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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071화 (1,071/1,329)

17화

김지훈의 손이 덜덜 떨렸다.

온갖 군상을 다 경험했지만 짐승보다 못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절실하게 깨달았다. 수술실에 들어서 겁에 질린 아이와 눈동자를 마주치고 나서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얼마나 무서우면 의식이 흐린데도 부모에게 두려움을 보일까?

‘아이에게만 집중해도 모자랄 상황이다. 부모 문제는 경찰에게 맡기자.’

마취 전 청진을 위해 아이의 옷을 들어 올리던 윤서연이 깜짝 놀라 물었다.

“김 과장, 어떻게 다쳤기에 온몸이 멍투성이야? 어머! 최근에 다친 상처만이 아니네.”

이미 아플 대로 아프겠지만 부모를 언급하는 순간 아이가 받을 마음의 상처가 더욱 깊어질 것이다. 아이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수술 끝나면 얘기할게.”

마취 내내 김지훈의 얼굴이 좋지 못했다.

자식이 없는 송진우와 아직 미혼인 고경철조차 인상을 쓰며 치미는 화를 가라앉히려 애썼다. 의사 이전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참담한 분노였다.

절대 도움이 될 감정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차분하게 말했다.

“수술실이다. 다 잊고 아이에게만 집중해. 이미 수술 시기를 놓쳤어.”

아이가 깊은 잠에 빠졌다.

복부 중앙의 새까만 멍이 빨간 소독약에 사라졌다. 잠시 눈을 가렸을 뿐 어떤 치료로도 해결하지 못할 마음의 상처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수술이 시작됐다.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지방 하나 없는 배를 열었다.

답답한 숨이 터졌다.

얇디얇은 복벽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

복막과 췌장 상부를 덮고 있던 위, 대장, 소장 곳곳이 점상 출혈로 얼룩져 있었다. 교통사고나 낙상 같은 강한 외부 충격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소견이었다.

보호자는 사고 등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결국 둔기를 든 사람의 손에 의한 손상밖에 달리 생각할 요인이 없었다. 아니면 성인의 체중이 실린 발길질일 수도 있었다.

‘아이에게 죽을 수 있을 정도로 폭력을 가한 것이 틀림없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지? 계부, 계모라 해도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한시가 급했지만 집도의의 수술 소견만으로는 짐승인 부모의 억지를 잠재우기 힘들지도 몰랐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확실한 증거를 남겨야 했다.

“간호사 선생, 내가 말할 때마다 사진 찍읍시다. 송진우 선생, 손상 부위 잘 보이게 시야 확보해.”

찰칵! 찰칵!

장기를 만질 때마다 염증성 삼출액이 장갑을 적셨다. 여덟 살 아이의 배 속에 숨겨져 있던 고통과 두려움을 반드시 하나하나 남겨야 했다.

“늦었다. 시작하자. 켈리!”

췌장에 접근하기 위해 장기를 제쳤다.

연결 조직을 파고들던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워낙 큰 충격을 받아 CT 소견을 잠시 잊었다.

‘최소 이삼 일 전 췌장 두부와 몸통 사이가 깨졌다. 만일 두부에 너무 가깝거나 소화액 유출로 인한 췌장 조직 손상이 너무 심하면 휘플을 해야 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어리고 약한 몸으로 버틸 수 있을까?’

적절한 수술 시기를 이미 놓쳤다.

수술의 크기가 사망과 직결되는 상황이었다.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췌장 주변 박리를 시작했다.

주변 조직이 흐물흐물할 정도로 약했다.

소화액이 유출돼 조직이 녹은 것이다.

‘주변이 이 정도면 췌장은 얼마나 심할까?’

췌장 전면이 드러났다.

시뻘겋게 변한 부분을 찾았다.

숨이 턱 막혔다.

생각 이상으로 췌장이 녹았다.

이미 일부분은 혈관 손상으로 출혈이 발생한 상태였고, 췌장 조직 자체의 염증이 너무 심해 부분 절제가 가능한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절대 내원 직전 받은 손상이 아니었다.

추측대로 최소 이삼 일은 지났다.

아이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얼마나 아팠을까? 살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을까? 죽음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차라리 죽고 싶지 않았을까?’

단 일분일초만 늦어도 패혈증이 심각하게 악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쳐도 삶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표현하기 힘든 연민과 분노가 휘몰아쳤다.

수술 중에는 절대 느끼지 말아야 할 감정이었다.

주어진 시간이 없기에 더욱 서둘러야 했다.

