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신현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수없이 보아야 할 사람이지만 개원 후에나 만날 일이었다. 더구나 진상건과 한통속인 이상 껄끄럽다 못해 마주치는 일조차 피하고 싶은 관계였다.
그런 사람이 먼저 찾아왔다.
도무지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김지훈이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시기가 문제일 뿐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이 제 발로 찾아왔다. 냉철함을 잃은 신현수를 보는 순간 민정호라는 사람을 자신에게 맡긴 또 다른 이유를 알았다. 심지어 손일석과 이경석도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감정을 배제하기 어렵겠지만 그건 내가 더 심하지 않나? 근데 오늘따라 유난히 마음이 차분해지네.’
“반갑습니다. 김지훈입니다. 앉으시죠.”
민정호의 첫인상은 냉정 그 자체였다.
신현수 저리 가라였다.
날카로운 눈매에 다소 마른 데다 일체의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많이 봐야 삼십 대 후반에 불과한데 진상건의 추천을 받았다면 대단한 능력자이거나, 아부가 극에 달해 표정까지 감출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이번에 신규 병원 행정 부원장으로 임명됐습니다. 제 역할은 재정 효율성을 관리 감독하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었으면 합니다.”
이름 소개가 인사의 다였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본론부터 꺼냈다.
원래 그런 인간인지, 어차피 좋은 관계를 형성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철저하게 감정을 배제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현수를 보니 행정 부원장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 얼굴이 아니네. 몇 가지 조건이란 게 이런 거였어? 행정 부원장이란 직함까지 만들다니 정말 답이 안 나오는 인간이네.’
김지훈도 끌려 다닐 생각이 없었다.
“행정 부원장이요? 처음 듣는 소리지만 재단의 결정이라면 따라야겠지요. 실례지만 여기 오시기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주로 구조 조정을 담당했습니다만 불필요한 질문입니다. 앞으로 일과 관련이 없는 사적인 대화는 삼가 주셨으면 합니다.”
첫인상 틀리지 않았다.
바늘 하나 들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구조 조정의 전문가라면 진상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전문 분야가 완전히 다른 강적을 만났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알겠습니다. 아직 만날 이유가 없는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한 가지 요청을 하기 위해 왔습니다.”
“말씀하시죠.”
“지금 이 시간부터 신규 병원과 관련된 모든 예산 집행 권한을 제게 주십시오. 이사장님과 상의해 기존 담당 부서는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진상건의 눈과 귀일 대리자의 말이었다.
불순한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방금 전 이 자리에서 진상건이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 개입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현수가 움찔거렸다.
김지훈이 지그시 무릎을 눌렀다.
상대의 의도가 너무 눈에 환히 보이는 탓인지 이상스럽게도 차분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현수야, 흥분하면 안 돼. 침착하게 대응해야 해.’
“동의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 않습니까? 전문 병원 설립에 방해가 될 만한 일은 사양합니다.”
듣는 입장에서는 분명 기분 나쁜 말이었다.
민정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이해합니다.”
힐끗 시선을 주며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이사장님께 연락을 받은 지 제법 됐습니다. 그동안 병원 예산과 공사 진척 상황을 파악하며 준비한 결과 의사가 담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기존 행정 부서가 있습니다.”
“집행에만 신경 쓸 뿐 누구도 예산을 아낄 생각이 없더군요. 그래서 준비한 자료입니다. 검사 장비 구입의 실제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 기안에 문제가 있습니까?”
“X-ray, CT, MRI, SONO(초음파 기기) 등 장비 구입에 총 54억을 요청하고 승인했더군요. 이 정도 지출이 합당하다고 보십니까?”
“CT나 MRI는 기본적으로 고가 장비인 데다 간 이식 특성상 초음파까지 모두 정밀한 기기가 필요합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성능이 비슷하면서 저렴한 제품이 있었습니다. 한정된 예산으로 병원 건립하고, 유지해야 합니다. 44억 이상은 안 됩니다.”
장비의 유용성을 잘 알고 있는 김지훈이었다.
무려 10억을 감액한다면 품질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민정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전문가도 아니면서 이미 결정된 사안이라는 태도였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장비에 투자를 아끼면 안 됩니다.”
“그럼 인건비를 줄일까요?”
말문이 턱 막혔다.
“이해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제시한 한도 내에서 적절한 제품 선택을 다시 해 주십시오. 제가 왜 지금부터 총괄해야 하는지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중환자실은 물론 수술실과 입원실 공사비가 상당합니다. 설비 때문이겠지만 비용 절감할 방안이 있습니다.”
