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김지훈이 헛기침을 했다.
“흠흠! 안호석 선생, 사정이 있어서 그런데 혹시 수술 하나 같이 들어갈 수 있을까? 아뻬 라파로야.”
(저야 좋죠. 그런데 과장님이 직접 하실 건가요?)
숨도 쉬지 않고 대답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집도의를 묻는 자세는 아주 만족스러운 욕심이었다.
“그럴 리가 있나! 빨리 나와.”
손일석이 중얼거렸다.
“아뻬 라파로조차 처음이라는 사실에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응급실 역사상 야간 두 건도 처음이잖아. 야! 역시 일복 무시할 수 없네.”
“이제 이 주에 역사는 무슨?”
썰렁한 농담인 데다 손일석이 너스레를 떠는 이유를 알기에 김지훈이 웃지 못했다. 무슨 이유인지 강호성의 부모가 잠시 잠잠한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게다가 응급실 문이 또 열렸다.
안호석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김지훈을 비롯해 사인방 전체가 나와 있는 데다 응급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다소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입이 찢어졌다.
“늦은 시간에 미안하다. 안호석 선생도 일복이 있는 모양이다. 담낭농양이 강력히 의심되는데 가능하지?”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신현수가 피식 웃었다.
“안호석 선생이 막판까지 간암하고 라파로 파트 사이에서 고민했다는 사실 잊었어? 아직 수술이 적고, 나 때문에 퍼스트도 제대로 서지 못했는데 잘됐다.”
“그러게요. 도진이나 도훈이 놔두고 절 부르시다니 운이 좋네요.”
“쯧쯧! 과장님이 제 무덤을 스스로 파시는군요. 도훈이야 서울에서 출퇴근하니까 그렇다 쳐도, 같은 동네 사는 도진이의 살벌한 눈초리를 감당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김지훈이 순간 어깨를 떨었다.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하지만 문득 든 옛 생각에 겸사겸사 안호석을 불렀기에 서도진의 불같은 항의는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올라가자.”
김지훈의 뒤를 따르던 안호석이 응급실 쪽으로 눈길을 주며 물었다.
“경찰까지 와 있고 분위기가 무겁던데, 응급실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수술 끝나고 나와 함께 중환자실 들르자. 미안하지만 네가 보아야 할 아이가 있어.”
“아이요?”
“아동 학대가 의심돼. 아니, 확실해. 아이 상태와 상황을 미리 알고 있다가 나중에 깨어난 후 도움을 줬으면 해. 한동안 소아 정신과가 있는 병원으로 이송하기 힘드니까 우리라도 뭔가 해야지. 미안하다.”
안호석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제 경험이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요.”
“부탁한다. 그럼 아이 문제는 잠시 뒤로 미루고 수술에 집중해 볼까?”
연이어 두 건의 수술을 시행했다.
신사인방이라 할 수 있는 후배 중 한 명의 실력을 똑똑히 확인했다. 아뻬는 배를 연 것처럼 수월하게 했다. 담낭농양 역시 상당히 침착한 손으로 무사히 끝냈다.
두 번째 환자를 막 깨울 때였다.
손일석이 스윽 고개를 들이밀었다.
“과장님, 64세 남자 환자입니다. 보기 드문 빤뻬리로 내원했습니다. 스케줄 내고 바로 수술하겠습니다. 환자는 물론 제 앞으로 입원시키겠습니다.”
“응? 네가 수술한다고?”
“일복이 없어서 이렇게라도 해야겠습니다. 지금부터 직접 킵하시고, 진우와 경철이 바로 보내 주십시오. 응급실은 천천히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해결됐어?”
미처 대답도 듣기 전에 환자가 몸부림을 쳤다. 꼬박 밤을 새게 생겼다고 투덜거리는 마취과 당직의에게 시선을 뺏기는 순간 손일석이 휘리릭 사라졌다.
얼떨결에 수술 하나 빼앗겼지만 잘됐다.
고맙다고 인사하며 보이는 보호자들의 미소에 답답하기만 했던 마음이 다소 풀렸다. 하지만 이내 중환자실의 서늘한 기운이 몰려왔다.
같은 층에 있는 탓만은 아니었다.
아이를 찾았다.
