지. 아빠라는 놈에게 동조했지만 엄마 역시 공포에 젖어 살았을 가능성이 획실히 높다. 엄마도 피해자라는 사실이 왜 다행이라고 느껴질까?’

서글프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형사와 엄마가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다소 불안했지만 강호성을 지켜 줄 어른이 몇이나 있었다. 예기치 않은 사태에 충분히 대처하고도 남았다. 무엇보다 강호성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응급실 기억이 떠오르며 기분이 묘해졌다.

면회를 허락했다.

겁에 질린 것처럼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둘러보던 엄마가 병상에 누워 있는 자식을 보았다. 거의 주저앉다시피 아들에게 다가갔다.

“호성아!”

“엄마!”

“엄마가 잘못했어. 우리 아들, 엄마가 잘못했어.”

자신의 손을 가슴에 품은 채 오열했다.

아이는 엉엉 울기만 했다.

엄마의 눈물은 가식이 아니었다.

“내가 죽었어야 됐어. 내가 죽었어야 됐어. 우리 아들, 엄마가 정말 미안해.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해.”

누구도 개입할 수 없었다.

김지훈이 슬며시 뒤로 물러났다.

때늦은 후회였고, 어떤 식으로 벌을 받을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엄마와 아들의 시간이었다. 강호성이 믿고 의지할 엄마가 있다는 사실에 다행이라는 생각만 스쳤다.

김지훈이 형사를 만났다.

“반응이 어떻습니까?”

“엄마와 자식이네요.”

적잖이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렇습니까? 정신 감정까지 확인했지만 정말 뜻밖이네요. 엄마는 재조사가 불가피하게 보이는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가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렸지만 호성이 반응을 보니 꽤 당황스럽네요.”

“서정호 검사님께서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우리를 믿고 맡기십시오. 더 이상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호성이를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구체적인 상황을 확보하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몸 상태도 문제지만 심리적으로 굉장히 불안한 상태입니다. 가능하다는 판단이 들면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았다.

남은 일은 강호성을 회복시키는 것뿐이었다. 채 삼분의 일도 안 남은 췌장이 평생 고통을 초래할 수도 있지만 아이의 생명력은 의사도 알 수 없는 영역이었다.

‘됐어. 다른 생각 말고 호성이만 보자.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형사를 보낸 김지훈이 중환자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수술실로 향하는 손일석이 보였다. 싱글벙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호성이 때문이 아닌 것 같네.’

“일석아, 좋은 일 있어?”

“호성이가 눈을 떴다며? 형님들까지 오시고 아주 잘됐어. 신문, 방송에 대검 부장검사님까지 신경을 쓰면 어떤 일이 해결 안 되겠어?”

어떻게 알았을까?

이미 인사까지 다 한 투였다.

역시 민감한 코를 가진 손일석이었다.

“그렇겠지? 오늘 아침에 내일 전원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런 일이 생긴다. 응급으로 시행한 검사 결과도 좋아.”

“그래서 눈가에 짙은 어둠이 사라졌구나. 내 얼굴도 그렇게 안 보여?”

분명 또 다른 일이 있었다.

김지훈이 궁금한 기색을 보이자 손일석이 하얀 종이에 빨간 글씨로 작성한 수술 스케줄을 흔들었다.

무려 두 장이었다.

고경철이나 펠로우가 제출해도 되건만 직접 들고 오다니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었다.

“수술 있구나? 무슨 수술이야?”

“간 이식이 없으면 뭐겠어?”

“혈관?”

“빙고! 민정호 능력이 대단한 건지, 내 이름이 이미 알려졌던 건지 모르지만 오늘부터 시작이다.”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홍보를 시작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혈관 수술 환자가 오다니, 한 장도 아닌 두 장의 수술 스케줄을 두 눈으로 빤히 보면서도 믿기 힘들었다.

“자! 그럼 수고하셔. 난 칼 잡으러 갑니다.”

김지훈이 멍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루 동안에 이런 일이 다 생겨도 되는 거야?’

이경석이 새로운 시도를 성공적으로 끝냈다.

일주일 내내 눈도 뜨지 못했던 강호성이 의식을 회복했고, 엄마를 찾았다.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던 엄마와 자식의 사랑까지 보았다.

수술이 없어 괴로워하던 손일석이 월요일부터 두 건의 수술을 시행하기 직전이었다. 주말을 고려하면 이삼 일에 불과했을 홍보에도 말이다.

