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다.
아침 일찍 출근 준비를 하던 김지훈이 눈시울을 붉혔다.
예쁜 카드 속 삐뚤빼뚤한 글씨에 담긴 희연이의 마음과 작은 젤리 봉지 하나에 울컥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오빠! 힘내세요. 빠이팅!>
“경아 씨, 우리 희연이가 벌써 이렇게 컸네요.”
“희연이가 호성이 얘기를 들은 모양이에요. 오빠가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고 꼭 전해 달래요.”
“부모 얘기까지 들은 건 아니겠죠?”
“조심했잖아요. 걱정 말아요.”
미안하고, 고마웠다.
분홍색 잠옷을 입고 꿈나라에 빠져 있는 희연이를 꼭 안아 주고 집을 나섰다. 칭얼거리면서도 아빠 품에 안기며 전한 딸의 온기가 무척 따스했다.
‘우리 딸 예쁘게 잘 크고 있어 고맙다.’
강호성이 변화를 보였을까?
중환자실부터 들른 김지훈이 답답한 한숨을 터트렸다.
주말을 잘 버텼다. 하지만 진정제를 쓰지 않아도 파이팅만 보였을 뿐 아직도 눈을 뜨지 못했다. 반혼수 상태로 벌써 일주일이 지난 것이다.
‘드레인도 깨끗하고, 검사 결과도 분명히 좋아졌는데 왜 깨어나지 못할까?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거지?’
응급으로 시행한 뇌 CT는 정상 소견이었다.
내과에서도 특별한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
관련된 의료진이 모두 모여 논의를 거듭했지만 명확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육체 상태를 반영하는 검사들이 좋아져 기다리면 될 것 같지만, 이 상태가 지속되면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기관 내에 삽입한 튜브조차 손상 요인이 되기에 기관 절제술을 요할 수 있었다. 결국 소아과, 이비인후과, 신경외과의 협진까지 요구될 것이다.
전문 병원의 능력을 넘어선다는 의미였다.
“송진우 선생, 큰 병원으로 전원해야 할까?”
“우리 병원에서 시행하지 못하는 치료가 있다면 모르지만, 필요한 조치는 다 하고 있는데 의미가 있을까요?”
송진우의 안색이 어두웠다.
막연한 반대에 불과했다.
김지훈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다른 과 전문의가 없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선이 곧 최고를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송에 따른 문제는 없겠지?”
“두세 시간 정도는 잘 버틸 겁니다.”
“오늘까지 보고 차도가 없으면 내일 보내자. 서울 병원에 연락해서 미리 중환자실 확보해.”
“알겠습니다.”
기운이 쭉 빠졌다.
지옥 같은 생활을 했을 아이의 숨만 간신히 유지시킨 꼴이었다. 한계를 인정하고 최대한 빨리 보냈어야 했다는 자책과 후회를 떨칠 수 없었다.
‘감정에 휘말렸던 걸까?’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김지훈이 마지막 희망을 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희연의 마음이 담긴 카드 한 장과 젤리 한 봉지를 강호성 머리맡에 놓았다.
“호성아, 우리 딸이 너 주라고 준 거야. 아빠도 안 주는 젤리까지 줬으니까 꼭 깨어나야 한다. 맛있는 것도 먹고, 웃으며 뛰어놀아야지.”
들릴 리 없건만 강호성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작은 손이 차갑기만 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회진을 돌았다.
김지훈이 좀처럼 어깨를 펴지 못했다.
의사가 보기에도 만족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운동을 한 장풍연 환자마저 가스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병원의 한계를 실감하게 한 강호성에게서 비롯된 우울한 마음이 더 심해졌다.
‘한 주의 시작인데 너무하네.’
죽어라, 죽어라 하는 모양이었다.
수술하는 날인데 수술이 없다!
손일석을 필두로 간 이식 파트, 췌장 파트 모두 같은 처지에 같은 얼굴이었다. 차라리 수술 방 갈 일이 아예 없으면 좋으련만 이경석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날이었다.
절대 빠질 수 없었다.
“김 과장, 수술 들어가고 좋겠어.”
내심도 모르고 분노에 찬 눈 화살을 맞으며 수술 방으로 향했다. 참관이라도 하겠다며 뒤를 따르는 후배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수술실에 들어섰다.
아무리 간단한 수술도 정신이 분산되면 실수하기 마련이었다. 오늘 같은 날은 더더욱 집중해야 하기에 김지훈이 애써 강호성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탈장인데 긴장이 되네.’
탈장 수술에 대해 차근차근 정리했다.
복강 내에서 출발해 고환으로 이어지는 혈관 다발이 빠져나오는 구멍이 있다. 이 구멍을 견고하게 둘러싸고 있는 근육이 약해지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소장이 복강 밖으로 빠져나오게 된다.
이것이 바로 탈장이다.
