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051화 (1,051/1,329)

17화

이혁민 교수가 마무리를 지었다.

“제안을 한 김 교수를 중심으로 상의해 구체적인 안을 들고 와라. 우리는 분위기를 만들어 볼 테니까, 박 과장이 먼저 검토해 보고 미흡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처리해. 원장님,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그래. 어차피 이사장이 우리 과를 가만히 놔둘 것 같지가 않다. 아무 대책 없이 끌려가지 말고 해 보자. 지분만 없다 뿐이지 우리도 주인이라면 주인이야. 주인. 현수야, 그치? 내 말이 맞지?”

특유의 말투를 찾았다.

다른 방법이 없는 한 밀어붙이라는 말이었다.

이준영 교수부터 지동훈 교수까지 사인방에게 강력한 지지의 눈빛을 보였다. 병원 내 정치는 지양해야 하지만 일반외과의 발전은 기필코 지향해야 할 명백한 목표였다.

회의를 끝냈다.

김지훈이 같은 파트기에 가장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교수를 찾았다.

오창도 교수가 웃었다.

“김지훈 선생님, 힘들죠?”

“편하진 않네요.”

“진충기 선생님과 내 관계를 생각해 보세요.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잖아요. 당장은 힘들어도 마음을 잃지 않으면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선생님들을 믿으세요.”

김지훈이 나직한 탄성을 터트렸다.

오창도 교수가 병원을 옮길 때 얼마나 힘들었을지 잊고 있었다. 진충기 교수와 등을 진 채 살 줄 알았건만 지금은 예전 관계를 고스란히 회복했다.

절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끊어질 수도 없었다.

‘내가 너무 과민했어. 도리어 우리가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거꾸로 생각하다니 어리석었어.’

가슴을 짓눌렀던 답답함이 다소 사라졌다.

미안한 마음은 여전했다.

오창도 교수도 김지훈이 자신을 왜 찾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전문 병원을 언급했을 때 이미 짐작하고도 남았던 일이었다.

“선생님 제안에 서운한 거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노리고 노리던 간담도 파트 전체를 맡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왜 반대를 하겠어요. 하하하!”

“죄송합니다.”

“과장님을 비롯해 지동훈 선생이나 나나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이란 걸 잊었어요? 이사장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지만 외과 선생들을 믿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김지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원 포트부터 시작해 전문 병원까지 서운하지 않다면 사람이 아닐 텐데 오히려 먼저 웃어 주었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존경할 수밖에 없는 선배였다.

마음 한편으로 외과 의사들을 믿는다는 오창도 교수의 말이 맞기를 간절히 바랐다.

진상건이 제시한 날짜가 임박했다.

사인방이 수시로 머리를 맞댔다.

친하다고 해도 요즘처럼 얼굴 자주 보는 때가 없었다. 즐겁고 화기애애한 자리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었지만 마냥 웃음이 나올 상황이 아니었다.

미래를 꿈꾸는 자리건만 평생 곁을 지키며 배울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스승들과 스스로 떨어지려 한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스승님들은 어쩌지?”

“우리보다 훨씬 강한 분들이야. 과장님도 상황에 맞춰 잘 처신하시겠지.”

정이란 놈이 보통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학창 시절 사인방을 가르친 교수들이었다.

인턴 때 저마다 독특한 스타일을 보이며 일반외과의 길로 이끌었다. 바이탈을 다루고, 수술을 통해 사람 살리는 일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몸소 알려 주었다.

전공의가 된 이후 혹독하게 수련시키며 전문의로서 조금도 부족하지 않게 키웠다. 결국 스승과 제자라 칭할 정도로 깊은 관계를 형성했다. 각자 자신의 분야를 택하게 된 주요 이유이기도 했다.

가슴 답답한 일임이 분명했다.

유일하게 함께 가게 된 김지훈이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스승들마저 자리를 비운다면 진상건의 입김이 가장 강하게 작용할 서울 병원 외과를 지킬 다른 대안이 없었다.

신현수가 감정을 배제하고자 애썼다.

“지금은 현실에 집중해야 할 때야. 이준영 선생님이 주신 자료를 보고 또 봐도 전문 병원 설립이 눈에 확 들어오질 않네. 힘들다.”

“그래도 해내야 돼. 이사장에게 보일 자료는 우리가 준비할 테니까, 지훈이 넌 접촉했던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신경 바짝 써. 합류할 사람이 없으면 끝이야.”

