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현실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전자를 택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감정과 명분에 목숨을 거는 존재이기도 했다. 동료들과 쌓은 정 역시 결코 적지 않았다.
‘병원 발전을 위한 방안이자 아버님의 유업이다. 무엇보다 함께 가지 못하면 아무 의미도 없다.’
홀로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상의해야 할 사람은 가족이었다.
직접적인 당사자가 돼 버린 절친한 동료와 믿을 수 있는 스승들도 빼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사이기 전에 의사라는 사실, 가장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친구에게 무척 중요한 일이 남았다는 사실이 발목을 잡았다.
진상건이 제시한 기한을 두고 줄다리기를 하는 것마저 자존심이 상했지만 접어야 했다.
“부탁 하나 드리겠습니다.”
“뭡니까?”
“이 주 정도 말미를 주십시오.”
“이 주씩이나요? 신 이사님이 의사로서 시간을 빼앗기듯 나 역시 이사장으로서 시간이 그리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혹시 다른 생각이라도?”
‘끝까지 이사장이란 사실을 강조하는구나.’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중요한 학회가 있습니다. 일반외과 교수로서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가 있고, 최선을 다하고 싶을 뿐입니다.”
진상건의 입꼬리가 말렸다.
‘학회를 핑계로 시간을 벌겠다? 하하하! 얼마든지 들어주지. 방법이 나오기는커녕 네가 얼마나 무력한지 절실하게 깨닫는 시간이 될 거야.’
이미 충격을 줄 대로 주었다.
기 싸움 단계를 넘겼다고 여겼다. 이 주라는 시간 동안 자신이 얼마나 고립무원인지 알게 된다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좋습니다. 단, 그때는 반드시 결론을 갖고 내 방에 와야 합니다. 빈손이라면 더 이상 지켜보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잊지 마세요.”
진상건이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눈길도 주지 않았다.
집무실을 나온 신현수가 부들부들 떨었다.
시간을 벌어 해결책을 강구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빤히 들킬 수밖에 없는 의도를 읽은 진상건의 득의에 찬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일반외과 의국을 실망시킬 수 없었다.
선대부터 이어져 온 가업이나 다름없는 병원을 포기할 마음은 좁쌀만치도 없었다.
하기에 이겨 내야 했다.
김지훈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이 주 후에 최종 결정 하기로 했어.”
“뭐야? 그러면 공사 중단에 센터 유보까지 모두 변한 것이 하나도 없네. 도대체 왜 부른 거야?”
부담을 주기 싫었던 신현수가 애써 미소를 머금었다.
“무슨 핑계를 대든 결국 돈 문제지, 뭐. 사방팔방 뛰어다니면서 해결책을 모색할 테니까, 지훈이 너는 학회 준비나 열심히 해.”
“에이! 결국 아무 소득도 없는 거네.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해야 할 일을 팽개치지 않으니까 너도 학회는 걱정하지 마. 나만 믿어. 다 잘될 거야.”
김지훈이 큰소리를 쳤다.
신현수가 안심이 된다는 듯 웃으며 퇴근했다.
멍하니 뒷모습을 바라보던 김지훈이 이준영 교수에게 연락했다.
“스승님, 잘 안 된 것 같습니다. 말은 안 하는데 뭔가 다른 문제가 생겼다는 느낌도 들었고요.”
(예상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까?”
(의사의 힘이 어디서 나오겠어? 학회에만 집중해.)
“손일석 선생과 이경석 선생에게 현수 다독이라고 얘기하겠습니다. 많이 힘들어 보입니다.”
(넌 한 발 뒤로 빠져.)
“그게 좋을까요?”
(간 이식 센터는 네가 가장 먼저 제안한 일이야. 얼굴 보면 말이 나올 수밖에 없고, 그때마다 부담이 가중될 거야. 가끔은 모른 척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되는 때도 있다.)
“알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김지훈이 나직한 숨을 내뱉었다.
신현수를 보는 순간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도 남았다. 스승의 말이 아니었어도 시시콜콜 묻고 싶은 생각을 누르길 잘했다.
‘먼저 꺼낼 때까지 기다리자.’
어차피 지금은 신현수 이외에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쓸데없는 오해와 잡음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진상건이 올바른 이사장이라면 이 주가 지나기 전에 모두가 납득할 만한 대책을 먼저 내놓아야 했다. 신현수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자세히 몰라도, 그것이 병원 구성원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자 예의였다.
