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049화 (1,049/1,329)

15화

휴식 중에도 토론이 이어졌다.

연륜, 경험에 상관없이 수많은 써전들이 김지훈을 둘러쌌다. 원 포트를 발표한 오창도 교수도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학회장으로서 전체 일정을 주관해야 하는 이준영 교수까지 가세했다면 가히 S 병원의 독무대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무작정 시간을 잡아먹을 수 없었다.

“다음 세션이 시작될 시간이네요. 죄송합니다. 필요하시면 점심시간에 시간을 내겠습니다.”

발표가 이어졌다.

흥분을 가라앉힌 김지훈이 진지하게 경청했다.

자신이 그랬듯 전국 모든 써전이 밤낮을 잊고 환자를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스스로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자 정당한 수단과 방법을 통해 땀 흘린 대가였다.

바람직한 일이었다.

한 번 뜨거워진 학회 분위기는 좀처럼 식을 줄 몰랐다. 두 개의 세션과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어느새 모든 발표가 끝났다.

“김 교수님, 다음번에는 더욱 알찬 발표 부탁드립니다. 전체 학회 때 또 봅시다.”

수없는 시선과 뜨거운 관심을 한 몸에 받은 김지훈이 부산한 인사를 마치고 간신히 숨을 돌렸다.

익숙한 얼굴이 다가왔다.

“진충기 선생님, 아직 안 가셨네요.”

“잠깐 시간을 내실 수 있습니까?”

긴히 할 말이 있다는 얼굴이었다.

학회 임원들과 최종 마무리를 해야 하는 이준영 교수가 보이지 않았다. 길지는 않겠지만 몇 마디 대화를 나눌 여유 정도는 있었다.

‘이번에는 무얼 욕심내실까?’

“무슨 일입니까?”

진충기 교수가 목소리를 낮췄다.

“오 교수에게 병원 상황을 들었습니다. 외부에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는 점 잘 압니다만, 편한 상황은 아니더군요. 시기가 묘하지만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제안이요?”

“우리 병원에 오셔서 간 이식 및 췌장 센터를 맡아 주십시오. 아직까지 계획 중입니다만, 확실하게 의향을 밝히신다면 재단 관계자분과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H 병원도 추진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덧붙여 말씀드린다면 우리 병원의 요구 사항은 돈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대우 문제 역시 걱정할 필요 없고요. 진지하게 고민했으면 합니다. 솔직히 말해 나 혼자 힘으로는 센터를 이끌고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스카우트 제의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병원 사정으로 곤란한 상황에 직면해 서로가 애매모호한 입장이었지만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불안한 틈을 탔다고 해서 진충기 교수를 비난할 근거는 없었다.

그러나 김지훈의 기준 역시 병원 사정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아무리 조건이 좋다 한들 혼자 병원을 옮기는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었다.

“말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재단이 적극적으로 먼저 나선 상황입니다. 혹시 동료들 때문에 마음에 걸린다면 몇 명 정도는 함께 오셔도 됩니다. 이런 기회 결코 흔치 않습니다. 심각하게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진충기 교수가 적절하게 파고들었다.

솔깃한 추가 제안이었다.

‘H 병원 재단이 얼마나 빵빵한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동료들까지 자리를 보장하겠다고? 후우! 지금까지 들어 본 소리 중에 제일 끌리긴 하네.’

김지훈도 사람인지라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신현수와 진상건의 얼굴이 동시에 아른거렸다.

이내 보기 싫은 얼굴 하나가 사라졌다.

“지금은 적절한 자리도, 때도 아닌 것 같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진충기 교수가 입맛을 다셨다.

‘갑작스러운 제안이지만 지금보다 적절한 때가 있을까? 이준영 선생님과 사인방 때문일 가능성이 높겠군. 어쩌면 오 교수 상황도 고려하겠지. 쯧! 강점이자 단점이야.’

김지훈이 유혹을 떨치려는 듯 서둘러 자리를 떴다.

‘싱숭생숭하네.’

기분이 묘한 가운데 한 통의 전화까지 받았다.

재단과 외과 사이의 불화를 직원이나 의사 누구도 숨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유력한 대학 병원 과장이었고, 그 역시 식사 약속을 잡자며 비슷한 제안을 언급했다.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파격적인 제안이자 대우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김지훈에게 직장을 옮기는 것은 도피와 다름없었다. 모든 노력을 다한 후에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을 때 택해야 하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래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폐쇄적인 의사 사회의 벽을 뚫고 이만큼 성장했다는 기쁨이 한동안 가슴속을 감돌았다.

“수고했다. 식사하러 가자.”

