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성형외과 과장이 원장으로 선임됐다.
응급실 부장은 정형외과로 돌아갔다.
능력만 된다면 어느 과가 맡아도 되지만 문제는 양해의 말은커녕 사전 통지 하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일반외과 내부 상황은 더 처참했다.
박승준 교수는 통상 병원에서는 절대 보지 못할 과장 직무 대리라는 희한한 처지에 처했다.
이준영 교수는 후임도 없이 센터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일각에서 전문 병원이 설립되는 이상 간 센터 자체를 빠르게 없애야 한다는 말까지 흘러나왔다.
명백한 보복이었다.
마치 하루아침에 손때 묻은 책상과 의자가 모두 사라져 버린 꼴과 다르지 않았다.
‘치졸한 놈!’
미래의 희망과 과거의 회한이 교차하는 하루였다. 사 개월 후면 진상건의 얼굴을 볼 일도 없었다. 하기에 각자 자신의 일에 더욱 충실해야 했다.
그 시간, 진상건과 민정호가 마주 앉았다.
“분위기 어땠어?”
“다들 의사더군요. 의욕만 앞섰지 실속이 없는 상태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독립 채산제는 그렇다 쳐도 원하는 바를 못 이루신 게 이상할 정도였습니다. 제가 모르는 내막이 있습니까?”
의외의 결과에 낭패를 면치 못했을 텐데 진상건이 크게 웃었다.
“크게 달라질 것은 없어. 애초에 설립 예정이었고, 부산 근방에 간 이식 전문 병원이 있다고 해서 알아보니까 고전을 면치 못하더군. 신현수 스스로 제 발등을 찍은 거야. 게다가 민 원장이 있잖아.”
“전 행정 부원장입니다. 계약을 이행할 뿐입니다.”
“확실하게만 이행해.”
“전문 병원 주요 보직은 결정됐습니까?”
“이준영 교수를 원장으로 낙점했어. 나머지 의료 보직은 신현수가 알아서 하겠지만 다들 애송이야. 누가 뭘 맡든 큰 의미가 있겠어?”
민정호가 뒤적뒤적 서류 한 장을 찾았다.
깨알 같은 글씨로 이준영 교수의 병원 내 평판, 인간관계, 학회 내 위치 등등의 정보들이 기록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김지훈과 신현수를 비롯해 전문 병원 주역들의 신상 정보까지 수집했다. 주관과 객관적 사실이 혼재돼 있었지만 민정호의 치밀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잘 알 텐데. 독립 채산제라고 해도 원장단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만큼 고지식한 사람이 누구보다 적임자야. 이준영 교수가 바로 그런 사람이지.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데다 서울 병원 일반외과 교수들을 보직에서 모두 쫓아냈어. 혹시 나나 민 원장 모르게 지원 요청을 할 가능성을 원천 봉쇄 한 거지. 시도조차 못할 테고, 설령 얼굴 맞댄다고 협의가 되겠어?”
민정호의 눈꼬리가 살짝 말렸다.
‘단일 분야만 따지면 서울 병원에서 가장 일이 많은 간 센터를 맡아 지금까지 문제없이 이끌어 온 사람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아닌가?’
“빠른 시간 내에 만나 봐야겠습니다.”
“왜?”
“제 일 아닙니까?”
“사 개월이나 남았어. 천천히 알아도 돼. 아! 장비 구입과 공사비 일부를 절감했다고? 겉으로라도 신뢰를 쌓아야 일이 편해지겠지만, 그 전에 망해도 상관없어. 보너스라 생각하고 챙겨도 돼. 기간을 앞당기면 성공 보수까지 약속하지.”
“마음에 드는 제안이군요. 굳이 대답하실 이유는 없지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해 봐.”
“이사장님은 공사가 확실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현수 교수님과 이렇게 대립하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아버님 일은 안타깝지만 병원 재단에 투자해서 얻는 이득이 거의 없잖습니까?”
진상건이 웃었다.
“내가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야. 물론 실익도 없는 일에 몇 년이라는 기간을 투자하고 싶지도 않아. 이자 톡톡히 받아 내야지. 그래서 거금을 들여 민 원장을 부른 거야.”
“따로 추진하시는 일이 있군요.”
“궁금해?”
“짐작은 하고 있지만 알아 두어야 할 일은 아닙니다. 전 계약대로 제가 해야 할 일만 정확히 수행하겠습니다.”
“이 년 내에 끝장을 내. 그게 진짜 내 뜻이야.”
“알겠습니다. 끝을 봐야죠.”
진상건이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민정호가 이준영 교수와 버금갈 정도의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인사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지만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 계약을 확실하게 이행하는 성격임은 분명해 보였다.
