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다음 날.
아침부터 일반외과에 배정된 수술실이 부산했다.
김지훈은 담도암 수술을 앞뒀다.
췌장암과 다르지 않아 휘플을 해야 했고, 이어지는 수술만 두 개였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술실에서 살아야 했다.
오창도 교수도 쉴 틈이 없었다.
원 포트를 비롯한 복강경 수술이 줄줄이 걸렸는데 이른 아침 시작된 응급 수술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입이 바짝 마르는 하루가 될 것이다.
신현수는 위암 수술이 잡혀 있었다.
진상건과의 일로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플 테지만 결코 환자를 등한시할 의사가 아니었다. 수술에 집중하고자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뿐인가?
사람과 날짜만 다를 뿐 일반외과 모든 구성원이 수술과 진료로 매일매일 땀을 흘리고 있었다. 당직 때면 바이탈이 흔들리거나 동반 손상이 의심되는 다른 과 환자까지 보기 일쑤였다. 일반외과 본연의 의무이자 힘이었지만 그만큼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리며 입술을 모았다.
동일한 건수의 수술로는 절대 돈 안 되는 과, 전문의를 따도 전공을 살려 개업을 하기 쉽지 않은 과, 개업을 해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 과란 소리는 얼마든지 들어도 좋았다.
원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바이탈을 다루는 일반외과 의사로서 자부심을 갖고 일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간 이식과 췌장 센터 설립도 같은 맥락이었다.
‘다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진상건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결국 환자가 있어 우리가 먹고사는데 그들이 최우선이라는 사실은 기본이자 원칙이잖아. 환자를 치료하며 발전까지 하면 더할 나위 없는 일 아닌가?’
윤서연이 보였다.
고경아의 바쁜 손이 보였다.
이른 시간부터 환자를 위해 땀 흘리고 있을 윤석진, 공정식을 비롯해 수많은 의료진과 일반 직원들이 뇌리를 스쳤다. 여기서 밀린다면 단순히 일반외과 문제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욕심과 욕망을 위해 이미 결정돼 공사까지 진행된 신규 병원까지 만지작거리는 이상 그들의 미래도 장담하지 못할 것이 빤했다.
진상건의 안을 절대 수긍할 수 없었다.
명확한 근거가 있었다.
인턴 때 시작해 전공의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금경태와 있었던 일로 부당한 이권 문제는 김지훈에게 유난히 민감한 사안이기도 했다.
장례식장 등의 외주였다.
원가에 미치지 못하는 수가를 보전하기 위해 영리를 허락했을 정도로 알짜 사업이라 불리는 부분이었다. 국가 기관조차 편법으로 시행한 일이기에 더더욱 모든 수익이 병원을 위해 쓰여야 했다.
진상건이 누구에게 사업권을 줄까?
지분이 있다 해도 기반이 전무했던 사람이 이사장이 됐다. 대가 없이 이뤄지는 일은 없는 법이었다. 자신의 돈을 쓸 리도 없었다. 명의는 달라도 측근이거나 자신을 지지한 이사들이 실질적 주인이 될 것이다.
‘빤한 일이야. 우리 과뿐만이 아니라 현수, 서연이가 힘을 잃지 않아야 병원이 산다.’
잠시 샛길로 빠졌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마취가 끝났다.
“수술 시작하셔도 됩니다.”
최근 들어 췌장, 담도, 담낭 질환으로 김지훈을 찾는 환자가 급속히 늘었다. 덕분에 휘플과 고도의 난이도를 요하는 복강경 경험까지 차근차근 쌓고 있었다.
‘오늘도 휘플로 시작한다. 최선을 다하자.’
자신의 일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에게 발전할 기회를 주는 세상이 아니었다. 환자를 놓친다면 발언할 권리조차 사라질 것이다.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김지훈의 눈이 번뜩였다.
위, 십이지장, 담낭, 담도, 췌장 일부가 차례차례 절제됐다. 일부라도 남아 있는 장기를 다시 이어 주는 복잡하고도 지난한 과정이 이어졌다.
비록 다른 암에 비해 예후가 불량하지만 환자는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다. 남은 생을 통증 없이 사는 것도 삶의 질에 무척 중요한 부분이었다.
“수처! 타이!”
한 방울의 땀이 흐르고 또 흘렀다.
그렇게 하루가 또 저물었다.
다음 날, 예정됐던 모든 수술이 끝났다.
