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것과 조사에 협조하는 일 말고 또 뭐가 있죠?”
“며칠 내로 기자가 찾아올 겁니다. 최대한 아이 입장에서 말씀하셔서 큰 기삿거리로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의식이 없다는 점, 배 속 장기가 파열되도록 때렸다는 점을 강하게 강조하면 더욱 좋겠죠. 단, 결론도 안 나온 일 때문에 법적 문제에 휘말려서 좋을 일이 없습니다. 부모가 가해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뉘앙스만 풍기셔야 합니다.”
김지훈이 반색했다.
“아동 학대에 관한 문제를 공론화시키자는 말이군요.”
“그런 의도도 있지만 병원을 알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기사가 뜨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테고, 저절로 병원 이름이 오르내리겠죠. 결국 시장 귀에도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시청에서 병원비를 대신 지급할 가능성도 생기고요. 세금은 이럴 때 쓰라고 내는 거니까요.”
“그게 전부입니까? 정작 가장 중요한 아이가 빠졌습니다. 아이를 위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계획대로 되면 아이에게 필요한 것들은 부수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 이상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설마 아이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말입니까?”
누구도 책임질 수 없겠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무 베듯 딱딱 나뉠 수 없는 일이었다.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기도 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말이라도 예쁘게 하면 안 되나?’
민정호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비슷해도 이준영 교수와 확연히 달랐다. 뜨거운 속을 가진 무뚝뚝함이 아니라 차가운 기운만 풍기는 냉정함이었다.
“책임지지 못할 동정은 금물입니다. 아이를 도와주는 것과 병원이 돌아가는 문제는 별개란 사실도 잊지 마십시오. 감정에 휘둘리면 실수하기 마련이고, 더욱이 선생님은 과장님입니다.”
‘바늘에 찔려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겠네. 정말 감정이 메마른 사람인가? 혹시 다른 사람에게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소시오패스 아니야?’
끔찍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정호의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아이 부모를 보는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찰 조사에서 확실하게 혐의를 잡지 못하는 한 다른 보호자와 똑같이 대해 주십시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과장님은 실수 안 하시나요? 설마 이번 일이 의사가 사람의 죄를 판단할 수 있는 예외적인 경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나도 강하게 의심하지만 결론이 날 때까지 자극할 이유가 없습니다. 냉정해지세요.”
티끌만치 있던 찝찝함을 콕 찍었다.
‘백 퍼센트가 아니라 이 말이지? 후우! 기분이 무척 나쁘지만 반박할 수가 없네.’
사실 전적으로 틀린 말도 아니었다.
김지훈이 지그시 이를 물었다.
감정을 가라앉히는 순간 한 가지 걱정이 앞섰다. 아이와 관련해 치료 말고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줘야 했다.
“아이 아빠가 경찰서에서 나오면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최악의 경우 퇴원이나 전원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릴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아이죠. 수술 소견을 아무리 자세하게 써서 보내도 전원 자체가 위험할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치료에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 병원비를 안 내면 절대 보낼 수 없죠.”
“내면요?”
“치료비가 적지 않을 텐데 저런 부모가 돈을 내겠습니까? 아무튼 퇴원 결정이 과장님 손에 있는 한 걱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군요. 그럼 이만.”
또 자기 할 말만 하고 돌아섰다.
내심 짜증이 난 김지훈이 한마디 하려는 순간 민정호가 깜빡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밤에 수술을 몇 건 하신 겁니까?”
“갑자기 그건 왜 묻습니까? 제가 두 건, 손일석 선생이 한 건 했습니다.”
“당직이 거의 일주일에 한 번꼴이죠?”
“그렇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별일 아닙니다. 하루 가지고는 큰 도움이 되지 않지만 오늘처럼 수술하면 병원 수입이 얼마나 될까 계산을 좀 해 봤습니다.”
“적어도 오늘 같은 날은 수입을 잊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일 계산해도 되잖아요?”
“과장님, 편의상 각자 할 일을 나눴지만 행정적인 문제까지 담당해야 할 자리가 과장이란 사실을 잊지 마세요. 지금은 초반이라 넘어갑니다만, 자신 없으시면 다른 선생님께 넘기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계속 이런 식으로 행동하시면 곤란합니다.”
김지훈이 순간 말을 잃었다.
반박할 수가 없었다.
환자는 끊임없이 올 테고, 온갖 사연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일일이 대응하다간 필히 문제가 생기기에 스승도 감정에 매몰되지 말라고 했다.
이번 일도 다르지 않았다.
