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사인방이 모두 모였다.
출발!
고급에도 차이가 있었다.
신현수가 말한 참치집은 그야말로 비싸 보였다. 시설도 으리으리했지만 붉은 살과 하얀 지방이 절묘하게 섞인 참치의 맛과 다양한 식감은 진미였다.
입 안에서 쫀득쫀득 살살 녹았다.
술병이 차곡차곡 쌓였다.
“김 과장을 위하여!”
“응급실장님을 위하여!”
“우리 병원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빤한 건배사였지만 몇 번을 되풀이해도 즐겁기만 했다. 손일석과 신현수가 파안대소를 터트릴 만큼 진정으로 축하해 줘 더욱 기쁜 날이었다.
술기운이 슬슬 눈가까지 차올랐다.
동기들을 대표하는 주당이라 불렸던 만큼 적어도 삼 차까지는 가서 취하는 것이 마땅했다. 사인방 모두 결코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김지훈이 뒷일도 생각하지 않고 전진을 외쳤다.
“이 차 가자!”
힘차게 계산서를 받아 들었다.
순간 입이 쩍 벌어졌다.
‘어후! 장난 아니네. 술은 또 뭐가 이렇게 비싼 거야? 그래도 이 정도는 내야지. 마님, 오늘 기분 좀 냅니다.’
그때 이경석이 쓰윽 고개를 내밀었다.
“김 과장, 같이 내자.”
“형, 오늘은 내가 삽니다.”
“과장보다 응급실장이 더 높아, 인마. 내가 애 셋만 아니었으면 혼자 다 샀다. 반씩 계산해 주세요.”
삐! 삐익! 드르르륵!
상당한 돈 아꼈다.
이런 자리에서 좋다고 인 마이 포켓(In My Pocket) 한 후 입 씻으면 바로 왕따 당한다. 최소 쩨쩨함을 비웃는 손가락질에 혀 차는 소리 정도는 들어야 할 것이다.
친구이기에 더욱 예외는 없었다.
김지훈이 간판만 봐도 비싸 보이는 집으로 돌진했다.
화들짝 놀란 손일석이 술 취한 놈 고집에 진땀을 빼며 말렸다. 덕분에 김지훈 수준에 딱 맞는 술집을 찾아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였다.
“사장님, 얼마 나왔어요? 딸꾹! 엥? 그것밖에 안 나왔어요? 딸꾹! 계산해 주세요.”
“다른 분이 계산하셨습니다.”
“김 과장, 이 차는 나랑 현수가 냈어. 축하주도 사야지. 딸꾹! 어! 간만에 너무 많이 먹었다. 취한다.”
‘고마운 자식들!’
손일석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회심의 미소를 날렸다.
‘흐흐흐! 싸게 먹혔다.’
만 원 내고 십만 원어치 먹기.
다 계획이 있었다.
정말 맛있는 술이었고, 즐거운 자리였다.
김지훈에겐 평생 잊지 못할 날이었다.
다음 날도 술자리가 이어졌다.
서울 병원의 핵심이 떠나고 주역이었던 교수 중 일부만 남게 되는 날이 불과 며칠 앞이었다. 시끌벅적 소란한 가운데 석별의 아쉬움이 진하게 뒤섞였다.
송재덕 교수는 웃기만 했다.
이준영 교수는 술잔만 기울였다.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서로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편치 않은 자리였다.
김지훈이 일일이 술을 따랐다.
“빨리 자리 잡고 찾아뵙겠습니다.”
“니들을 본 게 엊그제 같은데 세월 참 빠르다. 선생님들 잘 모시고, 합류하는 선생들 힘들지 않게 처신 잘해야 한다. 신 교수, 안 그렇나?”
“손일석이 불안해서 그렇지, 우리가 걱정할 나이가 아니야. 잘하고도 남아.”
“신 교수 니도 많이 아쉬운가 보다. 나도 현수가 제일 마음에 걸린다. 일도 많고, 탈도 많았잖아.”
그저 제자 걱정뿐인 스승들이었다.
장성한 자식을 둔 노모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사인방, 펠로우, 고경철까지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분위기가 점점 무거워졌다. 그러나 어디에든 반전이 있기 마련이었다.
서도진, 서도훈, 안호석, 강병옥.
잠시 떨어져 있었지만 이제 다시 진한 인연을 이어 가야 할 후배들이 인사할 겸 찾아왔다. 항상 보고 싶었던 자식이 다시 가족의 품 안으로 돌아온 것이다.
“선생님, 저희 왔습니다. 잘 지내셨죠?”