더더욱 의사가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질문조차 하기 쉽지 않았다.
“공사 발주처를 바꾸면 됩니다. 이 문제는 신 이사님께서 답을 주셔야 할 사안이라고 봅니다.”
사인방이 어떤 사람인지, 각자 무슨 역할을 할 것인지 철저하게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만큼 의사의 한계와 약점을 환히 꿰뚫고 있다는 말이었다.
비상 상황이었다.
신현수가 매서운 눈빛을 되찾았다.
“회사를 바꾼다고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제가 맡은 일은 안정적인 재정 운용입니다. 예상되는 실적과 비용을 추산한 결과 일 년 치 운영비 확보로는 이후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폐업과 직결될 구조 조정을 원하십니까?”
사인방 모두 눈가를 찡그렸다.
공사 부분은 당연히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리베이트가 어마어마한 분야라는 사실은 들어 알고 있었다. 장비 부분은 몰라도 이를 이용해 민정호와 진상건이 이득을 취하고, 수작까지 부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공사 경험이 많은 회사입니까?”
“도면대로 정확하게 시공하는 것이 핵심이지만 경험도 중요하겠죠. 다만 어느 업체든 경쟁을 붙이지 않으면 이익을 과도하게 부풀리기 마련입니다. 관성에 젖어 가장 중요한 요소를 배제했더군요.”
마치 질문을 사전에 알기라도 한 것처럼 답했다.
한마디로 강력한 벽이었다.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극명한 차이였다.
“추가 설명이 더 필요합니까? 한계를 인정하고, 애초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 겁니다. 재정 여력이 없는 독립 채산제를 택한 건 신 이사님의 결정이었습니다.”
정말 병원을 위해 일할 사람이라면 당연히 제안을 수락해야 했다.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민정호 씨, 당신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산을 절감하는 데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제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정확한 대답이 필요합니다.”
“상황이 변했지만 진상건 이사장님께서 애초에 제시한 일은 이 년 내에 유지할지, 폐업할지 확실한 결정을 내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독립 채산제를 택하신 이상 더욱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신현수가 이를 악물었다.
“사업체가 아니라 병원입니다.”
“결국 돈입니다. 재정만 분리됐을 뿐 병원 소유권은 재단에 귀속돼 있지 않습니까? 흑자를 내지 못하면 운영비를 조달할 담보조차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당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를 위해 이 일을 맡은 것이 아닙니다. 병원 미래의 절반은 제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서로가 편할 겁니다. 그럼 내일까지 연락 주십시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민정호가 고개를 까딱이고는 자리를 떴다.
김지훈이 쓴 입맛을 다셨다.
첫 만남부터 능력의 한계를 절감했다.
사실상 통보에 준할 정도로 독단적인 제안에 제대로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 실제로 재정이 열악해 예산 절감이란 논리를 깰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느낌이 정말 좋지 않았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에서 절감한 예산을 뒷구멍으로 빼돌리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복잡한 회계 장부를 내밀면 두 눈 뜨고 당할 가능성도 높았다. 무엇보다 이로 인해 부실한 부분이 발생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가 떠안을 것이다.
망하는 지름길이었다.
손일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야!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냐? 예의는 둘째 치고 의도를 알 수가 없네. 희한해.”
“뭐가?”
“CT나 MRI처럼 장비를 구입할 때 고가일수록 리베이트가 크고, 재단 관계자가 은밀하게 받아 챙긴다는 게 공공연한 소문이잖아. 그런데 상대적으로 싼 장비를 사라고? 솔직히 여기까지는 괜찮았어. 하지만 공사처를 바꾼다는 소리가 부쩍 의심이 돼. 그쪽이 더 크게 먹을 수 있다는 건가?”
“뭔가 흑막이 있겠지.”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이건만 이경석이 콧등을 찡그렸다. 갑갑한 한숨 소리의 결이 어째 다르게 들렸다.
“한 가지는 확실해. 민정호가 가진 능력은 우리가 의사를 그만둔다고 해도 절대 따라갈 수가 없어.”
“지금부터 권한을 주자는 말이에요?”
“생각해 봐. 현수가 이사로서 전문 병원 건립을 맡은 이상 민정호가 독단적으로 모든 일을 할 수는 없잖아. 오늘도 사실 현수가 있기 때문에 왔을 거야.”
“그건 그렇죠.”
“현수야, 내키지 않지만 고민은 해야 할 것 같다.”