과장의 직분을 상기할 때 특별한 상황 때문이란 말은 핑계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강호성을 위해서라도 보다 객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마땅했다.
인정해야 했다.
상대가 민정호라고 해서 회피하거나 부인한다면 비겁한 사람이 될 뿐이었다.
“내가 지나치게 흥분한 것 같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제 말을 알아들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저도 아이에 대해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은 우연이겠죠?”
‘일복 대단하다더니 정말인가? 이렇게 일하다 쓰러지면 곤란하지만 강철 체력이란 말을 믿어도 되겠지.’
“우연이라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김지훈만 남았다.
‘아이를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던데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도대체 뭐가 우연이라는 거야?’
얼굴 찡그리다 말고 피식 웃었다.
‘허구한 날 애매모호하게 끝나는구나. 하여튼 보통 사람은 갖기도 힘든 인맥까지 동원해 도움을 준단 말이지? 민정호 당신이 어떤 목적으로 접근하든 결과만 달라지지 않으면 돼. 이런 일까지 돈과 결부시키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일이었다.
너무 늦어 퇴근이 의미가 없을 시간이었다.
마음이 심란해 잠도 오지 않아 안호석과 함께 아이를 보았다. 여덟 살 남자아이 강호성의 안색이 불안할 정도로 창백했다.
“확실히 눈을 뜬 거 맞지?”
“저도 불안해지네요. 잠깐 눈이라도 붙이시죠.”
“괜찮아.”
나이 먹긴 먹은 모양이었다.
피로가 느껴지면 눈알이 따끔거렸다.
그때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다.
(과장님, 환자 왔어요.)
간호사 목소리가 반갑지만은 않았다.
가끔은 이런 일복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었다.
바로 오늘 같은 날이었다.
***
다음 날 아침.
김지훈이 애써 웃었다.
어쩌면 즐거운지도 몰랐다.
어제 아침부터 오늘 새벽에 걸친 수술로 입원 환자가 다섯 배로 늘었다. 손일석이 아니었다면 한 명 더 늘어 무려 여섯 배가 됐을 것이다. 게다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외래 진료가 줄줄이 예약돼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이준영 교수를 비롯해 각 파트 수술이 수술실 세 곳에서 동시에 시작됐다. 비록 오전에 다 끝나겠지만 병원 전체에 활력이 돌고 있었다.
이미 당직 일복은 터졌다.
팽팽 노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호성이만 잘 깨어나면 원이 없겠다. 아니야. 이 정도 수준을 절대 만족하면 안 돼.’
간만에 서울 병원 회진 비스무리한 회진을 돌고 커피 한 잔 맛있게 즐겼다. 고경아에게 지난밤 일을 보고하러 잠깐 수술 방을 들렀다. 밤 꼬박 새운 남편을 응원하는 아내의 눈빛에 힘이 더 났다.
‘오후에 호성이 문제로 원장님과 스승님 모시고 대책 회의를 해야겠지? 모처럼 하루 종일 할 일이 생겼네.’
사람 욕심 끝이 없었다.
서울 병원에서 수술한 환자가 검사를 위해 찾아온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인데, 수술할 환자가 없다는 사실에 내심 실망했다.
마지막 환자만 남았다.
간암 환자였다.
심한 간경화가 동반돼 절제가 아닌 이식이 필요했다. 자신도 모르게 불끈 주먹을 쥔 김지훈이 서둘러 마음을 진정시킨 후 침착하게 가능한 수술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일단 모든 조건이 맞아야 합니다. 장기 기증을 원하시면 필요한 검사를 한 후 대기자에 등록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얼마나 걸릴까요?”
“대기자가 워낙 많고, 우리가 임의대로 순서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약하기 힘듭니다. 반면 생체 간 이식을 원하시고, 기증자만 있다면 이삼 주 안에 수술이 가능합니다. 두 명이 동시에 수술을 받아야 해서 장기 기증을 받는 것보다 비용이 더 든다는 단점이 있긴 합니다.”
“비용 문제는 보험이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든 마련해야죠.”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내원했다.
결정은 어디까지나 환자의 몫이었다.
“의뢰서를 가져오셔서 외과에서 먼저 진료를 하게 됐지만 대부분의 검사와 준비는 내과에서 담당합니다. 다행히 오후에 내과 진료가 있네요. 보다 자세히 상담하시고,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빨리 받아야겠죠?”
“그렇게 판단됩니다.”
환자가 오후에 내과 진료를 받겠다는 말을 뒤로하고 진료실을 나갔다. 보호자의 어깨까지 축 처져 있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부터 엄청난 수술비까지 온갖 요인이 짓누를 것이다.