당분간 조용히 학회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마냥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외과 미래가 걸린 이상 손일석, 이경석과 함께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대비해야 했다.
이삼 일에 한 번씩 자리를 만들었다.
논의를 거듭해도 제자리만 뱅뱅 돌 뿐이었다.
김지훈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만일 재단의 입장이 변하지 않는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이 최선일까? 진상건 이사장이 받아들일까? 일석이와 경석이 형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선택인 반면 김지훈이 구상하는 내용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서울 병원에 간 센터를 만들고자 하는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특히 기존 교수들을 포함해 상대적으로 풍부한 의료진의 존재를 고려한 결과라는 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머릿속에만 담긴 생각은 실현 여부를 떠나 공염불에 불과했다. 비상 상황이라 해도 무방한 이상 터놓고 말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예측과 다르지 않았다.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손일석과 이경석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황당하다는 기색까지 보여 순간 공연한 짓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일석아, 그냥 내 생각일 뿐이야.”
손일석이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생각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게 진짜 문제다. 하지만 가정이라고 해도 개인적으로 부담이 정말 커. 의사 인생을 걸어라, 이 말이잖아.”
“경석이 형, 이런 말까지 해서 정말 미안해요. 생각다 못해 나온 말이고, 무리한 일이라는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도 답답해서 한 소리예요.”
이경석이 입을 다물었다.
손일석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막상 말을 꺼낸 김지훈도 후회가 밀려들 지경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큼 부담스럽다 못해 치명적인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성급했나? 아니야. 동의하든 안 하든 지금이 아니면 고민할 시간조차 없다. 에휴! 나 같아도 펄쩍 뛸 말을 해 놓고 기대하는 거 자체가 욕심이네.’
침묵이 길어졌다.
손일석과 이경석은 김지훈의 무리하다 못해 불가능한 제안에 대해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아예 무시했으면 좋으련만 심각하게 고민하는 기색을 보여 역으로 부담만 커졌다.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자신의 최선이 타인의 최선일 리 없었다.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째깍! 째깍!
시간은 무심했다.
이준영 교수, 오창도 교수, 김지훈, 세 명의 펠로우에 고경철까지 쉴 틈조차 없는 나날이었다. 그나마 학회 덕에 부담스러운 일을 모두 잊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드디어 학회 발표 날이 밝았다.
이른 새벽.
김지훈이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었다.
옷이 날개라는 말처럼 자리와 격식에 걸맞은 차림이 중요했다. 더구나 이전 학회와 달리 여러모로 무척 의미가 깊은 행사였다.
학회 발표는 대개 세 개 세션(Session)으로 나뉜다.
각 세션당 세 개 내지 네 개의 개별 주제가 발표되는데, S병원이 네 개의 주제를 맡았다. 무려 삼분의 일에 가까운 비중을 차지한 것이다.
전국에 존재하는 대학 병원이 한둘이 아닌 이상 이준영 교수가 대가라 인정받는다 해서, 간담도 학회 학회장을 맡았다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오직 실력만이 가능케 하는 일이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김지훈 개인의 성과였다.
원 포트, 생체 간 이식, 췌장 복강경 수술까지 독보적이면서도 선도적으로 도입해 이룬 결과를 노련하고 쟁쟁한 써전들로 구성된 학회에서 인정한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엄청난 힘을 지닌 개인적 자산이 분명했다.
“발표 잘하고 와요.”
“걱정 말아요. 늦을지도 모르겠어요.”
“이번 주말만 예외로 할게요.”
학회장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최근 복잡하고 답답한 일로 항상 찜찜했지만 오늘만큼은 마음껏 즐겨도 좋은 날이었다. 자만하지 않고 달려간다면 자랑해도 괜찮을 날이 올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성과를 냈더라도 발표를 제대로 못하면 빛이 바랜다. 재단, 간 센터 일 모두 잊고 학회에 충실하자. 내가 중심을 잃는 순간 자칫 후배들 모두 흔들릴 수 있다.’
학회장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의사들이 입장해 있었다.
송재덕 교수, 이준영 교수, 오창도 교수를 필두로 김지훈과 세 명의 펠로우에 고경철까지 만반의 준비를 했다. 서도진을 비롯해 강병옥까지 얼굴을 보여 하마터면 정신이 분산될 뻔했다.
김지훈이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집중하자. 집중.’
“추계 간담도 학회를 시작하겠습니다. 학회장이신 이준영 교수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역시 달라질 사람이 아니었다.
의례적인 인사가 짧게 끝났다.
