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057화 (1,057/1,329)

3화

좋게 말할 상대가 아니었다.

“볼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이사장님 제안을 수락했는지 궁금해서요.”

“거절했습니다. 실망스럽습니까?”

“송재덕 교수님까지 합류하시고, 김 교수님 의지도 확고하군요. 전문 병원 앞날이 어둡지만은 않겠습니다.”

민정호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지금 날 떠보는 건가?’

“계약을 이행하기 어렵다는 말로 들립니다.”

“쉬워지진 않을 것 같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묘한 반응이었다.

평소 표정을 보이지 않은 데다 억양마저 평탄해 속마음을 엿볼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자리를 뜨는 순간 진상건과 대책을 마련하느라 골머리를 썩을 것이 분명했다.

한 번 더 찔러 보고 싶었다.

“누가 제안했는지 몰라도 송재덕 선생님 일은 우리도 의외였습니다.”

“제가 제안했습니다. 일반외과 입장은 어떤지 모르지만 서울 병원에 계셔야 득이 될 일이 크게 없더군요. 이사장님께서 고심 끝에 수락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김지훈이 당황했다.

‘득이 될 일이 없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럼 전문 병원에는 득이 된다는 말 아닌가?’

절로 입이 열렸다.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이번 일 역시 계약을 이행하기 위한 일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고요.”

‘그놈의 계약 타령은 끝이 없네. 협박을 해서라도 계약서를 보고 싶네. 근데 정말 이유가 뭘까? 이런 사람이 이해득실을 잘못 계산했을까?’

음흉한 구석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에겐 잘된 일입니다.”

“만족하셨다니 다행이군요. 여러 사람에게 득이 됐다면 좋은 일 아닙니까?”

“제 거절은 몰라도 원장님 일은 이사장님과 행정 부원장님에게도 만족스러운 일인 모양입니다.”

“불만족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가끔은 저도 감을 따를 때가 있고요. 두고 봐야죠. 그럼 이만.”

민정호가 이사장실이 아닌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김지훈이 한참 동안 눈을 못 뗐다.

‘뭐야? 왜 진상건도 안 보고 그냥 가지?’

뭐라도 걸리라고 낚싯대 한 번 던져 본 것인지, 애써 여유를 보이려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적지 않게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보면 볼수록 정말 판단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어떤 행동을 보여도 핵심은 진상건과 민정호의 관계였다. 계약은 말뿐이거나 형식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의심이 깊어지는 순간 문득 장비 구입과 공사에서 절감한 비용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후우! 빼돌릴 기미가 보이질 않아서 그런지 계약 내용이 점점 더 궁금해지네. 설마 진상건과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봐도 한통속이잖아.’

혼자 머리 굴려 봐야 답 안 나오는 일이었다.

사인방을 찾았다.

면담 내용부터 알렸다.

빤한 의도에 분통을 터트리면서도 김지훈이 특급 대우를 제안받았다는 사실에 복잡한 반응을 보였다. 내색은 안 했지만 얼마 전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서로가 영원한 친구이자 가장 강력한 경쟁자이기에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야! 내가 살다 살다 진상건에게 서운해질 줄은 몰랐다. 왜 너한테만 제안을 했지? 혈관 수술 최고 고수인 날 무시하는 거야? 뭐야?”

“신기동 선생님이 계시는 한 최고는 아니지.”

“뭐… 그거야 그렇지만. 어쨌든 민정호도 이상하네. 말이라는 게 본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는 법인데, 어떻게 하나같이 명확한 것 같으면서도 애매모호하냐. 구조 조정 하면서 익힌 기술인가? 피도 눈물도 없다고 해서 사람 자르기 쉬운 건 아니잖아.”

이경석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준영 선생님은 워낙 속을 안 보이시니까 그렇다 쳐도, 함께 준비한 원장님까지 민정호에 대해 특별한 말씀을 안 하시는 거 보면 확실히 이상하긴 해. 사람 좋게 웃으셔서 그렇지 보통 예리한 분이 아니잖아? 사실 민정호도 권한을 강조하기만 하지 우리 영역을 침범한 적이 없긴 해.”

“지금은 서울 병원에서도 자금 관리를 관여해 몸 사릴 수도 있어요. 확실한 건 개원해야 알 수 있는 일이죠. 진상건이 우리를 겨냥해 뽑은 사람이라는 걸 잊으면 안 돼요.”

신현수는 조금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전담 병원의 존폐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계약 내용이 문제지 민정호도 현재까지는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수단과 방법이 잘못됐다면 옳고 그름의 문제가 될 것이다.

“어쨌든 희한한 사람이야. 속을 저렇게 감추기도 쉽지 않잖아?”

“이준영 선생님하고 비등비등하긴 한데 한 분은 묵직하고, 한 놈은 음흉해서 문제네요.”

