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하나둘 낯익거나 낯선 얼굴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환자에게나 직원에게나 가장 먼저 보이는 응급실이 가까워질수록 병원에 서 있음을 실감했다.
문 앞에 도착했다.
위이이이잉!
자동문이 열렸다.
응급실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확 다가왔다.
여기저기 분주히 닦고 쓸던 간호사들이 반갑게 맞이했다. 사전 교육 때 안면을 익힌 데다 일부는 서울 병원 출신이라 더욱 반가웠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장비는 훌륭했고, 언제든 환자를 맞을 준비를 구 할 이상 마쳤다. 각 부분과 유기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정비하고,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여! 김 과장, 일찍 왔네.”
“형도 일찍 오셨네요.”
“응급실장이잖아.”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외래는 아직 열기 전이었고, 예약 환자도 없어 교수실로 향했다. 서울 병원에서 가져온 짐을 하나하나 풀어 정성스럽게 정리했다.
어느새 아홉 시였다.
김지훈이 외래 간호사와 인사도 할 겸 진료실로 가던 도중 진료 표를 보았다. 임시 개원이지만 예약만 없을 뿐 내원하는 환자는 봐야 한다.
김지훈 과장
제일 진료실
전문 과목:간 이식 및 췌장, 담도 질환
진료일:화, 목
수술일:월, 수, 금
처음부터 끝까지 왜 이리 뿌듯한지 모를 일이었다. 그동안 끊임없이 추구했던 세부 전공 분야를 더욱 깊게 파고든다는 생각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후우! 기필코 도약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안녕하세요. 부원장님 나오셨죠?”
“그럼요. 웬일이세요. 오늘은 진료 없으시잖아요.”
“첫날인데 인사드려야죠.”
스승인 이준영 교수와 나란히 진료실을 사용한다는 사실 앞에서는 차마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가슴이 벅찼다.
진료실로 들어갔다.
“앉아. 커피 한잔하자.”
스승의 커피는 당연히 제자 몫이었다.
김지훈이 벌떡 일어서는 외래 간호사에게 고갯짓을 해 주저앉혔다. 믹스 커피에 불과했지만 이준영 교수의 입맛에 딱 맞게 물 조절을 했다.
“출근길은 안 막히셨습니까?”
“생각보다 빨리 왔다.”
“혹시 수술 너무 늦게 끝나면 출퇴근이 빡빡하실 텐데,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혁원이가 근처에 방 구했다. 걱정하지 마. 할 일이 많아. 환자 없는 동안 최대한 완벽하게 준비해.”
‘혁원이하고 단둘이 한집에? 혁원아, 뭔가 갑갑하겠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김지훈의 눈이 컴퓨터로 향했다.
“선생님, 저게 방사선 필름 확인하는 거죠?”
“맞다. 제대로 돌아갈지 모르겠어.”
몇몇을 제외한 나머지 의사에게 IT 방면은 참 낯선 부분이었다. 김지훈 역시 휴대폰 사용과 메일 확인 정도가 다인 까닭에 확실히 자신 없어 보였다.
“데모는 확인하셨습니까?”
“확인했다. 다시 보자.”
클릭! 클릭!
‘음! 스승님 컴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으시네. 너무 익숙해. 정말 인터넷으로 주식이라도 하시나.’
클릭 몇 번으로 기존에 찍은 필름은 물론 막 촬영한 사진까지 바로바로 볼 수 있다니 신기했다. 이젠 누구든 발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뛰어다닐 일이 없을 것이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사인방이 하나둘 모였다. 환자 한 명 없어 은근히 불안했지만 첫날부터 욕심 부릴 일이 아니었다.
주요 시설을 확인했다.
수술실, 중환자실, 응급실은 물론 병동에 구비된 장비 역시 첨단은 아니더라도 사용성과 기능성이 좋아 쓸데없는 인력 낭비를 막았다.
‘설치비는 많이 들었어도 돈 들인 가치가 있겠지. 운영비가 도리어 적게 들 텐데 민정호가 군말 없이 동의했다니 희한하네.’
의아해할 때가 아니었다.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임시 개원을 했지만 병원 입장일 뿐이었다. 비록 내과, 외과만 외래 진료를 담당하지만 어딘가 아프고 불편해 내원한 환자를 보며 실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지훈이 하루 종일 사인방과 함께 부족한 부분이 있는지 점검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도 병원은 한산 그 자체였다. 온통 직원만 보였다.
