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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047화 (1,047/1,329)

13화

사인방에게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원장님은 어떻게 되실까?”

“성형외과 과장님이 유력하다는 소문이 있어.”

“성형외과? 정말이야? 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그 선생님은 아니지 않아?”

“그쪽 펠로우들이 거의 확실하다고 수군거리더라. 그 양반 과장 자리 놓지 않고 엄청 오래 하더니 결국 원장까지 되는 모양이야. 마음에 안 들어. 예전부터 여기저기 기웃거린다는 소문이 자자했는데 솔직히 이건 아니지.”

신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소속된 과는 기준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의사들이 존경하고 인정하는 교수가 물망에 올랐어야 했다. 더욱이 의사라고 아부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이경석이 눈가를 찡그렸다.

“누굴 뽑든 이미 공사가 어느 정도 진척된 신규 병원을 전면 백지화할 수는 없을 거야.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빠져나가야 한다는 건데, 그게 마음에 걸려. 설마 기존 선생님들 자리를 외부에서 충원하지는 않겠지?”

손일석이 고개를 저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억지로 빼는 것도 아니고, 백번 양보해서 경력 있는 선생님들을 충원한다고 쳐요. 선생님들과 비견될 정도로 쟁쟁한 써전이어야 하는데, 그런 분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지 않겠어요? 자기 자리 차 버리고 애먼 동네에 누가 오겠어요? 우리 과에 융합되기는커녕 욕만 먹을 겁니다.”

“우리 과 내부에서 다른 선생님들이 맡아도 문제야. 어떤 이유를 대도 상당히 껄끄러울 수밖에 없잖아. 재수 없으면 우리한테까지 불똥이 튈 수 있어.”

“제길! 맡으면 얼굴 들기 힘들 정도로 부담스럽고, 거부하면 다른 과에 자리를 뺏길 수밖에 없네. 진퇴양난이네. 예전처럼 내부에서 의견 수렴하고, 승인하면 간단할 텐데 왜 이 난리를 치죠? 설마 그걸 노리는 건가?”

결과적으로 기존 보직 교수가 많은 일반외과가 가장 큰 문제에 직면했다.

누구도 이유를 모를 수 없었다.

말은 안 했지만 진상건의 또 다른 의도를 추측할 수 있었다. 신현수가 이사가 아니었다면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관련된 모든 부분 및 인물에 압박과 부담을 가해 완전히 힘을 빼려는 속셈이 엿보였다.

속마음이 어떨지 모르지만 제자들은 걱정이 태산인데 정작 보직을 사임한 교수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송재덕 교수가 침묵을 지키는 한 드러내 놓고 반발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자리와 명예에 연연하지 않는 교수들의 모습은 배워 마땅했다. 하지만 이면에 숨은 진상건 이사장의 의도가 너무 거슬렸다.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은퇴할 때까지 평의사로 근무해야 한다는 압박이 분명했다. 일반외과와 신현수를 목표로 삼은 것은 지난날의 은원 때문이 분명했다. 정당한 일이었어도 자신들이 피해를 입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지도 몰랐다.

실제 결과가 그렇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요 보직과 규모가 큰 과를 중심으로 빠르게 결정이 났다. 최종적으로 이사들에게 선을 댔다는 소문이 난 교수들과 행정 직원들이 속속 보직을 맡았다. 신현수, 윤서연, 최만철 이사의 반발도 소용없었다.

일반외과는 여전히 어떤 통보도 받지 못했다.

심지어 내부에서 결정할 수밖에 없는 과장과 간 센터 책임자까지 말이다.

무력한 현실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도대체 지연시키는 진정한 이유가 무엇일까?

스승의 거취와 간 이식 센터에 사활을 건 김지훈은 손 놓고 마냥 처분만 기다릴 입장이 아니었다. 의사로서 대응할 계획이 있어야만 했다.

경우의 수를 꼽았다.

‘현재 중단된 신규 병원 공사와 간 센터 설립이 모두 재개된다면 내부 문제만 남는다. 하지만 이렇게 무리한 인사를 강행한 것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둘 중 하나만 추진한다면?’

이미 상당한 재정을 투여해 공사가 진척된 신규 병원 건립을 백지화시킬 리 없었다. 결국 서류에만 존재하는 센터 설립이 무산될 것이다.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나? 아니야. 진상건이 이사장에서 쫓겨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야.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학회 준비로도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고민까지 깊어졌다. 결코 일회성으로 끝날 일이 아니기에 한곳에 집중하지 못했다. 능력을 갖춘 펠로우들이 아니었다면 부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긴 장래가 걸린 일이기에 펠로우 속도 썩어 문드러지고 있을 것이다.

