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고인을 추모한 후 회의에 들어갔다.
신현수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신임 이사장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이사는 최만철이었고, 가장 경계해야 할 이사는 김병오였다. 신임 이사 후보 둘 모두 어떤 결격 사유도 없었다.
‘우리 측 셋, 김병오 이사 측 셋, 중간 입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해 온 이사가 두 명이다. 만에 하나 신임 이사를 빼앗긴다 해도 그동안 보인 행동으로 볼 때 이사장으로 선출되기 위한 다섯 표를 얻기 어렵다.’
예측이자 바람이었다.
사실 단 한 표가 향방을 가를 정도로 아슬아슬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루두루 원만한 최만철 이사의 평판과 아직 남아 있을 신동철 전임 이사장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대세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 여겼다.
신현수가 최만철 이사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반드시 지지를 확보해야 할 이사님 두 분의 의사는 확인하셨습니까?”
“며칠 전 만났네. 김 이사와 관계가 좋았던 편이 아니고, 향후 병원 발전 계획에도 무척 긍정적이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게.”
확언은 듣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불안 요소가 있었지만 이제 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신임 이사 후보들이 병원 발전에 적합한지 바짝 신경 쓰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정관에 따라 신임 이사장 선출에 앞서 신임 이사부터 선출하겠습니다. 후보자는 두 분이며, 동수의 표를 얻으면 역시 정관에 따라 보유 지분으로 결정하겠습니다. 두 분 앞으로 나오셔서 인사와 동시에 병원 발전을 위한 견해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두 후보의 발표가 판이했다.
의료와 병원이라는 동일한 객체를 두고 한 명은 원칙에 입각해 현 기조를 이어 가자는 견해를 밝혔다. 반면 남은 한 명은 혁신을 내세우며 재정 절감을 통한 이익 보존을 주장했다.
비영리 법인이라 해도 사재를 출연했고, 지속 가능한 유지 방안이 중요한 만큼 이사로서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타당한 견해였다.
상당히 구체적인 수치까지 들고 나왔다.
몇몇 이사들이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갈수록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급기야 방만 경영이라는 말까지 언급하며 재정 상황의 문제를 파고들었다. 부채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신규 병원과 간 센터 설립을 목표로 한 것이 분명했다.
신현수와 윤서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제 이사 추천을 받은 사람이 병원 사정을 속속들이 너무 잘 안다. 이상해.’
김병오 이사가 추천한 인물을 다시 봐야 했다.
신현수가 이력을 살폈다.
오십 대 초반으로 다른 이사들에 비해 상당히 젊은 축에 속했다. 김병오 이사와 관계가 깊은 건설 회사와도 관련이 없어 보였다. 특별한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는 순간 무심코 지나쳤던 이름 세 글자가 눈에 턱 걸렸다.
진상건!
‘진상원! 왜 그 선배가 떠오르지?’
설마 진평호와 관계가 있는 인물일까?
알 수 없는 불안이 다가왔다.
이젠 망각의 저편에 묻혀 생각조차 나지 않았던 오래전 전공의 시절의 기억이 되돌아왔다. 금경태 등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로 재단에서 손을 뗀 지 상당히 오래됐다. 당시 지분을 처분한 것은 물론 그간 복귀하고자 하는 어떤 시도도 없었다.
‘우연이겠지.’
중대한 변수가 발생했을지도 몰랐다.
재단 운영의 핵심인 이사장 선출이 중대 기로에 섰다는 직감이 다가왔다. 그러나 최소 다섯 명의 동의가 필요한 만큼 어떤 흑막이 있다 해도 자신과 최만철이 미는 후보가 될 것이라 믿었다.
불안 속 투표에 들어갔다.
비밀 투표를 할 이유가 없었다.
김병오 이사 측도 마찬가지였다.
“두 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먼저 진상건 후보를 지지하는 분은 손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가장 먼저 김병오 이사가 손을 들었다.
이어 한 명, 또 한 명.
당연한 득표였다.
더 이상 지지 의사를 밝히는 이사가 없어야 했다.
손이 하나 더 올라갔다.
호의적이며 중립적이고, 병원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있다고 믿었던 남은 한 명도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진상건이 다섯 표를 얻었다.
“과반의 찬성으로 진상건 후보가 이사직에 선임됐음을 선포합니다.”
신현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단순히 확보해야 할 이사 한 명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중도파로서 병원의 특수성을 이해하며, 일반 사업체와 다른 경영 원칙을 중시한다고 여겼던 두 명이 모두 이탈했다.
‘지지를 부탁하며 마지막 만난 날까지 걱정 말라던 분들이 왜? 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김병오 이사가 이사장이 될 것이다.
