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담도암이 강력하게 의심된다는 소견이었다.
불행히도 보호자의 바람과 달리 아직까지 복강경으로 시도할 수 없는 질환이었다. 십중팔구 암이 맞을 테고, 초기 여부를 떠나 배를 크게 열어야 하는 휘플이 필요했다.
순간 맥이 빠졌지만 환자 앞이었다.
그것도 고령이었다.
섣불리 질환과 치료 방법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반면 환자와 보호자가 어떤 선택을 하든 복강경 수술 가능 여부는 반드시 알려야 했다.
“일단 정확한 진단을 위해 정밀 검사를 다시 해야 합니다. 임시 진단명이 나온다 해도 최종 확인은 조직 검사로만 가능합니다만, 무엇보다 복강경은 불가능합니다. 죄송하지만 부위가 너무 안 좋네요.”
“배를 크게 열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알고 계셔야 합니다.”
딸과 사위가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복강경으로 가능하길 무척 기대한 모양이었다.
어디까지나 결정은 환자와 보호자의 몫이었다.
김지훈이 차분하게 필요한 검사와 가능한 일정을 설명한 후 보호자를 따로 만났다. 솔직하게 휘플이란 큰 수술이 필요하고, 고령에 따른 위험까지 모두 말했다.
“크기가 크지 않다고 해서 내심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암은 암이군요.”
“담도와 췌장 쪽 질환은 저희도 항상 힘들고 어려운 병입니다. 수술도 가장 위험하면서 까다롭고요.”
딸이 물었다.
“얼마나 사실 수 있을까요?”
“초기라고 해도 예후가 기대만큼 좋지 않습니다. 항암 치료 역시 큰 효과가 없습니다. 하지만 수술은 꼭 받으셔야 합니다.”
“오래 사시지도 못하고, 수술 자체가 위험하다면서요? 가뜩이나 몸이 약해졌는데 도리어 더 빨리 돌아가시는 건 아닌가요?”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예후는 확률에 불과합니다.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말이지, 모든 환자가 오래 살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고생만 하시는 것은 원치 않아요.”
“반드시 수술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종양을 제거하지 못하면 결국 담도를 막아 간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통증을 견디기 힘듭니다. 마약성 진통제로도 해결되지 않는 고통이죠. 얼마나 오래 사시는지도 중요하지만, 삶의 질이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더구나 이 상태에서 체력까지 더 떨어진다면 수술 후 결과도 좋지 않습니다.”
보호자들이 입술을 깨물었다.
비관적인 말뿐이었다.
사는 지역이 달라 접근성마저 없는 병원임에도 복강경 수술을 기대하며 일부러 찾은 곳이었다. 무엇보다 김지훈을 찾은 의미 자체가 없어졌다.
실망이 이만저만 아닐 것이다.
“다른 병원에서 수술받아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선생님 말씀보다 더 나빠지지는 않겠죠?”
각오한 일이었다.
환자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라 해도 억지로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제 휘플만이 답이고, 노련한 의사가 집도한다면 결과의 차이가 있을 리 없었다.
욕심 부릴 일이 아니었다.
“맞습니다. 지금 상태에서는 수술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대학 병원이라면 어디든 아버님을 수술할 수 있습니다.”
“남편과 상의한 후 말씀드려도 될까요?”
“당연히 그러셔야죠.”
김지훈이 안절부절 가만히 있질 못했다.
책상을 두드리며 다리까지 달달 떨었다.
결정을 기다리는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처지만 다를 뿐 당사자인 환자나 보호자의 마음은 더욱 복잡할 것이다.
‘이렇게 한산하면 병원을 도리어 불신할 텐데 어떻게든 잡았어야 했나?’
진료실 앞 복도가 얼마나 조용한지 보호자들이 여기저기 전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병원 과장, 혹은 김지훈도 잘 알고 있는 의사 이름이 거론됐다.
하나같이 쟁쟁한 의사들이었다.
김지훈이 쓴 입맛을 다셨다.
다른 병원으로 갈 생각이 분명했다.
‘라파로가 아니면 나보다 경험과 실력 모든 면에서 훨씬 뛰어난 선생님들이네. 뭐 하는 사람인데 선생님들을 저렇게 많이 알지? 쩝! 첫 환자부터 놓쳐야 하나?’
시간이 꽤 흘렀다.
점심시간이 다 돼서야 김지훈을 찾았다.
“결정하셨습니까?”
“선생님께 장인어른 치료를 맡기겠습니다. 집이 멀어 가능하다면 가급적 입원부터 하고 검사를 받았으면 합니다. 가능할까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정이었다.
