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외래 앞 복도에 사람 그림자가 슬슬 늘기 시작했다. 수술한 환자들의 급작스러운 내원과 불가피한 환자를 받기 위한 응급실도 차츰 의료진의 휴식을 뺏기 시작했다.
다만 김지훈은 살짝 비켜서 있는 상태였다.
파트 특성상 빠르게 환자가 늘 수 없는 데다 진료일이 이틀에 불과한 탓이었다.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덕분에 첫 환자인 장풍연 환자에게 더욱 철저한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다. 아울러 한가함이 주는 불안과 쌓이는 체력이 전투력까지 증가시켰다.
‘와라! 오라! 온다, 온다.’
외래가 아예 없을 리 없었다.
수술 방을 외로운 하이에나처럼 기웃거리다 간호사에게 연락을 받고 후다닥 달려 나온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임시 개원인 상황이라 예약을 하지 못한 탓인지 무려 세 명이나 동시에 대기하고 있었다.
담낭 및 담도 내 담석을 진단받은 환자가 두 명이었다. 파트 경계가 애매모호했지만 간 염증과 췌장염이 유발될 수 있어 진료하기로 결정했다. 남은 환자는 담낭에 국한된 담석이라 급히 신현수에게 연락해 담당의를 바꿨다.
“담도에 돌이 있는 경우 간 내에도 돌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황에 맞춰 복강경 내지는 배를 열어 돌을 제거해야 합니다. 필요한 검사도 많고요.”
환자 모두 상세한 설명을 들은 후 수술에 동의했다. 담도 담석은 가급적 빠른 수술이 원칙이었고, 역시 한가한 상황 덕분에 제때에 검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다음 주로 일정을 잡았다.
‘이렇게 되면 월, 수, 금 모두 수술을 하네.’
절로 웃음이 터졌다.
서울 병원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지만 절로 어깨춤을 출 정도로 즐거웠다. 궤도에 오를 조짐에서 강한 희망을 엿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날 오후, 과장이 어떤 자리인지 또 한 번 절감했다. 유일한 전공의 고경철이 수술 스케줄을 들고 와 금요일 수술 일정을 보고한 것이다.
“이경석 선생님 앞으로 원 포트 두 건, 신현수 선생님 앞으로 라파로 한 건 예정입니다.”
집도의와 퍼스트를 확인했다.
‘결국 도훈이가 빠졌네. 다음 주에 세 건이나 있으니까 갈증을 풀 수 있을 거야.’
“원칙대로 수술 순서 정했지?”
“예. 78세 고령 환자가 첫 번째 수술입니다.”
“고경철, 네가 치프나 마찬가지니까 스케줄은 물론 주말 집담회까지 잘 준비해.”
“이번 주에도 합니까?”
김지훈의 눈빛이 으스스해졌다.
“예외는 없어. 준비 확실하게 해.”
“예, 알겠습니다.”
스케줄을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의자를 살짝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준 김지훈의 입이 쫙 찢어졌다. 형식에 불과할지라도 과장으로서 다음 날 수술 일정을 최종 결정했다.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짜릿한 즐거움이었다.
그뿐인가?
환자가 없어 그렇지 매일 외래 진료 결산을 확인할 권한이 있었다. 어떤 환자가 주로 내원하는지, 수술할 케이스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도 남았다.
‘즐거운 일이 정말 많네. 하하하!’
한가한 병원은 환자에게도 유리한 면이 많았다.
장풍연 환자의 검사가 빠르게 진행됐다. 내시경을 이용한 담도 촬영이 상당히 힘들었겠지만 이틀 만에 거의 모든 검사를 끝내는 편이 훨씬 편할 것이다.
딸과 사위도 의사가 바라는 보호자였다.
아버지이자 장인어른인 고령의 환자를 결코 의료진에게만 맡기지 않았다.
“선생님, 결과는 언제 들을 수 있을까요?”
“내일 오후, 최종 검토 후 수술 팀까지 결정할 생각입니다. 토요일 오전에 결정 말씀드리고,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다음 주 월요일에 수술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우리가 준비해야 할 일은 없습니까?”
“우리에게 맡겨 주십시오.”
힘이 나는 시간이었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었다. 담도암에 걸린 고령의 환자가 주는 부담감 이상이었다.
‘도진이, 도훈이와 오래간만에 손을 맞춰 보겠네. 워낙 실력이 좋았는데 지금은 얼마나 발전했을까?’
은근한 기대에 가벼운 흥분이 다가왔다.
‘언제든 오기만 하면 확실하게 치료한다.’
당연히 일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도 엄청 늘었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기에 고경아와 보다 많은 대화를 나누고, 희연이를 최대한 아빠의 품에 안았다.
