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있는 환자에게 잘해야 없는 환자가 오는 법이었다. 살짝 솟은 흥분을 깎아 내린 김지훈이 안정을 취하고 있을 장풍연 환자부터 찾았다.
나직한 대화를 건네던 딸이 웃으며 일어났다.
“아버님은 어떠세요?”
“제 말 잘 들으시고, 고개까지 끄덕이시네요.”
고령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깨어나고 있었다. 약한 체력과 마취 시간이 주는 부담은 어쩔 수 없지만 복강경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더더욱 기분이 고조됐다.
여세를 몰아 무료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서도진과 이혁원을 호출했다. 오직 환자 때문에 얼굴 보는 일이 처음이라는 사실에 내심 입이 쓰긴 했다.
“서도진 선생, 환자 왔다. 가자.”
발걸음에 힘이 넘쳤다.
외과 병동과 똑같이 한산하기만 한 내과 병동을 지나면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서울 병원보다 더 바빠질 것이란 확신이 선 때문이었다.
서도진이 바짝 붙었다.
“과장님, 흥분하지 말고 말씀 잘하세요.”
“뭘?”
“괜히 겁줘서 환자 도망가면 어떻게 해요? 자신감을 갖고, 꼭 해야 하는 이유를 팍팍 과감하고 확실하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너나 잘해.”
“전 퍼스트고, 혁원이는 세컨입니다. 환자 잡을 자신 없으면 칼을 넘기셔도 좋고요.”
“자신 있어?”
“그러니까 말씀 잘하시라고 하는 거 아닙니까? 꼭 그렇게 찔러야 마음이 편하십니까? 혁원아,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겠다.”
“심했죠. 환자 없어서 정말 심했습니다.”
왠지 책임을 묻는 눈길로 보였다.
‘어라? 혁원이 너까지? 이거 완전 제이의 손일석이네. 말로는 당할 수가 없겠어. 어떻게 처리하지?’
평소 친분이 깊었던 데다 나름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던 서도진이었다. 게다가 호흡을 맞춰야 할 이혁원과 꿍짝이 정말 잘 맞는 것처럼 보였다. 불현듯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쑥덕거리던 서도훈과 송진우의 얼굴이 스쳤다.
‘이상하게 외로워지네.’
김지훈이 전혀 협박이 될 수 없건만 마치 수술에서 제외할 수도 있다는 것처럼 눈을 부라렸다. 이내 아무 효과도 없음을 직감하고 힘없이 스테이션을 가리켰다.
서열에서 밀리는 이혁원이 재빨리 차트와 검사 결과를 찾으려는 순간 서도진이 뜻밖의 말을 했다.
“과장님, 손일석 선생님 수술 팀도 부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환자는 한 명인데, 왜?”
“우리 병원 수술진이 이 정도로 많다는 인상을 주면 환자가 더욱 안심하지 않겠습니까?”
“도진이 니가 감이 죽었구나. 손일석이 어떤 써전인지 잊었어? 그러다 환자 뺏긴다.”
“그럴 수도 있지만 병옥이가 위아래를 모르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우선권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최악이라고 해도 집도의만 바뀌겠죠.”
‘나만 바뀐다고? 어후!’
과장 체면에 한 대 때려 줄 수도 없고, 말로는 정말 감당하기 쉽지 않은 후배였다. 손일석 팀으로 보냈어야 한다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러나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 없는 후배였고, 좋은 의견이라는 점은 더더욱 무시할 수 없었다.
“알아서 해.”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혁원아!”
연락을 하자마자 손일석, 강병옥, 나종진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한가함을 한탄하다 기회가 왔다며 부리나케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김지훈의 눈빛이 변했다.
‘어림없지.’
여섯 명의 써전이 전반적인 환자 상황을 검토했다. 크고 작은 낭종이 간 대부분을 갉아먹었고, 간 기능은 형편없이 떨어졌다. 모든 검사가 간 이식 이외에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하네. 암도 간염도 아닌데 이식이 필요하다니, 참 몹쓸 병이 많아.”
“최대한 빨리 해야 하는 상황이야. 환자와 보호자 간의 적합도 검사가 이미 진행된 상태니까 빠르면 다음 주 초반에 가능하겠어. 서도진 선생, 이혁원 선생, 확실하게 챙겨.”
“예, 과장님.”
손일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당히 아쉬워하면서도 수술에 대한 열망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강병옥과 나종진 역시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감정을 드러냈다.
과장의 여유가 필요했지만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행여 수술을 넘기려는 기색이라도 보이는 순간 서도진과 이혁원에게 어떤 일을 당할지 몰랐다.
김지훈이 눈길도 주지 않았다.
병실을 찾았다.
드디어 첫 간 이식 수술을 받을지도 모르는 환자를 만났다. 무기력한 환자와 초조해 보이는 보호자의 눈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진료의 기본은 환자의 말을 들어 주는 것이었다.