김지훈이 나직한 숨을 내뱉었다.

“경석이 형, 늦었지만 고마워요.”

“이혁민 선생님 말씀 잊었어. 그런 소리 마. 이번 일은 우리 과 전체가 걸린 일이야.”

“지당하신 말씀! 지훈아, 부담 갖지 마. 일이 잘 풀렸어도 어차피 경석이 형과 나는 신규 병원으로 갔을 운명이야. 솔직히 췌장이나 담도는 몰라도 일반외과 전체의 역량이 필요한 간 이식은 전문 분야를 바꾸는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혈관 수술의 끝판 왕이라고 생각하면 도리어 잘된 일이야.”

“간 이식 센터라고 간만 수술한다는 보장이 없잖아. 현수와 내 전공이 크게 필요할 날이 있을 거야.”

세부 전공을 바꾸는 일이 말처럼 쉬울 리 없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미련과 애착은 어쩔 도리가 없을 텐데 담담하게 넘기고 있었다.

‘전생에 무슨 일을 했기에 이런 복을 타고났지? 정말 고맙다. 우린 최고의 수술 팀이 돼 최고의 병원을 만들 거야.’

그저 고마운 일이었다.

실망시키지 않는 길은 명확했다.

오직 의사로서 환자에 충실해야 했다.

정식으로 센터를 개설해 규모를 늘리지 않는 한 지금도 포화 상태인 상황을 피할 길이 없었다. 실적에 연연했다간 무리수를 불러 오히려 부작용만 일으킬 것이다.

전문 병원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

합류하길 바라는 의료진과 가슴을 터놓고 대화해야 했다. 신동철 이사장 때와는 상황이 백팔십도 바뀐 만큼 솔직함 이상의 무기는 없었다.

“경아 씨, 이번 주는 어쩔 수 없이 집에서도 일을 해야겠어요. 희연아, 아빠가 미안해.”

무엇보다 가족의 동의가 있어야 했다.

남은 시간이 빠르게 지났다.

촉박하게 전문 병원 설립을 위한 계획을 마련했지만 결코 허술하지 않았다. 전문의가 된 이후 외과 일을 하며 은근히 쌓은 공력과 간 센터 계획서를 작성하며 얻은 경험 덕이었다.

교수들의 추인까지 받았다.

마침내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서류를 챙기며 강한 각오를 보이던 신현수가 김지훈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지훈아, 같이 만나자.”

“내가?”

“전문 병원 문제만이 아니라 너도 병원 돌아가는 사정을 직접적으로 알아야 할 것 같아.”

“그럴 필요까지 있나?”

“전문 병원은 누가 운영할 건데? 더구나 신설 병원이야. 이준영 선생님과 나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야.”

“일석이와 경석이 형도 있잖아?”

“당연히 함께 상의해야겠지. 하지만 오늘은 여럿이 간다고 해서 유리한 자리가 아니야. 지분과 전문 병원에 각각 집중할 사람이 필요해.”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의료에만 신경 쓰며 살고 싶다는 소망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모든 동료와 함께 꾸려 가야 할 병원을 유지하는 일 또한 무척 중요한 책무였다.

‘병원은 작은 사회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회피한다면 무너지고 만다. 우리와 함께할 사람들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말아야 한다.’

진상건의 속과 복잡하게 돌아가는 외부 상황을 모른다면 헛발질만 할 것이다. 환자의 희망이자 삶의 터전을 스스로 망가트릴 수는 없었다.

함께 이사장실로 향했다.

진상건이 무척 정중한 태도로 맞이했다.

“김 교수님도 오셨네요. 어떤 일인지 모르지만 중요한 일일 테니 경청하겠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의 표본이었다.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면 불리해지는 자리였다.

김지훈도 내심을 확실하게 숨겼다.

“업무로 바쁘신 와중에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 교수님과 말씀을 나누기 전에 제가 먼저 한 가지 제안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신동철 이사장이 여러모로 꽤 신임한 의사라더니 만만치 않아 보이네. 그래 봐야 신현수와 한통속인 이상 뜻대로 되는 일은 없을 거야.’

“얼마든지요.”

전문 병원 설립 건을 꺼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일견 호의적으로 보였지만 김지훈이 내민 두툼한 서류를 보는 눈에 성의가 없었다. 건성건성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것으로 자신의 의사를 대신했다.

