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046화 (1,046/1,329)

12화

그날 저녁 늦은 시간.

이사장실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휑한 집무실에 한기만 감돌았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아버지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집무실을 보던 신현수가 붉어진 눈가를 굳혔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의료진 모두 본연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자신의 의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가슴 깊이 새겼다.

그럼에도 인정하기 쉽지 않았다.

신현수가 행여 간과한 부분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회의 자료를 다시 확인했다. 진평호 회장과 다른 인물이기를 간절히 바랐건만 기대하지 못할 희망이었다.

‘그때 진평호 회장이 보유했던 지분을 이사들에게 넘긴 것이 아니었어. 최만철 이사님 말대로 차명으로 숨겨 오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행동에 나선 것이 분명해.’

은근한 분노가 치밀었다.

진상건은 전임 이사장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우려 할 것이 분명했다. 첫 번째 목표는 신규 병원과 간 센터 설립의 타당성을 따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당연히 걸림돌이 되고도 남을 아들이자 이사인 신현수는 가장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제거 대상이었다.

지분만 가진 허수아비로 만들려 할 것이다.

대비해야 했다.

재단과 지분 문제를 상의해야 할 상대는 윤서연과 일가친척이었고, 신규 병원 등의 문제는 당사자이자 믿을 수 있는 친구를 찾아 의논할 수밖에 없었다.

밤새 거실 등이 꺼지지 않았다.

다음 날.

사인방이 머리를 맞댔다.

신현수가 이사회에서 벌어진 일의 전말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간 이사회는 먼 나라 이야기라 할 정도로 관심사 밖이었지만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김지훈은 물론 손일석과 이경석 모두 잔뜩 찌푸린 얼굴로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이미 신임 이사장으로 진상건이 선출됐다는 소식이 퍼졌다. 신분이 보장된 채 제자리에 안주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가 됐든 상관없는 일일 수도 있었다.

일반외과 입장은 확연하게 달랐다.

손일석의 거취가 달린 신규 병원 공사 재개는 물론 간 이식 센터 건립이 예정대로 추진될지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일말의 희망을 품었건만 한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는 순간 분위기가 돌변했다. 당직도 아니었던 신현수의 눈에 서린 핏발의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돌발 변수 정도가 아니었다.

발등에 폭탄이 떨어졌다.

“진평호 아들이라고?”

“나도 이번에 알았어.”

“신장 이식과 금경태 과장 일로 완전히 쫓겨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손일석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지분을 차명으로 분산해 숨기고, 재단을 장악할 기회만 엿본 것 같아. 어제 상황을 보면 성급한 판단도 아니야.”

“제길! 진평호와 똑같은 사람이라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돈 되는 일에만 투자하고, 진료 환경은 더 나빠지는 거 아니야? 서연이도 있는데 왜 그걸 못 막았어?”

일반외과만이 아니라 재단에도 심대한 악영향을 끼쳤던 진평호였다. 막을 수 있었다면 누구보다 먼저 나서 막았을 신현수였다.

의사 일로도 바쁜 상황에서 이사 일까지 완벽하게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신규 병원과 간 이식 센터가 아니었으면 재단 일은 이사회에 전적으로 맡겼을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손을 들어 진정시켰다.

‘후우! 침착하자. 침착해야 돼.’

솔직히 가슴이 벌렁거릴 정도로 앞날이 걱정됐지만 누구 탓도 아니었다.

흥분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석아, 아직 아무것도 결정 난 게 없잖아. 진정해. 신규 병원과 간 이식 센터 처리를 어떻게 하는지 봐야 의도를 짐작할 수 있지 않겠어? 현수야, 언제쯤 결정이 날까?”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했지만 진상건이 병원 상황을 확실하게 파악하려면 꽤 걸릴 거야. 반대로 사업을 한 사람이라니까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결정될 수도 있어.”

“유동적이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아버님 때와 다르지 않겠지. 지금으로서는 모두 뭉쳐 기존 계획을 실행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으로 보여. 실적이 뒷받침되는 주요 진료 과를 무시할 수는 없잖아.”

손일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평호 회장 때부터 그 집안이 돈 밝힌다는 소문이 파다했어. 이사장까지 됐는데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아? 왜 돈 안 되는 병원을 기웃거리는 거야? 무슨 원수라도 졌나?”

“신장 이식을 거부당했을 때 자존심이 상했나 보지. 목숨이 걸린 일이라고 생각했을 테니 감정이 더 안 좋을 수도 있어. 어쩌면 우리 탓이라고 여길지도 몰라.”

“경석이 형, 스승님은 원칙을 지키신 것뿐이에요.”

“신기동 선생님을 탓하는 게 아니야. 당시에도 그랬지만 현수 말을 듣고 나니까 그 사람들이 더욱 잘못됐고, 이상하다는 거지. 단순한 집착이었으면 좋겠다.”