수술의 목표는 구멍 주변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전통적 방식은 외부에서 접근해 서혜부 근육을 겹쳐 봉합했다. 절개 부위가 큰 데다 수술 후 근육에 강한 압력이 작용해 상당한 통증과 불편에 시달렸다. 밖에서 막기 때문에 재발 확률도 적지 않았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도입된 방식이 복강경을 이용한 수술이었다. 복강 안에서 혈관이 빠져나가는 구멍 주변을 인공 막으로 보강해 장의 탈출을 막았다.
전통 방식에 비해 모든 면에서 우월한 효과를 보였다. 하지만 복벽을 뚫는 과정 자체가 근육 손상을 동반하기 때문에 제법 강한 통증을 느끼는 환자가 없을 수 없었다. 더욱이 복강 내 다른 장기에 손상을 줄 위험도 상존했다.
반면 이경석이 생각해 낸 새로운 시도는 지방층을 따라 접근하는 방식이었다. 즉, 복강 내부와 근육 사이를 뚫고 들어가 보강하자는 것이었다. 간단하게 말해 피부 밑으로 접근한다는 말이었다.
예상되는 장점은 명확했다.
기존 복강경 기구를 그대로 사용한다.
따라서 환자에게 부과되는 추가 비용이 없다.
근육을 건드리지 않아 통증을 더욱 줄일 수 있다.
복강경 수술처럼 인공 막을 이용하기 때문에 나이나 기저 질환과 상관없이 재발의 위험까지 크게 감소시킬 수 있다.
이제 그런 장점을 실현시키는 일만 남은 것이다.
단지 접근 통로만 바꾸는 시도였지만 의미는 대단했다. 사소한 발상의 전환이 모이고 모여 획기적인 발전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단, 의료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했다. 실패하면 그만큼 환자에게 부담을 주기 때문이었다.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조용한 가운데 김진호 교수가 환자를 보며 산소마스크를 잡았다.
“마취 시작합니다.”
이경석이 집도의 자리에 섰다.
김지훈이 퍼스트로서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새로운 방식으로 수술한다는 소리에 마취를 끝낸 김진호 교수도 연신 눈길을 주며 큰 관심을 보였다.
“시작하셔도 됩니다.”
이경석이 훅 숨을 내쉬었다.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고경아가 메스를 건넸다.
배꼽 하방을 절개했다.
예전 방법을 따르면 에어팁을 복강 안으로 찔러 넣어 공기를 주입한 후 카메라를 넣고 진행하면 된다. 이 과정을 생략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이번 수술의 핵심이었다.
“켈리!”
조심스럽게 지방층을 벌렸다.
복벽을 구성하는 근육을 덮고 있는 막을 확인했다.
이경석이 손을 멈췄다.
신중하게 지방층과 근막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 조직을 찾았다. 혈관이 없는 층과 비슷할 정도로 주행하는 혈관이 적은 데다 손쉽게 박리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김 과장, 여기가 맞지?”
“확실합니다.”
“오케이! 진행하자.”
우측 서혜부 탈장이었다.
배꼽 절개부에서 탈장 구멍이 존재하는 부분을 향해 연결 조직을 벌려 나갔다. 배 속이 아닌 근육 위의 지방층을 따라 카메라를 포함한 모든 기구를 넣으며 신중하게 진행했다.
간혹 빨간 피가 보였지만 무시해도 좋았다.
소량인 데다 피부 출혈과 다름없었다.
공기압을 조절해 가며 적당한 공간을 확보했다.
모니터로 해부학적 구조를 확인하는 동시에 피부를 통해 만져지는 딱딱한 기구의 감촉을 느끼며 목표 부위에 도달했다. 켈리로 주변 공간을 확보하고, 소량의 공기를 더 주입했다.
마침내 지방층을 따라 배꼽에서 탈장 부위로 이어지는 일종의 터널을 만들었다. 큰 무리 없이 성공적으로 진행했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 없었다.
혈관이 빠져나오는 구멍 주변을 확실하게 확보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켈리로 조직을 추가 박리하고, 공기를 적절히 주입하기를 수차례 반복한 끝에 시야를 확보했다.
구멍 주변이 상당히 깔끔하게 드러났다.
박리가 힘들 뿐 혈관을 제외하면 위험하거나 복잡한 구조물이 있는 부위가 아닌 덕이 컸지만 사실상 이경석의 실력이 결정적이었다.
김지훈이 감탄을 터트렸다.
‘야! 첫 시도는 누구나 떠는 법인데 대단하시네.’
“한참 고생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쉽고 간단하게 하시네요. 연습이라도 하신 것 같습니다.”
“고민 많이 했어. 그보다 탈장 주머니를 제거해야 할까? 아니면 인공 막만 대도 충분할까?”
새로운 시도에 고민이 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수술 전부터 함께 고민했던 일이었다.
전통 방식은 구멍을 따라 복막이 늘어나며 생기는 일종의 주머니를 제거했다. 반면 복강 내에서 수술할 때는 제거할 필요가 없었다.
