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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056화 (1,056/1,329)

2화

곧 떠난다고 해서 일상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떠난 자리를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말처럼 마무리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분주한 한 주의 중반이 지났다.

더 이상 신경 쓸 일이 없을 줄 알았건만 신현수가 눈가를 찌푸리며 연신 혀를 찼다.

“왜 그래?”

“그동안 잠잠하더니 지난 며칠 진상건과 민정호가 부쩍 자주 만나고 있어. 한 달도 안 남았는데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어.”

“송재덕 선생님까지 나서서 미진한 일을 다 처리했는데 이제 와 뭘 하겠어?”

“왠지 불안해.”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찜찜했다.

진상건은 물론 구조 조정 전문가였던 민정호의 전력을 생각하면 의사가 감당하기에 분명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가장 큰 힘이 있는 자와 어떤 분야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가 만나 작당을 하는 순간 의사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문제를 키우고도 남았다.

스멀스멀 불안감이 치솟았다.

주말을 앞둔 날이었다.

소식 하나를 들었다.

사인방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놀라다 못해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전문 병원 의사 보직 중 진상건의 입김이 직접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자리는 원장과 부원장뿐이었다. 이사회의 승인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들려온 소식에 사인방은 물론 일반외과 구성원 모두 분개했다. 불과 삼 주 정도 남은 시점에 이준영 교수를 부원장으로 재임명한 것이다.

일종의 강등이었다.

아무리 보직에 욕심이 없다 해도 자존심을 크게 건드리는 결정이었다. 아니, 인격 모독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곧바로 이어진 후속 발표에 사인방 모두 서로의 얼굴만 보다 환호성을 지르고 말았다.

“송재덕 선생님을 원장님으로 임명한다고?”

천군만마를 얻었다.

도대체 진상건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중요하지 않았다. 일반외과의 정신적 지주가 함께한다는 사실 자체가 전율이었다.

사인방이 후다닥 달렸다.

송재덕 교수의 교수실에 이미 많은 교수들이 모여 있었다. 이준영 교수도 무뚝뚝한 얼굴로 자리를 차지한 채 입가를 씰룩거렸다.

엄청나게 즐거운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물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허허! 허허! 알다가도 모르는 게 세상이라더니, 나도 얼떨떨하다. 얼떨떨해. 서울 병원에서 아예 쫓아내려는 건지, 전문 병원 가서 고생하라는 건지,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다. 유리한 일만은 아니다. 아니야.”

“선생님까지 오시면 전문 병원이 훨씬 더 잘 돌아갈 텐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물론 도움이 되겠지. 아마 이 교수와 함께 전문 병원 준비를 한 게 영향을 줬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거야. 분명 그럴 거야. 내게 들어갈 비용까지 생각했겠지. 내 월급이 좀 된다. 돼.”

“예?”

난데없는 월급 얘기에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이혁민 교수가 피식 웃었다.

“내 생각은 이렇다. 그동안 원장님께서 알게 모르게 큰 도움을 주셨다. 당연히 원장님의 숨은 영향력과 힘을 봤겠지. 그런 분이 서울 병원에 계시다고 해서 전문 병원과 소통을 안 하시겠나? 끈이 있으면 도움이 된다는 것이 세상 이치다. 이사장은 아마도 그 점을 심각하게 우려했을 거야.”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 몰라도 송재덕 교수가 얼마나 동분서주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간 이준영 교수가 내린 단호한 결정에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런데 월급은 왜?

“월급도 그래. 책정된 일 년 치 운영비가 상당히 빠듯한 이상 어떻게든 비용을 줄여야 하는데, 원장님이 계시면 그 돈이 얼마인 줄 아나? 감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마라. 부담이 되고도 남을 거다.”

“그럼 좋은 면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웃음이 터졌다.

“왜 없겠나? 때론 존재 자체만으로도 힘이 되는 사람이 있다. 더구나 능력까지 갖추셨다. 이준영 선생님도 행정적인 일에서 벗어나 진료에 집중하실 수 있을 텐데 그보다 큰 득이 어디 있나? 이사장이 너무 머리 쓰다 헛발질을 한 거야. 후회할 기다.”

“원장 하시는 동안 여러 병원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으셨으니까, 전문 병원이 궤도에만 오르면 환자 섭외도 꽤 하실걸?”

단서를 달았지만 신기동 교수까지 낙관적으로 보았다. 그렇다는 얘기는 의심할 여지없이 좋은 일이었고, 진상건은 분명 치명적인 판단 착오를 일으켰다는 말이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갸웃거렸다.