“제길! 어쨌든 칼자루는 저쪽이 잡고 있어요. 재단 일이라면 누구보다 엄격하게 평가했던 아버님이셨어요. 그런 분이 살아생전에 승인한 입안서가 부족하다고 하면 도대체 뭘 보강할 수 있겠어요?”

고인을 언급해야 신현수만 가슴 아플 뿐이었다.

도움 될 말도 아니었다.

김지훈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재단을 손에 쥐고 마음대로 흔들고자 하면 사람 몇몇 나가는 건 상관도 안 하겠지?”

“왜? 삐끗하면 나간다고 하려고? 의사 아닌 사람 눈에는 쌔고 쌘 게 의사야. 눈 하나 깜짝이지 않을 게 빤해. 엉뚱한 생각 하지 마. 협박거리조차 안 돼.”

맞는 말이었다.

한동안 대화가 이어졌지만 뾰족하게 대처할 방안이 없었다. 목표를 이루기 직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다니 답답함을 넘어 괴로울 지경이었다. 병원 내 최고 의사 결정 체계가 이사회인 이상 아무리 유능한 의사라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현수 판단이 성급했으면 좋겠다. 만에 하나 아버지와 다른 아들이라면 곧 현수와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지 않을까? 그나저나 재단 문제도 마냥 모른 척할 수 없는 상황인데, 신경 바짝 써야 할 일까지 연이어 겹치네.’

신현수가 이내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 또 있어?”

“간담도 분과 학회 일정이 삼 주 후로 결정됐어. 스승님이 주관하시는 데다 발표할 주제가 많아서 준비를 많이 해야 하거든.”

“몇 가지나 발표하는데.”

“스승님께서 간암, 오창도 선생님이 원 포트, 난 췌장 라파로하고 생체 간 이식이야.”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분과 학회라 해도 전국 모든 병원의 관심이 쏠리는 행사였다. 상당히 큰 의미를 가진 자리에서 단일 병원이 무려 네 가지 주제를 발표한다면 김지훈은 물론 외과 위상의 비약적인 도약이었다.

간담도 파트의 영광이자 명예였다.

‘사실상 지훈이 네가 세 부분을 주도했으니까 너를 위한 자리일 수도 있네.’

당연히 축하할 일이었다.

써전으로서 강한 자극과 단단한 각오를 느끼고도 남을 일이었다.

하지만 악재 속 호재가 아니었다. 진상건과는 완전히 별개의 일인 데다 신현수와 관련된 상황 때문에 손일석과 이경석마저 웃지 못했다.

빛이 바랬다.

“지훈아, 미안하다.”

“뭐가 미안해? 이사회 일과 학회 일은 별개야. 그래도 혹시 네가 필요할 때 내가 시간을 못 내도 이해해 줘.”

“고맙다.”

“그런 말 하지 마. 머리 맞대면 좋은 생각이 나올 거야. 진료를 등한시할 수도 없잖아. 너야말로 몸 관리, 시간 관리 잘해.”

여러모로 심난했다.

한계를 절실하게 느낀 하루였다.

여파는 사인방에 국한되지 않았다.

상황을 전해 들은 교수들도 뒤숭숭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느 틈엔가 비용 절감에 나선다는 소문까지 나돌아 촉각을 곤두세웠다.

‘설마 인위적인 인력 조정을 하진 않겠지?’

신분이 불안정한 일부 제자들이 걱정이었다. 한편으로 이사장 입맛에 따라 함부로 사람을 자를 수 없는 사립학교 법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최소 계약 기간까지는 안전할 것이다.

“순리대로 갈 거야. 순리대로. 아무리 자리가 높아도 순리를 따르지 않으면 결국 쫓겨나는 법이다. 신임 이사장도 모르지 않을 거야. 사업했다며? 사업. 회사를 운영해 봤다니까 기대해 보자. 잘될 거야. 잘. 현수야, 넌 절대 실망할 필요 없다. 의사로서, 이사로서 네 직분에 충실하면 된다. 아암! 신현수는 그런 사람이지. 그치? 내 말이 맞지?”

송재덕 교수가 신현수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런 시기일수록 본연의 일에 충실해야 했다.

“지훈아, 펠로우들아, 학회 준비 잘해라. 이번은 욕심 좀 내자. 남들에게 우리가 이 정도로 실력 있다고 보여야 할 것 같다. 그래야 면이 서지 않겠니? 면이. 일 잘하고 많이 하는 과를 누가 괄시하겠어? 소문도 낼까? 응? 어때? 괜찮아? 괜찮은 생각이지?”

송재덕 교수도 우려하고 있었다.

학회 발표를 알려 간 이식 및 췌장 센터를 간접적으로 홍보하며, 절대적 당위성과 필요성을 강조하자는 말이었다.