한시가 급한 와중에 사진을 찍어 증거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은 차라리 자괴감에 가까웠다.

김지훈이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수술만 생각하자. 그래야 살릴 수 있다.’

신중하게 손상 부위를 확인했다.

휘플을 해야 할까?

아니면 몸통과 꼬리만 제거해도 될까?

“송진우 선생, 어떻게 생각해?”

“정상적으로 보이는 부분을 최대한 남긴다면 기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선생님, 무엇보다 휘플은 너무 위험합니다. 이미 패혈증까지 발생해 수술을 버티지 못할 겁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송진우의 의견이 최선인지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했다. 만약 염증으로 범벅된 췌장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절제 후 소화액 유출을 피할 수 없었다.

얼마나 남길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잘라야 할 면을 가늠했다.

애초 손상된 부위를 경계로 삼아 제거한다고 안전할 상황이 아니었다. 두부 쪽과 상당히 가까운 부분에서 새롭게 절제해야 했다.

솔직히 그 정도로 이미 염증으로 파괴된 췌장이 모두 제거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휘플은 그 이상으로 위험했다.

분명 아이가 견딜 수술이 아니었다.

‘이 정도 남길 수 있다면 진우 판단이 최선이다. 하지만 새로운 절제면의 염증이 심하다면? 불길한 생각은 하지 말자. 아이 상태를 감안하면 다른 방법이 없다.’

김지훈이 결단을 내렸다.

“췌장만 제거하자. 모스키토!”

기구를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췌장 박리를 시작했다.

아이의 장기는 유달리 작고 약했다.

어린 나이, 치명적으로 진행된 염증과 췌장 소화액 유출, 또는 영양실조에 가까워 보이는 육신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떤 이유든 극도의 주의가 필요했다.

“보비! 수처! 타이!”

작은 장기가 조금씩 떨어져 나왔다.

손상 부위에서 멀리 떨어진 꼬리 부분마저 난관의 연속이었다. 전체적으로 퍼진 염증으로 혈관마저 쉽게 끊어졌다. 한 방울의 피조차 아이의 생을 갉아먹는 것 같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꼬리 부분을 모두 박리했다.

후복막을 따라 몸통 뒷부분을 박리할 차례였다.

김지훈이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누가 집도의라 해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빠르게 제거하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갈수록 조직이 약했다. 아예 고름처럼 변한 부분까지 있어 박리는커녕 수처와 타이조차 힘들었다.

송진우의 극심한 긴장이 눈에 보였다.

“긴장 풀고 천천히 해.”

박리 내내 발생하는 출혈을 잡아 가며 마침내 애초 잘린 부분에서 몸통을 들어냈다. 악전고투였지만 상대적으로 쉬운 과정이었다.

진짜 어렵고 중요한 과정은 지금부터였다.

정상적으로 보이는 부분에서 절제를 해야 하건만 염증은 말할 것도 없었고, 총수담관 및 간과 연결된 혈관까지 인접한 부위였다.

과도하게 절제되면 췌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염증이 퍼진 부위를 미진하게 처리한다면 결코 아물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기적적으로 버텨 온 아이였기에 사소한 합병증이라도 발생한다면 위태로웠던 아이의 생이 허망하게 끝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미 몸통과 꼬리를 제거했기에 휘플도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 처했다. 무엇 하나 되돌릴 수 없어 그 어느 때보다 정확한 판단이 필요했다.

김지훈이 신중하게 새로운 절제 선을 그렸다.

“송진우 선생, 괜찮겠어?”

“이 정도 남기면 기능을 유지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절단면 일부에 손상을 받은 부위가 있더라도 더 이상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

“일단 자르고 판단하자. 모스키토! 보비!”

가느다란 모스키토의 끝이 췌장을 파고들었다.

김지훈이 얼굴을 펴지 못했다.

너무 약했다.

전체적으로 염증이 퍼졌다는 의미였다.

위험을 직감했지만 더 이상 췌장 두부 쪽에 붙여 자를 수 없었다. 무리하게 휘플을 시도하는 것과 마찬가지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물러설 곳이 없다. 더 이상 나빠지지만 마. 제발!’

췌장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긴장의 연속이었다.

김지훈의 이마에 땀이 흠뻑 맺혔다.

췌장을 자르는 내내 혈관과 소화관을 묶기 위한 단 한 바늘의 수처도 쉽게 할 수 없었다. 모든 신경을 오로지 눈과 손에만 쏟아부었다.

땀으로 젖은 송진우의 수술복이 어둡게 변했다.