과장이 입 꾹 다물고 환자는 물론 보호자의 말까지 경청하자 아무도 끼어들지 못했다. 손일석은 도리어 마치 과장을 보좌하는 것처럼 곁을 지켰다.
으쓱거릴 일이 아니었다.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날 오후,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환자와의 대화가 긍정적으로 끝났다.
간 이식 이외에 대안이 없다는 최종 결론을 내렸고, 윤석진이 이미 상당 부분 검사를 진행한 상황이었다. 일주일가량 시간이 필요하지만 다른 변수가 없는 한 개원 후 첫 간 이식을 시행하게 될 것이다.
손일석과 함께 환자를 본 덕이 제법 컸다. 서도진의 말마따나 상당한 신뢰를 준 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병실을 나오자마자 돌변했다.
지금도 김지훈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양보해.”
“첫 수술이야.”
“난 빈둥빈둥 놀고 있는데 과장님은 이번 주만 세 건 하시죠? 세부 전공을 바꿔도 칼바람 날릴 거라고 말씀하신 걸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이러시면 안 됩니다.”
“곧 날릴 거야.”
“양치기 소년처럼 공수표 남발하면 그동안 힘들게 쌓아 온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질 겁니다. 좋은 말 할 때 웃으며 넘기세요, 과장님!”
으스스했다.
대꾸할 말이 없어 궁색한 표정을 짓는 찰나 구세주가 나타났다. 신현수와 이경석이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왔다.
김지훈이 반색했다.
“현수야, 좋은 일 있어?”
“간 이식 잡았다며? 나도 이준영 선생님과 간암 몇 건 예약했고, 경석이 형도 다음 주 수술까지 여러 건 잡았어. 서울 병원에 비할 수는 없지만 슬슬 병원이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 같지 않아?”
아! 눈치 없는 신현수!
손일석의 눈이 쫙 찢어졌다.
괴로움이 극에 달한 듯 고개를 숙인 채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와중에 김지훈을 노려보는 매서운 눈이 점점 더 살벌해졌다.
“나는 놀고 있는데 병원은 돌아간단 말이지? 없어도 된단 말이네. 친구란 놈들이 과장이라고, 이사라고 날 이렇게 소외시켜? 후우! 강호의 도의가 땅에 떨어졌어. 내가 굳이 아등바등 지킬 필요가 있을까?”
“일석아, 왜 그래?”
눈빛 풀리지 않았다.
김지훈이 급히 신현수와 이경석에게 눈짓을 하며 손일석의 주의를 돌릴 화제를 꺼냈다.
“그건 그렇고, 민정호 말이야.”
“민정호가 왜?”
수술 방 앞에서 나눴던 대화를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상세하게 말했다. 역시 하오문 문주를 자처할 정도로 공사가 다망한 손일석이 바로 반응을 보였다.
“김 과장, 사안의 중대성 때문에 잠시 옆으로 샌다만 내 말 잊지 마. 그건 그렇고, 결국 어떻게든 수입을 늘리겠다는 말이잖아. 적정 수준 내에서만 결정한다면 우리에게 불리할 일이 없다는 건 확실하니까…….”
“그래서?”
“이미 여러 차례 얘기했지만 민정호를 다시 봐야 할 것 같아. 조금 더 개방적인 태도가 필요하다고나 할까?”
“진상건과 한통속이 아니라고?”
“그게 문제야. 상황은 자꾸 그쪽으로 가는데, 왜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사라지질 않지? 결정적일 때 한 방 크게 먹을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그런가? 어후! 머리 아파. 그냥 소주 한잔하면서 마음을 열어 봐?”
이경석은 물론 펄쩍 뛰고도 남았을 신현수마저 안경을 닦으며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면이라도 엿본 것일까?
민정호의 동향에 대한 가장 정확한 판단은 돈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직원과의 관계가 어떤지도 알면 좋겠지만 의사 입장에서는 어느 쪽도 정확하게 알기 어려운 일이었다.
신현수가 눈가를 좁혔다.
“이제 이 주 조금 더 지나서 판단하기 힘들지만 모든 비용이 정확하게 집행되고 있어. 개원 전 장비 구입과 공사비를 절감해 확보했던 돈도 그대로 있고.”
“돈이야 한 번에 나갈 수 있지 않아? 너무 섣부르게 생각하지 마.”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딱히 병원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야. 어쨌든 긴 호흡으로 봐야 하는 상황인 건 확실해.”
가장 적대적이었던 신현수까지 한 발 물러섰다.
이경석이 나직한 헛기침을 터트렸다.
“며칠 전에 원장님하고 한 얘기가 있어. 의중을 떠볼 때마다 계약을 강조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고 말씀하시면서 너무 한쪽으로만 보지 말라고 하시더라.”