며칠 후.
병원 전체가 술렁거렸다.
한 장의 공고문이 여기저기 붙었다.
<네 번째 산하 병원으로 예정됐던 신규 병원이 간 이식 및 담도와 췌장 부분 전문 병원으로 변경 건립됩니다. 이에 경력 직원 및 신규 직원 채용을 알려 드립니다.
의료직.
내과 0명, 외과 0명, 방사선과 0명, 마취과 0명, 임상병리과 0명, 간호과 00명, 방사선사를 포함한 의료 기사 00명.
행정직.
총무과, 원무과, 기타 기술직 등 지원 부서 00명.>
다양한 의견을 보였다.
새로운 기회로 받아들이는 사람 이상으로 재단 내 싸움의 결과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누군가의 입을 통해 독립 채산제를 택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졌다.
이제 시작하는 병원이었다.
재정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당수 필요한 경력 직원의 눈에 진상건 체제하의 기존 병원과 신현수와 외과가 주도하는 신규 병원 중 어느 쪽이 안정적일지는 불을 보듯 명확했다.
소문은 본격적인 방해 공작의 시작이었다.
더욱이 당연한 듯 보이면서도 의외의 사실 하나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반응을 유발했다. 이준영 교수가 원장으로 취임하게 될 것이란 발표였다.
“이준영 교수님이 의사로서는 훌륭하지만 행정 능력은 부족하잖아? 독립 채산제라는데 월급도 못 받는 거 아니야? 승진 노리고 지원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다들 잘 생각해야 할 거야.”
“진료 부분에 있어서는 확실하게 밀어주시겠네. 신규 병원이란 점만 빼면 오히려 환경이 좋을 수도 있겠어.”
의료진과 행정직의 판단 자체가 다른 데다 장점보다 단점이 더 입에 오르내리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는 길이었다. 남은 사 개월 동안 자신의 일에 전력하는 것만이 답이었다.
헉! 헉! 헉!
사인방의 얼굴이 노래졌다.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우아아! 이렇게 일하고 수혜자 수술 팀 못 맡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우리 중 한 명은 구경만 해야 돼. 각오만 갖고 될 일이 아니야.”
“이준영 선생님이 그걸 노리신 게 틀림없어. 경석이 형, 지훈이는 예전에 물 건너갔고 현수를 잡죠. 행정적인 일을 모두 맡기면 배겨 날 재간이 있겠어요?”
“이준영 선생님 혼자 인원 선발 하시라고?”
“어흑! 그건 또 안 될 말이네.”
“그것보다 현수 살 빠졌다는 거 잊지 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느라 얼굴이 반쪽이잖아.”
“어흑! 결국 형을 잡아야 하네. 미리 죄송합니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시간이 허락될 때마다 이준영 교수와 신기동 교수 수술을 들어가야 했다. 슬슬 하나의 목적으로 뭉쳤던 친구가 아니라 반드시 꺾어야 할 라이벌로 변하고 있었다.
더구나 전문 병원 개원 전까지, 혹은 자신들을 대체할 의사들을 뽑기 전까지 기존 파트 업무를 조금도 줄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애초 이준영 교수의 요구에 담긴 속뜻을 무시하지 못한 김지훈도 쓰러지기 직전까지 몰렸다.
‘간 이식 수술 팀 세 개를 확실하게 만들려면 사 개월로는 정말 부족하다. 콕 집어 말씀하시진 않았지만 결국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다. 간 절제부터 혈관 수술까지 더 배워야 가능해.’
자청해 수술을 들어갔다.
복강경을 포함해 췌장 질환으로 수술을 요하는 환자는 물론 담도 혹은 극히 드문 담낭암 환자까지 툭하면 내원해 수술하는 날이면 식사조차 거르기 일쑤였다.
결국 교수 네 명이 전공의로 변신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수술 팀 구성원과의 차이가 크다면 한 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전담 병원 근무가 예정된 후배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이준영 교수도 다르지 않았다.
방향이 다를 뿐 함께 일할 만한 의료진을 수시로 만나 자신의 뜻을 전하며, 비전을 제시했다. 외과 구성원에게는 아주 익숙한 일이었지만 짧기만 한 말투가 어떻게 들릴지 모를 일이었다.
“외과 병원이 아니라 우리의 병원이다.”
대부분 이런 말로 끝이었다.
의외로 효과가 어마어마했다.
윤서연이야 신현수와 운명공동체나 다름없어 가장 먼저 합류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김진호 교수가 자원했다.