명예와 이권에 무척 민감해 병원 재단의 이사로서 적정하지 못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인 인물이었다. 지분 관계로 어찌하지 못했을 뿐 신동철 이사장도 지극히 경계하고, 꺼렸던 사람이었다.
억제 가능했던 사람의 고삐가 풀린 것이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발등을 찍힌 것도 모자라 아버지의 유업과 자신의 꿈이 송두리째 흔들릴 위기에 처했다. 치밀하게 대처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지만 이미 늦었다.
곧바로 이사장 선출 준비에 들어갔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자천타천으로 당연히 입후보할 줄 알았던 김병오 이사가 가히 폭탄 발언이라 할 제안을 했다.
“여러분 모두 진평호 회장님을 기억하실 겁니다. 갖가지 불미스러운 소문이 떠돌았지만 진위를 알 수 없는 일이 태반이었고, 병원을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진상건 이사가 바로 그분의 아들입니다. 그동안 자신의 사업에 매진하며 많은 경험을 쌓았을뿐더러 뒤늦게 이사로 선임됐지만 본격적으로 재단을 위해 일해 주기를 바랍니다. 진상건 이사를 이사장 후보로 추천합니다.”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이사장 자리에 목을 매야 하는 사람이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자신을 밀어낸 것과 다르지 않은 진상건을 보는 눈에 어떤 불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신현수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감싸 쥐었다.
‘진평호의 아들이라니 완전히 당했다.’
윤서연마저 움찔거렸다.
단순히 신임 이사 및 이사장 선출 문제를 넘어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진상건은 김병오 이사의 입을 빌려 노골적인 도발이자 가감 없는 욕망을 드러냈다.
지분으로도 결과를 뒤엎을 수 없었다.
이사장으로 취임하는 순간 결국 진평호 일족이 재단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지난날의 행적을 볼 때 알게 모르게 사적 이득을 취하고도 남았다.
그동안 치밀하게 준비해 온 것이 분명했지만, 어떻게든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지 못한다면 영영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진평호 축출에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던 최만철 이사가 즉각 반발했다.
“이제 이사가 됐는데 업무 수행이 가능하겠습니까? 전임 이사장님이 돌아가신 후 공백 기간이 적지 않아 산적한 문제가 많습니다. 게다가 일반 사업체와 의료 재단 운영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까? 영리로만 접근하다가는 재단을 망치고도 남습니다.”
합리적인 반발이었다.
말속에 담긴 뜻을 모르지 않을 김병오 이사가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표정을 보였다. 반박하려는 순간 진상건이 발언을 청했다. 반발을 예상하고도 남았는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우려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순간적인 결정이 아니었기에 그간 아버님과 이사님들의 도움을 받아 충분히 준비했습니다. 최만철 이사님의 고언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본 재단 산하 삼 개 병원에 근무하는 인원만 수천 명에 달합니다. 안팎의 사정 역시 좋지 못합니다. 체계적으로 운영하지 않으면 생존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각오로 이사장직을 수행할 것입니다.”
“생존이 어렵다니요?”
“최만철 이사님도 일반 기업이었으면 벌써 망했을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비용을 절감하고, 추가 수익을 창출하지 못한다면 곧 껍데기만 남게 될 겁니다.”
신현수도 잠자코 있을 수 없었다.
“비용을 절감한다고 하셨는데 대부분 고정 비용이고, 대학 병원 특성상 인력 조정은 정부 부처의 승인까지 필요합니다. 혹시 신규 병원 공사 재개와 간 이식 센터 건립을 무산시킬 생각이라도 하는 겁니까?”
“신현수 이사님, 인사가 늦었습니다. 먼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제가 이사장이 된다면 여러 이사님들과 잘 상의해 유업으로 남은 부분을 최대한 지키고자 노력하겠습니다. 나를 보는 눈이 어떤지 압니다만, 이제 와 선대의 일로 얼굴을 붉힐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신현수가 얼굴만 찡그렸다.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진행된 모든 상황이 진평호 일가의 의도를 의심케 했다. 그러나 선대에 벌어졌던 일을 근거로 반발했다간 꼴사나운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명분에서조차 밀리는 것이다.
더 이상 말이 없자 진상건의 입가가 묘하게 말렸다.
‘신현수, 갑작스러운 일이라 생각하지 마. 이제 너희 일가가 발붙일 곳은 없어. 의사로서 충실하게 일하며 내가 주는 떡만 받아먹으면 돼. 그게 나와 아버님의 뜻이야.’
“이사님, 계속 진행하시죠.”