이준영 교수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입이 근질거렸지만 함부로 발설할 일이 아니었다. 죽으나 사나 병원에 충성해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다들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데 찬물을 끼얹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훈아, 펠로우들아, 잘했다. 잘했어. 너희들이 정말 자랑스럽다. 마음껏 일할 분위기를 만들어 줘야 하는데 미안하다. 미안해.”

송재덕 교수의 말에 스카우트 제의가 가져온 즐거움이나 이득보다 거절의 당위성이 더 커졌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과 함께 역경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마땅했다.

의사 생활 한두 해 반짝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장기적으로 볼 때 어느 선택이 더 유리한지도 불분명했다.

더욱이 학회 발표를 축하하는 자리였다.

“마시자. 마셔.”

‘카르페 디엠!’

한 잔의 술로 마음속 근심을 잠시 잊었다.

불현듯 진충기 교수의 구체적인 제안이 비장의 카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언제 꺼내야 할지 모르지만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던질 수 있어야 했다.

의사는 병원에 종속된 직원이었다. 그러나 대가라 불리며 수많은 대기 환자를 가진 의사는 역으로 병원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많은 수의 환자가 병원이 아닌 의사를 보고 오기 때문이었다.

김지훈도 그런 수준에 올라서고 있었다.

그동안 흘린 피땀이 만들어 낸 힘이었다.

외과의 능력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스승님과 교수님들의 위상까지 고려하면 재단에 질질 끌려 다닐 이유가 없다. 당당히 원하는 바를 말하고 관철시켜야 한다.’

김지훈이 술잔을 부딪치며 활짝 웃는 펠로우들을 보았다. 신분이 가장 불안정하건만 이 순간만은 근심 걱정 하나 없어 보였다.

스승과 선배에 대한 믿음이었다.

김지훈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왠지 어깨에 힘이 팍팍 들어갔다.

***

약속했던 이 주가 거의 다 지났다.

학회가 준 진한 여운이 차츰 옅어지며 냉혹한 현실이 사인방의 발목을 잡았다.

신현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수치를 무릅쓰고 수차례 면담을 요청해 최선책을 도출해 내고자 했다. 하지만 진상건의 관심은 온통 복수의 다른 말인 지분뿐이었고, 일말의 여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사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견된 일이었지만 의사들 중 유일하게 발언권을 가진 원장단 또한 완벽하게 진상건의 손안에 들었다. 설상가상 천안 병원과 구미 병원도 이미 무리한 인사이동에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사방이 온통 적으로 둘러싸인 형국이었다.

물러설 곳이 없었다.

정면 돌파만이 답이었다.

‘지분, 신규 병원, 간 이식 센터 모두 포기할 수 없다. 흥분은 금물이다. 냉정하게 생각해야만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

방법이 있을까?

신현수가 전화기를 들었다.

자신의 또 다른 기반인 일반외과 전체의 힘이 필요했다. 믿을 수 있는 친구들에게 그동안 숨겨 왔던 사실까지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연락을 받은 김지훈의 얼굴이 벌게졌다.

‘지분을 포기하라고? 이건 병원을 통째로 빼앗아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소리 아닌가? 희망을 품었던 내가 바보였네. 제길! 그때 물어봤어야 했어.’

진상건이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신현수의 말을 몇 번이나 곱씹어도 병원을 경영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 소유로 만들겠다는 의미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면담 후, 신중함을 유지하며 스승의 눈빛이 좋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한때나마 잘될 것이란 기대를 품었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러웠다.

그간 간 이식 센터를 위해 접촉한 모든 의료진들도 걱정이었다. 자세한 내막을 알면 아예 합류 의사를 접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사인방 모두 비장한 각오로 머리를 맞대야 했다.

약속 장소로 향하는 김지훈이 이를 악물었다.

면담의 기억이 어제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이미 결론 다 내놓고 할 일 했다는 생색이나 내자고 스승님까지 우롱해? 네 뜻대로만 되진 않을 거야. 최악의 경우 간 이식 센터까지 만들든 내가 나가든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어.’

진상건이 위협을 느낄까?

가능성이 없지만은 않았다.

불과 몇 년 전이었으면 누가 이사장이든 콧방귀를 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의료계 내부에서 차지하는 김지훈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다.

이미 스카우트 제의까지 받았다.

김지훈이 원하면 환영할 병원은 많았다.

이준영 교수와 함께라면 더욱 위력적일 테고, 뜻을 같이할 동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신동철 이사장과의 약속을 진상건에게 지켜야 할 의무도 없었다.