환자를 앞에 두고 하마터면 좋아 웃을 뻔했다.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입원실 텅텅 비었다고 조급하게 처리하다가는 보호자의 신뢰를 잃을 수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솔직함 자체가 큰 무기가 된다는 점도 잊지 않았다.
침착하게 응대했다.
“아시겠지만 어제 개원해 언제든 가능합니다. 너무 늦으면 안 되지만 편할 때 입원하시면 됩니다.”
“오늘 바로 입원했으면 합니다.”
“준비해야 할 것이 많으실 텐데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볼펜 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드디어 첫 환자가 왔다! 그것도 내가 가고자 하는 분야에 딱 맞는 환자다!’
김지훈이 표정 관리에 애썼다.
환자를 앞에 두고 기뻐하면 안 되지만 신설 병원 근무 시작 후 첫 환자가 주는 감흥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기에 더욱 철저히 준비해 수술하는 것이 마땅했다.
첫 입원장을 작성했다.
상당히 부유한 집안인지 당연한 얼굴로 일인실을 원했다. 돈을 벌고 쓰는 사람이 문제지 돈 자체는 죄가 없다. 다다익선일 따름이었다.
어쨌든 좋은 출발이었다.
“병동은 삼 층입니다. 지금 바로 입원 수속을 밟으면 한 시간 내로 입원이 가능하실 겁니다. 검사는 최대한 빨리 진행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때 환자의 딸이 뜻밖의 질문을 했다.
“선생님, 복강경으로 상처 없이 수술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인가요?”
“상처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배꼽 주변 한곳만 열고 수술해서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 그런 뜻이었구나. 혹시 담석이 있지만 증상이 없는 사람도 수술을 꼭 받아야 하나요?”
“증상 유무가 가장 중요하지만, 돌이 너무 크거나 반대로 너무 작아도 담즙이 배출되는 관을 막기 쉬워 수술을 권하는 편입니다.”
복강경에 꽤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는 담도암 의심 질환에 가족 중 담석을 가진 사람까지 있다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친김에 자세하게 상담을 해 주었다.
공짜로 말이다.
“친절하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정중하게 인사하는 보호자에게 고개를 숙이던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저도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우리 병원으로 결정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병원이 아니라 선생님을 보고 결정했습니다. 제가 가장 신뢰하는 선생님께서 복강경을 원한다는 말을 들으시더니 김지훈 선생님을 적극적으로 추천하더군요. 장인어른을 위해 최선의 방법을 찾아 주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의뢰서도 그분께 받았습니다.”
“복강경은 가능성이 없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걸 누가 알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어떤 선생님이지?’
“죄송하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H 병원에 계신 분입니다.”
순간 얼굴 하나가 떠올랐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보호자도 굳이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은 표정을 보여 어렴풋한 추측으로 남겨야 했다.
‘설마 진충기 선생님은 아니겠지. 간담췌 센터까지 준비하는 중인데 환자를 보낼 리 없잖아.’
확실한 사실은 경쟁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는 타 병원과 의료진에게도 강한 신뢰를 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또한 피땀 흘려 기울인 노력의 결실이었다.
그 모든 일의 핵심은 환자였다.
고령의 환자가 차가운 복도에서 입원 수속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도 담도를 침범한 종양이 허약한 육신을 갉아먹고 있을 것이다.
‘어제는 우울했지만 담도암이라면 시작이 나쁘지 않다. 최선을 다하자.’
김지훈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식당으로 향하는 김지훈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뿌듯한 마음을 안고 외과의에겐 호사일지 모를 여유로운 점심시간을 맞이했다. 송재덕 교수를 비롯해 모든 의료진의 얼굴이 보였다. 한가하다는 증거였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는 확신이 섰다.
환자 한 명으로 말이다.
“조진형 선생, 환자 한 명 있으니까 검사 빨리 부탁해. 소노(초음파), CT, MRI 모두 찍어야 돼. 윤석진 선생, ERCP(내시경적 역행 담췌관 조영술) 언제든 가능하지?”
“어떤 환잔데?”
“담도암 의증이야. 사이즈, 위치는 물론 가급적 악성 여부 최대한 신중하게 판단해 줘.”
“담도 종양이면 백이면 백 악성이겠지. 수술 한두 번 한 것도 아닌데 설마 양성이길 기대하는 거야?”
틀린 말 아니었다.
양성일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휘플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었다. 환자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첫 환자, 첫 수술을 최고 난이도를 가진 수술로 시작하게 됐다.
그것도 전문 병원에 딱 맞는 질환이었다.
반가운 일이 겹쳤다.
