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제자가 오직 의사로서 매진하기를 바라는 스승이었다. 본인 스스로 자리 욕심이 없는 데다 직위가 주는 권위로 대가 소리를 듣지 않았기에 과장으로 밀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수렴했다.
반대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한숨이 터졌다.
‘빨리 대가로 인정받는 수밖에 없네. 그래야 스승님처럼 가만히 앉아 있어도 억지로 감투 하나 줄 거 아니야?’
전에 없던 자리 욕심이 나다니 나이 먹긴 먹은 모양이었다. 그보다 상대가 사인방이란 사실이 전투욕을 자극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가끔은 포기가 빨라야 상처가 빨리 아무는 때도 있기 마련이었다.
왠지 상당히 아쉬웠다.
“누가 될까요?”
“나야 지훈 씨가 되기를 바라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이경석 선생님 아니겠어요? 나이도 있으시고, 무엇보다 당신은 물론 제부나 신현수 선생님까지 모든 일들을 의논하고 따르잖아요.”
와이프까지?
설상가상 이유까지 달랐다.
그만큼 확률이 높아졌단 말이었다.
“에이! 우리가 그랬구나. 왜 그랬을까?”
김지훈이 콧김을 내뱉으며 우걱우걱 과일을 씹었다. 한 번도 내지 않았던 자리 욕심을 내는 남편을 본 고경아가 토닥토닥 등을 두드렸다.
“사실 능력으로만 보면 지훈 씨죠. 비교 불가예요.”
쪽!
아내의 인정과 키스 한 방에 김지훈이 나가떨어졌다. 입에 발린 말이라고 해도 가족에게 인정받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었다.
희연이가 잠에서 깨어날 줄 몰랐다.
‘과장이고 뭐고 일단 할 일부터.’
우하하하! 우워워워워!
입이 귀에 걸린 늑대가 나타났다!
***
토요일 일과가 끝났다.
이제 딱 일주일 남았다.
온갖 비기가 난무하는 주말 집담회도 마지막이었다. 핵심 표적인 전공의는 단 한 명에 펠로우도 셋에 불과한 전문 병원은 서울 병원의 분위기만 못할지도 몰랐다. 칠지도와 잘게 다져지는 도마가 그리울 것이다.
고경철도 기분이 묘한 모양이었다.
“이혁원 선생님, 전문 병원에서도 집담회는 하겠죠?”
“당연하지.”
“그래도 한결 편하겠죠?”
이혁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종진과 송진우는 피식피식 웃었다.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선생님들 면면을 봐라. 하는 수술마다 메이저일 텐데, 죽으면 죽었지 편해질 수가 있겠어?”
슬슬 스승들의 사정권에서 벗어났던 사인방의 무서움을 간과했다. 이제야 인턴 때를 벗은 전공의 일 년 차 최악의 착각이었다.
와중에 특기할 일이 있었다.
서울 병원 근무가 결정된 써전들이 집담회 직후 과장 대리라는 희한한 상황에 빠진 박승준 교수를 만나고 돌아갔다. 얼굴 하나 보지 못해 서운했지만 인연이 이어지는 한 언젠가 마주할 것이다. 어떤 제안을 받았든 모두 합심해 서울 병원 일반외과의 위상을 지켜 주길 바랄 뿐이었다.
김지훈이 시계를 보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송재덕 교수, 이준영 교수와의 약속 시간이 불과 10분 남았다. 어차피 주말 당직이기에 가운을 입은 채로 서둘러 달려갔다.
개원에 앞서 일반외과와 관련된 부분은 물론 각자 맡았던 일을 최종 확인하는 자리였다. 모두들 열심히 듣고, 말하면 서도 분위기가 팽팽했다.
“내과 공정식 선생이 진료 부장을 맡고, 윤석진 선생이 과장 하기로 했다. 너희들도 일하기 편하겠지? 그치? 다들 친하잖아. 아니야? 정말 아니야?”
드디어 최대 관심사가 언급됐다.
사인방의 눈이 번쩍였다.
다들 태연한 척했지만 누구 한 명 양보의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팽팽했던 분위기가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라 손에 땀이 밸 지경이었다.
이미 스스로 결론을 내린 김지훈도 내심은 달라 행여나 하는 눈으로 송재덕 교수와 이준영 교수의 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교수, 김진호 선생은 양해했니? 서울 병원 과장 자리를 포기한 것과 다름없는데 서운하지 않을까? 나 같으면 되게 서운할 것 같다. 되게. 그게 사람이다. 그게 사람이야.”
“이 년 후에 부원장 맡기로 했습니다.”
