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김지훈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이사장님,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뭡니까?”
“전문 병원 설립이 무산된다면 계약 기간이 끝나는 대로 병원을 떠나겠습니다. 마침 공사가 마무리될 때쯤 기한이 만료되니 계약을 어기는 것도 아닙니다.”
“떠나든 말든 개인의 선택입니다만, 설마 협박은 아니겠죠. 그보다 혹시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 아닙니까?”
“외과가 어떤 분위기를 가진 과인지 잘 모르시는 것 같군요. 누구보다 제 한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만, 스카우트 제의는 항상 받고 있습니다. 흘려들으시면 안 될 겁니다. 메이저 과가 무너지면 누구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질지 생각해 보시죠. 책임이 가볍지 않을 겁니다. 그럼 좋은 결과 기대하겠습니다.”
김지훈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진상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사장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먼저 병원의 안정적인 경영이 필수였다. 김지훈의 말이 현실화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김병오 이사마저 인정한 탁월한 실력과 실적, 외과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 친구를 위해 지금까지 쌓은 걸 모두 포기하겠다는 거야?’
그간 숱하게 구조 조정을 주도했다.
초반의 저항은 당연하지만 결국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특히 아무리 끈끈한 관계라 해도 다른 사람 문제 때문에 자신의 일자리까지 팽개치는 경우는 없었다.
물론 극소수 예외는 있었다.
김지훈이 딱 그 짝이었다.
너무 자신만만한 태도도 마음에 걸렸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진상건이 코웃음을 쳤다.
‘감히 의사 주제에 날 상대로 협박을 해? 어차피 외부 수혈을 해야 하는 이상 다 날려 주지. 김지훈, 너는 반드시 네가 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거야.’
“그럼 이만.”
김지훈과 신현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사장실을 나갔다.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태도에 찜찜한 구석을 숨기지 못하던 진상건이 전화기를 들었다.
“김 비서, 김병오 이사님과 연결해요.”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 없다.
돈 먹고 발뺌하는 일은 더 어렵다.
장례식장을 비롯해 각종 이권을 안겨 준 이상 이사들 모두 자신의 뜻에 반대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신규 병원 허가 반려에 담긴 막대한 차익 또한 좋은 미끼가 될 것이다.
마음에 걸리는 이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전임 이사장 때 중간에 섰던 이사들 단속 철저히 하세요.”
(윤가와 최만철이 버티긴 하지만 신씨 일가는 이제 끝이야. 동조하는 의사들이 있다고 해도 뭘 할 수 있겠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게.)
‘항상 조금 먹었다고 떳떳한 양 행동하는 놈들이 더 문제라니까. 다시 만나는 것이 좋겠어.’
“오늘 당장 약속 잡아 주십시오.”
진상건이 대세에 전혀 지장 없다는 듯 툭툭 양복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신현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훈아, 네가 그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다.”
“너한테도 했던 말이다. 진심을 협박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데, 그럴 것 같지 않냐?”
“누가 알겠어. 어쨌든 멋있었다. 고맙다.”
“멋있긴! 솔직히 친구 때문에 밥줄 내놓는다는 게 쉬운 줄 알아? 식은땀 흘렸어.”
“미안하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조건이 많아. 일단 전문 병원부터 따내고, 술 한 잔 사. 소주는 사절이야.”
“양주는 입에 떠 넣어 줘도 싫어하는 놈이!”
“난 미국 물 먹은 남자야.”
신현수가 밝게 웃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진상건을 지지했고, 이권을 따라 움직였던 이사들로 구성된 이사회를 앞두고 자신이 있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근데 스카우트 제의 받았다는 거 정말이야?”
“진실이라고 했잖아. 문제는 내가 일단 거절했다는 사실에 시한까지 촉박하지만 언제든 결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지.”
“내가 목표는 아니겠지?”
김지훈이 씨익 웃음으로 대신했다.
왠지 한껏 찌푸렸던 하늘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진상건이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위기감을 느끼긴 한 모양이었다. 면담이 끝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곧바로 이사회를 열었다.
사안이 중대한 데다 양측이 작심한 상황이었다.
이사 전원이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사인방이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무려 세 시간이 지나서야 신현수를 볼 수 있었다.
득달같이 물었다.
“어떻게 됐어?”
“흐음! 그게 말이야.”
뜸을 들였다.
애가 바짝 탔다.
“빨리 말 안 해?”
“지훈아, 일석아, 경석이 형.”
차례차례 시선을 준 신현수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조용히 엄지를 치켜들었다. 원하는 대로 됐다는 신호에 사인방이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손바닥까지 부딪쳤다.
손일석이 싱글벙글 웃으며 채근했다.