은근한 불안이 현실로 다가왔다.
응급실 내원:0명.
내과 외래 진료:3명.
외과 외래 진료:3명.
‘스승님 환자도 다 서울 병원에서 수술한 환자고, 내과도 수술과 관계없는 환자란 말이지.’
김지훈이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기존 대학 병원과 비교할 수는 없어도 무려 백오십 병상을 가진 병원이었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지만 민망한 정도가 아니라 처참한 성적표였다.
홍보 부족, 제한된 진료 영역 등등 여러 핑계를 댔지만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입지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대학 병원 급은커녕 대형 병원도 없는 환경인데 전문 병원인지 모르고 내원하는 환자조차 없다니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 신설 병원을 보는 환자들의 냉정한 시각을 인정해야 했다.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일석아, 개업발이라는 게 있지 않냐?”
“그건 동네 의원이고, 우린 전문 병원이잖아. 게다가 임시 개원이야. 환자들도 다 촉이 있는데 막 달려오겠어?”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위안이 될 말은 아니었다.
민정호까지 염장을 질렀다.
“첫날이라고 해도 너무 없군요. 전문 병원을 표방했어도 환자 눈에는 별반 다르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다른 병원도 이런 식으로 시작했는지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일반 진료가 없지 않습니까?”
“저도 핑계는 수십 가지 이상 댈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생각보다 빨리 대책 회의를 열어야 하겠군요. 적자도 정도껏 나야 버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사정이 어려울수록 이사장님 귀에 더 빨리 들어갈 겁니다.”
진상건이 모를 수 없지만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누군가는 동요할 것이다. 약점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빈틈이 커지면 어떤 수를 쓸지 모르는 일이었다.
득의에 찬 진상건의 웃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사인방은 물론 병원 의료진이 진상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빤히 알면서도 민정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제길! 우리가 어떻게 보는지 빤히 알면 말이라도 예쁘게 하든지. 밉상 중의 밉상이야. 지훈아, 아무래도 홍보 부족이 가장 큰 문제야. 지금이라도 훈철이 형님께 연락해 부탁하는 건 어때?”
“예전에 벌써 말씀드렸어.”
“하긴 형님 입장도 있겠지. 한 병원을 대상으로 계속 홍보성 취재를 하다간 탈이 나도 단단히 날 거야.”
김지훈이 콧등만 찡그렸다.
전문 병원 설립을 주장한 당사자이기에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한마디 할 법도 한데 입을 열지 못하는 신현수를 보기 미안할 지경이었다.
당장은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돌파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방면이든 지역구와 전국구의 차이는 분명하게 존재했다. 과장의 어깨가 처지면 일반외과 전체 분위기마저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첫날일 뿐이다. 힘내자!’
“라파로는 대부분 지역 환자가 대상이지만 나머지 파트는 전국이 대상 지역이야. 첫 환자를 시작으로 몇 건만 확실하게 치료하면 분위기 확 달라질 수밖에 없어. 선생님들까지 계신 이상 오늘은 예외적인 날이 분명해.”
“그래야지.”
말과는 달리 어깨가 자꾸 처졌다.
정말 발걸음 무거운 퇴근길이었다.
‘각오는 했지만 너무하네.’
고경아가 김지훈의 처진 어깨를 보고도 활짝 웃었다. 하루 종일 준비만 하고 일과를 끝냈건만 조금도 불안해하지 않았다.
“우리 병원만이 치료할 수 있는 환자가 정말 많다고 했잖아요. 곧 환자들로 병원이 바글바글할 거예요. 난 지훈 씨를 믿어요.”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희연이 역시 처음 간 유치원에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에게는 낯선 환경과 새 친구를 만나는 것 자체가 큰 스트레스일 텐데 말이다.
김지훈과 결코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우리 딸도 씩씩하게 이겨 내는데 힘내자!’
아내와 딸에게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사실 잠은 오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김지훈이 마음 단단히 먹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자.’
지난밤 불과 서너 명의 환자가 내원한 응급실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수술을 요하지 않는 일반 복통과 단순 열상이었다는 사실에 심한 갈증을 느꼈지만, 책임과 부담은 직위를 가진 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의료진과 직원의 잘못이 아니었다.