엉뚱한 데서 훅 치고 들어왔다.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예? 이 년 후라니요?”
“자리를 잡든 못 잡든 김진호 선생은 원장님을 도와 병원을 이끌 충분한 능력이 있다. 난 내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맞아.”
“그래도…….”
눈길 한 번에 김지훈이 입을 꾹 다물었다.
부원장인 이상 원장을 목표로 해야 하는데 이준영 교수는 도리어 자리를 보전하기는커녕 물러날 기한까지 정했다. 스승의 결정은 제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기 마련이었다.
과장 자리 확실히 멀어졌다.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손일석은 나직한 헛기침을 터트렸다.
이경석은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에휴! 다들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난 언제 과장을 하지? 아니야. 스승님의 가르침을 잊지 말자. 절대 포기하면 안 돼.’
투덜투덜 입맛만 다시던 김지훈이 다시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사인방 모두 견제의 눈초리를 보내며, 김지훈 너는 열외라는 강력한 의사를 서슴없이 보였다.
‘나쁜 놈들!’
“잘 결정했다. 잘. 김진호 선생도 초반 이 년 동안 할 일이 많을 거다. 아주 많을 거야. 무관이 제왕이라는 말도 있잖아. 그건 그렇고, 우리 과 얘기도 해야지. 어디 보자. 어디 보자.”
송재덕 교수가 특유의 동네 아저씨 미소를 지으며 사인방에게 일일이 눈길을 주었다.
오늘따라 미소가 예사롭지 않았다.
“다른 과에는 미안한 일이지만 응급실장까지 우리 과가 맡을 수밖에 없네. 그치? 상황이 그렇지? 그래서 두 사람이 필요하다. 두 사람이.”
꿀꺽!
“근데 너희는 네 명이잖아. 네 명. 전공의 수련 같이했고, 전문의도 한 번에 다 땄네. 유학이 자리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 힘들다. 힘들어. 어쨌든 최연소 응급실장에 과장이 되는 거니까 신중하게 결정했다. 신중하게.”
왜 이리 뜸을 들이실까?
“이 교수, 발표한다. 발표.”
‘그래서요? 그래서요?’
사인방 모두 차마 애들처럼 티는 못 내고 바짝 마른 입술만 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전문 병원이 확고하게 자리 잡는 순간 이름 뒤에 붙은 과장이라는 직함은 상상도 못할 명예였다. 아니, 신설 병원이라 해도 대학 병원인 이상 그 자체로 대단한 영광이었다.
거저 얻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한 욕심과 허울도 아니었다.
피땀 어린 노력으로 얻은 기회였다.
사인방 모두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
송재덕 교수의 입이 열렸다.
“이 자리에 자격이 없는 사람은 없다. 없어. 다들 열심히 했고, 누가 되든 자신만이 아니라 병원을 위해 앞으로도 열심히 할 것이라 믿는다. 그치? 다들 그럴 거지?”
말해 뭐 할까?
사설이 너무 길다는 생각뿐이었다.
송재덕 교수가 헛기침을 했다.
드디어 발표 순간이었다.
그때!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리!
잔뜩 긴장한 채 귀를 열었던 김지훈이 화들짝 놀라며 품을 뒤졌다.
“죄송합니다. 여보세요?”
(이혁원입니다. 40세 남자 환자가 낙상으로 내원했습니다. CT 시행 결과 비장과 장간막 파열로 인한 혈복강이 의심됩니다. 바이탈이 흔들려 바로 수술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취과에는 이미 연락했습니다.)
이혁원의 목소리가 그대로 휴대폰을 빠져나가 모든 사람의 귀에 전달됐다. 단 몇 분이면 알 수 있건만 이준영 교수의 고개가 스르르 돌았다.
“뭐 해?”
“예?”
“바이탈 흔들린다잖아.”
나이 먹을 만큼 먹었는데 몸은 마치 전공의 시절처럼 반응했다.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한 김지훈이 후다닥 응급실로 내달렸다.
‘지금쯤 발표하셨겠지? 누굴까? 누가 과장일까?’
응급실 문을 여는 순간까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환자를 보는 순간 까맣게 잊었다. 이혁원과 고경철의 가운이 이미 피에 물들어 있었다.
헐떡이는 숨과 창백한 안색.
경고음이 그치지 않는 기계.
주렁주렁 매달린 수액과 혈액.
지금 곧바로 수술하지 않으면 놓칠 수밖에 없는 환자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혁원 선생, 어디야?”
“비장이 깨졌고, 대장이나 소장 혈관 손상에 빤뻬리까지 동반된 것 같습니다.”
