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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077화 (1,077/1,329)

3화

곁을 지키는 것이다.

지독한 학대에 시달리면서도, 췌장이 파열되는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은 아이였다.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도 놓치지 않는다면 살릴 수 있을 것이다.

‘환자가 없어 정말 다행이다.’

“수고해.”

언제나 느끼는 일이지만 치료해야 하는 환자는 단 한 명에 국한될 수 없었다. 중하든 경하든 의사를 필요로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회진을 마치고 수술 방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서도훈이 개원 후 첫 수술을 하는 날이었다. 실력을 믿어 의심치 않을뿐더러 함께 담도 담석 환자를 수술하는 동안은 어떤 일이 있어도 환자에게만 집중해야 했다.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서도훈의 손에 메스가 들리는 순간 김지훈이 다른 모든 일을 잊었다. 오직 모니터에만 눈을 박은 채 퍼스트이자 슈퍼바이저(Supervisor)의 책임을 다했다.

처컥! 처컥!

규칙적인 기계음 속에 수술이 진행됐다.

“수처! 타이! 컷!”

복부 봉합까지 끝났다.

서도훈의 실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서도진, 안호석에 이어 흠잡을 데 없는 써전을 또 한 명 보았다. 분명 미진한 점이 있겠지만 김지훈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라면 무시해도 좋았다.

환자가 힘차게 몸부림을 쳤다.

김지훈이 모처럼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수고했어.”

“과장님, 이번이 끝은 아니죠?”

수술에 목마르지 않은 써전은 없었다.

이준영 교수의 간암 수술과 이경석의 복강경 수술에 한 발 걸친 써전만 그나마 숨통이 트였을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개중 얼굴 보기 힘든 이혁원과 나종진은 행운아였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주력은 개뿔. 내가 책임져야 하는 파트는 모두 파리만 날리고 있으니 체면이 안 선다. 체면이.’

“나도 수술 좀 하자.”

“그저께 많이 하셨잖아요. 외래 환자가 없어도 너무 없네요. 이러다 엉덩이에 곰팡이 피겠습니다.”

“나도 없어.”

“그럼 선생님하고 같은 날 당직 설까요? 아 참! 오늘부터 저하고 도진이, 병옥이도 번갈아 가며 중환자실 킵하기로 했습니다. 낮에도 해야 한다는데 호석이하고 진우 둘만으로는 힘들 것 같아서요.”

“안 그래도 폐렴이 발생할까 봐 다시 인투베이션을 했어. 고맙다.”

누구 한 명 힘들다고 외면하지 않아 무척 큰 힘이 됐다. 덕분에 복강경으로 시행한 췌장공장 문합술 이상의 의미를 가진 장풍연 환자에게 시간을 더 쓸 수 있었다.

“아버님은 어떠세요?”

“아프다는 표현은 거의 안 하시는데 코 줄 때문에 무척 불편해하시네요. 언제쯤 뺄 수 있을까요?”

“일단 가스 배출이 돼야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말 나온 김에 당장 소변 줄 빼고, 지금부터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버님, 일단 앉는 것부터 시작하시죠.”

김지훈이 직접 소변 줄을 제거했다.

환자를 부축해 앉혔다.

힘 하나 드는 일이 아니었지만 환자에게는 대단한 응원이 될 것이다. 손 한번 잡아 주는 것에, 불편한 곳은 없냐는 말 한마디에 웃는 사람이 환자니 말이다.

잠시 보호자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걷는 것만 열심히 하셔도 회복이 훨씬 빨라질 겁니다. 가스 나오면 바로 연락 주세요.”

병실을 나온 김지훈이 돌연 병동에 처음 올라오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둘러보았다. 환자는 아직도 턱없이 부족했고, 분위기 역시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는데 왠지 느낌이 달랐다.

환자들이 내는 나직한 기척, 병간호에 여념이 없는 보호자까지 새삼 치열한 의료 현장 한가운데 서 있다는 강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이유가 뭘까?

‘환자들이 눈에 확 들어와서 그런지 마음이 한결 편하네. 민정호의 속을 확인했기 때문인가?’

생각난 김에 연락도 하지 않고 민정호를 찾았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같은 공간에 근무하면서도 먼저 찾은 적이 없었다. 당연히 사무실 근처는 얼쩡거리지도 않았다. 그동안 얼마나 두꺼운 벽을 쌓아 두고 살았는지 두말할 여지가 없었다. 어색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싫다고 해서 피해도 된다는 말은 아닌데 너무 어린애처럼 굴었어.’

