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김지훈이 화들짝 놀랐다.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왜 그래?”
“엄청 큰일이 있었지. 내가 짜증이 안 나게 생겼냐? 일주일 동안 환자 그림자도 못 봤어. 임시 개원은 개뿔, 내 이 방정맞은 입이 죄지. 간 이식 파트에만 소속된 것이 이런 부작용을 가져올지 정말 몰랐다.”
“한가할 때 간 이식에 대해 공부하면 좋잖아.”
“김 과장님,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는지 책이 너덜너덜합니다. 제길! 한가한 것도 정도가 있지. 원장님하고 나하고 손에 곰팡이가 필 지경이야. 봐. 손이 까맣지? 이거, 이거 녹까지 슬었네.”
투석을 시행하지 않는 관계로 다른 병원의 의뢰가 없는 한 혈관 수술이 있을 수 없었다. 손일석도 각오한 일이지만 뛰어난 써전을 지난 일주일 내내 백수로 만들다니 미안한 일임은 분명했다.
“곧 바빠질 거야. 투석하는 병원이 여럿 보이던데 혈관 수술 의뢰도 들어오지 않겠어?”
“기타 분야를 만든 것 자체가 형식적이라는 건 원장님도 나도 잘 알고 있어. 내가 투덜거린다고 처음 결정을 잊지는 마라. 하도 심심해서 한 말이야.”
김지훈이 눈가를 비볐다.
애초 고심을 거듭한 끝에 혈관 수술은 시행하지 않기로 했다. 전문 병원 설립 취지에 크게 벗어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특정 분야에 집중하는 것이 이렇게 여러 문제를 만들지 몰랐다.
‘미안하다.’
“그래도 두고 본다. 내 마음속 기준을 넘지 못하면 바로 떠날지도 모르니까 긴장 타야 할 거야. 그나저나 난 개업식에서 빠지면 안 될까?”
“개원식이다.”
“개원은 개뿔, 나한텐 그냥 개업식이야. 마음도 안 좋은데 진상건까지 보고 싶지 않아.”
“나도 그래. 하지만 우리 병원 주력이 빠지면 빛이 나겠어? 넌 꼭 참석해야 돼. 아버님도 봬야지.”
“야! 진퇴양난이네. 하긴 진상건 때문에 내가 피하는 것도 우습다. 무릇 대장부라 함은…….”
“너 아직도 무협 소설 그런 거 읽어?”
“내 취미 생활이야, 인마. 일도 없어 죽겠는데 어디서 시비야? 과장이고 뭐고 확!”
째려보다 말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불평불만을 들어 준 후에야 함께 개원식이 열리는 장소로 향할 수 있었다. 과장으로서 외부 인사에게 인사를 해야 해 서둘러 움직였다.
송재덕 교수와 이준영 교수를 중심으로 개원식에 참석하는 이들을 한 명 한 명 반갑게 맞이했다. 시간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시작 전부터 시끌벅적했다.
김지훈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이사 직분을 갖고 있는 신현수는 물론 손일석까지 스윽 주변을 둘러보며 눈가를 찌푸렸다.
“민정호가 주관한다고 할 때부터 무슨 짓을 할지 내가 딱 알아봤어. 다 우리 병원 직원이고, 외부 인사는 한 다섯 명이나 되는 거야, 뭐야?”
잘못 센 것이 아니었다.
주요 인사는 진상건, 김병오 이사, 최만철 이사에 산하 병원 원장 세 명이 다였다. 진짜 외부 인사라 할 수 있는 사람은 불과 다섯 명 정도 보였다.
성대한 개원식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홍보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 때마침 귀빈들과 인사를 마친 민정호가 다가왔다.
손일석이 노골적으로 항의했다.
“민 행정 부원장님, 간 이식은 다른 병원의 협조가 가장 필요한데 고작 다섯 명이라니 너무한 거 아닙니까? 병원 망하는 꼴 보고 싶다는 티 상당히 내십니다.”
“사람 많아야 예산만 많이 듭니다. 정 불만스러우면 손 교수님께서 솔선수범해 개원 일주년 기념식은 성대하게 치를 수 있게 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예산이 문제면 직원들도 참가하지 말라고 하시지 그랬습니까?”
“우리 직원에겐 자신의 일이고, 이왕 돈 쓸 거면 일하는 사람에게 써야죠. 인당 가격이 꽤 비싼 뷔페니까 많이 드십시오.”
“아침부터 굶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얼마나 비싼 밥인지 볼까? 캐비어는 있나?”
“러시아도 아니고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손일석과 말발이 비등한 사람도 처음 봤다. 그보다 서로 긴밀하게 협조해야 할 사람들이 반목하는 모습, 내심 김지훈 자신도 손일석과 같은 마음이라는 사실에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과장이다.
웃어야 했다.
하늘이 돕는지 진짜 웃을 일이 생겼다.
장인어른이자 하늘같은 선배인 고성문이 왔다.