이경석이 무려 두 건이나 수술 예약을 했다.
김지훈이 반색하면서도 실소를 금치 못했다.
‘두 건에 무려라는 생각이 다 드네.’
모두 원 포트였다.
하등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기존 복강경 경험이 상당한 데다 전문 병원 설립이 가시화된 이후, 오창도 교수가 자기 수술 뺏는다고 입을 내밀 정도로 원 포트에 전력을 다한 이경석과 신현수였다.
“와우! 굿! 형이 다 할 거예요?”
“첫 수술인데 현수하고 하나씩 해야지. 우리 후배들 화끈하게 태워 가면서 말이야.”
“하하하! 누구하고 들어가실 건데요?”
“글쎄. 다들 욕심을 내서 사다리라도 타야 할 것 같아. 그래도 파트상 서도훈 선생이 일순위지. 남은 한 명은 현수가 결정하면 되고.”
“피 터지겠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막 식사를 하려던 강병옥이 신현수를 보며 눈가에 바짝 힘을 주었다. 한때 명예를 중시했던 의사가 아니라 실력으로 성공하고 싶은 의사의 눈빛이었다.
김지훈이 밝게 웃었다.
‘수술 욕심으로는 도진이하고 호석이도 결코 만만하지 않을 텐데 잘해 봐.’
예상 적중했다.
서도진이 강력하게 자신의 의사를 피력했다.
“과장님, 휘플을 하면 도훈이가 당연히 퍼스트를 서게 되는데, 이 상황에서 원 포트까지 먼저 준다면 형평성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닙니까?”
“파트가 다르잖아. 애초에 잘 선택했어야지.”
“초반이잖아요, 초반. 손도 제대로 안 풀린 상황에서 간 이식이 뜨면 어떻게 하려고 이러십니까? 손발도 못 맞출 수 있어요. 과장님께도 심각한 영향을 끼칠 겁니다. 그럼 환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 파트도 아닌데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과장님으로서 이경석 선생님께 이번에는 골고루 참여시키라고 말씀하시면 되잖아요?”
“말도 안 된다는 거 너도 잘 알지? 그리고 불리하면 과장 찾는 것 같다.”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마음을 이렇게 모르면 안 되죠. 그리고 과장님을 과장님이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요?”
음! 과장을 대하는 태도와 말투가 아니었다.
‘자식! 성격 하나도 안 변했네.’
워낙 막역했던 선후배 사이였다.
게다가 그럴듯했다.
개개인의 능력을 떠나 팀을 구성해 수술을 하는 이유와 같은 맥락의 주장이었다.
김지훈이 슬쩍 이경석과 신현수를 보았다.
못 들은 척 식판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과장이 무슨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것도 아니고, 두 손 모아 부탁한다면 모를까 섣불리 이런 일에 관여했다가는 온갖 눈총을 다 받을 것이다.
결론은 하나였다.
“집도의가 결정할 문제야. 난 힘없어.”
서도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눈이 확 찢어진 서도진이 돌연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태세를 바꿨다.
“선생님! 안호석 선생, 강병옥 선생, 뭐 해?”
안호석, 강병옥과 함께 이경석 옆에 앉아 열심히 입을 놀렸다. 신현수에게도 아양 아닌 아양을 떨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역시 써전은 수술을 먹고 사는 것이 분명했다.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외과를 통틀어 불과 환자 세 명에 수술 세 개가 잡혔을 뿐인데 분위기가 확 돌변했다. 송재덕 교수와 이준영 교수도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저러다 싸움 나는 거 아니니? 도진이 성격이 보통 아니잖아. 보통이. 응급실에서 의사 얼굴 꼬매는 일 벌어지면 곤란하다. 곤란해.”
“그런 싸움은 나도 좋습니다.”
“현수하고 경석이는 저런 후배 둬서 좋겠다. 그런데 나는 뭐니? 평생 돌덩이 같은 놈이 옆에 딱 붙어서 떨어지질 않아요, 떨어지질. 에이! 나도 대화하며 웃고 싶다. 대화가 필요해. 대화가.”
송재덕 교수의 입담이 걸쭉하게 퍼졌다.
여기저기에서 숨죽인 웃음이 터졌다.
그 덕인지 오후 진료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졌다.
서울 병원 근무 때 수술받았던 환자 한 명이 추적 검사를 위해 내원했다. 오창도 교수에게 받아도 되는 데다 거리마저 멀어졌을 텐데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남는 게 시간이었다.
사소한 일까지 충실히 듣고 설명했다.
“오늘 바로 검사하시고, 다음 진료 때 결과 설명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전문 병원에 활력의 기미가 돌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