8세 남자아이, 강호성.
바짝 붙어 아이를 보던 송진우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동공반사를 확실히 보이고, 통증에도 반응했지만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송진우 선생, 이유가 뭘까?”
“내원 당시에는 심하지 않았지만 패혈증이 다소 악화된 상태였습니다. 마음은 또 얼마나 무섭고, 아팠을까요? 그 모든 것 때문에 수술과 마취를 견디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살릴 겁니다. 짐승 같은 부모에게 목숨을 잃게 할 수는 없습니다.”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감정적인 말이었지만 어떤 주의도 줄 수 없었다.
불현듯 예전에 함께했던 의료 활동이 떠올랐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그 이상의 사랑으로 보답한 송진우였다. 반면 안호석은 자식을 버린 아버지를 딛고 일어서 훌륭하게 성장했다.
함께 치료한다면 아이는 반드시 눈을 뜰 것이다. 의사의 냉철한 이성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가진 연민의 정이 주는 힘을 믿고 싶었다.
“송진우 선생, 수술 있다고 연락받았지? 경철이하고 빨리 가서 준비해.”
“킵은 누가 합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수술에 집중해. 안호석 선생, 많이 늦었다. 들어가. 수고했어.”
안호석의 눈에 씁쓸한 기운이 진하게 감돌았다.
아내와 자식을 버린 사람의 손이 얌전했을까?
확언할 수는 없지만 아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지도 몰랐다. 순간 무리한 부탁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감정이 모두 사라진 단순한 기억이기를 바랐다.
안호석이 아무 말 없이 아이 앞에 앉았다.
“안 들어가?”
“제가 아이 곁을 지키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왠지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고맙다. 응급실로 연락해.”
어깨를 툭 친 김지훈이 중환자실을 나왔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아이 엄마가 보였다.
그 뒤에 민정호와 낯선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얼굴 보자마자 험한 말이 튀어나올 줄 알았건만 아이 엄마가 서글프게 울며 눈물을 흘렸다.
“선생님, 우리 호성이 보게 해 주세요. 갑자기 수술해야 한다는 소리에 당황해서 말 못했는데, 나 모르는 사이에 어디선가 다친 것 같아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김지훈의 가운을 잡으며 호소했다.
‘이 아줌마가 왜 이러지?’
태도가 변해도 너무 변했다.
당황스럽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을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 이렇게 빨리 변할 수 없었다. 그것도 자기 배 아파 아이를 낳은 엄마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태도를 보인 사람이었다.
아이 엄마가 격하게 손이 떨렸다.
두려움이 분명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란 생각에 도리어 분노가 치밀었다.
그런데 여인의 눈길이 이상했다.
중환자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거짓이나 연기라고 생각하기에 너무 진한 슬픔이 엿보였다. 아픈 자식을 둔 엄마의 절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 눈빛이었다.
착각일까?
“죄송해요.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해야 할 말이었지만 응급실에서 보인 행동 때문인지 가증스럽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이제 와 깨달았다 해도 변할 것은 없었다.
‘만에 하나 진심이라 해도 늦었습니다.’
김지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정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과장님, 지금 면회가 가능합니까?”
목소리 역시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어떤 상황인지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아이의 처지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더욱이 중환자실이 주는 묘한 감정을 생각하면 냉철하다 못해 감정이 메마른 사람처럼 보였다.
‘이런 사람이 해결하겠다고 자청하다니, 참 판단하기 힘든 사람이네.’
“의식이 없을 정도로 상태가 불안정해 부모라 해도 허락할 수 없습니다.”
“다른 환자 경우도 마찬가지죠?”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민정호가 낯선 사람을 가리켰다.
“경찰서에서 나오신 형사분입니다. 시간이 늦었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다시 한 번 상세하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다른 환자가 온 보람이 있네요. 면회가 안 된다니까 어머니는 절 따라오시죠. 오해가 있으면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발 얼굴이라도.”
“병원이 지켜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상황이 허락되면 바로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아이 엄마가 주춤주춤 민정호를 따라갔다.
두려움에 젖은 것처럼 다리에 맥이 풀려 있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형사를 보더니 이제야 무서운가 보지?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 할 거야. 당신은 엄마라고 불릴 자격이 없어.’
