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송재덕 교수가 두루두루 존경을 받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중 하나가 원장이자 연배가 가장 높은 사람임에도 함부로 말을 놓지 않는 처신이었다. 직종이 다른 경우에는 더더욱 엄격하게 지키는 편이었다.
‘우리 과 식구나 인연이 깊은 사람들 말고는 반말을 안 하시는 분인데 이상하네. 민정호를 믿는 것 이상으로 친근하게 생각하시는 건가?’
끊고 맺음이 가장 확실한 이준영 교수의 태도도 명확하지 않았다. 냉정한 눈으로 보면 서울 병원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사인방과 비슷한 감정이나 경계심을 갖고 민정호를 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몇 차례 물을 기회가 있었다.
다만 한두 살 어린애도 아니고, 다들 나이 먹었는데 사람 하나 두고 어떠니 운운하며 상의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주저했을 뿐이었다. 명백하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여러 사람 입에 올려 평가하는 것 자체가 남부끄러운 일이기도 했다.
솔직히 호의적으로 보이는 여러 일에도 불구하고 민정호의 진의가 아직도 의심스러웠다. 진상건의 실체를 직접 경험한 데다 서로 마음을 트고 지내는 사인방과의 뒷담화는 예외일 따름이었다.
예외를 남발하면 일상이 되지만 말이다.
“제가 말씀드릴 사안은 두 가지입니다.”
민정호의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평소 사족을 달지 않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원장과 부원장이 있는 자리였다.
김지훈이 활짝 귀를 열었다.
‘재정 말고는 할 얘기가 없는데 어느 쪽일까? 함께 극복하자는 걸까? 아니면 진상건의 의도를 교묘하게 관철시키려 할까?’
한 번 새겨진 선입견이 마치 낙인처럼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인식이 다소 바뀌어 사사건건 진상건과 연결시켜 바라보지 않았지만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시겠지만 초반이라고 넘기기에는 병원 사정이 상당히 좋지 않습니다. 지금보다 최소 대여섯 배 이상 수입이 증가해야 겨우 수지타산을 맞출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 이뤄지지 않으면 만성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결과는 폐업입니다.”
역시 돈 얘기였다.
성급하다 해도 비수처럼 아픈 말이었다.
그보다 진상건과 한통속이라면 느긋하게 지켜보면 되는 일인데 먼저 문제를 꺼낸 민정호의 진짜 의도가 궁금했다. 문득 강호성의 일을 처리한 모습과 맞물려 완전히 잘못 판단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관건은 이어질 말이었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책이 있습니까?”
“선생님들의 고유 권한을 잠시 침범해야겠습니다. 병원 경영은 처음입니다만 돈이 될 구석이 보이더군요. 손일석 선생님의 원래 전공이 혈관이라고 들었습니다. 수술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귀중한 인력을 썩힐 수는 없습니다.”
“혈관 수술을 하자는 말인가요?”
“안 될 이유가 있습니까? 이 지역 병원의 실태를 알아본 결과 투석 환자는 많은 반면 혈관 전문의는 없었습니다. 투석 시설이 있는 의원 원장님들도 확실한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무척 바라고 있었습니다. 적극적으로 홍보한다면 상당한 수입원이 될 겁니다.”
김지훈은 물론 신현수까지 무척 놀랐다.
수입을 늘리려 한다는 사실에 한 번 놀랐고, 의료인이 아님에도 혈관 분야의 유용성과 중요성을 파악했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마지막으로 직접 지역 병의원을 방문했다는 사실에 허를 찔린 것처럼 놀랐다.
언제 지역에 산재한 병의원을 찾아 의견을 구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애초 전문 병원을 표방하며 포기했던 부분이었다. 이제 와 어렵다는 핑계로 하나둘 되살리다 보면 추구해야 할 본연의 방향을 잃을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현실에 밀리다 보면 자칫 죽도 밥도 안 될 수 있다. 눈앞의 수익에 연연하며 중심을 잡을 수 있을까?’
고민스러운 일이었다.
힘들게 결정한 일을 번복한다는 것 자체가 발목을 잡았다. 한편으로 알량한 자존심을 앞세우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도 했다.
제자의 생각을 모를 이준영 교수가 아니었다.
필요한 것은 모두가 납득할 명분이었다.
“김 과장, 새로 합류한 선생들에게 혈관 수술 경험이 필요해. 특히 이식 파트인 서도진 선생과 강병옥 선생은 전문가 못지않아야 돼. 부족하다.”