진상건이 이사장으로 선출됐다는 사실이 많은 것을 바꿀 것이다. 진평호의 과거사를 잘 알고, 현 원장이기에 더욱 정확하고 현실적으로 꿰뚫어 볼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예상외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일반 직원이나 보직이 없는 의사들은 신임 이사장과 얼굴 맞댈 일이 없었다. 곧 열릴 취임식도 간부급 이상의 인사들만 참석할 행사였다. 하지만 폭풍 전 고요처럼 불안한 시간이었다.

김지훈은 원칙을 견지했다.

매일매일 수술실과 진료실에서 땀을 흠뻑 흘렸다.

간 이식 센터 설립을 취소할 명분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도리어 잊으려 애썼다. 오직 본분에 충실한 것만이 정공법이라 여겼다.

주어진 시간에 비해 할 일도 너무 많았다.

“나종진, 이준영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지? 이미 발표 자료 작성하고 계실 테지만, 지난 오 년간 간암 케이스 모두 취합해서 결과 및 예후 철저하게 파악해. 잘 쓰면 첫 번째 저자로 올리실 수도 있어.”

스승의 발표도 제자로서 신경 써야 했다.

눈에 보이게 개입하면 안 될 일이었지만 원 포트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오창도 교수 혼자만의 실적으로는 케이스가 부족할 수도 있었다.

“송진우, 원 포트 준비는 잘하고 있지? 오창도 선생님이 말씀 안 하시더라도 내 케이스까지 모두 정리해. 이혁원, 간 이식, 췌장 라파로는 우리 몫이다. 논문이라 생각하고 제대로 써. 나보다 잘 쓰면 제일 저자로 올린다. 아! 이번 주 수술까지 모두 넣어. 케이스 숫자가 힘이라는 사실 잊지 마.”

의학 논문 작성은 사실상 협업이었다.

일반외과에 제자 혹은 동료의 공을 가로채는 파렴치한은 없었다. 자신의 연구 성과를 인정받는 제일, 제이 저자로 핵심 역할을 한 써전을 등재하는 한 문제 될 일이 없었다.

김지훈이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희연이가 복숭아 먹고 싶다고 했는데 있나? 후우! 마님에겐 뭘 사다 바쳐야 하지? 바쁘다. 바빠.’

진상건의 동향에 촉각이 곤두섰을 신현수도 다르지 않았다. 김지훈이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낼 학회 발표에 자극받은 손일석과 이경석도 땀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방향으로든 다가올 변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진상건이 움직였다.

신임 이사장으로서 내린 첫 번째 결정은 모든 보직 교수를 비롯한 간부 직원의 전원 사임이었다. 잔여 임기와 직위에 상관없이 혁신을 위한 조치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해당 인사 모두 격앙된 분위기를 보였지만 사표가 아닌 이상 따라야 했다.

일반외과 역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원장인 송재덕 교수, 간 센터 센터장인 이준영 교수, 응급실장을 맡고 있는 지동훈 교수, 과장인 박승준 교수까지 모두 네 명이 해당됐다.

일종의 대기 발령이었다.

같은 통지를 받은 행정직까지 크게 동요했다.

병원 전체가 뒤숭숭해졌다.

어떤 면에서는 기회일 수도 있었다.

기존 보직 싸움에서 밀렸던 교수들은 물론 승진에 소외됐거나 목말라 했던 간호과와 행정직까지 물밑에서 분주히 움직였다.

일주일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었다.

선별을 위한 작업 기간이었다.

곧 행정직부터 이사들과의 면담이 진행됐다.

문제는 편향적으로 선택된 대상자였다.

“저 사람이?”

능력이나 인품은 별개로 김병오 이사 측에 가까운 사람들이 상당수 포함됐다. 면접은 형식일 뿐 이미 내정을 마쳤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싫으면 나가라는 소리였다.

진상건이 원하는 방향으로 병원 체계를 완전히 갈아엎겠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잘잘못을 떠나 직원들에게는 직면한 현실이었다.

결국 이번 기회에 승진을 노리며 뒤늦게라도 주류가 된 이사들과 줄을 대려는 이들이 속출했다. 반면 사실상 좌천되거나 승진 기회조차 잡지 못한 이들의 불만의 목소리도 상당히 높았다.

쉽게 메우지 못할 균열이 발생한 것이다.

진료 과 영역에도 심각한 영향이 발생했다.

신동철 이사장 때 선임됐던 각 과 과장과 보직 교수들이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갔다. 대척점에 섰던 교수나 의외의 인물이 임명돼 불만이 속출했다. 그러나 찻잔 속 태풍에 불과했다.

“과장 아니라고 의사 아닌가? 교수직도 그대로잖아.”

“그래도 과장 못 달고 후배에게 밀린 교수들은 좌불안석일 거야. 나가라는 소리밖에 더 돼?”

반면 일반외과에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더 큰 폭풍을 예고하는 듯해 구성원 모두 우려를 금치 못했다.

진상건의 의중을 알 수 있는 기준이 있었다.

바로 송재덕 교수의 거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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