모든 사전 행사가 끝나고 이내 수많은 써전이 운집한 가운데 첫 발표가 시작됐다.
간암 수술에 대한 고찰이었다.
이준영 교수가 좌장이었다.
나종진이 제일 저자로서 연자로 나섰다.
“지난 오 년간 본원에서 시행한 간암 수술 삼백 케이스를 기초로 한 결과와 예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울러 개복과 라파로 간의 유의미한 차이를 비교 고찰하겠습니다.”
과연 대가라 불릴 만했다.
간암 수술을 거의 매주 한 건씩 시행했다. 무엇보다 복강경 수술 건수가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많다는 사실이 상대적인 침묵을 유발했다.
“라파로까지 짧은 시간에 많이도 하셨네. 케이스 적은 병원은 명함도 못 내밀겠어.”
“할 말이 없네. 할 말이 없어.”
간담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오창도 교수의 발표가 이어졌다.
송진우가 제이 저자에 올랐다.
여전히 일반화되지 않았기에 뜨거운 관심이 쏟아졌다. 특히 돈독하면서도 강력한 라이벌인 진충기 교수의 매서운 질문이 이어지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김지훈 교수가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발표는 오 교수가 하네요. 아예 수술을 넘긴 걸까요?”
“허허! 누가 알겠습니까? 예전에 한 병원에서 근무한 진 교수가 칼을 갈고 온 건 틀림없어 보입니다. 둘 다 얼굴이 나빠 보이지 않아 다행입니다.”
“결과가 상당히 좋네요. 이대로만 가면 오 교수 위상이 예전과 확실히 달라질 것 같습니다. S 병원이 주도권을 갖기 전에 우리도 빨리 시작해야 하는데 걱정이네요.”
건전한 경쟁이 흥미까지 더했다.
열띤 분위기를 잠깐의 커피 타임으로 가라앉혔다. 그러나 이내 김지훈의 발표가 이어지자 수많은 써전들이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미 간 이식 수술을 시행하는 병원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시늉에 불과하다 할 정도로 건수가 적어 발표할 기본 요건조차 채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유는 빤했다.
모두들 장기 기증 부족이라는 절실하면서도 공통된 고민을 갖고 있었다. 돌파구가 될 생체 간 이식에 대한 관심이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공여자, 수혜자 수술 팀을 각각 운용하는 데 어려움은 없습니까? 공여자 수술 후 퇴원 기준은 어떻게 됩니까? 특별한 문제는 없었습니까?”
“다른 수술과 병행하는 데 따른 부담은 없습니까? 필요 인력이 몇 배는 필요할 텐데 주당 몇 건의 수술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혈액형이 상이한 경우에도 가능하다고 하셨는데 또 다른 케이스는 없었습니까? 다시 시도할 생각이십니까?”
수많은 질문이 이어졌다.
김지훈도 많은 도움을 얻었다.
특히 남부 지역에서 먼저 간 이식 센터를 만들어 확고한 위치를 점한 부산 모 대학 병원 분원의 경험을 일부 공유한 것은 귀중한 소득이었다.
시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췌장 복강경 발표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역시 장기 자체가 가진 위험성이 상당한 논란을 유발했다. 심지어 진충기 교수마저 비판적 입장에서 질문을 아끼지 않았다.
“개복과 비교해 여러 면에서 유리한 것이 사실이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없다고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확장 가능성이 있습니까?”
김지훈이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발표를 보시면 경험이 쌓일수록 결과가 좋아지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위험도를 줄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충분히 확장 가능하다고 판단됩니다.”
“어디까지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많은 요소를 감안해 결정해야겠지만 췌장암이나 담도암 역시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간 이식 수술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복잡하고 위험한 수술인 휘플을 복강경으로 시도하겠다는 소리에 발표장이 뒤집혔다.
찬반 의견이 쏟아졌다.
김지훈은 흔들리지 않았다.
논란은 충분히 예상했던 문제였다.
애초 시도할 생각이 없었다면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었다. 오히려 부담스러울 정도로 뜨거운 관심에 당위성을 얻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았다.
결과 역시 김지훈의 몫이었다.
주어진 시간이 훌쩍 지났다.
좌중의 분위기가 너무 뜨거워져 사회자가 나서 정리해야 할 지경이었다. 찬반을 떠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끝으로 김지훈이 연단에서 내려왔다.
짝짝짝짝! 짝짝짝짝!
논란의 중심에 선 주제였다.
김지훈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수많은 써전들의 뇌리에 다시 한 번 각인시킨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