적극적인 지지였다.
이준영 교수가 고민도 하지 않고 동의할 리 없었고, 민정호 혼자 독단적으로 제시할 사안도 아니었다.
사전에 의견을 주고받은 것이 분명했다.
자신보다 민정호와 먼저 상의했다는 사실에 서운하기보다 필요하다는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고민할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손일석의 의중도 알아야 했다.
‘분명 좋아서 먼저 나서겠지만 나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일석이가 동의하는 것이 먼저야. 근데 우리를 쏙 빼놓으시다니 좀 서운하네. 하긴 우리도 부담스러운 문제는 말씀 안 드리긴 마찬가지구나.’
“선생님, 지금 결정해야 합니까?”
“빠를수록 좋다고 본다. 잘 상의해서 결정해.”
역시 스승이었다.
손일석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제자의 마음을 단박에 읽었다. 불가피한 사정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 은근하게 느껴졌던 서운한 감정이 싹 사라졌다. 어쩌면 고민하지 말라는 배려일 수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민정호가 고개를 저었다.
감히 이준영 교수를 빤히 보며 말이다.
“부원장님, 당사자가 없지만 뒤로 미룰 문제가 아닙니다. 과장님 책임하에 반드시 관철해야 합니다. 그것이 과장이라는 자리가 가지는 무게와 책임 아닙니까?”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어라?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하라는 거야? 이건 꿍꿍이가 있을 사안이 아닌데 수입을 못 늘려 안달을 해?’
심지어 과장의 권한을 강조하며 강경한 어조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김지훈의 입지와 위상을 십분 인정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민 부원장, 며칠 밀린다고 병원 망하지 않아. 의료 쪽 문제는 우리에게 맡겨.”
“안 됩니다. 지금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마치 기 싸움이라도 벌일 것처럼 차가운 무표정이 뜨거운 무뚝뚝함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했다. 그것도 안정적인 경영을 두고 말이다.
부지불식간 선입견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이준영 교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어불성설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었다.
“민 부원장, 의료는 기계로 빵 찍어 내는 일과 다르다. 달라. 어떤 일이든 사람이 중심이잖아. 고려해야 할 점이 훨씬 더 많고, 준비해야 할 일도 많다. 서두르지 말자. 이삼 일에 병원 안 망한다. 안 망해.”
송재덕 교수의 중재에 민정호가 결국 물러났다.
‘부원장으로서 결정하시라고 그렇게 설득했는데 고집을 굽히지 않다니 너무 강한 사람이야.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 때문인가? 후우! 차라리 말씀을 하실 때가 훨씬 편하네.’
“원장님과 부원장님 뜻이 그렇다면 따라야죠. 하지만 다음 안건은 저를 포함해 모두 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부원장님의 전폭적인 협조까지요.”
다소 건방진 말투였지만 의외의 상황에 김지훈도 미처 지적하지 못했다.
“계속해.”
“얼마 전 정부에서 간 이식에도 의료보험 적용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논의가 어느 정도 진행됐지만 재정 건전성을 따지는 목소리가 제법 있는 모양입니다.”
금시초문이었다.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과장님, 좁은 인맥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하여튼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그동안 보안을 유지했지만 곧 민간 부분까지 참여해 최종 결론을 낸다고 합니다. 누가 참석해야 할지 빤하지 않습니까?”
간 이식 학회가 없는 이상 의사 쪽에서는 간담췌 학회가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학회장인 이준영 교수의 입김이 강력하게 작용할 것이다.
“부원장님, 좌고우면할 상황이 아닙니다. 부산 지역 간 이식 전문 병원, 최근 센터를 발족시키며 준비에 나선 H 병원, 그리고 우리 병원이 주축이 돼 보험 적용을 반드시 관철시켜야 합니다.”
‘진충기 선생님도 결국 시작하시는구나.’
김지훈으로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묘했다.
무슨 이유인지 민정호가 이준영 교수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다른 문제도 아닌 비급여 수술을 보험에 적용시키는 일로 말이다.
모두가 바라던 일이지만 병원 입장에서 보면 밝은 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험이 적용되면 치료 수가 대부분 원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수익과 비용 측면을 비교해 볼 때 뜨거운 감자나 다름없었다.