오늘 수술한 환자를 비롯해 입원 환자의 상태를 살피는 회진이 끝나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후 일곱 시가 넘어서 가운을 벗은 김지훈이 부지런히 회의실로 향했다.
운명을 가를지도 모르는 중요한 날이었다.
송재덕 교수, 이준영 교수, 이혁민 교수, 신기동 교수, 박승준 교수, 오창도 교수, 지동훈 교수, 김지훈, 신현수, 손일석, 이경석까지 열한 명이 모였다.
일반외과의 핵심이자 중핵이었다.
“다 모였으면 시작하자.”
신현수가 상황을 설명했다.
보직 문제를 포함해 병원의 미래를 위해 지분을 지키고, 일반외과의 앞날을 위한 센터 또한 반드시 설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인적 욕심을 앞세울 것이란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설령 그렇다 해도 보다 큰 뜻이 있기에 결정을 좌우할 요소가 아니었다.
모두 동의하는 바였지만 분위기가 무거웠다.
송재덕 교수마저 특유의 말투를 잃었다.
“사심 없이 일만 잘한다면 보직은 누가 돼도 좋아. 지금 필요한 것은 대책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 과를 통합하고, 발전시킬지가 중요해. 좋은 의견 없니?”
다들 말이 없었다.
간 이식 센터 설립은 간담췌 파트에서 주도한 데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더구나 평생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지분 문제까지 거론됐다.
사인방을 통해 김지훈의 제안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선생님들 모두 대책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답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기 때문이겠지. 부담이 더 커지기 전에 먼저 나서야 한다.’
매듭은 묶은 자가 풀어야 한다.
또한 오랜 경험으로 풀 일이 있고, 젊은 패기로 돌파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었다.
김지훈이 신현수를 보았다.
핵심 당사자이자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신현수가 논의를 일임한다는 듯 눈길을 주었다. 분명 대책을 함께 강구했건만 교수들을 보며 갑갑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손일석과 이경석도 마찬가지였다.
김지훈이 눈가를 문질렀다.
‘네게만 국한된 지분 문제까지 걸려 입장이 더 곤란할 수도 있겠지. 현수야, 일단 내가 먼저 총대를 메마. 일석아, 경석이 형, 정말 무리한 일이라는 것 잘 알지만 지금도 함께 갔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 갖지 말고 어떤 대책이든 마음 놓고 말하라는 의미였다. 스승으로서 제자와 센터 설립을 주도했고,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신규 병원을 종합 병원이 아닌 간 이식 및 담도를 포함한 췌장 수술 전문 병원으로 만들었으면 합니다.”
하등 문제가 없을 방안이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논의로 들어가 하나하나 살피는 순간 수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혁민 교수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전문 병원? 그럼 서울 병원 내에 센터를 설치하는 것을 전면 취소하자는 소리야?”
“그렇습니다. 새로운 승인이 필요하지만 재단 상황이 완전히 바뀐 이상 두 사업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은 모두 포기하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신규 병원은 공사가 중단된 것뿐이니까 재정적인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겠네. 아이디어는 좋다만 다른 문제가 없겠나?”
김지훈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들 이미 들어 알고 있던 방안이었지만 이혁민 교수는 물론 다른 교수들 모두 짐작하고도 남을 중대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섣불리 꺼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우리 과가 모두 갈 수는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 결정되든 절반 가까이 떠나야 합니다.”
“더 자세히 설명해 봐라. 서울 병원과 전문 병원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니까 양쪽 모두 충원이 필요하겠다만, 그 전에 전문 병원으로 누가 가야 할지는 생각했나?”
“합류 의사를 밝힌 후배들과 별개로 이준영 선생님, 이경석 선생, 손일석 선생, 신현수 선생, 우리 파트 펠로우 셋과 저까지 최소 여덟 명이 가야 합니다. 죄송하지만 오창도 선생님은 서울 병원 간담도 파트를 이끌어 주셨으면 합니다.”
비로소 가장 하기 어려운 말을 꺼냈다.
모두들 술렁거렸다.
지난밤, 스승들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몰라도 김지훈의 꺾이지 않는 고집에 손일석과 이경석은 희미한 미소만 머금을 뿐이었다.
간담도 파트가 한꺼번에 자리를 비울 수 없기에 오창도 교수는 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인방은 입장이 달랐다. 박승준 교수, 지동훈 교수가 있다 해도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중추였고, 전공 분야마저 다르기 때문이었다.