김지훈도 달라져야 했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문을 열고 들어선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터지는 헛웃음을 참아야 했다. 흔히 볼 수 있는 사무실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이보다 깨끗할 수 없었다. 질서정연하게 정리된 데다 먼지 한 톨 없어 소파에 앉기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후우! 왠지 먼지 털고 들어왔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다니, 일석이 말을 부인할 수가 없네.’

“앉으시죠.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병원 내 한 공간이고, 직원 중 한 명을 만날 뿐이었다. 김지훈이 사무실을 한 바퀴 둘러보며 편안하게 소파에 몸을 던졌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털썩 소리에 민정호가 움찔거리는 것 같긴 했다.

“사무실이 참 깨끗하네요. 커피라도 한 잔 주시죠.”

“블랙입니까? 믹스입니까?”

“이왕이면 믹스로 주시죠.”

“물은 얼마나?”

“대충 삼분의 이면 됩니다.”

참 깔끔하게 탔다.

종이컵이 아닌 커피 잔에 믹스 타는 것도 처음 봤다. 받침접시에 받쳐 내미는 것까지 일거수일투족에 성격이 팍팍 묻어났다.

한 모금 마신 김지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족 단다고 반응할 민정호가 아니었다.

그냥 직진하면 된다.

“간 이식 보험 문제는 신현수 선생님과 이경석 선생님이 담당하기로 했습니다.”

“결과만 잘 나오면 됩니다.”

“혈관 수술 시행하기로 했고요.”

“결정이 빨라 좋군요.”

“행정부원장님이 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제가요?”

“홍보를 맡아 주셔야겠습니다. 투석을 하는 병원만이 아니라 가급적 지역 내 모든 병원을 대상으로 해야 효과가 극대화될 겁니다. 지지부진 시간을 끌어서도 안 되고요.”

일 좋아하는 사람 없다.

자신의 고유 영역이 아니면 더더욱 불만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그런데 민정호는 어떤 표정도 보이지 않고, 자신의 일정부터 확인했다.

“일주일 정도면 가능합니다. 중요 병원은 직접 방문하고, 나머지 병원은 홍보 책자로 충분하다고 판단됩니다. 수술에 필요한 장비는 갖추신 겁니까?”

이미 예측하고 준비까지 마친 것처럼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원래 표정이 없는 사람이긴 했지만 무엇보다 일을 미루지 않았다는 사실이 인상 깊었다.

왠지 한 수 밀린다는 생각이 스쳤다.

“간 이식에 필요한 장비로 혈관 수술까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부탁…….”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죄송합니다.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어 전화부터 받겠습니다. 여보세요? 민정호입니다.”

잠시 통화를 한 민정호가 김지훈에게 눈길을 주었다.

“마침 강호성 일로 연락한 기자가 지금 병원에 도착한 모양입니다. 어차피 원장님과 과장님을 만나야 하니까 잠시만 기다리시죠. 저는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송재덕 교수에게 연락하고는 할 말 다 했다는 듯 서류에 눈을 박았다. 뻘쭘한 데다 정말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사무적이네. 이러니 한 달이 넘도록 그놈의 속을 파악하기 힘들었겠지.’

일이 있는지 송재덕 교수마저 감감무소식이었다. 기자가 올 때까지 기다린 10분 남짓의 시간이 이렇게 길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한마디도 안 하냐. 일 말고는 관심이 아예 없나? 친구는 있는 거야? 결혼은 했나? 못했을 거야. 어느 여자가 좋다고 하겠어?’

별생각이 다 들었다.

곧 취재가 시작됐다.

“원장을 맡고 있는 송재덕입니다. 여러모로 힘든 아이를 위해 기사를 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부모라고 하지만 그런 개놈이 없습니다. 아니네. 개보다 못한 놈이죠. 개보다 못한 새끼. 기자님, 내 말이 맞죠?”

“예? 예예. 아직 경찰 조사가 안 끝나서…….”

“부모 입에서 폭력을 가한 놈이 누구인지 말이 안 나오면 조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이 꼴로 만든 놈을 모를 수 있겠습니까? 죽일 놈입니다. 죽일 놈. 그런 놈은 당장 잡아서 처넣어야 해요. 당장. 에이!”

험한 말 연이어 터졌다.

나이와 직위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송재덕 교수에게 지극히 어울리는 태도였다. 살짝 당황하는 기자를 본 김지훈이 재빨리 본론으로 들어갔다.

상황을 설명하는 내내 묘한 어색함이 흘렀다.