기쁜 일이 연달아 벌어졌다.

무언가에 홀린 기분까지 들었다.

불현듯 목요일에 있을 보험 논의마저 잘 해결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당장은 간 이식 파트 전원의 눈총을 받아야 하지만, 곧 단내 나도록 수술할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경석이 형, 송진우, 안호석, 손일석, 모두 고맙다.’

반드시 외쳐야 할 말이 남았다.

김지훈이 돌연 인상을 썼다.

‘인정해? 인정할까? 알게 모르게 많은 덕을 봤는데 그래도 되겠지? 민 부원장님, 고맙습니다. 사무적인 관계로만 살지 맙시다.’

카르페 디엠!

다들 자리 잡아 가는데 김지훈 너는?

간 이식 파트에 딸린 식구들은?

주변만 술술 풀려 갈 뿐 정작 제 코가 석 자이긴 마찬가지였다. 어정쩡하게 만세를 외친 김지훈이 중요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형님들은 가셨나?’

“형님, 어디세요?”

(돌아가는 중이야. 국장님도 이슈를 만들어 보시겠다니까 호성이 문제는 걱정하지 마. 그리고 민정호 부원장 말이야. 꽤 희한한 사람이더라.)

“저도 알쏭달쏭합니다.”

(그래? 우리 정서상 공사가 너무 확실하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어. 최소 자신이 내뱉은 말은 철저하게 책임지는 사람으로 보이니까 잘 지내 봐.)

“민 부원장도 우리가 껄끄럽데요?”

(그런 뜻이 아니야. 일 하나는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란 인상이 강해. 난 그 점이 무척 마음에 들던데, 김 과장은 안 그런가 봐.)

“정이 없잖아요.”

(정? 강호성에게 이 정도로 신경 쓰고,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없는 우리하고 식사 날짜까지 잡았는데 정이 없겠어? 티를 안 내는 거겠지.)

통화를 끝낸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형님들은 인맥이고 우리는 아니란 말이야? 하긴 구조 조정 전문가에게 의사보다 검사나 방송인이 더 필요하겠지.’

민정호의 웃는 얼굴조차 떠올리기 쉽지 않았다. 정훈철이나 서정호나 별반 다르지 않을 텐데 어떻게 호감을 주었는지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사람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뭐야?”

투덜투덜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중환자실에 들렀다 이른 회진을 돌았다. 복강경 수술로 담도와 공장을 이었기에 은근히 불안했던 장풍연 환자마저 희소식을 전했다.

“선생님, 가스 나왔어요.”

허탈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젖은 거즈로 입만 적셔 왔다.

물만 보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물병에 손부터 갔다.

“아버님, 고생 많이 하셨지만 아직 안 됩니다. 내일 아침에 진찰하고 괜찮아야 물을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내일이면 됩니까?”

“운동 열심히 하세요.”

장풍연 환자가 진짜 웃었다.

기쁜 일이 차고도 넘쳤다.

김지훈이 모처럼 밝게 웃었다.

때마침 간 이식 보험 문제를 논의하기로 한 첫 번째 날이었다. 이런 추세라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이라 믿으며 힘차게 회의실로 향했다.

송재덕 교수, 이준영 교수, 이경석, 신현수가 이미 모여 있었다. 돈과 관련된 일이라면 결코 빠지지 않을 민정호도 어김없이 얼굴을 보였다.

“김 과장, 호성이가 눈을 떴다며? 괜찮니? 괜찮지? 다들 고생했다. 고생했어. 꼭 건강하게 만들어서 퇴원시키자. 우리가 이런 맛에 의사 하는 거잖아. 좋다. 좋아.”

한동안 강호성을 두고 즐거운 대화가 이어졌다.

모두들 아동 학대라는 사실은 잠시 접어 두고 오직 환자에게만 집중하려 애썼다. 민정호도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은지 병원비 얘기는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김지훈이 가자미눈을 떴다.

‘병원비 얘기를 꺼내고도 남아야 하는데 왜 조용하지? 원장님하고 스승님 앞에서는 뭔가 달라. 우리하고는 다른 인맥이라는 건가?’

의심의 눈초리 때문이었을까?

보험 논의에 들어가자마자 민정호가 적정 급여를 두고 강하게 태클을 걸었다. 간 이식 수술까지 미룬 김지훈 입장에서는 첨예하게 맞설 수밖에 없었다.