전체적인 느낌이나 판단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송재덕 교수의 원장 임명과 김지훈을 대한 태도가 미묘한 시각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사실 진료에 방해되는 일을 하지 않고, 재정을 빼돌리지 않는 이상 민정호를 욕할 일은 없었다.

물론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긴 했다.

긴장 늦추지 않고 지켜볼 일이었다.

그 시간, 진상건이 민정호를 호출했다.

얼굴을 찡그린 채 연신 혀를 찼다.

“민 부원장, 김지훈이 단박에 거절했어. 싸가지 없이 건방진 소리까지 해 대는데 가관이더군.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어디서 이사장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려고 해?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드는 놈 천지야. 하여튼 송재덕 교수 건도 자네 뜻을 따랐지만 느낌이 좋지 않아.”

“송재덕 교수님은 영향력이 적지 않은 데다 친화력까지 대단한 사람입니다. 파벌이라도 생기면 병원 운영에 큰 차질을 빚고도 남습니다. 이사장님께는 그 편이 도리어 유리할 겁니다.”

“알고 있어. 의사 하나 내 마음대로 자르지 못한다는 게 화가 나서 그래. 대책은 확실히 세운 거겠지?”

“생각 중입니다.”

진상건의 눈이 사나워졌다.

“운영비를 최대한 깎았는데 생각할 게 뭐가 있어? 일회성으로 소모되는 물품이 한두 개야? 주삿바늘 하나에 십 원씩만 더 붙여도 휘청거릴 상황이잖아. 성공 보수는 넉넉히 생각하고 있으니까 일 년 내에 처리해.”

“주삿바늘이라! 사소하지만 의료보험 수가를 고려하면 타격이 되겠군요.”

“아마추어도 아니고 선수가 왜 이래?”

민정호는 진상건 앞에서도 표정을 일절 보이지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인지 진상건이 찌푸린 얼굴을 펴지 못했다.

“이제 열흘도 안 남았어. 그 전에 전문 병원을 확실하게 처리할 계획을 세워 이행해. 이왕이면 찍소리 못하게 한 방에 보내 버려.”

“저도 그러고 싶지만 만만치 않네요. 이사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계약 기간도 이 년으로 잡으신 것 아닙니까?”

진상건이 눈가를 찌푸리며 턱을 매만졌다.

‘그놈의 말투는 갈수록 애매모호해지네. 이런 일에 민정호 이상으로 능력 있고, 냉철한 놈이 없는데 뭐가 거치적거리는 거지? 제길! 크지도 않은 병원 하나 때문에 신현수를 이 년이나 두고 봐야 한다니 웃긴 노릇이야.’

어차피 자신 대신 손을 더럽히라고 부른 민정호였다. 계약을 정확하게 이행한 후 약속된 돈을 지급하면 다시는 병원에 관여할 위치도 아니었다. 행여 불법적인 일이 불거져도 계약에 따라 진상건 자신에게는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도록 조치했다.

“병원과 사업체가 다르다는 점은 나도 인정해. 하지만 자네 능력을 더 믿어.”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성공 보수도 계약서에 명시해 주시죠. 말로 한 약속은 법적 구속력이 없지 않습니까?”

진상건이 씨익 웃었다.

‘지지부진해 보였던 이유가 이거였어? 역시 돈을 무엇보다 우선하는 놈이야. 나도 깔끔한 거래를 좋아하니까 원하는 대로 해 주지.’

“내일 아침에 바로 도장 찍지.”

“감사합니다. 할 일이 많아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민정호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진상건이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고수익에는 고위험이 따르는 법이지. 계획대로 된다면 이 정도 돈은 푼돈에 불과해.’

최대 이 년 내에 전문 병원 혹은 신설 병원의 존폐를 확실하게 결정한다는 계약서가 팔랑팔랑 흔들렸다.

***

계절이 바뀌기 시작했다.

마지막 근무 날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임시 개원 첫 주는 병원 시스템을 점검하는 동시에 직원 교육 시행이 예정돼 있었다. 간 이식, 췌장, 담도 전문을 표명한 만큼 의료진 보수 교육이 특히 중요했다.

김지훈, 윤석진, 윤서연, 조진형이 임상 부분 교육을 맡았다. 필수적으로 설치해야 하는 응급실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도 고민거리였다.

“김 교수, 어떤 수술을 해도 갑자기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니까 응급실을 운영해야 하긴 하는데, 일반 환자까지 모두 볼 수는 없잖아?”

“맞는 말인데 응급 환자가 문제야. 잘못 받았다간 전문 병원 이미지가 깨지고, 안 받자니 이송 중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서 무척 애매모호하네.”

“어차피 내과, 외과 환자밖에 못 보니까 둘이 알아서 결정해. 아! 마취과도 껴야 하나?”

