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055화 (1,055/1,329)

1화

행정 직원 선발을 두고 미묘한 갈등이 유발됐다.

기존에 선발을 담당했던 서울 병원 직원이 여전히 업무를 유지했고, 선발 대상 개개인의 문제도 아니었다. 이준영 교수와 사인방이 전문 병원 설립을 주도하는 상황을 정상적이라 볼 수도 없어 일임하는 것이 마땅했다.

애초 불필요한 논쟁이었다.

그런데!

민정호가 노골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대학 병원에서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행정 부원장이란 직함이었고, 계약상 재정에 국한된 자리였다. 더구나 개인적으로도 신뢰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감정이 안 좋아 사인방 모두 한목소리로 반대했다.

아예 논의조차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예외는 없을 줄 알았다.

한 사람이 고개를 저었다.

놀랍게도 진상건조차 고지식하다고 판단한 이준영 교수였다. 씩씩거리며 불만을 토로하는 사인방을 앞에 두고 묵직한 몇 마디를 던졌다.

“최소 이 년은 봐야 할 사람이다. 전문 병원 내에서도 행정과 재정을 담당할 수밖에 없어. 이유를 막론하고 지금 피하면 앞으로도 피하게 된다. 적어도 만나는 봐야 해.”

일견 지당한 말이었지만 선발 업무를 충분히 대신할 사람이 있는 상황이었다. 정확한 의중을 알 도리가 없었다. 민정호가 어떤 인간인지 파악하려 한다는 의도 정도만 추측 가능했다.

“함께 만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너희들 모두 더 이상 다른 일에 시간을 뺏길 이유가 없다. 목표는 민정호가 아니라 너희들이 중추가 돼야 할 전문 병원이라는 사실을 명심해. 나 혼자 만나마.”

단호했다.

더 이상 의료 외적인 일에 시간을 투자하지 말라는 엄한 오더였다. 누구 한 명 바라 마지않은 일이었지만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사인방 모두 얼굴만 찡그렸다.

“행정적인 일인데 괜찮으실까?”

“두고 봐야지.”

김지훈이 돌연 눈가를 좁혔다.

“선생님 말씀이 옳아. 어쩌면 우리 모두 선생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는지도 몰라. 지금까지 간 센터를 문제없이 이끄셨잖아.”

“그러네. 이혁민 선생님과 과장님은 인정하면서 막상 가장 많은 일을 하셨을 송재덕 선생님의 행정적인 능력을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네. 그동안 이준영 선생님도 똑같은 시각으로만 봤어. 야! 내 촉이 이렇게 허술했었나?”

“같은 일을 두고도 우리만큼 다급해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있으셨겠지.”

뱁새가 황새 쫓다 괜히 다리 부러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중견 의사가 된 사인방은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았고, 스승들과의 차이는 그만큼 컸다.

가슴을 답답하게 했던 불안감이 서서히 옅어졌다.

이준영 교수가 단독으로 민정호와 만났다.

“이 교수님, 전권을 일임해 주십시오. 경영과 진료는 전혀 다른 영역입니다.”

“본인이 모두 결정하겠다는 말입니까?”

“최종 승인은 받겠습니다.”

이준영 교수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분명 반대를 예상했을 텐데 전권을 요구하며 노골적으로 치고 들어왔다. 방해를 위한 수단 중 하나인지, 정말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선발 기준을 알아야겠습니다.”

“일반 사업체와 다르지 않습니다. 기존 경력, 능력, 병원에 대한 사명감, 인성 등이 기준입니다.”

“본인의 눈을 믿습니까?”

“보는 눈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믿어 달란 말입니까?”

“전 재단을 대표하는 이사장님과 계약을 맺었고, 이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어떤 계약이죠?”

민정호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계약 조건에 비밀 엄수가 있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직원 선발에 이사장님의 입김은 작용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워낙 권한에 민감해서요.”

이준영 교수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오랜 경력을 더욱 빛나게 하는 당당한 체격과 무뚝뚝한 얼굴에서 절로 뿜어져 나오는 압박감에도 민정호는 동요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묘한 사람이야. 한 번 맺은 계약은 절대 어기지 않는다는 말이 거짓으로 들리지 않는군. 어떤 계약인지가 관건이지만 말이야.’

민정호가 어떤 의도를 가졌든 경영과 진료가 별개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입한다고 해서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근거도 없었다. 선발에만 국한된다면 재정 누수를 우려할 문제도 아니었다.