의료 쪽에는 문외한이라지만 진상건이 이해득실을 따져 보지 않았을 리 없었다. 경험 풍부한 김병오 이사까지 있는 마당이었다. 정말 서울 병원과의 부분적 단절과 추가 소요 비용만이 손해인지 심각하게 판단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손해는 없는데 이런 결정을 한 이유가 뭐지? 분명 민정호도 동의했을 텐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혹시 신임 원장인 성형외과 과장님과 알력이라도 생긴 걸까?’

답 없는 일에 머리만 복잡해졌다.

손일석이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사람이 너무 욕심을 부리면 반드시 탈이 난다더니, 한마디로 제 꾀에 제가 넘어갔다는 소리네요. 우리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확실하게 대가를 치르게 해야겠습니다. 아! 고맙다는 선물을 보내야 하는 상황인가요?”

“일석아, 너무 성급한 거 아니니? 그러다 체한다. 체해. 내가 가서 얻는 득보다 손해에 집중해야 한다. 그걸 만회하는 길이 뭐겠니? 너나 나나 열심히 하는 거다. 열심히. 남은 기간 신 교수가 가진 것을 다 빼먹어야 한다. 현수하고 경석이도 마찬가지야. 너희들 어깨에 전문 병원의 미래가 걸려 있어. 아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원장님 말씀이 맞다. 서울 병원은 우리가 있으니까 니들은 자신이 할 일에만 집중해라.”

진상건이 입을 열지 않는 한 이유를 알 길이 없었지만 확실히 전화위복이었다. 송재덕 교수의 전문 병원 원장 취임은 숨은 의도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이준영 교수의 어깨를 짓눌렸던 무거운 짐도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앞날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았다.

사인방의 가슴이 활활 타올랐다.

카르페 디엠!

***

토요일 오전.

김지훈이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세상 일 참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젠 얼굴 볼 일 없을 줄 알았던 진상건이었다.

들려온 목소리만으로도 얼굴이 구겨졌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습니까?”

뜻밖에도 단독 면담을 요청했다.

이준영 교수나 신현수를 비롯해 다른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아 상당히 의아한 일이었다. 솔직히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하지만 아직 서울 병원 소속이었고, 상대는 이사장이었다. 그깟 면담 하나로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현수야, 무엇 때문에 보자고 하는 걸까?”

“글쎄. 십중팔구 병원 문제긴 하겠지만 이사회 때 마주쳐도 별말이 없었어. 널 왜 혼자 보자고 하는지 모르겠네. 어쨌든 송재덕 선생님 일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 무슨 말을 하는지 확실하게 듣고, 성급하게 답을 하면 안 될 것 같다.”

“지훈아, 고민할 일 아니다. 지금 와서 뭘 어쩌겠어? 일단 만나 보고 대책을 세워도 늦지 않아.”

이경석 말도 맞았다.

부딪쳐 봐야 알 일이었다.

얼굴 보기 싫은 사람일수록 행색이 중요한 법이었다. 의사로서 만난다는 사실을 강조할 겸 깨끗한 가운으로 갈아입은 김지훈이 넥타이를 고쳐 맸다.

진상건과 마주했다.

향기 좋은 커피를 내오며 자리를 권했다.

시간이 얼마가 지나든 기분 좋을 자리가 아니었다. 사람 미워하지 말라지만 핵심만 듣고 얼른 뜨는 것이 정신 건강에도 무척 이로웠다.

김지훈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토요일인데 바쁜 모양입니다. 그럼 나도 바로 말씀드리죠. 지난 세 달만이 아니라 그 전의 실적까지 꼼꼼하게 살폈습니다. 솔직히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더군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여러 여건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병원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일해 주다니 아주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김 교수님께만 특별한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김지훈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진상건이 바짝 당겨 앉았다.

관심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내부에서 숙고한 결과 유학을 제외한 모든 대우가 적절치 않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능력을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공헌이 큰 분이라면 나이에 관계없이 은퇴까지 정년이 보장되는 정교수가 돼야죠. 실적에 따른 합당한 대우를 해야 한다는 것이 내 방침입니다. 그래야 다른 교수들도 자극을 받지 않겠습니까? 살펴보시죠.”

한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내용을 살핀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가히 대가라 소문나 어마어마한 환자가 대기하는 의사에게만 해당될 특급 대우를 제시했다. 모르긴 몰라도 이준영 교수 정도는 돼야 이 정도 대우를 받을 것이다.

‘이제 부교수인 내게?’