문제를 감추면 일만 더 커지기 마련이었다.
김지훈이 한 가지 문제를 더 꺼내 들었다.
“기존에 의사를 타진한 선생들 모두 전문 병원으로 합류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서울 병원은 외부에서 충원해야 하는데 재단의 입김이 작용하고도 남을 겁니다.”
“우리야 이미 눈 밖에 난 것이 확실하고, 이사장은 자신의 마음에 맞는 선생들을 부르겠지. 그게 큰 부담이 될 것이란 소리야?”
말 잘 듣는 사람을 뽑는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최악의 경우 과장 자리마저 외부 의사에게 돌아갈지 몰랐다. 말 그대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형국이었다.
김지훈이 한숨을 쉬고 말았다.
첩첩산중이었다.
부작용이 클 것이다.
김지훈은 물론 이 사태가 자기 탓이라 여길 수밖에 없는 신현수까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대안은 없었다.
재단의 불합리한 간섭을 이겨 내고 중심을 제대로 잡아야 했다. 그것만이 서울 병원 외과와 센터의 다른 이름인 전문 병원을 모두 지키는 길이기도 했다.
이혁민 교수가 송재덕 교수의 의견을 구했다.
“원장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쁘지 않아. 자식도 때가 되면 품에서 다 떠나고, 함께 살아야 하면 새 식구를 맞이해야 하잖아. 누가 가고 누가 남든 문제 될 것이 없다. 열심히 살면 된다.”
“이준영 선생님은요?”
슬쩍 김지훈을 보았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을 테고,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부담 갖지 마.’
“동의해.”
한 번쯤 안 된다는 말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미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고, 어차피 부딪쳐야 할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신현수 선생은 전문 병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일이 결부돼 김 교수보다 먼저 말씀드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이경석 선생과 손일석 선생은? 의견을 말하라는 것이 아니다. 신현수 선생까지 니들이야말로 결정하기 가장 힘들지 않겠나.”
김지훈이 바짝 귀를 세웠다.
세부 전공을 바꿔야 한다.
어차피 수술의 기본은 다르지 않기에 기술적인 문제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가르쳐 물려준 스승들이 앞에 있었다. 또한 각자 자신의 길이라 확신해 지난 시절을 모두 바쳤다.
엄청난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일찍 말했어도 고민이 부족했을 테고, 결코 쉽게 결론 낼 일이 아니었다. 김지훈과의 사적 친분과 경쟁은 완전히 별개 문제였다.
손일석은 신기동 교수와, 이경석은 송재덕 교수와, 신현수는 이혁민 교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복잡한 눈빛으로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갈등하는 기색만으로도 스승들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문질렀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스승님들을 생각하면 함께 간다고 해도 막아야 하는데, 난 왜 이렇게 간절할까?’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마침내 자신들의 의사를 밝혔다.
“스승님, 죄송합니다.”
사인방 모두 고개를 푹 숙였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리고 말았다.
안도의 한숨이 왜 이리 미안한지 모를 일이었다. 스승들의 입가에 걸린 의미 모를 미소에 도저히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그때 이혁민 교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목소리까지 높였다.
“어젯밤 너희들이 찾아왔을 때 분명히 말했는데 지금 죄송하다고 했나? 재단 이사장이 앞으로 어떤 행태를 보일지 우리 모두 충분히 알고 있다. 원장님께서 항상 너희들이 자식이라고 말씀하시는 거 잊었나? 너희들의 결정을 탓할 사람 없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신 그런 말 하지 마라.”
“그래. 도리어 우리가 사과해야 할 일이다. 자식을 지키지 못한 부모가 무슨 말을 하겠니. 우린 너희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한다.”
김지훈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언제나 우리부터 생각하시네.’
아직 나눠야 할 말이 태산인데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았다. 냉혹한 현실을 앞에 두고 불안정한 감정은 절대 도움이 될 수 없었다.
박승준 교수가 과장으로서 냉철하게 화제를 돌렸다.
“이로써 김 교수 제안에 모두 동의했습니다만, 우리 동의가 아닌 이사회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전문 병원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상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재단 이사회, 특히 진상건의 동의가 없으면 탁상공론에 불과했다. 최선을 다해 구체적인 방안을 도출해 내도 반대에 직면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고민과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앞이 밝은 것도 아니었다.
신현수는 이사들을 설득할 방안까지 찾아야 했다.
한동안 논의가 이어졌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사인방의 모습에 김지훈이 더욱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