행복은 미룬다고 쌓이지 않는다.
지금 반드시 즐겨야 할 행복이었다.
다음 날.
세 건의 수술이 차례로 시행됐다.
김지훈이 단 하나의 수술도 없는 현실을 십분 활용했다. 참관 명목으로 수술실에 들어가 모든 수술을 함께했다. 수술 방 간호사들의 준비와 마무리는 물론 윤서연과 마취과 상황까지 논의했다.
“우리 마취과 간호사들은 다 뛰어나. 이 정도면 당장 메이저 수술을 해도 무리 없겠어.”
“수술 방도 원활하게 돌아가서 정말 다행이다.”
사소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까닭에 임시 개원을 했다. 정식 개원이 불과 사흘 후였지만 충분히 개선하고도 남았다.
수술이 모두 끝난 후 이유 모를 아쉬움에 입맛만 다시던 김지훈이 외래를 들렀다 만면에 미소를 금치 못했다.
이준영 교수가 확실한 변화에 쐐기를 박았다.
대가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단 하루 동안 간암 환자가 무려 세 명이나 내원했다. 모두 수술받기를 원해 덩달아 수술 전 각종 검사를 담당하는 내과와 방사선과까지 바빠졌다. 물론 외래 진료의 핵심인 내과 환자도 슬슬 늘어나고 있었다.
‘역시 스승님이시다!’
기분 좋은 하루였다.
이제 장풍연 환자 수술 계획만 점검하면 하루 일과가 끝난다. 담도암이라지만 간 이식을 핵심으로 설립된 병원이었다. 앞날을 위해 간단하게나마 수술 팀은 물론 각 과의 의견을 수렴하고, 함께 논의하는 것이 마땅했다.
회의를 앞둔 김지훈이 컴퓨터 앞에 앉았다.
클릭! 클릭!
검사 결과가 화면에 떴다.
‘참 편리하네.’
찬찬히 결과를 확인하다 말고 눈가를 좁혔다.
종양은 확실한데 악성 여부가 애매모호했다.
‘이거 병변 양상이 묘하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신중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은데…….’
더욱 함께 논의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서울 병원에서는 늦은 오후에나 시작했지만 한가한 병원 덕에 일찍 모였다. 수술 팀인 서도훈, 송진우와 내과 과장 윤석진, 방사선과 과장 조진형까지 모두 참석했다.
송진우가 검사 결과를 취합 발표했다.
방사선과는 물론 내과 소견도 김지훈의 판단과 같았다. 담도의 종양은 확실하게 존재하는데 종물은 물론 주변이 너무 깨끗했다.
“조진형 선생, 악성으로 보여?”
“대단히 희귀한 케이스 같네. 양성 종양을 배제할 수가 없겠어. 임파선 비대가 안 보이고, ERCP에서도 담도 내부가 너무 깨끗하게 보이잖아.”
“윤석진 선생은 어떻게 판단해?”
“나도 같은 생각이야. 하지만 제거 이외에는 답이 없잖아. 이런 경우에도 휘플을 해야 하지 않나?”
김지훈이 서도훈을 보았다.
“서도훈 선생, 어떻게 생각해?”
“종양이 발생한 담도를 제거한 후, 조직 검사를 시행해 양성이 확실하다면 담도 일부를 자르고 공장을 연결해 주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종양 발생 위치상 담낭도 같이 제거해야 합니다.”
“접근 방법은?”
“라파로로 해야죠.”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집도의는 분명 김지훈이고, 서도훈은 물론 어떤 써전도 시행하지 못했을 수술법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자신만만하네.’
“가능할까?”
“이미 췌장공장 문합술을 시행하셨습니다. 그에 비하면 난이도는 비등해도 위험도는 한결 적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환자에게도 최선이고요.”
“제 생각도 서도훈 선생님과 동일합니다. 라파로로 시행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고 봅니다. 최악의 경우 개복으로 전환한다고 해도 위험도가 증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야! 정말 좋은 생각이야. 아무리 양성이라지만 누가 담도 종양을 라파로로 수술할 생각을 하겠어? 내가 이런 과감성 때문에 합류했다니까. 다른 병원에서는 엄두도 못 내지 않겠어?”
송진우에 윤석진까지 가세했다.
집도의의 의견을 듣기도 전에 수술 방법이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동안 논의를 지속했지만 수술 팀의 판단은 확고했다.
도전과 성취, 환자에 대한 고려, 자유로운 의견 개진까지 내심 김지훈이 바라 마지않던 일이었다.
뜸 들일 일이 아니었다.