진상건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 특히 이제부터 돈 들어갈 일만 남은 나이 때는 더욱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지. 민정호가 전담 병원에 가장 필요한 사람으로 널 지목한 이상 신현수에게 이 이상의 타격은 없을 거야.’

김지훈이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확실히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를 대도 과도한 대우에는 감당 못할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었다. 순간 진상건의 의도가 무엇인지 떠올랐지만 본인의 입으로 들어는 보고 싶었다.

“무슨 의미입니까?”

“다른 의미가 있겠습니까? 내가 이제야 김 교수님의 진가를 인정한 것뿐입니다. 지금처럼만 하면 최연소 과장에 최연소 원장까지 앞길을 환하게 열어 줄 용의도 있습니다. 그간 이사장으로서 할 일이 너무 많아 살피지 못했던 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사탕발림 나왔다.

모든 의사들의 지지와 존경이 필요한 원장 자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만 봐도 빤한 일이었다.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송재덕 교수를 원장으로 발령한 것 또한 비슷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진상건을 보다 자세히 알 기회일 수 있었다.

“전담 병원 개원이 한 달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이면 인생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결정만 내린다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불리할 일이 조금도 없는데 망설일 이유가 있을까요?”

“제 파트에 새로 오기로 한 선생님들이 이미 결정됐다고 들었습니다.”

진상건이 웃었다.

“능력에 따라 대우를 받겠죠.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누군가 판단을 잘못한 대가를 치르겠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어디에서도 내가 제시한 대우는 받지 못할 겁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문질렀다.

의도가 너무 빤히 보였다.

실력과 능력에 열정까지 갖춘 의사를 확보하겠다는 의지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주역이 될 써전을 빼돌려 전담 병원이 망하길 바라는 생각뿐이었다.

신현수의 몰락이 최종 목적일 것이다.

‘현수와 돌아가신 아버님에게 어떤 원한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어디까지 갈 셈이지?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잘 알 텐데 이제 와 이런 제안을 하다니 너무 비열한 사람이다.’

진상건의 제안은 덫이자 함정이었다.

미끼 역할은 더더욱 사절이었다.

자존심까지 걸린 이상 당장 한 소리 하고 거절해야 했지만 순간 스친 생각에 도리로 침착해졌다. 진상건이 상당한 위기를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착각이라 해도 무엇인가 여의치 않다는 사실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김지훈 자신의 존재가 무척 위협적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스승님과 날 그렇게 무시해 놓고 이제 와 이런 소리를 한다면 당신도 날 인정했단 말이지? 그런데 그걸 돈 하나로 사려고 해? 솔직히 돈은 욕심나지만 민정호나 당신이나 우리를 잘 모르네.’

민정호가 계산기를 두드렸을 것이다.

보고를 받은 진상건은 의외의 결과에 놀라 씨도 안 먹힐 제안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송재덕 교수의 원장 임명도 민정호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다. 유불리를 어떻게 따졌는지 몰라도 진실에서 크게 벗어난 생각은 아니라 여겼다.

왠지 웃음이 나왔다.

얼굴 붉힐 이유조차 없었다.

도리어 담담하게 대하는 것이 더 강한 영향을 줄 것이다. 진상건에게 감정적 동요를 일으킬 수 있다면 유리하면 유리했지 불리할 일이 없었다.

김지훈이 미소를 머금었다.

‘누굴 돈으로 사려고 해? 솔직히 현수 아버님께서 제안하셨다면 당장 사인했겠지만 당신은 아니야.’

진상건도 따라 웃었다.

“원한다면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계약할 수도 있습니다. 장기 계약을 맺는다면 그만큼 병원에 득이 될 테니 추가 조건까지 따라붙겠죠?”

“아닙니다. 거절하겠습니다.”

진상건의 미소가 싹 사라졌다.

“뭐라고요? 김 교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곳은 전문 병원이 아니라 서울 병원입니다.”

“제 인생은 제가 결정합니다. 사람을 돈으로 사려 하지 마십시오. 이런 제안은 도리어 이사장님 얼굴에 먹칠하는 겁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었다.

똥칠이라는 말을 간신히 참았다.

인간이 얼마나 비열해질 수 있는지 두 눈으로 보았기에 후련하면서도 찝찝했다.

가슴 펴고 당당히 걸어 이사장실을 나왔다.

그때 시커먼 그림자가 눈앞을 가렸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민정호?’

이 시간, 이 장소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진상건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들었다면 어떻게든 설득하려 할 것이 분명했다.

‘진상건이 말도 안 되는 수작을 부린 이유가 바로 너였구나! 계속 헛발질을 하고 있네.’

김지훈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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