타이를 할 때마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췌장이 부서질 것처럼 짓눌렸다. 이를 악물며 췌장을 파고드는 타이가 주는 극심한 압박을 이겨 내려 애썼다.

행여 방해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고경철은 아예 미동도 하지 못했다. 수술 부위에 흐르는 피를 닦기 위해 거즈를 댈 때마다 극도의 긴장에 휩싸였다.

“집중하자. 집중!”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중얼거리던 김지훈이 얼굴을 펴지 못했다. 점점 깊숙이 잘라 가건만 췌장 조직이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불안이 엄습했다.

이토록 확신이 없는 수술은 처음이었다.

애초 휘플을 하는 것이 맞았다는 생각이 사라지질 않았다. 수술 직후 아이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슴속을 꽉 메웠다.

불필요한 생각이었다.

분명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는 요인이 명백하게 발생하지 않는 한 최초의 판단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이 마땅했다.

수많은 경험이 말해 주고 있었다.

‘절대 잘못된 판단이 아니다. 휘플이 훨씬 더 위험했던 것이 분명해. 수술 후 절대 회복되지 못할 상태야. 스승님도 나와 같은 판단을 내리셨을 거다.’

수술 팀의 능력과 아이의 생명력을 믿어야 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됐을 부모의 폭력과 수없는 손상에도 살아남은 아이였다. 지금까지 버텨 온 강인한 생명력이라면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불안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수술 팀 모두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드디어 가장 치명적 구조물이 드러났다.

췌장 소화관이었다.

끊어지는 순간 가뜩이나 적게 남긴 췌장마저 보존할 길이 없었다. 모스키토 끝으로 췌장관을 잡아 가는 김지훈의 호흡이 턱턱 끊겼다.

이중 삼중으로 타이를 해야 하는 송진우가 극도의 긴장에 휩싸였다. 내쉬는 숨 하나하나가 고통스럽게 보일 지경이었다.

“타이! 컷!”

손상 없이 소화관을 묶었다.

“후우!”

순간 긴장이 풀린 송진우는 물론 김지훈도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제대로 아물지, 염증이 번져 녹아 터질지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었지만 수술 중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수술 팀의 경험과 능력을 믿을 뿐이었다.

‘끝이 보인다. 조금만 더 가자.’

췌장 하부를 잘라야 했다.

좁은 시야, 곳곳에 숨은 치명적인 구조물, 바늘조차 제대로 찌르지 못한 상황이 이어졌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됐지만 멈출 수 없었다.

마침내 마지막 수처와 타이가 끝났다.

췌장을 새로운 경계에서 절단했다.

벌겋게 피멍이 든 후복막이 모두 드러났다.

폭력이 아니라 살인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누구 소행이든 반드시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 부분도 사진 찍읍시다.”

찰칵! 찰칵!

김지훈이 잘라 낸 조각을 살폈다.

고름 덩어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흐물흐물 녹아내린 조직과 그나마 본래의 탄력을 유지한 조직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이제 수술 결과를 확인하는 일이 남았다.

새롭게 절제한 면의 양상에 따라 아이의 목숨이 좌우될 것이다. 말라 오는 입과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킨 김지훈이 매서운 눈으로 절제된 부분을 확인했다.

모든 순간 최선을 다해 처리했다.

기대한 것보다 깨끗했다.

천만다행이었다.

일부분에서 관찰되는 염증 소견에 불안이 가시지 않았지만 아이의 전신 상태만 호전시키면 제대로 아물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 이상 건드리면 역효과만 부를 뿐이었다.

자를 수 있는 췌장도 남지 않았다.

‘여전히 최악이지만 우리 판단이 맞다. 휘플을 했어도 몸통과 꼬리 부분의 염증이 심해 결국 연결부가 녹았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결과가 초래됐을 것이다.

김지훈이 곧바로 결정을 내렸다.

“마무리하자.”

소화액 유출에 대비하는 굵은 드레인 하나에 통상 사용하는 얇은 드레인 세 개를 넣었다. 작고 마른 아이의 배 속이 드레인으로 가득 찼다.

복부 봉합에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김지훈이 빠르게 배를 닫았다.

동시에 윤서연이 아이를 깨우기 시작했다.

“타이! 컷!”

모든 수술이 끝났다.

긴장은 여전했지만 급격한 피로가 다가왔다.

수술 팀 모두 맥이 탁 풀려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수술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던 것은 아닐까? 무사히 깨어나야 한다. 호성아! 힘내.’

김지훈의 얼굴이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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