잠시 민정호의 눈빛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이준영 교수가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각자 잘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었고, 견제는 언제든 가능했다.

따라서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좋습니다. 행정 직원 선발 권한을 모두 드리죠. 단, 최종 승인이 아닌 최종 면접부터 함께 진행해야 합니다.”

“제 제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이신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민정호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무뚝뚝한 사람과 표정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냉철한 성격을 가진 사람의 자리였다. 대개는 서로의 의도를 알지 못해 질질 끌기 마련인데 예상보다 너무 빨리 끝났다.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귀찮거나, 문외한이라 할 정도로 관련 부분 경험과 지식이 없거나, 혹은 자신과 상대의 상황에 맞춰 정확하게 처신했을 때였다.

민정호 역시 이준영 교수가 어떤 사람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다만 적대적인 관계에서도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지극히 객관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의미의 다른 표현이었다.

‘이준영 교수가 과연 융통성이 없는 사람일까? 많은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처럼 오랜 기간 센터장을 역임했다는 이유가 과연 일반외과 특유의 분위기 덕분이었을까? 겉모습과 달리 유연하면서도 원칙에서 한 발도 물러나지 않은 성향이라면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분명해.’

문을 열던 민정호가 돌아섰다.

“아! 한 가지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를 본인 이런 식으로 지칭하지 마시고 행정 부원장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형식적인 권위에 불과하지만 직원들에겐 민감한 문제 아니겠습니까? 저도 앞으로 원장님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행정 부원장님.”

민정호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단순한 호칭 문제가 아니었다.

절차의 정당성을 넘어 상대가 현실적으로 점한 위치와 자리를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더구나 직제에도 없던 행정 부원장이라는 직함을 얻은 자신에게 말이다.

‘자존심을 굽힌 것이 아니야. 왠지 서늘해. 역시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어. 진상건 이사장님의 선택에 강한 의문이 생기는군.’

무뚝뚝함과 무표정이 소리 없이 충돌한 자리였다.

마주하는 내내 서로에 대한 탐색이 이어질 것이다.

각자의 목표에 상대가 부응한다면 대단한 상승효과를 내겠지만, 반대라면 둘 중 하나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도 남았다.

민정호가 목을 돌렸다.

‘오늘은 곧바로 동의했지만 예외일 수도 있어. 남은 기간 내내 피곤해질까? 하긴 내 일이 편한 일은 아니지.’

속마음과 달리 임시로 마련한 집무실로 향하는 동안 어떤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이 년 이내에 결판이 난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몰랐다.

“예? 정말입니까?”

이준영 교수의 결정을 들은 사인방은 난리가 났다. 모든 과정을 함께할 줄 알았는데 최종 면접 이후에나 관여한다니 옅어졌던 불안감이 다시 치솟았다.

김지훈만 꿋꿋했다.

‘스승님의 결정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면을 보시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셨을 거다.’

“선생님, 만에 하나라도 민정호가…….”

이준영 교수의 눈길이 신현수에게 꽂혔다.

말꼬리가 그대로 끊어졌다.

“신현수, 내 말 잊었어. 이젠 너 이외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과 환자에게만 집중해. 이사회 일은 내 소관 밖이라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 너희들도 마찬가지야.”

요즘처럼 말을 길게 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미안하다는 말까지 했다.

이준영 교수가 현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기 위해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틀린 말 하나 없어 사인방 모두 수긍했다.

자리를 끝내고 나온 김지훈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전공의 때부터 모든 것을 배워 왔지만 지금 역시 또 다른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그동안 한 번도 재단과 전담 병원 일에 집중하는 우리에게 뭐라고 하신 적이 없다. 이제는 다르다는 말이고, 상황에 따라 각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확실하게 파악해 매진해야 한다는 말씀이 분명해.’

이준영 교수의 판단과 결정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

현 상황에서 견지해야 할 목표와 원칙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의료인의 직분을 가장 우선시했다.

또한 스승과 제자는 결코 단순한 관계가 아니었다.

단 한시도 의사임을 잊지 말라는 말이었다.

***

째깍! 째깍!

갖가지 우여곡절 속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미리 준비할 것이 많았다.

근무 지역이 달라지는 만큼 생활 여건도 많은 변화가 예상됐다. 김지훈과 손일석은 이사를 결정했고, 형편에 맞는 집까지 계약했다. 이준영 교수, 신현수, 이경석은 피곤을 무릅쓰고 통근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환자 확보에 사활을 걸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수술이 필요한 환자의 치료를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 또한 환자에 대한 의무이자 도리였다.