신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우이길 바라지만 지금까지 경험한 정부의 행태를 볼 때 이식을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 점은 알고 있습니까?”
“신규 보험 적용 시 어떤 문제가 있는지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병원이 반드시 논의에 참가해 적절한 수가를 보장받아야 합니다. 최악의 경우 비급여 항목을 개발해 수익을 보전해야겠지만 보험이 돼야 환자가 늘지 않겠습니까?”
민정호는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어느 부분이든 넘기 힘든 턱이 있기 마련이다.
환자의 경제력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부분이었다.
생체 간 이식 시 억대 이상 드는 본인 부담이 삼분의 일 정도로 뚝 떨어진다면 경제적인 문제로 고민했던 많은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고도 남았다.
적정 수가만 책정된다면 병원 입장에서도 마음껏 수술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것이다. 민정호 말처럼 비급여 항목을 개발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말이다.
민정호가 일일이 시선을 주었다.
“제 제안에 반대하는 분은 없으시겠죠? 부원장님, 논의에 참가할 자격이 있는 선생님들이 많겠지만 이 사안만큼은 우리 병원이 주도해야 합니다. 사활이 걸린 문제 아닙니까?”
이준영 교수가 답을 하지 않았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대충 어떤 고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의사 역시 갖가지 명예욕을 갖고 산다.
학회장이란 직함이 개인의 신념을 위해 존재하는 자리도 아니었다. 학문적 영역 말고도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야말로 정책 결정의 적임자라는 아집, 정부 기구에 들어간 경력을 오직 정치 발판으로만 삼으려는 의사, 현실을 도외시한 채 이상만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먹이가 될 만한 기회가 던져졌다.
온갖 군상이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자들의 영향력이 의외로 강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젯밥에 관심이 있는 자들이 과연 제대로 된 정책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의사 집단의 이익만을 좇아서는 안 되지만 명예나 정치에 휘둘리면 최선의 방안이 나올 수 없었다. 적어도 환자와 의사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적절한 안을 마련하는 것이 마땅했다.
결국 정부 논의에 참석하는 이들 모두 의료계 내부의 분열과 싸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순수한 열정을 가진 이는 상처를 받고도 남았다.
제법 시간이 흘렀다.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결정이 도출돼도 나뿐만 아니라 참여한 의사들 모두 욕을 먹기 마련이다. 분명 비난하는 이들까지 있을 거다. 너희들이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고 싶지만 다른 방법이 없구나. 어떻게든 내가 막아 주마.’
권력과 하등 상관없는 학회장 자리를 두고도 온갖 구설수에 휘말리는 세상이었다. 소수에 불과하다 해도 그들이 벌이는 정치판을 제자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강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부딪쳐야 할 일이었다.
진상건과 관련된 모든 일이 다르지 않았다.
“김 과장, 신현수 선생, 공정식 선생과 함께 논의에 참여할 준비해. 간 이식의 적정 수가를 책정하고, 정확한 근거를 제시해야 할 거야.”
갑작스러운 결정이었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피해서는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의료보험 적용에 전문 병원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직접 이식을 담당하는 젊은 사람들이 대거 참가할 필요가 있어. 수술도 안 하면서 머릿속으로만 접근하면 도리어 문제만 더 생길 거야. 정치적이지 않으면 다행이다. 다행이야.”
한 가지 안건을 결정했고, 남은 하나 역시 수일 내에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할 말 다 했다는 듯 민정호가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정리했다.
“원장님, 부원장님,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꾸벅 인사하고는 바로 회의실에서 나갔다.
대개 중요한 결정을 내린 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미비한 점을 상의하는 것이 일반적인 행동일 것이다.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인간미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결같네. 칭찬해야 하나?’
고개를 흔들던 김지훈과 신현수가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이대로 끝내면 안 될 절대적 사유가 있었다. 착각이었든 오해든 반드시 풀어야 할 감정이 남았다.
지금 이 시간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현수야, 우리가 본 사람이 민정호 맞지?”
“대화가 더 필요한 것 같다.”
민정호를 불러 세웠다.
“왜 그러십니까?”
“잠깐 얘기 좀 하죠.”
“삼십 분 정도면 괜찮습니다.”
시간이 문제일까?
곧바로 자리를 마련했다.
그동안 줄곧 보인 행동으로 판단할 때 이리저리 말 돌려 묻는다고 허심탄회하게 입을 열 민정호가 아니었다.
탐색전은 필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