“근무 중 특별한 문제 없었죠? 접수부터 장비 사용에 이상은 없었어요?”
“예. 그런데 환자가 너무 없어서…….”
“많을 때도 있고, 적을 때도 있는 법이죠. 불편한 점이 있으면 이경석 선생님과 제게 꼭 말씀하세요. 피곤하겠네. 다들 빨리 퇴근해요.”
외래도 변함이 없었다.
기죽을 일 아니었다.
‘이제 이틀째다. 파이팅하자!’
진료실에 앉아 새로 설치된 프로그램을 돌려 보며 충실한 준비의 시간을 보냈다. 간호사가 슬금슬금 눈치를 봐 난감한 분위기도 풀어야 했다.
“우리 커피 한잔할까요? 어제 진료할 때 불편하거나 부족했던 점은 없었어요?”
사인방을 찾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도 시간이 철철 남았다. 항상 접수하는 환자로 북적였던 기억만이 있는 원무과 역시 한산했다.
각오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었다.
별생각이 다 들었다.
‘개원했다 망한다는 소리가 다른 사람 일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불안하고 답답할 줄은 몰랐네.’
째깍! 째깍!
어느새 열한 시가 훌쩍 넘었다.
진료실 문은 자물쇠를 채운 것처럼 굳건히 닫힌 채 열릴 줄 몰랐다. 의사가 된 이후 이토록 한가했던 적은 없었다. 적응의 문제가 아니라 불안한 현실을 대변하는 것 같아 조급함이 앞섰다.
김지훈이 남몰래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다들 뭐 하고 있을까? 스승님을 찾아가 커피라도 한잔할까? 아니야. 벌써 세 잔이나 마셨는데, 더 먹었다간 밤에 잠 못 잔다.’
그때 오전 내내 들을 수 없었던 간호사 목소리가 들렸다. 같은 돈이면 일이 적길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건만 상당히 들떠 있었다.
“과장님, 환자 한 명 접수됐대요.”
“환자요?”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이미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을 닦았다.
이제 불과 이틀째건만 첫 환자의 등장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렇게 감동적이고 고마운 적은 아마도 손에 꼽을 것이다.
문이 열렸다.
김지훈이 최대한 자세를 바로 했다.
부부로 보이는 말쑥한 차림의 중년 남녀가 노인 한 명을 부축하고 들어섰다. 바짝 마른 몸에 안색이 좋지 않아 어딘지 모르게 큰 병을 앓는 사람으로 보였다.
차트를 확인했다.
80세 남자 환자, 장풍연.
“앉으시죠.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습니까?”
노인 대신 중년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실례되는 질문인데 김지훈 과장님 맞으십니까? 너무 젊어 보여서요.”
“맞습니다. 왜 그러시죠?”
“처음 검사한 병원에서 적극 추천해 서울 병원까지 들렀다 왔습니다. 소개해 주신 선생님이 연세가 있으신 분이라 선생님도 나이가 지긋하실 줄 알았습니다. 저희 생각과 많이 다르시네요.”
김지훈이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가끔 그런 오해를 받습니다.”
“그러시군요.”
종종 있는 일이었다.
다른 병원 의사가 이름을 콕 집어 의뢰할 정도로 쟁쟁한 실력을 갖췄다면 경험 많고, 노련하다는 말이었다. 통념상 거의 절대적으로 나이 많은 의사이기 마련이었다. TV에 몇 번 얼굴 비친 것만으로 김지훈이라는 의사를 알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부부의 눈길이 슬쩍 진료 의사를 소개하는 경력 표에 머물렀다. 이준영 교수의 화려한 이력 옆에 쓰인 김지훈의 경력을 세세히 읽어 내려갔다.
‘저 나이에 유학 다녀오고, 대학 병원 부교수에 과장이라면 일단 실력은 있다는 말인데.’
의심의 눈길이 다소 옅어졌다.
김지훈이 차분하게 기다렸다.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었다.
“장인어른께서 많이 아프십니다. 연세도 많고 하셔서 혹시 복강경으로 가능한지도 알고 싶습니다. 다른 병원에서 가져온 의뢰서부터 확인해 주십시오.”
의뢰서를 받아 든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라파로를 원하신다? 제 전문이죠.’
자신 있게 내용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