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김지훈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그간 모든 일을 동료와 상의해 왔지만 현 상황을 차근차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민정호와의 관계 설정, 일파만파로 커지는 강호성의 일도 시급했지만 자신과 병원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했다.
수술 실적과 예약된 병원 전체 수술을 확인했다.
‘확실히 달라지고 있어.’
개원한 지 이제 이 주도 되지 않았다.
의욕만 앞세워 초조한 시간이었지만 막상 수술 건수는 바닥은 아니었다. 당직 덕인 데다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수준이라 해도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임은 분명했다. 특히 간 이식 수술 두 건이 확정 직전에 있다는 사실이 무척 고무적이었다.
‘다음 주에는 첫 이식 수술을 할 수 있겠지.’
의외로 마음이 편했다.
원하는 방향으로 향하는 현실이 가져온 여유만은 아니었다. 민정호라는 사람이 주던 스트레스에서 일정 정도 벗어난 덕분도 있었다.
‘민정호의 본심을 알면 진상건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가관이겠지. 병원이 궤도에 오르는 일은 오직 우리에게 달렸다. 이제 엉뚱한 곳에 신경 쓰지 말고 할 일만 하면 된다.’
물론 걱정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생각만 해도 불안한 강호성이 있었다. 부모 문제는 차치하고 눈조차 뜨지 못해 다시 기관 내 삽관까지 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불현듯 비용 문제가 스쳤다.
민정호의 행동이 매정해 보이지만 병원 입장에서는 실로 심각한 일이었다. 수술비부터 시작해 중환자실 사용료와 치료에 투입되는 고가의 약제까지 어마어마하게 들 것이다.
‘민정호 말대로 흘러가야 하는데 큰일이네.’
공연한 자괴감까지 들었다.
“치료에만 몰두해도 모자랄 판에 돈 생각을 하다니, 사람 참 간사해진다.”
애써 돈 문제에 벗어나려 했지만 오히려 간 이식 환자의 막대한 치료비까지 신경 쓰였다. 목숨보다 돈이 우선일 수 없지만 환자에게 엄청난 부담임은 분명했다. 보험 적용이 돼야 하는 당위성은 경제적 문제, 즉 돈의 또 다른 표현이나 다름없었다.
‘보험이 되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식을 받을 수 있겠지.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그보다 바람직한 일이 또 있을까?’
결과적으로 병원 경영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탓일까?
정말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이래도 될까?’
김지훈이 한숨까지 쉬었다.
민정호가 얻은 정보에 따르면 정부 내 부처 간의 이견은 어느 정도 조율이 됐다. 실제 수술 시행자인 의사와 병원의 입장만 반영되면 곧 보험이 적용될 것이다.
돈 때문에 수술을 받을 엄두도 내지 못하던 환자들의 숨통이 트이는 것이다. 기증 자체가 드물고, 환자 선정까지 까다로운 뇌사자 장기 기증은 여전하겠지만 생체 간 이식은 환경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수술이 예정된 두 명의 환자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전액 본인이 부담을 해야 하는 만큼 웬만큼 잘사는 집안이라도 집안 뿌리까지 흔들릴 거액이었다. 수술 후 경제적 파탄이라도 나면 이식의 의미가 크게 줄어들 것이다.
‘가급적 빨리하면 좋겠지만 응급 상황이 아닌 이상 한두 달 정도 여유가 있겠지?’
만일 그 안에 보험 적용이 결정된다면 수술 후 삶을 지탱할 귀중한 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환자 상태가 유지돼야 한다는 전제만 충족된다면 절대 무리한 생각이 아니었다.
세상에 그저 좋기만 한 일은 없었다.
결정이 날 때까지 수술을 미뤄야 할까?
‘망하는 거 아니야?’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준비되는 대로 해야 할까?
‘간 이식만 받으면 끝인가? 치료에만 신경 쓰면 할 일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을까?’
딜레마였다.
한동안 고민에 빠졌던 김지훈이 결정을 내렸다.
병원과 환자, 어느 쪽의 현실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선의 방안을 도출해 내는 것이 마땅했고, 그것이 결국 장기적인 이득을 가져올 것이라 믿었다.
민정호의 반응도 자못 궁금했다.
이 상황에 무슨 소리냐며 태클을 걸어온다면 그동안 오고 간 말이 본심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강력한 우군을 얻는 것이다.
‘반대라고 해서 거짓말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사안이다.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맞겠지?’
환자들이 다른 병원으로 가는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는 한 이래저래 손해 볼 일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전화기를 들었다.
“선생님, 보험 논의가 언제 시작됩니까?”