‘역시 일반외과는 신동철 이사장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질 못했군. 확실히 물갈이하지 않으면 골치를 썩겠어. 전문 병원이라! 형식이야 어떻든 결국 신현수에게 달린 일이지.’

“좋은 의견입니다. 가장 우려되는 재정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방안입니다만, 이런 사안은 교수님들께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재단 이사이신 신현수 이사님과 상의해야 할 일이 분명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충분히 예상한 답이었다.

응당 일어나야 할 김지훈이 자리를 지켰다.

진상건의 의아한 눈초리를 본 신현수가 당연하다는 듯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어떤 상황인지 자세히 알아야 할 사람입니다.”

“혹시 김 교수님도 지분을 갖고 계신가요?”

“공헌도를 생각하면 지분과 다름없습니다.”

“신 이사님 입장이 상당히 곤란해질 텐데요.”

“그럴 일 없습니다.”

진상건의 눈꼬리가 살짝 흔들렸다.

누구나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꺼릴 얘기를 두고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무엇인가 다른 대책이 있다는 말이었다. 사업적인 감각은 비교도 되지 않을 신현수이기에 도리어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전문 병원으로 대체는 빤한 대책에 불과해. 재정 문제를 포함해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널 압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겠지?’

“좋습니다. 먼저 내게 해야 할 말이 있지 않은가요?”

“그 전에 이번 안은 이미 예정된 재정만 소요됩니다. 반대하지는 않으시겠죠?”

“이사회에서 결정할 일입니다. 이사장이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시대는 지나지 않았습니까?”

“반대하겠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하하하! 그렇게 들리셨습니까? 사실 공사 위약금을 물어서라도 신규 병원 설립 허가마저 반려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막대한 재원을 기존 병원에 투자한다면 얼마나 큰 효과가 나겠습니까?”

“이권 때문이겠죠. 용도를 돌려 돈이 되는 사업, 가령 아파트라도 세우면 꽤 큰돈이 들어올 테니까요.”

진상건이 힐끗 김지훈을 보았다.

신현수가 이런 말까지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김지훈은 커피 한 모금을 넘기며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재단 일에 관해서는 철저히 무시해도 좋은 사람이었지만 입까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 교수님, 이런 말은 아예 없었던 말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억측인 이상 우리 신 이사님 입장까지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김지훈이 쓰윽 고개 돌려 눈길을 마주쳤다.

“제가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지만 이런 말을 잊을 수는 없겠죠. 누가 압니까? 현실이 될지.”

진상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재단 이사장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신현수의 도발에 말려들 이유가 없었고, 김지훈에겐 언제든 불이익을 줄 수 있었다.

진상건이 가벼운 헛기침을 했다.

“단단히 오해를 하시고 있군요. 유쾌하지 않은 얘기는 그만하죠. 우리가 일전에 나눴던 대화의 핵심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지분 담보는 없습니다. 이미 결정된 일인 만큼 예정대로 진행하셔야 할 겁니다. 나 역시 신규 병원만이 아니라 앞으로 지출하는 비용을 십 원 한 장까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겁니다. 명심하십시오.”

“이사장 권한으로 이사회에 재고를 요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아실 텐데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하십시오.”

진상건이 피식 웃었다.

‘발악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꼴사나운 일이 될 겁니다. 굳이 한계를 확인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두고 봐야죠.”

“이렇게 나오신다면 저도 어쩔 수 없네요. 정식으로 이사회에 안건을 올리겠습니다. 전문 병원이 아니라 선친의 유업인 신규 병원 건설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결과가 어떻든 지분은 지키겠죠.”

“쓰고 싶지 않지만 경영에 중대 위해를 가하는 경우 강제 지분 조정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셔야 할 겁니다.”

“필요하다면 소송도 불사하겠습니다만, 대상이 꼭 내가 되리란 확신은 너무 성급한 것 아닐까요? 저도 충분한 인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강대강의 대결이었다.

만약 신규 병원 건립이 무산된다면 신현수는 단시간 내에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입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진상건 역시 적잖은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냉철한 신현수였다.

분명 믿는 구석이 있었다.

무엇보다 사안에 관계없이 신동철 이사장의 흔적을 지우려는 것도 모자라 노골적으로 신현수를 압박하는 진상건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뻔뻔한 놈! 나도 당신 같은 사람이 이사장으로 있는 병원에서 근무하고 싶지 않아.’

한마디 해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