‘다른 병원에서 간 이식 센터 설립을 약속한다면 최소 혁원이, 종진이, 진우는 따라오겠지? 일석이와 경석이 형은 같이 간다고 할까?’

바람이지만 우려하지 않아도 좋았다.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만으로도 진상건에게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대가를 치러야겠지만 막다른 궁지에 빠졌다. 더 이상 밀릴 구석조차 없었다.

만약 김지훈의 생각이 실제로 이뤄진다면 주력 상당수가 사라진다. 특히 이준영 교수와 김지훈은 대체가 불가능한 써전이었다.

극적인 계기나 진상건의 태도 변화가 없다면 남은 교수들의 의욕과 열정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결국 서울 병원 외과는 간담도 파트를 시작으로 붕괴 위기에 처할 것이다.

메이저 과, 특히 외과의 기본이자 중추인 일반외과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연쇄적으로 연관된 다른 과까지 원활한 직무 수행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파급력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다시 정상적으로 복구하기 전까지는 대학 병원이라 할 수조차 없었다. 능동이 아닌 수동적 태도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이사장으로서 경영을 책임져야 하는 진상건은 그런 부담을 감수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사활을 걸어 밀어붙일 경우 다른 파트까지 모두 책임질 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남아야 하는 동료가 결코 적지 않았다.

서울 병원에 갖는 애착도 남달랐다.

김지훈이 감당하기 힘든 부담이었다.

‘제길!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망가지네.’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두어야 했다.

결국 내부에서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사실 진상건이 취임 전 의도치 않게 준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았다. 예견되는 위험을 모두 피해 갈 수 없겠지만 진상건이 거부할 수 없고, 신현수에게도 피해가 없는 방안을 찾아왔다.

문제는 이미 손일석과 이경석에게 심각한 고민을 안겨 준 방안이라는 점이었다. 관점에 따라 희생을 요구하는 일일 수도 있었지만 대안이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사인방 모두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 한 말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또 정리해 결심을 굳혔다.

‘어떤 선택을 하든 결정은 각자의 몫이다. 정말 함께 일하고 싶지만 절대 내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사인방의 결정이라는 한 고비를 넘긴다 해도 반드시 일반외과 주요 구성원의 동의를 구해야 했다. 불가피하게 흘려야 할 피가 관건이었다. 가슴 아프지만 어떤 방법을 택한다고 해도 전체가 하나가 돼 움직일 방안은 없었다.

사인방이 모였다.

신현수가 다시 상황을 설명했다.

김지훈은 자신이 생각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일반외과 입장에서는 병원을 나가거나 불만을 폭발시켜 뒤집어엎는 일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특히 사인방에게는 인생이 걸린 일이었다.

손일석이 피식 웃었다.

“지훈아, 우리가 동의하든 말든 네 제안이 최선이고, 누가 함께하느냐가 문제지 결과는 마찬가지 아니야?”

“정말 무리한 일이라는 거 빤히 아는데 욕심이 앞서네.”

“자식! 내가 신규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할 때도 얼굴이 좋지 않더니 지금도 그러네. 이제 우리 없이 홀로 설 줄 알아야지. 이렇게 정에 연연하다간 간 이식 센터 제대로 이끌기 힘들어진다.”

“역시 힘들겠지?”

“방안 자체는 동의하지만 입장 바꿔 생각해 봐. 전에 네가 말한 이후 쭉 고민해 왔는데 정말 쉽지 않은 일이야.”

이경석은 물론 신현수조차 말이 없었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김지훈의 제안의 핵심에는 동의했다.

외과 전체 구성원 앞에서 공식 제안하는 일만 남았다. 추측컨대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생각해 볼 방법이었다.

다만 동의 여부는 별개의 문제였다.

“지훈아, 최선이라고 해도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부분이 있잖아. 선생님들께 미리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다. 처음 말했을 때와 상황이 또 바뀐 이상 나도 고민은 해 볼게.”

“부담 갖지 마세요. 나도 동의 못할 일이잖아요. 선생님들께는 미리 말씀드리죠.”

“오늘 밤 잠 못 자겠네.”

신현수까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솔직히 어마어마한 부담을 가했다.

최선이 없어 차악을 택한다더니 지금이 딱 그 꼴이었다. 그러나 진상건이 물러나지 않는 한 다른 방도가 없어 밀어붙여야 할 상황이었다.

‘비관적으로만 생각하지 말자. 우리 선택과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훌륭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곰곰이 고민에 잠겼던 김지훈이 돌연 이를 갈았다.

‘아차! 내일 담도암 환자를 잊었네. 환자에게 문제 생기면 진상건, 너 가만 안 둔다.’

절대 쓸 수 없는 주먹이 울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