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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076화 (1,076/1,329)

2화

김지훈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행정부원장님, 오늘만큼은 솔직하게 대답해 주길 바랍니다. 진상건 이사장과 생각이 다른 겁니까?”

“계약을 이행할 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도대체 그놈의 계약이 뭡니까?”

“전에 말씀드린 대로 이 년을 기한으로 가급적 빨리 존폐를 결정하라는 겁니다.”

“그걸 묻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민정호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입술을 모았다.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뭐가 문제죠?”

“신뢰가 걸린 문제입니다.”

“신뢰요? 말은 좋습니다만, 신뢰 하나로 병원이 돌아갈까요? 절 믿어 달라고 한 적이 없고, 믿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육 개월 내에 결론이 날 테니까요.”

“어떤 결론이 난단 말입니까?”

“존속 가치가 크면 병원을 유지시키겠지만 청산해야 한다는 판단이 서면 문 닫아야죠. 직원들도 망해 가는 병원 붙들고 있는 것보다 그 편이 유리할 겁니다.”

신현수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환자 한 명 없어도 최소 일 년은 버틸 운영비가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신 이사님, 정신 차리세요. 일 년 후에도 적자가 나면 어떻게 할 겁니까? 자기 재산 자기 마음대로 쓰는 것은 자유입니다만 책임져야 할 직원이 몇인지 잊지 마십시오. 가라앉는 배에 끝까지 남아야 할 사람은 선장 한 명으로 충분합니다. 과장님도 다른 선생님들과 상황이 다르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뭐가 다르다는 겁니까?”

“원하는 자리로 갈 기회가 훨씬 더 많다는 말입니다. 설마 그때도 이 많은 식구를 다 책임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죠? 한여름에도 찬바람이 부는 것이 현실입니다.”

희망 섞인 전망도 부족할 판에 폐업을 염두에 둔 말만 이어 갔다. 그동안 쌓인 감정을 풀 기회를 이렇게 날리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보인 말과 행동은 절대 폐업을 원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신현수를 슬쩍 보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계약에 따른다고 몇 번을 말해야 합니까?”

“최종 기한이 이 년이라면 존속 가치와 상관없이 끝까지 함께 가겠다는 말로 들립니다.”

“계약에는 항상 옵션이란 것이 붙기 마련입니다. 혈관 수술과 의료보험 문제부터 확실하게 해결하세요. 지금 하나가 무너지면 다음번은 헛된 희망만 품게 될 겁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참 독특한 성격이다. 하지만 그 덕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다는 말이고, 도리어 당분간 불리할 일이 없다는 말이다.’

적의 친구가 꼭 적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봐 온 모든 일을 고려할 때 민정호를 백안시하며 사사건건 의심하는 것도 합리적이거나 현실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상대에게 요구하기 전에 스스로 호의를 보이는 것이 마땅했다.

김지훈이 손을 내밀었다.

“잘해 보죠.”

“악수하기에는 여러모로 성급해 보이는군요. 그럼 이만.”

사람 무안하게 고개 한 번 까딱이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김지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 문득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 떠올랐다.

‘결벽증이라도 있는 걸까?’

일과 감정은 완전히 별개라는 듯 돌아서는 민정호의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김지훈이 신현수의 어깨를 툭 쳤다.

“얼굴 풀어.”

“난 아직도 불안해.”

월급쟁이와 전 재산을 건 오너의 차이일까?

하긴 민정호와 진상건의 관계가 갑자기 달라질 리 없었고, 누구보다 감정적 골이 깊은 신현수였다. 최악의 경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일 수도 있었다. 반면 민정호의 진의를 확실하게 알았다고 해도 무방했다.

지나친 경계는 피곤할 뿐이었다.

“한 입으로 두말하며 뒤통수를 칠 사람 같진 않아. 계약을 철저히 이행한다는 말을 믿어도 될 것 같아. 결국 우리에게 달린 일 아니겠어?”

“사람이나 현실 모두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는데 예전처럼 냉정하게 보질 못하네.”

생각처럼 풀리지 않는 병원 상황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닐 것이다.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없을 테고, 여유를 가질 상황이 아니었다.

이해되고도 남았다.

‘나도 불안한데 너는 오죽할까!’

“누구 한 명은 삐딱하게 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 원장님이나 스승님도 처음부터 끝까지 민정호를 믿지만은 않으실 거야.”

“그렇겠지? 후우! 일이 묘하게 흘러가네.”

신현수가 말을 하다 말고 물끄러미 김지훈을 보았다. 강철 체력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시뻘게진 눈에 진한 피로가 걸려 있었다.

‘너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야. 고맙다.’

“안 피곤해?”

“슬슬 졸리긴 한데 일석이 만나야지.”

“내일 얘기해도 되잖아?”

“하루가 아쉬워. 조금 이르지만 회진부터 빨리 돌고 함께 만나자. 호성이가 너무 신경 쓰여.”