손일석이 혀를 찼다.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꼴인데, 이러다 잡아먹히면 뼈도 못 추릴 거예요. 전문 병원에 딸린 식구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야. 환자를 확보하는 것만도 벅찬데 행정적인 일까지 우리가 도맡으면 제대로 굴러가겠어? 어차피 민정호가 아니더라도 진상건 입김을 피할 직원은 거의 없다고 봐. 부족하다고 해도 방심하지만 않으면 치명적인 결과는 피할 수 있어.”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라 동의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반면 각자의 능력과 현실을 고려하면 이경석의 말도 충분한 일리가 있었다.
신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할 수 없다면 부딪쳐야죠. 절감된 예산이 어디에 쓰이는지 정도는 알 수 있겠죠. 오히려 개원 전에 진상건과 민정호가 고스란히 의도를 드러낸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어요. 내일 민정호를 다시 만나야겠어요.”
“우리는 맡은 일에만 집중하면 되겠네. 민정호를 맡기로 했던 지훈이는 어떻게 하지?”
“형 말대로 나도 민정호 같은 능력은 없어요. 혼자 상대하기 힘들지 않겠어요?”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끊임없이 환자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을 맡아야 했지만 피할 생각은 없었다. 전문 병원 출발부터 삐걱거리는 상황만큼은 막아야 했다.
“알았어. 공부라도 해야지, 뭐.”
“결정이 난 이상 따르는 게 정도야. 어차피 볼 사람 미리 보는 것뿐이고, 강호라는 세상이 원래 피바람이 끊이지 않는 동네야. 우리에겐 희대의 보검, 메스가 있잖아. 믿고 달리면 돼.”
손일석의 너스레가 공허하지만은 않았다.
자리가 끝난 후, 김지훈이 의자에 몸을 묻었다.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시간과 심력을 빼앗기긴 하겠지만 민정호가 치명적인 부정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도리어 환자에게 더욱 신경 쓸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었다.
‘사 개월 남았다. 간 이식, 췌장, 담도, 간암까지 최대한 확보해 개원 즉시 칼바람을 날려야 한다. 그것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부분이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수술 예약을 확인했다.
오창도 교수가 양성 질환을 대부분 맡아 어마어마한 일정에 시달리겠지만 김지훈 역시 만만치 않았다. 예약 건수는 적어도 하나하나가 모두 막대한 시간과 노력을 요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준영 교수는 강력한 힘이었다.
간암 환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관련 질환 환자가 늘기 마련이었다. 간 이식의 주요 대상이 간암이라는 사실 또한 매우 유리한 요소였다.
다음 날.
정말 강력한 힘을 얻었다.
“신 교수, 걱정할 것 없다. 이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전문 병원 건립을 통과시켰단 사실을 잊지 마. 민정호라는 사람이 아닌 자신을 믿으면 된다.”
“손 교수, 이 교수, 일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든 날 찾아와. 함께 만나 얘기하자.”
“김지훈, 병원과 의사의 생명은 결국 환자다. 다들 마찬가지지만 환자에게 특별히 더 신경 써.”
김지훈의 입이 쭉 찢어졌다.
유일하게 교수가 아닌 이름을 불렀다.
나이가 먹어도 왜 이리 즐거운지 모를 일이었다.
“신 교수, 손 교수, 이 교수, 사 개월 남았다. 간 이식 수술 팀을 최소 세 개는 만들어야 한다. 신기동 교수와 내 수술 들어와.”
헉! 소리 터졌다.
몇 마디만으로 각자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알려 주었다. 사인방의 얼굴을 허옇게 만들 정도로 든든한 받침대를 자처하는 모습이야말로 스승의 진면모였다.
행정 경험이 가장 많은 송재덕 교수와 자리를 만들어 향후 계획과 일정을 논의했다.
많은 도움이 됐다.
진료 이외에도 의사에게 주어진 일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최종 결정권이 없다 해도 주인 의식만은 버리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부당함에 저항하지 못하면 순응의 다른 말에 불과할 것이다.
“지훈아, 현수야, 일석아, 경석아, 정말 자랑스럽다. 자랑스러워. 어느 누가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겠니? 노력하고,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결과가 나쁠 수가 없어. 나쁠 수가. 아암! 그렇고말고. 지훈아, 내 말이 맞지? 그치?”
“감사합니다.”
예전의 모습을 조금도 잃지 않았지만 사인방이 마냥 웃지 못했다. 반드시 일반외과가 맡아야 하는 보직이란 법은 없었지만 진상건은 기본적 예의조차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개새끼!’
절로 욕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