그것이 오히려 신생 전담 병원에 도움이 되는 길이기도 했다. 어떤 명성과 실력을 가졌다 해도 무성의한 의사를 신뢰하긴 어렵기 때문이었다.

자신감 또한 적지 않았다.

이준영 교수의 힘은 막강했다.

악성 질환임에도 대기 목록에 이름을 올렸던 환자들 중 많은 수가 병원과 관계없이 수술을 받기로 했다. 물론 여건이 따르지 않는 환자들의 불만이 속출했다.

누구도 예기치 못한 일이기에 구두 약속을 전적으로 믿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상당수가 새로 올 의사에게 치료를 맡길 가능성도 높았다.

서울에 위치한 대학 병원을 볼까?

아니면 대가라는 사실을 중시할까?

결과는 예측 불가였다.

김지훈의 칼바람도 멈추지 않았다.

최근 반짝 건수가 늘었다 해도 다들 한 달에 한 건조차 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던 간 이식 수술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이 추세로 간다면 전문 병원 개원 직후 곧바로 간 이식을 할 공산이 높아졌다.

악성을 포함해 췌장, 담도, 담낭과 관련된 질환 역시 상당히 늘었다. 방송을 타며 많은 환자들에게 알려진 데다 췌장 복강경 수술의 준수한 결과가 큰 영향을 미친 덕이었다.

예약을 잡지 못한 환자들의 물음이 이어졌다.

“서울에서는 못 받는다고요.”

“제가 곧 전담 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합니다. 그때까지 수술 예약이 꽉 차 있어 불가능합니다.”

“여기서도 복강경으로 받을 수 있습니까?”

“같은 질환이라도 의사에 따라 판단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죄송합니다.”

갈등 속 제법 많은 환자들이 김지훈을 선택했다.

당연히 자신의 몸을 맡길 의사의 실력을 인정한 결과였다. 또한 일부 질환의 복강경 수술에 대한 찬반을 넘어 고통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자타공인의 대가인 이준영 교수조차 환자 확보를 확신하지 못했다. 환자의 선택 조건에 의사 말고도 많은 요인이 있다는 사실 또한 엄연한 현실이었다.

‘끝까지 충실해야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한두 사람의 힘으로 끌어갈 상황이 아니었다.

그럴 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직도 전담 병원 일로 바쁜 신현수를 비롯해 합류가 결정된 모든 구성원이 구슬땀을 흘렸다. 막연하기만 한 희망과 불안이 교차했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을 확신했다.

“이준영 선생님 수술은 아무리 자주 들어가도 힘들어. 김 교수, 저 자식도 정말 만만치 않아. 내가 왜 세부 전공까지 바꿔 가면서 이 고생을 하는 거지? 으으으! 이 분노를 어디다 풀어야 하나!”

“선생님, 진정하세요. 우리가 있잖습니까? 영원히 선생님 곁을 지키겠습니다.”

손일석의 투덜거림도, 혈관 수술을 들어갈 때마다 맹폭을 당하는 펠로우들의 절박한 아양도 모두 즐거웠다.

매일 땀을 흘리는 의료진과는 달리 민정호 행보가 다소 의외였다.

행정 직원 선발이 모두 끝난 후 마치 잠수라도 탄 것처럼 조용했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 자신의 직무와 전혀 상관없는 의료에 대해 묻거나, 이준영 교수에게 필요한 재가를 얻을 뿐이었다.

‘얼굴 안 봐서 편하긴 하다만 무슨 꿍꿍이야?’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났다.

어느새 개원까지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

김지훈이 새로 살게 된 집을 볼 겸 겸사겸사 내부 공사가 한창인 전담 병원을 찾았다.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건물이 반짝반짝 빛났다.

지은 지 오래된 서울 병원만 보다 풀풀 새집 냄새 날 병원을 보니 기분이 한껏 고조됐다. 이제 곧 간담췌 부분에 있어서는 굴지의 병원이 될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야 말 것이다.

“경아 씨, 다 잘될 것 같지 않아요?”

“걱정 많이 했는데 예정대로 개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간호 과장 역할을 잘할 수 있을까요?”

“무슨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해요? 고경아보다 잘할 사람 없다는 건 세상이 다 알아요.”

고경아가 겸연쩍어하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김지훈으로서는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일이었다.

‘이제 시작이구나. 마지막 남은 한 달 후회하지 않도록 알차게 보내자.’

기분 좋은 미소처럼 새로운 병원에도 밝은 빛이 깃들기를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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