김지훈이 중환자실로 향했다.

보호자가 보이지 않았다.

경찰이 면회를 제한하기 때문인지 몰라도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결코 얼굴을 보이지 못할 것이다. 행여 아이 엄마도 피해자일지 몰랐다. 하지만 자식이 이 지경이 되도록 방조한 죄는 달라질 수 없었다.

‘차라리 없는 것이 호성이에게도 유리해.’

송진우와 안호석이 부산했다.

“무슨 일이야?”

“지금은 안정을 찾았는데 잠시 바이탈이 흔들렸습니다. 열도 떨어지지 않고요.”

“검사 결과는?”

안색이 어두웠다.

좋을 수가 없었다.

췌장 파열로 패혈증이 동반된 복막염이 발생했다. 전신 상태가 나쁜 상태에서 제때 수술하지도 못해 자발 호흡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한 상황이었다.

“혹시 나 없는 동안 보호자가 면회 요청을 하진 않았어?”

“경찰서에서 엄마라도 면회 가능한지 연락해 오긴 했습니다. 일단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아직도 조사 중이라 풀려나지 않았나? 엄마까지 막다니 민정호 인맥이 대단한 모양이네.’

“누구한테 연락이 오든 일단 막아. 아이가 엄마를 찾긴 했지만 괜히 면회 시켰다 아빠라는 작자 목소리 들을까 무섭다.”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부모의 면회를 적극적으로 막아야 할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강력한 항생제, 영양실조로 인한 고영양 요법, 인공호흡용 튜브를 제외하고는 단 하나도 제거하지 못한 생명 유지 장치까지 모든 것이 눈에 밟혔다.

의식 유무와 관계없이 차단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믿을 사람은 오직 의료진뿐이었다.

“장기전이야. 번갈아 보면서 체력 아껴.”

“과장님도 좀 쉬십시오.”

눈 벌게진 놈들끼리 서로를 걱정했다.

답답한 가운데 병동으로 올라갔다.

수술한 환자들 얼굴이 좋았다.

아뻬 환자는 벌써 복도를 왕복하며 회복에 여념이 없었다. 복강경으로 수술했다지만 안호석의 실력을 충분히 인정하고도 남았다.

다소 기분이 풀렸다.

손일석에게 희소식이 분명할 말도 앞뒀다.

한숨도 못 잔 탓에 온몸이 찌릿거릴 정도로 강한 피로를 느꼈지만 힘을 낼 수 있었다. 병실에 환자만 가득 찬다면 날아갈 것이다.

사인방이 모였다.

의외라고 할 수밖에 없는 민정호의 행동에 다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손일석은 생각이 복잡해졌는지 턱을 괸 채 고민에 잠겼다.

“경석이 형, 이 정도면 우리도 민정호를 달리 생각해야 하지 않겠어요? 설령 진상건과 깊은 관계를 유지한다고 해도 최소 육 개월은 병원을 위해 일한다는 말이잖아요. 실제 그렇게 움직이고 있고요.”

“나도 같은 생각이긴 해. 그런데 왜 원장님과 부원장님은 민정호가 어떤 사람인지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나도 그게 궁금하긴 해요. 일석아, 넌 어떻게 생각해?”

“원장님 얘기야? 아니면 스승님을 배반하면서까지 눈물을 머금고 포기한 혈관 수술?”

“갑자기 웬 뒤끝이야? 둘 다.”

심각한 표정을 지우지 않던 손일석이 한쪽 입꼬리를 말았다. 급기야 마치 이 사태를 모두 파악했다는 듯 손가락을 튕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형이 차근차근 정리해 줄게. 첫째, 선생님들께서 말씀을 안 하신 것은 최근에야 민정호를 파악했거나, 우리도 이 정도는 스스로 해결할 나이라는 거지. 내가 생각해도 그동안 너무 중심을 못 잡았어.”

“민정호를 믿자는 말이지?”

“마음을 놓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이제부터 우리 머리를 아프게 한 대가를 받아 내야 할 타임이야.”

“무슨 소리야?”

“계약에 목을 맨 건 기정사실이고, 스스로 육 개월이란 기한까지 정했다면서? 그 점을 철저히 이용해야지. 병원에 득이 될 일이 보이는 대로 무조건 이행하라고 밀어붙이는 거야.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를 취해야 한다는 말이지.”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익은 우리에게 달렸고, 민정호는 행정과 재정을 맡았는데 구체적으로 뭘 요구할 수 있겠어?”

“흐흐흐! 그게 바로 내가 반드시 혈관 수술을 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야. 나를 쓸모 있게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민정호도 의견을 낸 이상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하잖아? 홍보를 맡긴 후 환자 확보가 미진하면 응징을 가하는 거지.”

“어떻게?”

“민정호 같은 스타일이 자존심은 엄청 강한 법이야. 너 뭐 하는 놈이야? 뭐 이런 의미를 담아 살벌하게 한 소리 날리면 되지 않겠어? 자존심에 쓰라린 상처를 깊게 내주는 거지.”

