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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079화 (1,079/1,329)

5화

홀로 남은 김지훈이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때론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는 법이었다.

유연한 대처야말로 민정호와 힘을 합치는 유일한 길일 수 있었다. 바람대로 된다면 진상건마저 머릿속에서 떨쳐 내 버릴 것이다.

관건은 뱉은 말의 실현이었다.

‘하아! 큰소리 뻥뻥 쳤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 난국을 헤쳐 나가지? 전단지라도 돌려야 하나?’

허세로 끝나면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김지훈이 머리를 싸맸다.

당장 답이 보이지 않는 일을 두고 끙끙 고민하는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이경석이었다.

의아할 정도로 얼굴이 밝았다.

“김 과장, 시간 있지?”

“그럼요. 들어오세요.”

확실히 무슨 일이 있었다.

완전히 들뜬 얼굴이었다.

“기분 좋은 일 있으세요?”

“별건 아닌데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들렀어. 오전에 담석증하고 탈장을 연이어 수술하던 중에 탈장도 원 포트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탈장을요? 구멍을 하나만 뚫으면 탈장 부위에 인공 막을 댈 때 정확한 각도가 안 나올 텐데요. 아뻬도 담낭 절제보다 수술 부위가 훨씬 적지만 기구 조작 때문에 원 포트로 하기 힘들잖아요.”

“기존 방법으로는 확실히 힘들지. 하지만 접근 통로를 바꾸면 어떨까?”

이경석이 이제는 의대를 나왔다는 추억의 물건에 더 가까운 해부학 책을 찾았다. 상당한 흥미를 느낀 김지훈도 고개를 박았다.

“어떻게요?”

“똑같이 배꼽으로 들어가서 여기를 통과하는 거야. 인공 막을 대야 하는 부위가 이렇게 달라지니까 원 포트로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어?”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지?’

무수히 시행한 탈장 수술이었고, 기존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복강경 수술 역시 간단한 데다 환자의 고통을 충분히 줄였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경석은 다르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더욱이 대단한 장비나 비용의 추가 없이 접근 방식만 바꾸면 되는 일이었다. 이런 시도 또한 진정한 발전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기발했다.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급기야 박수까지 쳤다.

짝! 짝! 짝!

“어때? 가능하겠지?”

“야! 이거 획기적인데요. 이렇게 접근하면 없는 통증이 더 없어지겠네요. 퇴원도 더 빨라지고요.”

“내 생각에 동의하는 거지?”

“당연하죠. 환자 잘 선택해서 바로 시도해 보세요. 아! 기존 기구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데 난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정말 기발하네요. 이건 기발한 정도가 아니라 탈장 라파로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수술이 될 것 같아요.”

이경석이 손을 저었다.

“그 정도는 아니야. 어쨌든 성공해서 안착시켜야지 시도로만 끝나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김 과장, 그래서 말인데 몇 케이스만 나하고 함께 수술하자.”

“저하고요?”

“처음 시도하는 수술법이잖아. 아무리 간단하게 보여도 명색이 라파로 수술인데 김 과장 손이 있어야 안심하고 하지. 마침 다음 주에 한 건 있어.”

쓰리 포트에서 원 포트로 발전한 담낭 절제술처럼 대단한 의미가 있었다. 그런 수술의 첫 시도를 함께하자니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이경석 말처럼 반드시 성공해야 새로운 수술법으로 정식 채택할 수 있었다. 후배 사인방과 펠로우까지 모두 마음에 걸렸지만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영광이죠.”

할 일이 턱없이 부족한 오후였다.

즉시 수술 팀이 모였다.

이경석, 김지훈, 나종진에 심심하다며 좀비처럼 병원을 배회하던 손일석에 서도진, 강병옥까지 함께했다.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다들 놀라워하며 기발한 아이디어에 감탄했지만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했다.

“김 과장 라파로 인생 끝났네. 책임지지도 못할 큰소리 뻥뻥 칠 때, 그때 알아봤어야 했어. 경석이 형, 이참에 과장 자리까지 가져오시죠.”

“과장님, 긴장하셔야겠습니다. 이경석 선생님, 우리도 라파로 파트에 끼어 주시면 안 됩니까? 간 이식이 개점휴업 상태인 거 잘 아시잖아요.”

“세컨도 괜찮습니다.”

이경석을 떠받들며 복수의 기회가 왔다는 듯 김지훈을 아예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과장으로서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못했으니 아얏 소리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과장 체면이 있었다.