“상황 잘 알지? 이준영 선생님과 오창도 선생님도 많이 힘드실 거야. 가급적 우리 손에서 한 번에 끝내자. 저자 문제는 내가 책임질게.”

“저희는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공헌도에 따라 결정하는 게 맞아.”

각자 외부 요인에 휘둘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이상 재단도 결정을 미룰 상황이 아니었다.

기다림의 결과는 진상건이 요청한 이준영 교수, 김지훈, 신현수와의 면담이었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사장실 앞에 섰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보직 교수님들과 먼저 면담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난 왜 보자고 할까?’

어떤 직책도 없는 부교수에 불과한 김지훈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간 이식 센터 설립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어떤 제안을 할지 몰랐다.

부딪쳐 볼 일이었다.

똑! 똑! 똑!

“들어오세요.”

진상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전까지 그 자리에 앉아 손님을 맞이하던 신동철 이사장이 생각나 기분이 묘했다. 신현수의 감정은 더욱 복잡할 것이다.

반면 단정하게 빗은 머리, 깔끔한 복장, 껄끄러운 상황에서도 잃지 않은 미소, 정중하게 자리를 권하는 모습까지 생각과 너무 달랐다.

그렇다 해도 기분 좋은 만남이 아니었다.

이준영 교수가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그간 일이 많아 개인적으로 만나 보고 싶었던 교수님들과 이제야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오늘도 공적인 일을 먼저 꺼내야 합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말씀하십시오.”

“신규 병원과 간 이식 센터에 관한 서류를 검토했습니다. 두 건 모두 일반외과와 상당히 관련이 깊더군요. 신규 병원의 경우 매출 비중이 가장 큰 정형외과가 소외됐다는 느낌을 받았을 정도입니다. 아! 매출이란 말을 곡해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아직 습관이 남아서요.”

수순의 문제일 뿐 당연한 일이었다.

“정형외과도 무척 중요한 과입니다만 응급실, 중환자실 운영 등과 관련해 초반에는 우리 과와 내과 위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병원도 동일한 방식으로 시작해 병원을 키워 나갑니다.”

“그런 면이 있군요. 인정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검토해 봐도 수년간 적자가 불가피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 가지 사업을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특히 간 이식 센터는 돈 잡아먹는 하마가 따로 없더군요. 이사장이 바뀐 이상 날 설득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없이 맞닥트렸던 상황이었다.

이준영 교수의 허락을 받은 김지훈이 세세하게 필요성과 당위성을 설명했다. 진상건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심각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동의할 부분이 상당히 많네요. 다만 병원 전체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은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결정 기다리겠습니다.”

“이게 모두 병원 발전을 위한 일인데 너와 내가 어디 있겠습니까? 기본 검토가 모두 끝난 이상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서로 합심하면 더 좋고요. 사실 그게 제일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진상건의 눈빛도 묘했다.

‘아예 현수 편을 들지 말라는 소리네. 어디까지 나갈 생각이지?’

이준영 교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기대했는지 진상건이 김지훈에게도 눈길을 주다 말고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그동안 쭉 신호를 줬는데 인사치레 말도 안 해? 한솥밥 먹었다 이거군. 지나치게 뻣뻣하면 부러지기 마련이지. 오히려 부담을 줄였어.’

“이제 신현수 이사님과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군요. 두 분을 직접 만나 보니 보직 결정까지 더욱 빨리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 일하길 바랍니다. 어려운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까지 정중했다.

부정적인 반응도 원론적인 입장에 불과했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생님, 잘될까요?”

“기다려 보자.”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무뚝뚝함 속에 부정적 기류가 숨어 있었다.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느껴졌다.

“혹시 제가 모르는 일이 더 있습니까?”

“아니다. 사람 보는 눈일 뿐이야.”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 첫인상이 무척 중요하지만, 때문에 잘못 판단하는 경우도 많은 법이었다. 살아온 세월의 차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성형외과 과장님이 원장 물망에 올랐다는 것으로 이미 끝난 걸까? 사실상 현수와 등 돌린 상황에서 어떤 대화를 나눌까? 나오면 알 수 있겠지.’

그 시간, 집무실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신현수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두 곳 중 하나를 포기하란 말입니까?”

“두 곳 중 하나가 아니죠. 신 이사님도 답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정밀하게 실사한 결과 추가 재정 투여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신규 병원도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점을 직시하세요.”