김지훈이 미처 한 발 내딛기도 전에 손일석이 번개처럼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버님, 길도 먼데 뭘 일부러 오셨습니까? 이쪽 길이 많이 밀릴 텐데 오시는 동안 힘들지 않으셨고요?”
고경아까지 달려왔다.
넙죽 인사하는 사위 두 명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던 고성문이 딸자식을 보자마자 만면에 즐거운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 간호 과장님 오셨네. 힘들지 않아?”
“전 괜찮아요. 커피라도 한 잔 드릴까요?”
“괜찮아. 얼굴 보니 좋다. 바쁜 건 알지만 자주 와. 엄마가 서운해하잖아. 손 교수, 자네 얼굴도 좋네. 김 과장, 자네도 잘 있었지? 힘들지 않아?”
“생각보다 환자가 없어 조금 갑갑하긴 합니다.”
“옛날에 병원 없을 때나 개업했다고 몰려왔지, 지금은 개업발이라는 게 없으니까 걱정 마. 평소 하던 대로 열심히 하면 환자들이 알아서 올 거야.”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장인이었다.
진상건 때문에 답답했던 가슴이 편안해졌다.
원장이라 해도 죽을 때까지 고성문의 후배인 송재덕 교수와 이준영 교수가 다가왔다.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이 자리에 꼭 있어 주었으면 하는 범접하지 못할 스승이 생각났다.
“아버님, 혹시 큰 스승님은…….”
“나이가 있으시잖아. 굳이 오시겠다는 걸 억지로 말리느라 힘들었다. 자네를 보고 싶어 하시니까 일간 찾아봬.”
“알겠습니다.”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호랑이라 불렸던 사람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간 문안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착잡했다.
‘큰 스승님, 죄송합니다. 비록 오늘 뵙지 못했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올 사람은 거의 다 왔다.
시간을 미룰 수도 없었다.
민정호의 사회 속에 개원식이 시작됐다.
타 병원에서 온 귀빈, 신임 서울 병원 원장, 전문 병원 원장인 송재덕 교수가 차례차례 축사를 했다. 게임 속 끝판 왕처럼 진상건이 마지막을 장식했다.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공염불에 불과했다.
이어진 식사 자리에서 호탕하게 웃으며 송재덕 교수와 이준영 교수를 대하는 모습은 실로 가증스러울 지경이었다. 심지어 신현수를 직접 찾아 격려까지 했다.
‘철면피네, 철면피.’
눈치가 좋을 리 없었다.
진상건도 내심 불편한지 일찍 자리를 떴다.
김병오 이사와 민정호가 뒤를 따랐다.
김지훈은 상관하지 않았다.
덕분에 남은 시간 편안하게 식사하며 처음 보는 직원들과도 안면을 텄다. 물론 과장인 까닭에 귀빈들과 인사를 나눠야 했지만 오래 머물 자리는 아니었다.
편한 사람이 최고였다.
“고경아 선생님, 희연이는 어떻게?”
“경희가 봐준다고 했어요.”
“다행이네요. 처제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저녁 사기로 했어요.”
“당연히 사야죠.”
언제 또 있을지 모르는 자리였다.
김지훈이 부지런히 옮겨 다녔다.
그때 정말 반가운 얼굴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훈철 형님!”
“아이고! 늦는 줄 알았네.”
“웬일이세요?”
“못 올 데 온 것처럼 뭘 그렇게 정색을 해. 서운해지려고 한다. 김 교수하고 우리 제수씨 과장 된 거 축하하고, 교수님들과 아우님들 얼굴 보러 왔어.”
송재덕 교수와 이준영 교수도 무척 반가워했다.
이경석과 손일석은 물론 최만철 이사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던 신현수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이사장인 진상건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환대였다.
반가운 사람은 진정으로 대접해야 하는 법이다.
누구도 홍보에 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 시간.
진상건과 김병오 이사가 아주 즐겁게 웃고 있었다.
“민 원장, 이게 첫 주 실적이라고?”
“그렇습니다.”
“이거 뭐, 완전히 바닥을 쳤네. 이 추세로 가면 월 적자가 얼마나 될 것 같아?”
“이 추세면 계산할 이유도 없습니다. 오륙 개월 내에 폐원을 논의해야 할 겁니다.”
“하하하! 좋아. 환자가 안 늘 수는 없으니까, 전에 말한 대로 초장에 비용을 팍팍 늘려. 인허가부터 어렵게 설립한 병원인데 신현수가 많이 아쉬워하겠어. 인테리어 다시 하려면 얼마나 들까?”
“제 소관이 아닙니다.”
진상건이 민정호의 어깨를 쳤다.
“성공 보수만이 아니라 목돈 만질 기회까지 줄 수 있으니까 계약만 제대로 이행해.”
“알겠습니다.”
“말로 끝이야? 계약서 쓰자는 말은 안 해?”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추진하면 머리만 복잡해집니다. 이사장님과 맺은 계약에 집중할 뿐입니다.”