마치 어제 본 것처럼 활기차게 술자리를 휩쓸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고조되며 지난 일이 사라지고 앞날의 꿈, 희망, 포부만 남았다.
김지훈이 이제야 웃었다.
‘제때 정말 잘 왔다. 마음이 중요하지, 몸이 떨어져 있다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구나.’
서울 병원 식구들과의 마지막 자리가 그렇게 흘러, 흘러 끝났다.
아쉬움과 서운함이 모두 사라지지 않았지만 한 번 이어진 인연이 쇠심줄처럼 더욱 단단해지고 있었다.
평생 동안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
다음 날 송재덕 교수, 이준영 교수 주관하에 전문 병원 소속 외과의가 모두 모였다.
무엇보다 중대한 일을 앞뒀다.
각 파트 구성을 최종 발표하는 자리였다.
이준영 교수가 일일이 눈길을 준 후 입을 열었다.
“전문 병원 파트를 간암, 간 이식, 췌장과 담도 악성 질환, 그 외 질환의 라파로 전담까지 모두 네 파트로 나눴다. 그동안 상의해 온 대로 각자 원하는 분야를 최대한 존중했다. 향후 진료 개시 후 자신의 파트를 바꿀 수 있다는 점도 잊지 말길 바란다.”
간 이식과 간, 췌장, 담도의 악성 질환만을 진료해선 한동안 유지가 어렵다는 판단하에 복강경이 추가됐다. 한정된 운영비로 이 년을 버텨야 하는 까닭에 어쩔 수 없이 취한 고육지책만은 아니었다.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한 최소의 방편이자 필수적인 술기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본래의 설립 목적에 부합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발표가 시작됐다.
*간암 및 공여자 수술 파트
이준영 교수, 신현수, 안호석, 펠로우
*간 이식 수혜자 및 공여자 파트
김지훈, 서도진, 이혁원
손일석, 강병옥, 나종진
*췌장 및 담도암 파트
김지훈, 서도훈, 송진우
*복강경 파트
이경석, 신현수, 서도진 외 펠로우까지 칠 인
*기타 파트
송재덕 교수, 손일석, 펠로우
가장 앞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파트를 주도하게 될 써전이었다. 구성원의 경우 지금 당장 어떤 파트에 속해 있든 결국 각자 자신만의 핵심 전공을 택하게 될 것이다.
외과의만 무려 열네 명이었지만 각 파트가 필요로 하는 인원보다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파트 소속이 중복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더구나 모든 파트에 이름을 올린 펠로우를 포함해 절반 이상이 더 배워야 할 위치였다. 환자가 많든 적든 당분간 상당한 땀을 흘려야 할 것이다.
특기할 점이 있었다.
신현수의 대표 파트가 간암이었다.
전공의 시절 간담도 파트를 생각한 데다 이준영 교수에게 배우길 갈망했던 신현수였다. 어쩌면 그 기억에 이준영 교수 다음으로 이름을 올렸을지도 몰랐다.
김지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자식! 까딱 잘못하면 펠로우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는데 스승님 파트로 갔어? 정말 여러모로 평생 라이벌이네.’
송재덕 교수의 위치도 애매모호했다.
이제 와 전문 분야를 바꾸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반면 응급실이 있는 이상 표방 과목 이외의 환자가 올 가능성도 높았다. 그렇다고 해도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지만 송재덕 교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대장도 필요한 수술이 있을 거다. 게다가 원장 일만 안 해도 되는 게 어디니. 그거면 됐다. 그거면. 남는 시간에 민정호랑 놀면 된다. 놀면 돼. 허허허!”
‘원장님, 감사합니다.’
가장 눈에 띄는 써전은 역시 김지훈이었다.
핵심적인 두 파트를 모두 관장하게 됐다.
그간의 성과를 생각하면 복강경은 물론 간암까지 사실상 모든 파트가 김지훈의 주력 분야라 할 수 있었다. 이 점을 중시한 이준영 교수가 김지훈을 과장으로 추천한 이유기도 했다.
누구나 인정하는 일이었다.
덕분에 과장 체면 단단히 세웠다.
“과장님, 원 포트부터 배울 게 많은데 펠로우들까지 라파로에 참가하면 경험이 적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한다고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서도진의 은근한 항의에 김지훈이 웃었다.
“이경석 선생님이 적절하게 분배할 거야. 궤도에 오르면 자기 파트 이외에 다른 분야는 쳐다보기도 힘들 수 있으니까 건수 적더라도 잘 배워 둬. 특히 서도훈 선생은 췌장 파트를 원했으니까 각별하게 신경 써야 돼. 알지?”