김지훈이 한숨을 쉬고 말았다.
‘어차피 수술받아야 할 환자지만 매번 안타깝네. 비용이라도 줄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방금 전까지 간절하게 원했던 환자였다.
막상 오니 다른 문제가 걸렸다.
딜레마였다.
묘한 기분에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한 김지훈이 목을 돌리며 수술 방으로 향했다. 스승의 수술을 보며 기분도 전환할 겸 오후 자리를 상의할 요량이었다.
한발 늦었다.
이미 수술이 끝났다.
스승의 수술이니 당연했다.
김지훈이 막 휴게실에서 나오는 이준영 교수를 보자마자 쪼르르 달려갔다. 신현수는 마무리를 했는지 이제야 수술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쩝! 원래 내 자린데 스승님과 함께 수술할 기회가 없네. 이러다 아예 제자 자리까지 빼앗기는 거 아냐? 좋은 방법 없을까?’
이 또한 딜레마였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몇 시에 시간이 되십니까?”
“두 시에 원장님 방에서 만나자. 신현수 선생, 공정식 선생과 민 행정부원장도 오기로 했다.”
“중환자실에 있는 아이 때문인데 민정호도요?”
“상의해야 할 일이 더 있다. 이왕이면 행정부원장이라고 불러. 밥 먹으러 가자.”
한 번 입 닫으면 끝인 스승이었다.
식사하는 내내 왜 민정호까지 참석하는지, 왜 점점 더 호의적으로 변하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시간이 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땡! 두 시다.
전문 병원의 의사 결정을 주도하는 송재덕 교수, 이준영 교수, 김지훈, 신현수, 진료부장인 공정식, 민정호가 한자리에 모였다.
김지훈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꽂혔다.
신현수도 연신 안경을 닦았다.
누구 할 것 없이 민정호는 항상 신경 쓰이는 사람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상의했지만 강호성의 일까지 겹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새벽에 나눈 말을 반복한다면 과장으로서 긍정해야 할지, 아니면 의사 입장에서 반박해야 할지조차 결정할 수 없었다.
‘과장이 결코 좋은 자리가 아니었어.’
이준영 교수가 부원장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이유도 행정적인 일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스승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제자라는 사실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지만 피할 수 없는 자리기도 했다.
“다 모였니? 다 모였지? 오늘 상의할 일이 몇 개 있다. 김 과장 간만에 밤 꼴딱 새서 피곤할 텐데 빨리빨리 하자. 호성이라고 했지? 호성이. 김 과장, 어떻게 된 거야. 자세히 말해 봐. 자세히.”
김지훈이 미리 준비한 자료를 꺼냈다.
응급실 차트, 수술 기록지 및 사진, 방사선과 검사까지 모든 것이 외상의 증거였다. 아울러 가장 중요한 과거력과 병력에 적힌 부모의 말을 제시했다.
“단 한 번도 아이가 외상을 입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응급실에서 보인 태도 또한 부모라면 도저히 보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동 학대가 분명합니다.”
“다른 이유를 의심하기 힘드네. 맞는 것 같다. 자료 잘 보관해. 행정부원장도 나왔다면서? 대책을 세운 게 있나?”
송재덕 교수가 특유의 말투를 잃었다.
민정호가 침착하게 지난밤 어떻게 대응했는지, 향후 대책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여전히 감정이 완전히 배제됐건만 희한하게도 설득력이 있었다.
각자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아동 학대는 의심의 여지가 없고, 이후 대응은 김지훈과 민정호에게 일임한다는 말이 주류였다.
이준영 교수가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렸다.
“김 과장, 여러 문제가 예상되고,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지만 절대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아이 미래가 달린 만큼 행정부원장과 함께 확실하게 해결해.”
“적당한 대책이라고 보십니까?”
이준영 교수가 민정호에게 눈길을 주었다.
김지훈도 알기 힘든 눈빛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피할 수 있겠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다.”
가장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건만, 이 상황을 병원 홍보에 이용한다는 대책까지 허용했다. 생각해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일이기에 김지훈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논의한 내용 자체가 심각해 무거운 분위기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송재덕 교수가 주의를 환기시키며 민정호를 보았다.
“자자! 우리가 상의해야 할 일이 이거 하나만은 아니다. 행정부원장, 얘기해 봐. 다들 마음을 열고 들어야 한다.”
마음을 열라니 예사롭지 않은 말이었다.
좌중의 눈길이 일제히 민정호에게 집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