“보호자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제길! 지금 바로 환자 올려. 간호사, 보호자 오면 즉시 수술 방으로 올려 보내 주세요.”
보호자에게 환자 상태와 수술에 따른 갖가지 위험과 합병증을 사전 설명하는 것은 법적 의무였다. 만일 고지하지 않은 채 수술하다 문제가 생기면 의료사고와 무관하게 소송을 당할 수도 있었다. 반면 두려워 기다리다간 환자가 목숨을 잃을 상황이었다.
어느 쪽이 중요한지 명확했다.
다행인 점은 대부분의 보호자가 응급 상황을 이해하고 수긍한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억지를 부리거나 브로커에 속아 무작정 돈을 바라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반면 의료 약자라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기에 의료 외적인 위험을 감수하고 간호사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환자를 수술실로 옮겼다.
띠띠띠띠띠띠!
급박하게 울리는 심박동 소리는 언제나 강한 긴장을 유발했다. 특히 다발성 장기 손상이 의심되는 경우는 집도의의 우선순위 판단이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가슴까지 답답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취과와 수술 방 간호사가 빠르게 준비를 마쳤다. 즉시 마취가 시행됐고, 동시에 수술 팀은 배를 열 준비까지 모두 마쳤다.
“수술 시작하셔도 됩니다.”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김지훈이 과감하게 배를 열었다.
온통 검붉은 피로 꽉 찼다.
“셀라인! 석션! 탭(수술용 천)!”
찌이익! 찌이이익!
고인 피가 석션을 따라 쏟아지듯 제거됐다.
완전히 피로 물든 탭이 바닥에 쌓였다.
비장을 확보했다.
완전히 깨졌다.
김지훈이 빠른 판단을 내렸다.
‘비장 말고도 출혈 부위가 더 있다. 끊어진 소장이나 대장 동맥은 한 번에 잡을 수 있으니까 먼저 해결하자. 그게 절대적으로 유리해.’
비장 주변에 탭을 쑤셔 넣어 임시로 압박했다. 수많은 경험을 통해 몇 분 정도는 충분히 버틸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역설적이게도 혈압이 떨어져 액티브(Active)한 출혈이 발생할 수 없는 상황이 도리어 도움이 된 것이다.
“소장, 대장부터 확인하자.”
소장과 대장이 여기저기 찢어졌다.
결정적으로 혈관이 포함된 장간막이 크게 손상됐다.
끊어진 혈관이 다수 보였다.
심장박동을 따라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일부는 동맥이 분명했다.
저혈압 탓에 출혈량은 많지 않았지만 결코 멈추지 않을 출혈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비장 출혈을 잡아 혈압이 상승하는 순간 상당한 피를 내뿜을 것이다.
그때는 시야가 나빠져 수술이 더 어려워지게 된다. 간당간당 생의 끈을 잡고 있는 환자는 또다시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손을 내밀었다.
“켈리! 켈리! 켈리!”
따르륵! 따르륵! 따르륵!
빠르게 끊어진 혈관을 잡았다.
“타이!”
이혁원이 단단히 매듭을 지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출혈은 없었다.
장 일부를 살리기 어렵다는 직감이 다가왔지만 우선순위는 무조건 출혈부터 잡는 것이었다. 물을 적신 탭으로 장을 덮은 김지훈이 곧바로 비장을 압박한 탭을 제거했다.
“비장 제거하자. 켈리! 타이! 컷!”
비장과 주변 장기를 연결한 조직을 잡고 잘랐다. 빠르게 절단면을 살피며 비장 동맥 유무를 확인했다. 너덜너덜해진 비장을 거의 다 제거할 때쯤 동맥을 찾았다.
김지훈과 이혁원의 손이 정확하게 움직였다.
따르륵! 따가각!
절대 풀리지 않도록 이중으로 묶었다.
“비장 나갑니다.”
가장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장기가 제거됐다.
띠띠띠띠띠띠!
환자의 심장은 아직도 헐떡였다.
“혈압 어떻습니까?”
“여전히 낮습니다.”
부분적으로 우징(Oozing) 양상의 출혈이 관찰됐다. 하지만 이젠 소장, 대장의 손상과 출혈이 더 문제가 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장 손상 부위를 확인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짐작은 했지만 너무 심하네.”
소장 말단부인 공장 끝단에서 우측 상행 결장 중간부까지 까맣게 죽었다. 끊어진 혈관을 다시 연결해 주는 방식은 위험만 초래할 뿐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불가능했다.
안타깝지만 선택은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