신동철 이사장은 미래 지향적일 뿐 몽상가가 아니었다. 현실적인 문제 역시 절대 무시하지 않았고, 한때 목적을 위해 금경태 같은 사람의 본질을 알고도 중용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병원이 휘청거릴 정도로 무리한 결정을 내릴 리가 없었다. 하지만 실권은 이사장이 쥐고 있었다. 진위를 떠나 실사 결과까지 들이미는 순간 어떤 항변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결론을 내놓고 이준영 교수님과 김지훈 선생은 왜 만난 겁니까?”

“적어도 관계자의 의견은 들어 봐야 하는 것이 이사장의 책무가 아니겠습니까? 다른 이사님들도 동의한 상황입니다. 일단 간 이식 센터 건은 없던 일로 하는 것이 현재 방침입니다. 그러나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내 생각을 벗어날 정도로 절실하다면 말이죠.”

신현수가 이를 악물었다.

대가를 바라고 있었다.

“방법이 뭡니까?”

“두 사업을 동시에 추진하려면 추가 대출을 받아야 하는데, 재단은 더 이상 담보를 제공할 의향도 능력도 없습니다. 신 이사님과 윤 이사님이 가진 것을 제외하면 말이죠.”

“설마 지분을 담보로 잡히란 말입니까? 비영리 법인입니다. 은행에서 받아 줄 것 같습니까?”

진상건이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자금은 은행과 똑같은 조건으로 내가 대죠. 단, 삼 년 이내에 이자와 원리금 전액을 갚아야 합니다. 이행하지 못할 시 지분을 모두 포기해야 할 겁니다.”

송곳니를 드러냈다.

신현수가 으스러지게 주먹을 쥐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병원 운영도 사업이고, 사업이란 것이 원래 그렇습니다. 어떤 조직이든 오너가 확실하게 장악하지 못하면 분란만 커지는 법이죠. 이미 전대 회장님도 내 아버님께 그런 일을 벌인 적이 있지 않습니까? 되풀이하고 싶지 않네요.”

신현수가 입을 열지 못했다.

반박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지난 일을 들춰 싸우기보다 눈앞에 닥친 위기 돌파에 전념해야 했다. 단 한 가지라도 상대의 의도를 모르면 실수를 반복하기 십상이었다.

‘원래 이런 사람들이다. 절대 흥분하면 안 된다.’

“조건은 그게 전부입니까?”

“안타깝지만 추가로 몇 가지 소소한 안건을 동의해 줘야겠습니다. 장례식장과 주차장을 비롯해 영리 부분을 모두 외주로 돌리고, 신규 병원이든 간 이식 센터든 재정 관리는 내가 지정한 사람이 맡아야 합니다. 앞으로 이사님은 진료에만 전념하세요. 어차피 승인될 일을 두고 매 안건마다 투표를 해야 한다면 꼴불견이 아니겠습니까?”

“이권을 빼돌리겠단 겁니까?”

“그럴 리가요. 적법한 절차를 지켜야죠. 그보다 핵심에 집중하세요. 수단은 많습니다. 병원을 옮긴다면 모를까, 신 이사님만이 아니라 동료들까지 피해를 볼 수 있습니다. 신 이사님, 사람은 언젠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돼 있습니다. 설령 돌아가신 분이 벌인 일이라 해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 세상입니다. 일주일 정도 말미를 드릴 테니 신중하게 결정하세요. 단, 너무 늦으면 안 됩니다.”

이사장과 이사의 대화가 아니었다.

여유가 넘쳤다.

정중한 목소리는 조롱이었다.

승자가 패자를 대하는 태도였다.

신현수가 냉철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기존 보직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대충 들어 알고 있지 않습니까? 원장과 응급실 부장을 꼭 일반외과에서 맡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사님들과 충분히 상의해서 결정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과장과 센터장도 보다 유능한 피를 수혈해야겠지요.”

일반외과 의견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사회의 주요 구성원인 신현수는 물론 윤서연, 최만철 이사까지 허수아비 취급을 했다. 아홉 이사의 과반인 여섯이 참석해 넷이 찬성하면 통과될 안건이기에 결정을 뒤집을 수도 없었다.

기로에 섰다.

당분간 지분을 보유한 채 이사 역할만 포기하면 자존심은 상해도 재기할 기회를 노릴 수 있을 것이다. 대신 아버지의 유업, 동료들과 함께 꿈꾼 미래가 모두 사라진다.

지분을 포기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재정 관리자를 진상건이 임명하는 이상 온갖 트집과 방해를 일삼을 것이다. 특히 신규 병원은 단기간에 실적을 내기 어려웠다.

결국 삼 년을 연명하는 꼴에 불과했다.

선택은 불을 보듯 명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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