“현수야, 자세히 얘기해 봐. 엄지를 들 정도면 기대 이상이란 소리 아니야?”
“단순히 선친의 유업이 아니라 병원 발전을 위한 사업이란 점, 시대에 뒤떨어지면 병원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강조했어. 진상건과 김병오 이사의 반발이 상당해 배임까지 거론해야 했지만, 결국 중도파 이사 두 명이 우리 손을 들어 주더라.”
“오 대 사라! 아슬아슬했지만 어쨌든 이긴 거네. 진상건 얼굴이 어땠는지 봤어야 했는데 아깝다.”
“똥 씹은 얼굴이지, 뭐. 이사회 끝나자마자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날 노려보는데 가관도 아니었어. 거래처럼 이뤄졌을 이권 문제까지 꺼내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손일석의 감 죽지 않았다.
진상건이 어떻게 이사를 구워삶았는지 추측하고도 남았지만 짐짓 모르는 척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다 자세히 알고 싶은 모양이었다.
“다 알면서 왜 그래? 정황증거까지 잡았지만 이사들과 완전히 등 돌리는 순간 재단을 정상적으로 돌려놓을 방법이 없어. 더러워도 참아야 한다는 소리지. 일단 진씨 일가의 전횡을 막은 후 최종적으로는 아예 발을 못 붙이게 해야 돼.”
으드득 이까지 갈았다.
이경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분 변동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잖아.”
“진상건이 물 수밖에 없는 조건을 하나 걸었죠. 지금은 산하 병원이 아니지만 예전 음성 병원처럼 독립 채산제를 제안했어요. 향후 발생하는 모든 이익을 재투자해서 반석 위에 올려놓고 진상건이 무리수를 범할 때를 기다려야죠. 어떻게든 병원과 재단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겁니다.”
“초반부터 수익이 날까? 진상건이 추천한다는 재정 담당자는 어쩌고? 도박 아니야?”
신현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재정 담당자 때문이라도 더욱 독립 채산제가 필요해요. 적어도 외부로 돈을 빼돌리지는 못할 테니까요. 수익은 이준영 선생님과 지훈이를 중심으로 우리가 만들어 내야죠.”
“밤낮 없이 일하라는 소리로 들린다.”
“지금보다 더 힘들겠어요? 문제는 다른 직종 직원들이지만, 일 년 치 운영비까지 확보했으니까 모두 그만한 대가를 얻을 겁니다.”
김지훈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가장 깊숙이 관여한 탓에 볼 꼴 못 볼 꼴 다 봤다. 자신의 목표이자 부당함 때문이었지만 환자에게 집중해야 할 의사 입장에서는 분명 불행한 일이었다.
“현수 판단이 맞아. 이런 일은 과를 불문하고 언제든지 또 벌어질 수 있어. 전문 병원을 굴지의 병원으로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재단도 정상적으로 돌려놔야 돼. 이제부터 시작이야.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자.”
“고맙다. 우선 당장 해야 할 일을 분담해야 돼. 일석아, 난 행정 직원 영입을 포함해 제반 사항을 맡아야 하니까 경석이 형과 함께 의료진 확보에 나서 줘. 이준영 선생님과 반드시 상의해서 결정해.”
“그건 지훈이가 맡았잖아?”
“지훈이는 재정 담당자가 정해지는 대로 필요한 기기, 설비, 시설을 반드시 완비하도록 철저하게 단속하는 일을 맡아 줘. 간 이식을 비롯해 우리가 해야 할 수술에 무엇이 필요한지 너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잖아.”
끙! 소리 터졌다.
이제 환자에게만 집중하면 될 줄 알았는데 사인방 모두 행정적인 문제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게 됐다. 특히 김지훈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과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일을 하게 됐다.
‘어이구! 이거 보통 일이 아닌데 빠져나갈 방법이 없나? 난 의사라고, 의사! 의사이고 싶다고!’
“현수야, 내가 할 수 있을까?”
“해야 돼. 재정 담당자를 다른 사람이 아닌 네가 접촉해야 하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아?”
신현수의 눈빛이 묘했다.
순간 지난 일이 뇌리를 스쳤다.
진상건을 함께 만나며 지분 문제를 포함한 재단 내 싸움의 이면을 보았다. 당시에는 단순히 선친의 유업인 전문 병원 문제 때문인지 알았는데 신현수는 다른 생각까지 한지도 몰랐다.
‘진상건이 추천하는 재정 담당자를 만나야 한다면 거의 운명공동체라는 소린데, 내가 착각한 걸까?’
대답이 없자 신현수가 결정타를 던졌다.