“천하의 원장님 판단이라! 진상건에게 그 수모를 당하고도 민정호는 믿어 보시겠단 말이죠? 이유가 있으실 거 아니에요? 다른 말씀은 없으셨어요?”
“사람 속을 누가 알겠냐고 하시긴 했는데, 그런 이유만은 아닌 것 같아.”
“하긴 이준영 선생님도 자주 면담을 하시는 것 같은데 별말씀이 없는 거 보면 두 양반의 생각이 우리와 확실히 다른 것 같긴 하네요. 이유가 뭘까? 왜 이렇게 촉이 무뎌졌지? 수술을 못해서 그런가?”
삼천포로 빠지든 말든 잠자코 듣기만 하던 김지훈이 돌연 머리를 톡 쳤다.
‘계약? 그래, 계약이었어!’
“현수야,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런데, 혹시 민정호가 철저한 원칙주의자 아닐까?”
“무슨 소리야?”
“입장이 곤란해도 계약을 이행한다는 소리 이외에는 어떤 말도 안 하잖아.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기 쉬워? 나 같으면 대충 둘러대는 게 훨씬 편할 것 같아.”
손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 김 과장 이론에 상당한 일리가 담겨 있네. 맞아. 약속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마치 죄라도 지은 것처럼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정신과 수업에서 배우지 않았나? 일종의 강박증이라고 말이야. 그런 사람이라면 계약에 목을 매지 않겠어?”
“아무리 미워도 애먼 사람 환자로 만들지는 말자.”
“말이 그렇다는 거야. 아니다. 머리부터 구두까지 옷매무새 흐트러진 거 한 번이라도 봤어? 일상생활에는 아무 지장도 없는 경증 환자일지 누가 알아?”
너무 나갔다.
그래도 건질 말은 있었다.
보통 사람은 절대 실천하지 못할 원칙주의자이든 아니든 정말 계약에 목을 맬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엉뚱한 추측이 맞는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만약 전문 병원 폐업이 계약이라면 한순간에 손도 쓰지 못할 정도로 병원 재정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민정호에겐 그런 능력이 있어 보였다.
결국 계약 내용이 관건이었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에휴! 계약 내용을 모르니까 온갖 생각을 다 모아도 돌고 돌아 항상 제자리네.”
“강박증을 빼면 소득이 없는 건 아니야. 원칙주의자란 말이 이상하게 머릿속에 남아. 그간 민정호가 보인 행동과 말 때문이겠지. 결국 우리에게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한 방향으로 움직일 거야.”
“강박증을 왜 빼?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열린 마음으로 바라봐야…….”
김지훈이 손을 휘휘 저었다.
“현수야, 예측하기 쉽다는 말이야?”
“개원 전부터 거의 한 달 반을 봤어도 어느 쪽인지 모르는데 쉽게 판단할 수 있겠어? 다만 우리에게 여유가 생긴 건 맞아. 민정호에 대한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당분간 진료에만 신경 써.”
사실 민정호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말 진상건과 다른 의도를 가졌는지 알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나올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경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가를 찌푸렸다.
“김 과장, 진료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응급실 환자가 너무 적어. 야간은 그렇다 쳐도 주간까지 영향을 줄 수밖에 없어. 전문 병원이란 사실에 너무 매달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과 쪽 환자야 어느 정도 볼 수 있지만 외상 환자는 한계가 명확하잖아요. 정형외과하고 신경외과가 없는데 다른 환자를 어떻게 받아요?”
“다른 과 영역이 겹쳐도 응급처치 정도는 가능하잖아? 전문 분야를 너무 강조하면 아뻬도 안 올 거야. 일단 병원을 알려야 환자가 오지 않겠어?”
슬슬 늘고 있다지만 내원 환자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현실이었다. 융통성 있는 운영이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동의했지만 전문 병원의 색채를 옅게 할 위험이 있었다.
어정쩡한 병원!
가장 경계해야 할 문제였다.
섣불리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오는 환자야 어쩔 수 없지만 대학 병원 응급실처럼 활성화시키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너무 커요. 초반인 만큼 조금 더 지켜보죠.”
“과장 생각이 그렇다면야.”
돌연 손일석이 김지훈을 째려보았다.
이글이글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쩝! 환자가 있어야 신경을 쓰지. 김 과장, 현수 말을 현실로 바꿀 능력이 있는 사람은 오직 김 과장뿐이라는 사실 잘 알고 있지? 내가 써전임을 망각하지 않게 해 줘.”
어느 틈엔가 진료에만 신경 쓰라는 신현수 말에 돌아가 있었다. 다들 손일석의 상황이 얼마나 답답할지 잘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뿐이었다.
“일석아, 노력할게.”
“김 과장님, 힘쓸 일 없길 바랍니다.”
지속적이면서도 노골적인 협박을 받으며 자리를 끝내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응급실이었다.
누가 당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