“니들이 아무리 날 욕해도 이번 수술 퍼스트는 나다.”

“말도 안 돼. 경석이 형, 정말 이런 불공정한 일을 자행하실 생각입니까?”

“넌 혈관이 있잖아. 종진아, 초반 몇 케이스만 같이할 거니까 양해해 줘. 그리고 과장님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안에서 새면 밖에서도 샌다는 거 몰라. 다들 주의해.”

“경석이 형, 과장님이란 바가지가 이미 깨진 걸 어쩌겠습니까? 깨진 바가지만 바라봐야 하는 우리만 불쌍한 거죠.”

수술보다 인신공격이 난무했다.

한가함의 부작용이었다.

눈알에 힘 잔뜩 준 이경석이 새로운 수술법에 다시 집중하자 써전의 본능이 살아났다. 파트가 달라도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내용이었다.

논의를 끝낸 김지훈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홀로 가는 세상이 아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발전을 모색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치열한 고민의 산물을 함께하기에 더없이 큰 의미로 다가왔다.

대단한 힘이자 응원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일에 충실해야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갈 힘을 얻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김지훈만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김지훈이 중환자실로 향했다.

희망과 노력은 별개가 아니었다.

눈이 벌게진 채 호흡 튜브를 채운 가래를 빼 주는 송진우에게서 노력을 보았다. 교과서까지 펼치며 놓친 부분이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하는 안호석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격한 자극에 몸을 비틀며 파이팅을 하는 강호성의 강한 생명력을 확인했다.

강호성은 반드시 눈을 뜰 것이다.

“안호석 선생, 어때?”

“잘 버텨 주고 있습니다. 간간이 파이팅도 하고, 검사 결과도 미미하나마 좋아지는 추세입니다. 혹시 경찰서에서 연락 온 것은 없습니까?”

숨기지 못하는 분노가 보였다.

지난날의 아픔일지도 모를 정당한 분노였다.

‘아직도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한 모양이구나. 호석이 너만큼 피부로 느끼는 사람도 없겠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까 잘 처리하겠지. 송진우 선생, 이제 그만 올라가 봐.”

“조금만 더 보겠습니다.”

“회진 준비 안 해? 장풍연 환자도 있잖아.”

김지훈이 돌연 언성을 높였다.

회진 돌 시간이 제법 남았건만 타박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머뭇거리는 기색에 김지훈이 인상까지 쓰자 송진우가 마지못해 일어났다.

안호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이렇게 안 하면 올라가겠어? 번갈아 킵을 하기로 했으면 따라야지. 저러다 몸 상한다. 오늘 밤은 서도진 선생하고 강병옥 선생이 책임진다니까 안호석 선생도 쉬어. 의욕만으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야. 밤에 나왔다는 소리 들리면 내가 어떻게 할지 잘 알지?”

장기전이 될 공산이 높았다.

따라서 체력 안배가 무척 중요했다.

더구나 이십 대 청춘이 아니었다.

의사가 지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에게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모든 파트 환자를 봐야 한다는 이유로 고경철까지 정해진 시간에만 킵을 하도록 조치했다.

이 모두 선배로서 챙겨야 할 일이었다.

안호석이 무심코 입을 열었다.

“선생님, 이럴 땐 환자가 없는 것도…….”

“어라? 진우 올라가는 거 빤히 봤을 텐데 아직도 안 올라갔네. 안호석 선생은 회진 준비 안 해? 이준영 선생님 혼자 돌라는 소리야?”

목소리를 높이자 후다닥 자리를 정리했다.

슬쩍 흘린 미소가 보기 좋았다.

홀로 남은 김지훈이 찬찬히 차트를 확인했다.

강호성의 상태에 맞춰 적절하게 대처한 기록을 보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당장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지 않아 물끄러미 강호성을 보며 중얼거렸다.

“호성아, 그만 속 썩이고 일어나. 엄마, 아빠가 없어도 앞으론 행복하게 살아야지.”

김지훈이 한동안 자리를 지켰다.

서도진이 오고 나서야 병동으로 향했다.

잠깐 인수인계를 하는 사이 여덟 살 아이의 뺨을 따라 또르륵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어떤 자극을 받았는지 쿨럭쿨럭 파이팅을 해 서도진도 미처 보지 못했다.

마음의 문을 닫은 것일까?

***

다음 날.

수술 방으로 향하던 송진우가 콧등을 찡그렸다.

어제저녁 회진을 돌며 들은 말 때문이었다.