“오케이! 라파로로 합시다. 더 이상 논의할 사항이 없으면 수술 팀만 남고 모두 퇴근하시죠.”
“다들 수고하세요.”
할 말 다 한 윤석진과 조진형이 재빨리 사라졌다. 서울 병원에서는 꿈도 못 꿀 여유를 하루라도 더 누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곧바로 수술 테이프를 꺼냈다.
“췌장공장 문합술을 찍은 테이프야. 퍼스트건 세컨이건 확실하게 숙지해. 그보다 먼저 퍼스트를 정해야겠지? 서도훈 선생, 설 수 있겠어?”
서도훈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회의 전에 이미 라파로로 결정하고 오셨네. 매 수술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준비해야겠다.’
“가능합니다.”
써전 스스로의 판단이었다.
김지훈도 서도훈의 실력이 어떤지 이미 파악하고 있는 만큼 존중해야 마땅했다. 송진우의 아쉬운 얼굴을 뒤로하고 바로 결정을 내렸다.
“좋아. 퍼스트 서.”
“감사합니다.”
예상외로 모든 사안이 빠르게 결정됐다.
비록 단 한 번의 경험에 근거했지만 절대 자만이 아니었다. 수술 팀 모두 수없이 테이프를 돌려 보며 최선을 다할 것이다.
‘원하는 만큼 환자가 오진 않았지만 한 주의 시작이 정말 좋다. 내일 개원식도 웃으며 치를 수 있겠어.’
퇴근하는 김지훈의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신경 쓰지 말자. 오직 우리 병원만 생각하자.’
머릿속에서 단 하나의 사실을 지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음 날, 장풍연 환자의 보호자를 만났다.
수술 팀의 결정을 알리자 깜짝 놀랐다.
“악성이 아닐 수도 있다고요?”
“예. 가능성이 높습니다.”
“복강경으로 하신다고요?”
“수술 중 조직 검사를 시행해 양성이 확실하면 복강경으로 계속 진행할 생각입니다. 다만, 저도 경험이 없기 때문에 실패 확률이 적지 않다는 점 양해해 주십시오.”
솔직한 말에 보호자들이 주춤거렸다.
“처음이란 말씀이신데, 다른 병원도 마찬가지입니까?”
“제가 알기로 담도와 소장을 연결하는 수술을 복강경으로 시행한 보고는 없습니다. 사실 췌장과 연결하는 수술은 이미 해 봤고, 담도와의 연결이 처음이란 말입니다.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김지훈이 그림을 그려 가며 어떤 식으로 수술할지 설명했다.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겠지만 조그만 구멍 세 개를 통해 수술한다는 말에 무척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배를 열게 되면 상처가 얼마나 큰가요?”
“최소 명치부터 배꼽 상방까지 열어야 합니다. 당연히 회복 시간이 오래 걸리고, 통증도 상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수술과 마취 자체가 내포한 위험성에 몇 가지 의문을 물은 보호자들이 곧바로 수술에 동의했다.
잠시 후 개원식이 있어 자리를 끝내려는 순간 딸이 뜻밖의 말을 했다.
“선생님, 아빠 수술이 잘 끝나 완전히 회복되시면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담석 환자가 바로 저예요.”
무슨 말을 할지 빤했다.
내심 욕심이 났지만 과장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을 깰 수는 없었다.
“아! 증상이 없다는 분이 바로 따님이셨군요. 그런데 무슨 부탁을 하시려고요?”
“선생님께 수술을 받을 수 있을까요?”
“죄송하지만 곤란합니다. 담석증을 전문적으로 수술하시는 선생님이 계십니다. 배를 한곳만 뚫고요.”
“선생님께 받고 싶은데요.”
“말씀 감사합니다만, 저는 물론 제 가족이 아플 때 믿고 맡길 수 있는 선생님입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이경석 선생님께 진료받으세요. 가급적 미리 예약을 하셔야 원하는 날에 수술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보호자가 봐도 한가한 병원인데?
다른 집도의를 권하는 것까지 보호자에겐 다소 의외의 말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도리어 신뢰가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더구나 내 말대로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듯 김지훈이 자신만만한 미소까지 머금었다.
“알겠습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자리를 끝낸 김지훈이 시계를 보았다.
개원식까지 한 시간 남았다.
깨끗한 가운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마음을 다잡았다. 식후 간단한 식사까지 대략 두 시간 정도 걸릴 예정이었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진상건을 또 봐야 한다는 사실에 치솟는 짜증을 조절해야 했다.
‘그래도 손님맞이는 해야지.’
똑! 똑! 똑!
‘이 시간에 누구지?’
“들어오세요.”
손일석이었다.
온 얼굴에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