(오늘 오전에 다음 주 목요일 오후에 연다고 통보받았다. 나와 함께 가야 하니까 오후 진료는 받지 마.)
“선생님과 저만 참석합니까?”
(그렇게 결정했다.)
“알겠습니다. 한 시간 후쯤 시간 있으십니까?”
(괜찮아.)
이유도 안 물어봤다.
민정호도 비슷하게 행동하지만 완전히 달랐다.
일단 마음이 무지무지 편했다.
스승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통화를 끝낸 김지훈이 부리나케 윤석진과 공정식을 찾았다. 마음의 결정을 두고 시간을 끌면 다른 생각이 날 수밖에 없었다.
“간 이식 환자들 수술 언제 받겠대?”
“한 명은 다음 주를 원하고, 나머지 한 명은 추가 검사가 필요해서 그다음 주가 좋을 것 같아.”
“연기하자.”
“뭐? 가뜩이나 환자가 없는데 왜?”
간략하게 보험 적용 논의를 언급했다.
“빠르게 결정 난다면 보험으로 수술할 수 있잖아. 당장은 손해가 될지 몰라도 결국 환자는 물론 우리에게도 유리한 일일 것 같아.”
“뜻은 좋은데 기약이 없잖아?”
“그래서 이준영 선생님과 상의할 자리를 만들었어. 모두 동의하면 환자에게 설명하고 한 달 정도 미뤘으면 해. 그때까지 별문제 없겠지만 면밀하게 관찰하면 되지 않을까? 만일 불가피한 일이 생기면 바로 수술하고. 검사가 다 돼 있으니까 문제없잖아?”
“그렇긴 한데, 병원 상황을 생각하면 찜찜하네. 자칫 병원 사정으로 수술이 어렵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어. 환자들이 다 김 과장이나 이준영 선생님을 알고 찾아오는 것은 아니잖아.”
“말하기 나름이지. 일석이도 있잖아. 깔끔하게 설명할 거야. 일단 동의하는 거지?”
잠시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우리도 충분히 설명할 테니까 너는 보험 논의에만 집중해. 이왕이면 환자들 불안하지 않게 빨리 결정됐으면 좋겠다.”
“고맙다. 한 시간 후 이준영 선생님 방에서 보자.”
김지훈이 간 이식 파트 전원을 소집했다.
간략하게 자신의 뜻을 설명하고 곧바로 이준영 교수를 찾았다. 가뜩이나 없는 수술마저 한 달 이상 미루겠다는 말에 다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수술에 목마른 써전의 아쉬움이었다.
신중해야 할 일임은 분명했다.
잠시 김지훈에게 눈길을 준 이준영 교수가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문제부터 확인했다.
“윤석진 선생, 공정식 선생, 수술을 미뤄도 환자에게 아무 문제 없겠어?”
“현 상태는 유지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결국 김 과장과 내게 달린 일이군. 그래도 빨리하는 게 좋겠지. 환자가 동의하면 최대 한 달만 연기하자. 상태가 유지된다고 해도 그 이상은 위험해서 안 돼. 김 과장 생각은 어때?”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수술에만 목을 매지 않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부원장과 파트 주임 교수이자 과장인 김지훈의 결정이었다.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 손 들고 환영할 일만은 아니었다.
서도진과 강병옥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칼바람 날릴 줄 알고 왔는데, 한 달 반이 넘도록 간은 구경도 못하겠네. 병옥아, 우리 뭐 하고 살지?”
“다른 파트 수술이라도 노려야죠. 마침 손일석 선생님이 혈관 수술을 시작하시니까 아예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은 어떨까요?”
“에휴! 어쩌다 펠로우보다 수술 기회가 없는 처지가 됐냐. 몸은 편한데 마음이 정말 불편해.”
“저도 그렇습니다.”
펠로우인 덕에 도리어 운신의 폭이 넓은 이혁원이 미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강호성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송진우는 모처럼 난로에 불을 지폈을 것이다.
설상가상, 손일석이 고개를 저었다.
“혈관은 절대 못 준다. 내 코가 석 자야. 너희들이나 나나 김 과장한테 속았어.”
슬며시 엿듣던 김지훈이 쑥 끼어들었다.
“걱정하지 마. 곧 몸도 힘들어질 거야.”
“뭐가 있습니까?”
“그냥 감이야.”
반색하던 서도진의 눈이 쭉 찢어졌다.
김지훈이 주는 말과 감을 믿다 이 지경이 됐는데 또 믿어야 할까? 사실 엄청 시간이 지난 것 같지만 개원한 지 이 주도 안 됐다. 김지훈의 어마어마한 당직 일복까지 봤지만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공수표가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환자를 찾았다.