“송진우 선생, 내일 수술하고 싶으면 오늘 일찍 퇴근해서 푹 자라. 머릿속이 개운하고, 몸 상태가 좋아야 수술도 잘되는 법이야.”

“알겠습니다.”

“수술 안 줄 수도 있어. 농담 아니다.”

단지 몸이 힘들다는 이유 하나로 자신을 배려하고,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웃음이 나올 일인데 오히려 가슴이 먹먹했다. 이성보다 감정에 더 충실한 성격 때문일지도 몰랐다.

‘수술에만 집중하자.’

덕분에 좋은 컨디션으로 수술에 임했다.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김지훈이 수술 내내 날카로운 눈을 유지했다.

능동적이고도 주도적으로 수술하라는 말을 송진우는 결코 잊지 않았다. 신중한 손을 따라 정확하게 움직이는 기구에 송진우만의 특징이 잘 드러났다.

담낭이 절제됐다.

제법 까다로운 담도 내 담석 제거와 T-tube 삽입도 수월하게 잘해 냈다.

꼼꼼한 마무리까지 모든 것이 흡족했다.

“수처! 타이! 컷!”

마지막 봉합을 마쳤다.

환자가 잘 깨어났다.

회복을 기다리며 송진우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김지훈이 슬쩍 고개 돌려 고경철을 보았다. 전공의기에 수술이 많든 적든 반드시 챙겨야 할 후배였다.

‘어쩌면 경철이가 가장 큰 문제에 직면했을 수도 있다. 수술 경험이 없으면 전문의를 따도 써전이라고 할 수가 없지.’

파견 형식으로 근무한 까닭에 기한이 되면 서울 병원으로 돌아가 수술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손은 놀리면 놀리는 만큼 녹이 슬기 마련이었다.

햇병아리 써전이기에 도리어 더욱 중요한 시기였다. 문제는 정규 수술 대부분이 고경철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수술이라는 점이었다.

‘라파로는 언감생심이고.’

많은 수술이 복강경으로 시행되고 있지만 개복 수술이 기초라는 사실은 변할 수 없었다.

운에 기댈지라도 대안은 하나뿐이었다.

“고경철 선생, 다음 주 당직 때 나하고 만나나?”

“아니요. 그날 오프입니다.”

“그래? 계속 날 피하는구나. 당직 바꿔.”

무슨 소리인지 몰라 눈만 껌벅거리던 고경철이 돌연 입을 쫙 찢었다. 변함없는 일복을 보인 김지훈과 당직을 같이 선다면 응급실이 북적일 확률이 높았다.

굳이 당직하는 날을 바꾸라는 말은 곧 수술을 준다는 말이었다. 곧 일 년 차가 끝나고 이 년 차가 되는 이상 받을 수 있는 수술의 범위까지 넓어질 것이다.

‘어디까지 주실까? 뭘 준비해야 되지?’

고경철이 상상의 나래를 마구 펼쳤다.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찬물 끼얹었다.

“킵 말고는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아 바꾸라고 한 거야. 김칫국 마시지 마라.”

흐흐흐!

‘매형,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고경철은 결코 어리지 않았다.

교복 입은 고등학생, 의대에 막 입학해 어리바리 어설펐던 예비 의사의 모습은 처남을 친동생처럼 여기는 김지훈의 기억 속에만 있을 뿐이었다.

추억처럼!

토요일이다.

주말 집담회는 반드시 지켜 나가야 할 전통이었다.

비록 서울 병원과 비교하기 창피할 정도로 수술이 적었지만 화력 빵빵한 써전이 여섯 명이나 있었다. 게다가 담도공장 문합술을 복강경으로 시행했다.

“서도훈 선생!”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옛 기억이 현실로 다가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웬만한 병원이었으면 과장을 하고도 남을 전문의가 까맣게 탔다.

시작일 뿐이었다.

다들 어떤 수술이든 한 발은 걸쳤다.

강호성과 무관하게 외상으로 인한 췌장 파열의 수술과 치료 원칙부터 간암 수술의 유의점까지 치열한 토론이 이어졌다.

리틀 화염방사기, 논리의 도마, 찬바람 휭휭 부는 비수, 여유로운 얼굴에 숨은 망치까지 사인방의 무기가 유감없이 제 위력을 뽐냈다. 이준영 교수와 송재덕 교수까지 가세했다면 쑥대밭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또 한 주가 지나갔다.

다가오는 날은 보다 바빠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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