“몇 배나 큰 회사도 시원하게 날린 사람이 할 소리가 아니지. 정 원하지 않으면 나야 좋고. 그럼 믿고 간다. 다음 달에 실적 바로 보내.”
진상건이 실실 웃었다.
‘누구보다 돈맛을 잘 아는 놈이 웬일이지? 어쨌든 너만큼 계약에 목을 매는 놈도 없으니까 당분간 서울 병원 정리에 전념해도 되겠어.’
이것도 신뢰라면 신뢰였다.
다만 오로지 돈을 믿을 뿐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홀로 남은 민정호가 서류 하나를 꺼냈다.
이번 주 실적에 이어 다음 주 예정된 수술과 외래 예약 현황 표였다. 이에 따른 예상 수입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한참 부족해도 확실히 달라지는데……. 비용이라!’
왜 진상건에게 말을 안 했을까?
비용을 크게 늘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걸까?
개원식이 끝났다.
“아버님, 주무시고 가시죠.”
“희연이하고 우리 딸들 저녁 먹이고 가야 돼.”
“일이 있으십니까?”
“나 바쁜 사람이야. 손 교수, 지금은 힘들겠지만 잘 선택한 것 같다. 신 교수가 무척 아쉬워하면서도 갈 길 간 거라고 하더라. 그나저나 한가하긴 하네.”
화기애애하게 모든 행사가 끝날 때까지 응급실은 조용하고 편안했다. 덕분에 가족과 식사하는 내내 단 한 번도 방해받지 않았다.
과장 자리가 주는 중압감이 대단했다.
‘환자가 있을까? 겸사겸사 가 보자.’
일요일 오전, 뒹굴뒹굴 구르며 방바닥 청소를 하던 김지훈이 고경아의 허락을 받고 집을 나섰다.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응급실 안으로 살짝 고개를 들이밀었다.
띄엄띄엄이라도 꾸준히 환자가 오면 좋으련만 절간처럼 조용한 가운데 수액 맞는 환자 두 명만 보였다. 급박함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간호사들도 무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일석이가 주말 당직이잖아. 그나마 일복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아예 기를 못 피네. 에휴! 겸사겸사 수술 준비한다고 나와서 괜히 마음만 더 심란해졌네.’
그때 희미하지만 아주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왜애애애앵!
사이렌 소리였다.
후다닥 정문 쪽으로 나간 김지훈이 길게 고개를 뺐다. 조그만 소리가 점점 커져 마침내 귓가에서 왕왕 울렸다. 119 구급대 차량이 두 대나 도착했고, 피투성이가 된 환자를 곧바로 응급실로 옮겼다.
비상이다.
119 대원이면 전문 병원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얼마나 급하면 무작정 환자를 이송했을까? 치료 역량을 떠나 대학 병원 산하라는 사실을 믿는지도 몰랐다.
“교통사고 환자입니다.”
간호사들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원무과는 전문 병원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응급 환자 치료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환자 상태가 한눈에도 위중해 보였다.
김지훈이 겉옷을 벗으며 소리쳤다.
“응급 처치부터 하고 결정합시다.”
바이탈을 측정했다.
동시에 수액을 달아 혈관을 확보했다.
김지훈이 빠르게 환자 상태를 확인했다.
환자 한 명이 특히 위급했다.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호흡마저 불규칙했다. 한쪽 눈동자가 심하게 확장된 채로 동공반사까지 관찰되지 않았다.
‘브레인(Brain:뇌)이다.’
두개골을 촉진했다.
우걱우걱 골절이 의심됐다.
CT를 찍어야 정확히 판단할 수 있겠지만 두개골 골절이 동반된 뇌출혈이 강력하게 의심됐다. 신경외과 전문의가 없는 이상 수술이 불가능했고, 검사 자체가 무의미했다. CT라도 찍는다고 시간을 끌었다간 오히려 환자의 목숨만 위협할 뿐이었다.
“기관 내 삽관 준비하고, 만니톨(수액의 일종) 달아요. 흉부 사진 확인 후 폴리(Foley:소변줄)까지 끼우고 바로 이송합시다.”
그때 고경철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환자 한 명이 더 있었다.
인턴 때 배운 지식이 전부이겠지만 뇌손상 환자 처치를 가르칠 여유가 없었다. 지금 일반외과 의사로서 해야 하는 일은 바이탈을 잡아 어떻게든 수술이 가능한 병원에 살아서 도착하게 하는 것뿐이었다.
“고경철 선생, 다른 환자 봐.”
김지훈이 직접 기관 내 삽관을 했다.
포터블(Portable:이동식 방사선 촬영 장치)로 찍은 흉부 사진을 확인한 결과 폐 손상은 없었다. 혈압이 불안정했지만 다행히 복강 내 출혈은 의심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처치는 다 했다.
“빨리 이송합시다.”
마침 손일석이 도착했다.
힐끗 눈길을 준 후 바로 고경철이 보는 환자에게 달려갔다. 믿고도 남을 써전의 등장에 한숨 돌리려는 순간 원무과가 꽤나 시끄러웠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