“가장 기본이 되는 기계 구입 비용조차 결코 작지 않아. 예산 집행은 서울 병원 행정 부서에서 맡고 있지만 진상건이 재정 담당자를 통해 언제 개입할지 몰라. 적어도 자금이 정확하게 집행되는지까지 봐야 돼.”
“돈 문제까지?”
무리한 일 정도가 아니었다.
“월급 명세서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을 텐데 가능하겠어? 내가 원하는 건 최소한 우리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야 한다는 거야. 물론 어느 정도는 알고 말해야 믿겠지? 경석이 형, 일석이, 나 모두 세부 전공을 바꿨어. 지훈이 너도 진상건을 만났을 때 사활을 건 것으로 알았는데 잘못 생각한 건가?”
할 말 없었다.
생각해 보면 가장 절실한 사람은 김지훈 자신이었고, 친구들까지 끌어들인 꼴이었다. 누구보다 앞장서 많은 짐을 짊어져야 하는 것이 마땅했다.
“알았어. 최선을 다해 볼게.”
손일석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지훈아, 네가 이런 일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도 이상하지만, 사활을 걸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병원 옮길 수 있다고 했거든.”
“설마 진상건 면전에서? 야!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정말 사활을 걸었구나. 김지훈 깡 아직 죽지 않았네. 살아 있네. 어째 모든 일이 다 잘될 것 같다.”
신현수가 손뼉을 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어떤 상황인지 다들 알았을 거야. 우리 손으로 직접 전문 병원을 개설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행정적인 일은 모두 내가 맡을 테니까, 기안 즉시 작성해서 이준영 선생님께 허락받은 후 바로 실행하자.”
“현수야, 가장 중요한 얘기가 빠졌잖아. 언제 개원 예정이야? 중단된 공사는 바로 재개되는 건가?”
이경석의 말에 신현수가 머리를 톡톡 쳤다.
지금껏 아무도 묻지 않았다니 다들 어지간히 흥분했던 모양이었다.
“건물 공사는 거의 다 끝난 상태라서 사 개월 후면 개원이 가능할 것으로 보여요.”
손일석이 고개를 흔들었다.
“야! 그 상태에서 병원을 엎으려 했다는 거야? 뭔가 다른 게 있지 않고서는 설명이 안 된다 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큰 이권이 달린 게 분명해. 전문 병원 전환이 우리에겐 신의 한 수고, 진상건에겐 악몽의 시작이네.”
어쨌든 건물 완공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 남았다.
장비, 시설을 완비하는 일만으로도 개원 시점이 달라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의료진을 비롯해 직원 선발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가야 했다.
어떤 방해가 있을지 몰랐다.
진상건이 수작을 부려 돌발 변수가 생기기 전에 전광석화처럼 움직여야 했다. 각오를 다지던 김지훈이 번뜩 떠오른 생각에 신현수를 보았다.
“현수야, 아무리 이사회를 통과했다고 해도 고분고분 넘어갔을 진상건이 아니잖아?”
“몇 가지 조건이 더 붙긴 했는데, 어떤 식으로 다가올지 모르니까 지금은 다른 생각 말자.”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끈질긴 사람이 가장 무서운 법이었다. 신현수가 말을 하지 않는 까닭이 있겠지만 긴장의 끈을 조여야 했다.
‘산을 하나하나 넘어도 평지가 나오질 않네.’
하지만 곧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이다.
김지훈이 돌연 환하게 웃었다.
“아직 끝난 건 아니지만 축하할 일이 분명해.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 보자. 우리 손으로 전문 병원을 멋지게 설립해 보자구.”
“오케이! 심장이 두근두근 떨리네.”
자축하기 이르다 해도 수많은 난관을 뚫고 결국 원하는 목표에 성큼 다가섰다.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긴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경석이 휴대폰을 흔들었다.
“스승님 모두 결과 기다리실 거야.”
“역시 경석이 형이야.”
다들 분주히 전화를 돌렸다.
잘됐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수고했다. 수고했어.)
이로써 오늘 할 일을 모두 끝냈다.
뭔가 아쉬웠다.
손일석과 마음 통했다.
“조금 늦었지만 소주 한 잔…….”
그때 나직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늦은 시간에 누굴까?
“들어오세요.”
문이 열렸다.
처음 보는 얼굴이 보였다.
“누구세요?”
“신규 병원 재정 관리를 맡은 민정호입니다. 낮에는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없어 부득이 지금 찾아왔습니다. 마침 다 모여 계시네요.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일순 침묵이 흘렀다.
오늘만큼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갑자기 찾아왔으면 예의로라도 보여야 할 첫인사의 미소조차 보이지 않았다. 제 발로 걸어와 남의 잔치판에 똥 뿌린 격이었다.
분위기가 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