“누가?”

“과장이.”

“내가?”

“그럼 누가? 설마 과장 자리를 날로 먹으려는 생각이야? 거의 대등한 능력을 갖춘 우리가 찬성했을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민정호에게 홍보해야 한다는 말도 누가 해야 하는지 알겠지?”

신현수와 이경석마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장 된 죄였다.

‘이거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이 더 많은 것 같네.’

김지훈이 입맛을 다시며 마지막 안건을 꺼냈다.

간 이식 보험 결정 위원회에 제출할 자료 준비였다. 이견이 없는 문제인 데다 김지훈은 강호성 일에 집중해야 하는 까닭에 신현수와 손일석이 담당하기로 했다.

신현수가 눈가를 좁혔다.

“경석이 형, 우리도 논의에 참여해야 가능성이 있는데 누가 가죠?”

“파트로 볼 때 둘이 더 가야 하면 김 과장하고 일석이, 셋이면 현수 너까지 가는 게 맞지 않겠어?”

우려에 불과했다.

정부와 관계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설 정도로 대단한 관심을 가진 의사들이 제법 있었다. 기존 협의체에 이미 참가하고 있는 의사들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준영 교수까지 많아야 두 명이었다.

결국 김지훈 확정이라는 말이었다.

빼도 박도 못할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모든 일이 결정됐다.

손일석은 언제든 혈관 수술을 시작할 것이다.

간 이식 보험 문제는 신현수와 손일석이 맡는다.

김지훈은 강호성 문제 및 민정호와 직접적인 접촉을 맡게 됐다. 아울러 외과에 한 발이라도 걸친 일이 있다면 모두 신경 써야 할 것이다.

‘행정적인 일이 왜 이렇게 많아지냐.’

훅 긴 숨을 내쉰 김지훈이 이경석을 보았다.

환자와 수술에만 집중해도 되는 상황이 정말 부러웠다. 언제쯤 환상 속 과장의 힘을 휘둘러 볼지 난망하기만 했다. 물론 삐끗했다간 스승과 사인방에게 맞아 죽겠지만 말이다.

집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분명 환자는 턱도 없이 부족한데 하루 반 만에 하는 퇴근이었다. 남들 다 하는 당직인데 무슨 놈의 일복이 이리 험악한지 모를 일이었다.

강호성 문제까지 꽤 힘들고 피곤했다.

환자가 의사에게 힘을 주듯,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 몸을 누이자 아내와 딸이 모든 스트레스를 빼앗아 날려 버렸다.

“고생했어요. 조금만 더 힘내서 호성이란 아이 꼭 살리세요. 억울하잖아요.”

아내의 따뜻한 말 한마디, 생판 모르는 아이에게 보내는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왠지 포근했다.

깔끄러운 입맛에도 밥 한 공기 뚝딱 비웠다.

희연이가 끔벅끔벅 조는 아빠 팔을 베고 누웠다.

진지하게 유치원 생활을 말하는 모습에 귀여우면서도 언제 이렇게 컸나 하는 생각이 교차했다. 딸이 주는 따스한 온기에 강철 체력 김지훈이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눈 한 번 감았다 떴을 뿐인데 아침이었다.

밤새 전화 한 통 없었다.

강호성이 더 나빠지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김지훈이 내심 안도했다.

하지만 중환자실의 서늘한 기운을 맞이하는 순간, 여전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강호성을 보는 순간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검사 결과는?”

“별 변동이 없습니다. 그나마 드레인이 깨끗하고, 아직까지 폐렴 징후가 보이지 않아 다행입니다.”

“췌장 쪽도 문제지만 폐가 버티지 못하면 회복이 불가능해. 폐렴을 막을 수 있을까?”

“상황 봐서 기간 내 삽관을 시행하겠습니다.”

기관지 분비물을 제거하지 못하면 세균 감염을 피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노인들의 주요 사망 원인인 폐렴으로 여덟 살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문질렀다.

‘너무 불안해. 호흡 튜브를 아예 빼지 말았어야 했나?’

통상적인 접근으로는 강호성의 회복을 장담하기 힘들었다. 치명적인 합병증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결정을 내렸다.

“송진우 선생, 선제적으로 시행하자.”

“지금 말입니까?”

“숨소리가 확실히 어제보다 거칠어졌어.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지켜보다 타이밍을 놓칠지 몰라.”

송진우가 콧등을 찡그렸다.

무력함을 느끼고 있었다.

강호성을 재웠다.

기관에 삽관을 했다.

튜브로 식염수를 소량 투입한 후 가래를 빼내기 위해 석션을 시행했다. 강한 자극에 강호성이 반응하며 소리 낼 수 없는 기침을 터트렸다.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의식이 없다 해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루하루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의식 회복이란 고비를 반드시 넘겨야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 의료진이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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