“만장일치가 이상적이지만 투표가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최종 결정을 위해 논의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잠시 휴회하겠습니다.”
이사들이 하나둘 일어났다.
다들 진상건과 김병오 이사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웃음소리가 들렸다.
남은 사람은 신현수, 윤서연, 최만철뿐이었다. 혹여 이사장 선출만큼은 다를지 모른다는 한 가닥 기대마저 확실하게 사라졌다.
분노보다 허탈함만이 감돌았다.
‘며칠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돌아가신 아버님을 어떻게 뵙지?’
숫자에서 크게 밀릴뿐더러 모든 지분을 더해도 과반을 넘지 못했다. 반대할 명분이 없고, 마지막 수단까지 사라진 이상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진상건의 신임 이사장 취임은 기정사실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사님, 승부는 이미 결정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일이 걱정입니다. 견제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동안 진평호가 차명으로 지분을 숨겼던 것이 분명해. 철저하게 당했어. 지분에서 밀리고, 이사 다섯이 진상건에게 협조하는 이상 이사회를 통해 해결할 방법은 없네. 유일한 희망이라면 무리수를 범하거나 약점을 보일 때 이사회를 통해 밀어내는 것뿐이야.”
아비인 진평호와 똑같은 일을 당할까?
그 정도로 어리석었다면 오랜 기간 발톱을 숨기고 있던 진평호 일가가 신임 이사장으로 밀지 않았을 것이다. 진상건은 신현수는 물론 최만철 이사마저 감당하기 힘든 인물일 수 있었다.
답답함 속에 투표가 진행됐다.
이변은 없었다.
진상건이 여섯 표를 얻었다.
“오늘부로 진상건 이사가 신임 이사장으로서 직무를 수행하게 됐음을 선포합니다.”
“축하합니다.”
“허허허! 이제 새 바람이 불겠어요.”
“그렇고말고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 아닙니까? 진평호 회장님에게 배운 바가 적지 않을 테고, 규모 있는 기업을 경영한 만큼 기대가 큽니다. 참! 아버님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신장 이식을 받긴 하셨지만 시기를 놓쳐서 좋은 상태는 아니십니다. 연세도 많으시고요.”
공공연히 진평호가 언급됐다.
신동철 이사장이 선한 사람이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진평호가 어떤 위인인지는 확언하고도 남았다. 왜 나쁜 사람이 더 오래 사는지 모를 일이었다.
진상건의 목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기대하셔도 됩니다.”
그동안 진평호 일가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이사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왔고, 마침내 재단 일선에 공식적으로 복귀했다는 직접적인 신호였다.
진상건이 신현수에게 다가왔다.
“잘 부탁드립니다.”
악수를 청했다.
어이없는 사태에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이를 악물어서라도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들끓는 가슴을 지그시 억누른 신현수가 악수를 하며 부탁했다.
“축하드립니다. 무엇보다 병원이란 점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경험 많은 김병오 이사님은 물론 집안 어르신들과도 충분히 상의해 나가겠습니다. 병원 상황이 정체된 이상 예전 경험도 무시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과거에 대한 진상건의 인정은 선택적이었다.
신현수와 윤서연은 차치하고, 경영에 깊숙이 관여하며 병원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최만철 이사마저 언급하지 않았다.
정중함 속에 숨은 노골적인 선언이었다.
졸지에 구세력으로 몰린 이들은 퇴장할 때였다.
무엇인가 양심에 찔리는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선대부터 대척점에 섰던 이사들은 물론 신동철 이사장의 유업을 지켜 줄 것이라 믿었던 이사들마저 신현수의 눈길을 피했다.
한심한 일이었다.
물론 재단이 대대손손 한 집안의 소유일 수는 없었다. 능력이 된다면 지분에 관계없이 찾아가 경영을 부탁하는 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도저히 믿지 못할 사람에게 실질적 권한을 모두 빼앗겼다. 두 눈 시퍼렇게 뜬 상태에서 말이다. 때늦게 자책해 봐야 지켜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신현수가 으스러지게 주먹을 쥐었다.
재단이 어떤 곳인지, 그간 이사들의 이해관계와 암투가 얼마나 심했는지, 스스로 얼마나 순진했는지 이제야 피부로 절감했다.
때늦은 후회를 집어삼키며 각오를 다졌다.
‘비록 열세에 빠졌지만 결코 전횡을 지켜보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이사장 자리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병원과 직원들을 지키는 것이다.’
진상건과 진평호가 전혀 다른 인물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만일 불길한 예상을 깨고 병원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다면 깨끗이 승복할 일이었다.
물론 사심은 누구에게도 없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