“휘플까지 라파로로 한다고 하셨죠? 저도 같은 목표를 잡았습니다. 이경석 선생님께 싹싹 빌어서라도 실력을 쌓겠습니다. 펠로우 선생들, 미리 양해 구한다. 이해해 줘.”
강병옥과 안호석도 눈가를 굳혔다.
신임 교수 네 명 모두 펠로우들에게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했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신설 병원의 주역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싶을 것이다. 사인방을 포함해 서로가 서로에게 동료이자 라이벌일 수밖에 없었다.
***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났다.
토요일 오후 한 시.
김지훈이 물끄러미 병원 정문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퇴근길이었다.
서울 병원 업무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남은 교수들을 찾아 일일이 인사했다.
주말에 이사를 가면 서울 생활도 끝이었다.
한동안 걸음을 떼지 못했다.
온갖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의대 본과 생활, 인턴, 전공의, 펠로우, 조교수, 부교수에 이어 유학까지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한 병원이었다. 말 그대로 젊음을 모두 바쳤다.
수많은 환자를 만나 살렸다.
구성원들과 쌓은 인연도 적지 않았다.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들 대로 든 정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었다.
‘평생 여기에서 근무할 줄 알았는데 아쉽네. 현수가 가장 마음이 안 좋겠지?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우리 일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현수야, 일석아, 경석이 형, 갑시다. 우리 꿈을 펼쳐 봅시다.’
미련에 붙잡힐 때가 아니었다.
새로운 시작을 앞뒀을 뿐이었다.
진상건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게 미치는 병원에서 벗어나는 꼴이니 어쩌면 다행이라 할 수도 있었다. 사사건건 침범당하다 보면 본연의 업무마저 지장을 받고도 남을 것이다.
‘차라리 잘된 일이야. 좋게 생각하자.’
마침 고경아도 작별 인사를 마치고 병원을 나왔다. 상념 속 뒷덜미에 딱 달라붙는 아쉬움과 허전함을 훌훌 털고 함께 걸었다.
지난날 추억은 이미 충분하게 나눴다.
이제는 미래를 볼 때였다.
“경아 씨, 우리 잘해 내겠죠?”
“어떻게 만든 전문 병원인데 당연하죠. 이사 때문에 준비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빨리 가요.”
“포장 이사 하는 거 아니에요?”
“에휴! 이래서 남자는 안 된다니까.”
무슨 말인지 절실하게 깨달았다.
이사 전 제법 오랜 시간 이것저것 정리했지만 토요일 밤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일요일 이른 아침부터 이사를 시작했다. 노련해 보이는 직원들이 고경아가 지정하는 자리에 고스란히 짐을 옮겼건만 할 일이 산더미였다.
‘야! 짐 정리가 이렇게 힘든 일인가?’
고경아도 지쳤다.
가만히 있으면 좋으련만 새집이라고 방방 뛰던 희연이까지 배고프다고 아우성이었다.
“이번 주는 일이 거의 없을 테니까 쉬엄쉬엄, 차근차근 정리해요.”
“그래야 할까 봐요.”
대충 끼니 때우고 새로운 도시, 새로운 집에서 첫날밤을 맞이했다. 싱숭생숭, 기분이 묘했지만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전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생활이 이어질 것이다.
날이 밝았다.
김지훈이 습관처럼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출근 첫날이었다.
잡탕처럼 뒤섞이는 두근두근 설레는 가슴, 임시 개원이 주는 중압감,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치고 새 마음 새 뜻으로 출근 준비를 했다.
예전처럼 김지훈이 먼저 집을 나섰다.
고경아는 희연이를 건사한 후에야 병원으로 향할 것이다. 서울 병원 출근 거리보다 멀었지만 다행히 걸어가기에 무리가 없었다.
낯선 거리가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 모두 각자 자신이 원하는 삶과 가족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을 것이다.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이 달콤한 결실로 이어지길 바라며 말이다.
‘시계추 같은 일상일지도 모르지만 오늘이 내게 특별한 날인 것처럼 의미 없는 날은 없겠지.’
멀리서도 병원명이 크게 보였다.
S 대학 간담췌, 복강경 전문 병원!
걸음이 빨라졌다.
병원이 눈앞으로 확확 다가왔다.
정문 앞에 섰다.
심장이 두근두근 달리기 시작했다.
김지훈이 심호흡을 했다.
유난히 밝은 아침 햇살이 온몸을 감쌌다.
길고 답답했던 터널에서 빠져나와 모든 것이 새로울 직장의 첫발을 앞뒀다. 단지 의사 중 한 명일 뿐인데 마치 내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감격스러웠다.
‘이제 정말 시작하는구나.’
후욱! 후욱! 후우!
김지훈이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드디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