역시 의사들만 모여 개원 준비를 하기에는 상당히 벅찼다. 행정적인 부분을 빼고도 산적한 일이 많았다. 다른 사람으로 충분히 대체 가능하긴 해도 민정호 역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간호과도 무척 바빴다.

간호사 직무 관리까지 계획하고, 담당해야 하는 고경아를 중심으로 자료를 만들며 구슬땀을 쏟았다. 김지훈의 요청에 따라 입원실, 중환자실, 수술실, 응급실의 유기적인 환자 연계에 방점을 두었다.

김지훈에겐 고되면서도 즐거운 일이었다.

“경아 씨, 수술 방 간호 선생들 교육은 하던 대로 하면 되겠지만 다른 파트는 힘들죠?”

“경험 풍부한 수선생님들이 계시잖아요.”

“다행이네. 그래도 요즘 나보다 늦는 걸 보면 상당히 머리 아픈 모양이에요.”

찌릿! 찌릿!

“그동안 대부분 누가 늦게 왔는지 따져 볼까요? 난 당직 때 이외에는 늦은 적이 없고, 오프 때 친구도 제대로 못 만나는데 억울해요?”

직장과 육아에 간호학과 교수 준비도 모자라 새로운 병원 교육까지 담당한 고경아가 김지훈보다 훨씬 힘들 수밖에 없었다. 고경희도 바빠 희연이를 봐달라는 소리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스트레스받으면 날카로워지기 마련이었다.

좋은 뜻마저 오해할 수 있었다.

이럴 때 맞받아치면 싸움 난다.

김지훈이 바짝 엎드렸다.

“아니, 뭐 혼잣말한 건데 발끈하고 그러세요. 마님, 다행이라는 말에 집중해 주세요. 혹시 목이 마르진 않으신가요?”

음료수 한 잔, 고경아가 야금야금 수시로 먹는 과자 몇 개, 써전의 솜씨로 깎은 과일까지 정갈한 다과상을 내온 후 마님의 뭉친 어깨를 주물렀다.

다행스럽게도 빨리 풀렸다.

웃음을 참는 고경아의 볼이 빨개졌다.

‘휴! 다행이다.’

부부가 같은 직종, 같은 직장에 근무한다는 것이 꽤나 불편할 수도 있지만, 하기 나름에 따라 극복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었다.

정이든 뭐든 어떻게 부르든 간에 말이다.

오도독 과자를 씹던 고경아가 돌연 한숨을 쉬었다.

“지훈 씨, 이번 주말 당직이죠?”

“하필이면 마지막 주에 딱 걸렸네요. 거기다 원장님과 스승님께서 일과 끝난 후 긴히 할 말씀이 있다고 하시네요.”

“좀 늦은 것 같지 않아요?”

“무슨 말씀 하실지 아는 사람 같네요?”

“대충 짐작은 돼요.”

“신이 내렸나? 뭔데요?”

고경아가 과일 한쪽을 들고 입을 열 듯 말 듯 묘한 눈으로 생글생글 웃었다.

“원장님, 부원장님, 행정 직원 보직, 우리 간호과까지 다 정해졌는데 선생님들만 빠졌잖아요.”

“아! 과장!”

갑자기 후끈 달아올랐다.

내과, 마취과, 방사선과야 인원이 적어 누가 맡아야 할지 빤히 보였지만, 외과 대상자는 서열상 사인방 중 한 명이 맡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자리가 하나는 아니었다.

전문 병원을 표방했다고 해서 간담췌 관련 질환만 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일부러 찾아오는 환자나 응급 환자를 막을 수도 없을뿐더러 야간에 시행하는 복강경 수술이 상당한 변수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과장 말고도 응급실장이 있었다.

김지훈에게도 욕심이 있었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스승에게 배웠다고 해서 똑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더욱이 전문 병원 설립을 위해 노력하는 동안 의료 외적인 능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또한 영원한 라이벌들과의 경쟁의 연장선이라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다.

언젠가 해야 한다면 보다 젊었을 때 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했다. 관건은 과연 어떤 자리가 가장 명예로우면서도 실권이 있는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과장이었다.

‘야! 이거 생각 이상으로 욕심나네. 일석이에게 한 말이 있지만, 그건 혼자 갔을 때 얘기지 지금은 적용할 이유가 없어. 진료 부장은 내과 몫이고, 응급실장과 과장만 남는다면 선택은 하나밖에 없지. 내가 과장이 되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음흉한 미소를 짓던 김지훈이 돌연 쩝쩝 입맛을 다시며 한숨을 쉬었다.

사인방 각자의 생각과 요구는 관건이 아니었다.

결정은 원장과 부원장의 몫이었다.

사인방의 능력이 비등비등한 이상 결국 가장 강력한 후보는 수제자를 자처하는 김지훈 자신과 이경석일 것이다. 그게 세상 이치고 인지상정이지만, 팔이 반드시 안으로 굽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이준영 교수의 팔은 밖으로 굽고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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