“시작하실까요.”
김지훈이 상세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꽤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귀찮은 기색조차 없이 경청했다. 일일이 수첩에 적어 가며, 때때로 질문을 하며 상당한 열의까지 보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아이 아빠가 지금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만, 확실한 증거도 없이 계속 붙잡아 둘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과장님 말이 맞는다면 도리어 해코지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앞으로 있을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실 수 있겠습니까?”
은근히 불안했지만 부모의 폭력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 없었다. 더구나 여덟 살에 불과한 아이의 평생이 걸린 일이었다.
“협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모 중 한 명이라도 병원 내에서 행패를 부린다면 바로 출동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그때 안호석에게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이야?”
(다행히 안 주무셨네요. 아이가 잠깐 눈을 뜨고 입까지 열었습니다. 코마에서 잠시 벗어났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정말이야? 다행이다. 나 지금 중환자실 앞이야. 바로 들어갈게.”
(지금은 다시 의식이 흐려져 오셔도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한 첫마디가 엄마였습니다. 학대가 분명하다면 엄마부터 찾을 리가 없어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어쨌든 선생님이 꼭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김지훈의 눈가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의식이 또렷하지 않은 상태에서 엄마를 가장 먼저 찾았다니 본능처럼 나타난 감정이란 의미였다. 더구나 학대한 사람을 충분히 인지하고도 남을 여덟 살 아이였다. 엄마가 아니라 공포의 대상이었을 텐데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끊을 수 없는 엄마와 자식 사이의 끈 때문일까?
불현듯 무엇엔가 쫓기듯 소리를 질러 댔지만 집기 하나도 잡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반면 아비는 엄마와 달리 상대를 가리지 않고 서슴없이 폭력을 행사하려 했다.
단순히 정도의 차이일까?
폭력에서 아내는 안전했을까?
‘설마?’
추측에 불과하지만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어미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근원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형사님, 죄송하지만 폭력에 당한 흔적이 있는지 엄마 몸을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가족이 모두 아이 아빠에게 학대를 당했다는 말입니까? 응급실에서 똑같이 난리를 쳤는데 굳이…….”
“일종의 스톡홀름 신드롬과 유사한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엄마 역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빠져 있을지도 모르고요. 벌을 받더라도 차이가 있지 않을까요?”
형사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가끔 압도적인 폭력에 눌려 도리어 가해자에게 동조하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확인해 보겠습니다. 어쨌든 우리 직원이 올 때까지 아이 아빠와는 절대 접촉하지 마세요.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직원이라니요?”
“우리끼리는 서로 그렇게 부릅니다. 혹시 급박한 일이 생기면 곧바로 연락 주십시오.”
명함 한 장을 받았다.
홀로 돌아온 민정호와 인사를 나눈 후 사라졌다.
왠지 깍듯한 태도도 그렇고, 평소 경찰이 병원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잘 알고 있는 김지훈으로서는 무척 의아한 일이었다.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늦장 출동에 상황이 진정되면 바로 돌아가는 모습만 봤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지역이 달라서 그런가?’
“이제 퇴근하시죠.”
민정호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아이 엄마는요?”
“이 형사가 조사할 것이 있어 데리고 간다고 했습니다. 어차피 면회도 안 되지 않습니까? 당분간 분리시키는 것이 맞을 것 같고요.”
“그러네요. 이렇게 빨리 형사까지 오다니 뜻밖입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아는 분이 있습니다.”
“인맥 뭐 그런 건가요?”
“필요할 때 확실하게 밀어주면 그만한 대가가 따라오는 법입니다. 불법적인 일을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면 인맥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죠.”
경찰, 그것도 고위급이 분명할 사람과 어떤 인연을 쌓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무엇보다 병원을 위해 자신의 인맥까지 이용하다니 새삼스레 정체가 궁금할 지경이었다.
어쨌든 고마운 일이었다.
김지훈이 살짝 열린 문을 조금 더 열었다.
“오늘 일 감사합니다.”
“제 일이라고 말씀드렸고, 아직 안 끝났습니다. 인사받고자 한 일도 아니고요. 어쨌든 이번 일로 인해 과장님께서 해야 할 일이 더 생겼습니다.”
민정호는 여전히 사무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