이미 상황을 전해 들었지만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며 갈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투덜거리던 손일석이 침착하면서도 화려한 말발로 일말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돈이 다는 아니지만 결코 무시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우리를 믿으시면 됩니다. 그동안 몸 관리 수칙 철저하게 지키셔야 합니다.”
수술 연기에 따른 여파는 의사와 환자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예상과 정반대로 병원 수입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민정호 귀에 안 들어갈 리가 없었다.
다음 날 진료가 끝나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따르르르릉!
“여보세요?”
(민정호입니다. 지금 만나죠.)
“왜 그러십니까?”
(이식 수술을 모두 한 달 후로 미룬다는 결정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심각하네요.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기대했던 전화였고, 이참에 하고 싶은 말도 있었다. 무엇보다 곧바로 반응을 보인 민정호의 행동과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확실히 믿어도 되겠어.’
민정호가 십 분도 안 돼 달려왔다.
은근히 흥분한 것 같은 목소리였는데 표정은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호흡조차 거칠어지지 않았다. 하긴 아무리 급해도 티를 내는 성격이 아니긴 했다.
앉자마자 용건부터 꺼내 들었다.
“환자에게 설명하셨습니까?”
“어제 이미 설명했습니다. 저도 다시 환자를 찾아 안심시킬 거고요.”
“수입 감소를 만회할 대책은 있는 겁니까?”
“열심히 해야죠. 민 부원장님도 혈관 수술과 복강경 홍보에 전력을 다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기사에도 신경 써서 병원을 알리는 데 집중해 주시고요.”
‘결국 대책이 없다는 말이잖아?’
“이런 식이면 곤란합니다.”
“서로의 권한을 침범한 것도 아니고, 스스로 기한을 정한 것도 그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로 들렸는데 착각인가요?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으로 봤는데 아닙니까?”
민정호가 잠시 입을 닫았다.
아주 잠깐 속마음을 드러내 보인 것이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사실 구조 조정 전문가란 소리를 듣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일자리의 근원을 살려야 한다는 원칙을 지킨 탓에 얻은 악명이었다.
누군가 눈물을 흘릴지라도 버려야 할 것은 과감히 버리고, 살려야 할 것은 반드시 살린다는 기준이 병원이라 해서 예외일 수도 없었다.
‘나만큼 병원 재정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의 결정이란 말이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이상 두고 봐야겠군. 그런데 왜 주도권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곤란해.’
“좋습니다. 단, 육 개월이란 시한을 잊지 마십시오.”
“계약서에 명시된 사항입니까?”
약간은 살 떨리는 질문이었다.
추측과 다르다면 민정호를 대하는 방식과 앞으로 주의해야 할 부분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 폐업이 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건 아닙니다만, 계약 이행을 위해 제가 세운 최소 조건입니다. 전 감정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후우! 다행이다. 좋았어.’
내심 가슴을 쓸어내린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전 이 년이 기한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의미인가요?”
“민 부원장님이 병원을 위해 일할 최소한의 기간을 말하는 겁니다. 계약을 정확하게 지키셔야죠.”
“유지가 아니라 존폐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육 개월이면 우리 병원이 충분히 변하고도 남을 시간입니다. 이후에는 쭉쭉 뻗어 나갈 거고요. 따라서 계약 기간 내내 함께하시게 될 겁니다.”
“과도한 기대거나 자만 아닙니까?”
“항상 자만을 경계하라고 스승님께 배웠습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민정호가 눈가를 좁혔다.
거의 처음 보는 표정 변화였다.
“근거가 있습니까?”
“최고의 의료진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모였습니다. 열정도 충분하고요. 이번 일은 이보 전진을 위해 한 발 물러서는 것뿐입니다.”
김지훈이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자만이 아닌 자신감이었다.
동료에 대한 믿음이었다.
확고한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결정타가 될지도 모르는 말까지 날렸다.
“민 부원장님도 우리와 함께하시죠. 도장은 진상건 이사장과 찍었겠지만 계약의 주체는 우리와 민 부원장님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발 떨어진 사람이 아니라 동료로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이쯤 되면 강한 반응이 있어야 했다.
기대를 배신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해 보이는군요. 어떻게 변화를 일으킬지 지켜보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사적인 문제가 결부된 일은 언급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상당히 불편합니다. 그럼 이만!”
역시 민정호였다.
수없이 경험한 일이기도 했다.
김지훈이 여유롭게 웃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 잊지 마세요. 우리는 언제나 가슴을 열고 있습니다.”
민정호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김지훈의 표정도 바로 변했다.
여유만만했던 웃음이 싹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