“기본 조사에서 일억 이상의 수가가 적당하다고 나왔어도 생체 이식의 경우 환자 부담이 삼천만 원이 넘습니다. 여기서 더 올려야 한다는 건 수술받지 말라는 말과 뭐가 다릅니까?”

“일주일에 두 건 이상 하실 자신이 있습니까? 많이 양보해서 한 건 반 정도 한다고 해도 수지타산이 안 맞습니다. 최소 총수가가 일억 이천은 돼야 합니다.”

“형편 좋은 환자 얼마 없습니다.”

“환자 생각하다 병원이 먼저 망합니다. 주장을 굽히지 않으시면 전문 병원 타이틀을 버리거나, 비급여 항목을 개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허용되는 선까지 이윤을 줄여 보다 많은 사람이 수술받게 하자는 의견과 안정적인 병원 경영을 위해 적정 이윤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견의 충돌이었다.

무엇이 옳은지 확언하기 어려운 문제를 두고 한 사람은 목소리를 높이고, 한 사람은 차분했다. 성격 차이가 명확하게 보였지만 민정호가 특이한 쪽에 더 가깝긴 했다.

각기 합리적인 명분이 있었다.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사실상 김지훈과 민정호 두 사람의 충돌이었다.

결론이 나지 않았다.

묵묵히 귀만 기울였던 이준영 교수의 말이 있고 나서야 자리가 조용해졌다.

“각 병원 모두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만의 의견으로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어. 다른 병원과 연락해서 절충점을 찾는 것이 가장 바람직해.”

“알겠습니다.”

민정호가 곧바로 수긍했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김지훈이 멍하니 입만 벌렸다.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던 민정호가 스승의 단 한마디에 꼬리를 내리다니 어이가 없었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만만하다는 건가?’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 그게 좋겠다. 우린 비용이 일억 이상 들지 모르지만 다른 병원은 그 이하거나 이상일 수도 있어. 무리하면 역효과만 난다. 합리적으로 접근해야 돼. 합리적으로.”

송재덕 교수까지 동의한 이상 논의를 지속할 이유가 없었다. 목요일 오전 최종적으로 상의한 후 보험 적용 회의체에 참석하기로 했다.

김지훈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현수야, 경석이 형, 내 말이 틀렸어요?”

“나도 네 의견에 동의하지만 원장님과 부원장님 결정을 따라야지 어쩌겠어. 민정호는 너랑 말싸움을 벌이는 와중에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네.”

“언젠 안 그랬나요? 마음에 들다가도 안 들고, 안 들다가도 마음에 드는 때가 있어 정말 헷갈리는 사람이에요.”

신현수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혀를 차며 회의실을 나간 김지훈이 멈칫거렸다.

민정호가 보였다.

다른 건 다 몰라도 한 가지는 묻고 싶었다.

“민 부원장님, 내 의견은 그렇게 반대하더니 부원장님 의견을 바로 받아들인 이유가 뭡니까? 절충점을 찾아도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전 원하는 바를 이뤘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다른 병원 입장도 제 의견과 별반 다르지 않더군요. 단지 부원장님도 과장님 의견에 동의한 것이 분명해 보여서 방법을 달리한 것뿐입니다. 돈보다 환자를 무척 중요하게 여기시는 데다 한 번 결정하면 끝까지 밀어붙이시는 분 아닙니까? 더구나 김지훈이라는 의사가 아닌 과장님의 주장이었습니다. 충돌하지 않았다면 병원 문 닫는 날이 훨씬 빨라졌겠죠.”

‘뭐야? 일부러 나하고 언쟁을 벌여서 자신의 의견과 비슷할 수밖에 없는 절충점을 찾도록 유도했단 말이야?’

김지훈의 어깨가 툭 떨어졌다.

맥이 다 풀렸다.

당했다.

목표는 충분히 합의가 가능한 김지훈이 아니라 대쪽에 쇠심줄 같은 이준영 교수였다. 예전보다 훨씬 유해졌다고 해도 민정호 눈에는 굉장히 강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민정호의 처세술이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확실히 돈 문제에 관해서는 자신의 주장을 어떻게든 관철시키는 재주가 남달랐다. 상대 기분을 망가트리는 방식이라도 서슴없이 밀어붙여 탈이었지만 말이다.

이준영 교수와 송재덕 교수는 오로지 돈만 계산하는 음흉한 속을 정말 몰랐을까?

세상이 점점 알쏭달쏭해졌다.

과장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 절대 없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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