“음성 병원에서부터 쌓은 인연이 가볍지 않아서 나도 어쩔 수가 없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대단한 믿음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김진호 교수의 합류가 기폭제가 된 듯 속속 의료진이 결정됐다.
내과 윤석진과 공정식, 방사선과 소속 조진형에 임상병리과를 비롯해 각 과 신임 펠로우까지 결정됐다. 졸지에 장래가 창창한 교수들을 잃게 된 해당 과 과장들도 개인의 의사를 십분 존중했다.
무엇보다 외과 진영이 빠르게 정해졌다.
이준영 교수와 사인방, 서도진, 서도훈, 안호석, 강병옥, 이혁원, 나종진, 송진우까지 도합 열두 명이었다. 최소 네 개의 수술 팀을 꾸릴 수 있는 인원에 개개인의 실력도 뛰어나 더 이상 보강할 필요가 없었다.
재정 문제로 신임 펠로우를 뽑지 못하는 점이 아쉬웠지만 당장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대신 대학 병원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전공의를 얻었다.
고경철이었다.
서울 병원도 인원이 모자라 단 한 명뿐이었다. 다른 분야는 파견 형식을 빌려 수련하게 될 것이다. 교수들과의 인연이 끊어질 수 없었다.
‘후우! 이 년 차는 새로운 병원에서 시작하겠구나. 어차피 혼자 일해야 하고 기대도 되는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물어 뭐 할까?
운명은 이미 정해졌다.
그래도 위안될 만한 일이 있었다.
간호과에서 놀라운 결정을 내렸다.
고경아를 전문 병원 간호과장으로 추천한 것이다.
물론 유학을 다녀온 실력파에 수간호사로 승진할 수 있는 경력을 쌓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는 점까지 감안해도 뜻밖의 결정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경아 씨, 축하해요. 승진이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드디어 빛을 보네요.”
고경아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좋은 일만은 아니에요.”
“왜요?”
“교수 신분을 겸한 선생님들은 임의대로 퇴직시키지 못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어요. 펠로우 선생님들은 임용 기회라도 있죠. 우리 간호사들과 일반 직원들은 병원 망하는 순간 바로 실직이에요. 위험부담이 그만큼 크단 말이에요.”
“간호사 선생들이나 의료 기사 분들은 서울 병원으로 다시 못 가나요?”
“가능한 선생들도 있겠지만 간호 부장이나 과장까지 한 사람에게 줄 자리가 어디 있다고 다시 부르겠어요? 평간호사로 간다고 해도 안 받아 줄 거예요.”
김지훈이 잠시 말을 잃었다.
얼굴도 잘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일자리가 달린 상황이라는 것을 새삼 절감했다. 각자의 선택이라지만 누군가의 안일함으로 누군가의 삶이 깨지고도 남았다.
‘정말 열심히 해야 되겠어.’
“경아 씨, 걱정하지 말아요. 스승님과 우리 사인방이 있는 한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참! 간호학과 교수 선발은 어떻게 한데요?”
“진행은 되고 있는데 경쟁이 엄청나요. 쟁쟁한 분들도 많고요. 그러니까 나 실직자 만들면 알죠? 믿어요. 그리고 이번 주말에 절대 약속 잡지 말아요.”
“이것저것 일이 있을 수 있는데 왜요?”
“집 알아봐야죠. 희연이 보낼 초등학교까지 생각해야 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돼요. 경희네도 같이 갈 거니까 잊지 말아요.”
고경아의 눈빛이 으스스했다.
단순히 직장 옮기는 일이 아니라 삶의 터전까지 바꿔야 하는 상황이었다. 남편이자 아빠로서 약속을 어겼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사실은 덤이었다.
어쨌든 의료진 선발은 모든 면에서 뜻밖일 정도로 수월했다. 과를 불문하고 저마다 일종의 갈망이라 할 꿈이 있었고, 이를 실현할 기회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내과, 방사선과, 마취과 역시 보다 특화된 전문 분야가 있었다. 간 질환에 관심이 많았다면 전문 병원을 통해 이를 채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물론 일반외과가 독단적으로 병원을 끌고 나가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만약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미련 없이 병원을 떠날 것이다.
“합류할 의료진에게 외과 병원이 아닌 우리의 병원이라는 점을 일일이 말했어. 어떤 경우가 닥쳐도 이를 잊지 마. 결코 외과만으로 끌어 나갈 수 없는 병원이야.”
이준영 교수가 마주할 때마다 누누이 강조했다.
사인방을 포함해 누구도 이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어디서나 터지기 마련이었다. 재단의 전폭적인 지원과 협조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더욱 심각해질 수 있었다.
우려가 현실이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충돌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