툭하면 터지는 송재덕 교수의 당혹스러운 욕설이 아니라, 자신이 말한 대로 상황을 설명하는지 확인하는 민정호의 매서운 눈빛 때문이었다.

어쨌든 과장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자체로 이미 충격이었다.

지속적인 학대 정황, 췌장이 파열될 정도의 폭력만으로도 기자의 분노와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취재가 거의 끝날 무렵 김지훈이 의외의 질문에 다소 당황했다.

“과장님, 혹시 아이 엄마도 피해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으셨습니까?”

“왜 그러십니까?”

“경찰 측에서 일부러 아이 아빠와 엄마를 분리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 엄마가 아빠와 대면할 때마다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힌다는 말도 들리고요.”

강호성이 엄마부터 찾았다.

비록 그 한 가지 사실뿐이었지만 김지훈도 내심 의심했던 일이었다. 용서하기 힘들지만 죄에도 경중이 있는 이상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했다.

“사실 아이가 잠깐 의식을 찾았을 때 엄마를 찾긴 했습니다. 아빠라는 사람과 똑같이 학대를 일삼았다면 여덟 살 아이가 보일 반응은 아니었습니다.”

송재덕 교수도 동의하는 표정이었다.

아동 학대를 먼저 인지하고, 신고까지 한 입장이기에 외면할 상황도 아니었다.

“민 부원장님, 맡아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아이 엄마도 검사와 검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경찰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

“물론 그렇지만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가져야 호성이에게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부원장님이 말씀하셨던 부분도 실현 가능성이 훨씬 높아지고요.”

“말은 해 보겠습니다.”

환자와 관련된 이상 김지훈에게 통할 말이 아니었다.

“아이를 위한 일인데 말로만 되겠습니까? 우리가 직접 움직여야 할 사안입니다. 엄마의 정신 감정 의뢰까지 필요하다는 의견을 확실하게 전해야 합니다.”

민정호가 김지훈을 보았다.

그동안 보아 왔던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가 아니라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강호성의 상황을 홍보에 이용하겠다는 자신의 말을 들먹인 것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검사와 검진을 우리 병원에서 하겠다는 말입니까?”

“정신적인 문제는 몰라도 육체적인 문제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필요하다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당연히 우리가 해야겠죠.”

단호했다.

‘법적 책임이 없는 일인 데다 개입하면 개입할수록 후환을 두려워해야 하는 일인데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단 말이지. 이준영 선생님 제자라 이건가? 게다가 내가 한 말을 교묘하게 이용해?’

처음 인상과 달리 점점 만만치 않아지는 김지훈이었다. 더욱이 모든 일을 뒷말 없이 깔끔하게 처리하고 싶은 민정호였다.

결국 민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오 기자, 취재할 내용이 더 남았습니까?”

“충분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지역 주민의 여론이 움직일 수 있도록 심층 기사 부탁드립니다.”

“아이를 위해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감사합니다.”

취재가 끝났다.

“잘될 거야. 잘. 민 부원장, 엄마라는 사람도 신경 써라. 지은 죄만큼 벌을 받아야지 더 받을 이유는 없다. 김 과장, 아빠라는 놈은 확실히 나쁜 놈이지? 개새끼지? 그치?”

“그럼요. 원장님, 가시죠.”

“가자고? 할 말 더 없니? 없어.”

받은 만큼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없습니다.”

“커피라도 한잔하자. 어때? 좋지?”

“제 방에서 드시죠.”

“김 과장 방에서? 그럴까? 오래간만에 우리 김 과장이 타 주는 믹스 커피 좀 마셔 볼까?”

“딱 원장님 스타일로 타 드리겠습니다.”

“이왕이면…….”

“원장님! 가시죠.”

속마음도 모르고 눈치 없이 민정호까지 보는 송재덕 교수를 기어이 문밖으로 밀어낸 김지훈이 가볍게 고갯짓을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무심했던 민정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 때문이 아니었다.

빼어난 실력에 환자들이 원하는 인성까지 갖춘 의사가 드물다지만 찾아보면 상당히 많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듯 젊은 나이는 때때로 한쪽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었다.

‘들리는 말과 실제 모습이 일치하는 경우는 드문데 여기서 보는 걸까? 내가 기존에 해 온 일과 전혀 상관없는 병원 일을 맡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닌 모양이다.’

김지훈과 민정호.

서로가 서로를 보는 시선이 변하고 있었다.

상이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죽이 맞아 의기투합할지, 어설픈 봉합 상태가 지속될지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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