관건은 수술 목표를 달성해야 성공이라 말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수술 위치가 딱 중간이라고 적당히 타협해 탈장 주머니를 반만 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지훈이 신중하게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상상과 실제 조직을 보며 판단하는 일은 별개라고 해도 무방했다. 해부학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해 재발과 조직 손상 방지를 위한 최선의 방법을 고민했다.
‘애초 생각이 맞는 것 같다.’
“제거하는 게 좋겠습니다.”
“구멍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서 막으면 아무래도 인공 막이 복압을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높겠지. 주머니가 남아 있으면 압력을 받는 부분이 더 많아질 수도 있고.”
구멍 난 물통을 어떻게 막아야 효과가 좋을지 결정하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안이든 밖이든 통로 자체를 모두 메워야 압력이 커져도 물이 안 샐 것이다.
“배제할 수 없죠.”
“좋아. 주머니 안에 소장이 있는지 확인하고, 제거하자.”
마취로 인해 근육이 힘을 잃었다.
복강 안에서 밖으로 가해지는 압력이 사라진 이상 소장이 삐져나올 리 없었다. 하지만 인간의 몸은 기계가 아니기에 탈장 주머니 안에 장이 있을 수도 있었다.
신중하게 열어 내부를 확인했다.
“없습니다. 진행하시죠.”
주머니 입구 부분을 단단하게 봉합한 후 잘랐다.
이전 방식보다 훨씬 공간이 좁아 수처, 타이는 물론 실을 자르는 일마저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랐다.
이제 인공 막을 구멍 주변에 고정시켜 조직을 강화시키는 과정만 남았다. 수술의 핵심이자 생소한 접근과 첫 시도가 주는 난관이었다.
조금씩 진행시켰다.
이경석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수처! 타이! 컷!”
봉합이 어려운 부분은 클립으로 밀착시켰다.
서서히 인공 막이 원하는 자리에 안착됐다.
마침내 마지막 수처가 끝났다.
완벽했다.
다시는 재발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배꼽 절개 부위까지 막았다.
살짝 배를 눌러 가며 통로가 만들어졌던 부위를 확인했다. 겉으로 봐서는 어떤 문제도 없었고, 애초 기구가 들어갈 정도의 너비에 불과했다. 지방층에 작용하는 압력으로 수월하게 막힐 것이다.
환자도 잘 깨어났다.
“깔끔하게 잘된 것 같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이경석이 긴 숨을 내쉬었다.
김지훈이 웃었다.
정말 많이 경험한 일이었다.
성공에 대한 기쁨보다 불안함이 앞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00퍼센트 성공해야 할 수술이기에 도리어 걱정이 앞설 것이다.
정신력 소모도 장난 아니었다.
시간마저 평소보다 더 걸렸다.
하지만 흥분에 가까울 정도로 기뻐해도 좋았다. 숙달된다면 복강경보다 훨씬 빠르고 안전하게 수술할 수 있는 방식이 분명했다.
김지훈이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축하드립니다. 학회 발표감입니다.”
“이 정도 가지고 뭘.”
“무슨 말씀이세요? 김지훈 선생님, 제 말이 맞죠?”
“내가 써전은 아니다만 탈장 수술은 제일 많이 봤을 거야. 이경석 선생,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식이 분명해. 개복에서 라파로로 변한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잖아. 케이스 쌓아서 빨리 발표해. 다들 놀랄 거야.”
참관한 후배들도 십분 동의했다.
모처럼 수술실에 웃음꽃이 폈다.
“축하드립니다. 최고예요.”
이경석이 얼굴을 붉히며 딴청을 부렸지만 뿌듯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비단 탈장에 국한될 접근 방식이 아니었다. 복강경 전문의로서 한 발 도약한 것이 틀림없었다.
“잘했다. 잘했어. 이게 다 대장을 한 덕이다. 경석아, 그치? 내 말이 맞지?”
“예. 선생님 덕분입니다.”
“내 덕분은 아니다만 논문 쓰면 오저자쯤에 내 이름도 올려 주면 좋겠다. 정리도 도와주고 그러면 그렇게 해 줄 거지? 그치? 경쟁률이 세서 안 될까?”
“정리해 주시면 이저자죠.”
“그래. 그래. 일은 안 주는구나. 그렇구나. 허허허!”
송재덕 교수의 농담에 대소가 터졌다.
간만에 경사를 맞은 것처럼 김지훈도 벅찬 가슴을 안고 수술 방에서 나왔다. 이경석을 본 보호자들이 우르르 달려가는 모습을 보니 더욱 기분이 좋았다.
그 너머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민 부원장?’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민정호라는 이름 대신 행정부원장을 떠올렸다. 본능적으로 작용했던 적대감이 많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물론 다른 생각이 바로 이어졌다.
‘새로운 시도라고 더 받자는 말을 하려고 왔나?’
찜찜한 구석을 숨기고 살짝 고개 인사를 했다.
당연히 이경석을 만날 줄 알았건만 민정호가 김지훈을 향해 곧바로 다가왔다.
“과장님, 시간 있으시죠?”
‘왜 또 날?’
김지훈이 눈만 껌벅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