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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042화 (1,042/1,329)

8화

김지훈 자신이 집도의였다.

한 가족의 미래가 걸렸다.

친구 아버지라 해도 신동철 이사장은 김지훈이 책임져야 하는 환자가 아니었다. 신경외과를 믿고, 여전히 목숨이 위태로운 환자의 치료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보호자를 위로하는 일 역시 잊지 말아야 했다.

단, 확언과 지나친 감정 이입은 금물이었다.

김지훈이 다시 한 번 환자 상태를 설명했다.

“상당히 안 좋은 상태지만 평소 건강하셨다면 반드시 이겨 낼 겁니다. 좌측 간이 남아 있는 이상 간 기능에도 문제가 없습니다. 절대 희망을 잃지 마세요.”

“부탁드려요. 제발 우리 남편 살려 주세요.”

고개 숙여 마음을 대신한 김지훈이 수술 방으로 향하려다 말고 주춤 걸음을 멈췄다. 정신이 분산돼 놓친 것이 있을지 몰랐다.

이혁원과 고경철이 있지만 자신을 믿고 몸을 맡긴 환자와 보호자에게 집도의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었다. 최대한 정신을 집중해 환자를 다시 보았다.

평소보다 훨씬 세심하게 상태를 점검하는 모습에 이혁원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황망 간에 지나쳤다 해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선생님, 여기는 우리에게 맡기고 가 보시죠.”

“알고 있었어?”

“신경외과 중환자실에 베드 마련하는 걸 보고 간호사에게 들었습니다. 별일 없으실 겁니다.”

“그래야지.”

수술 방으로 향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남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준영 교수, 이혁원 교수, 신기동 교수에 손일석과 이경석까지 일반외과 교수들이 다 나왔다.

일부 낯선 사람들은 재단 이사들이 분명했다.

김지훈이 답답한 한숨을 내뱉었다.

정확한 병명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신현수와 윤서연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곁을 지키며 기다리는 일 말고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송재덕 교수가 어깨를 툭 치며 눈짓을 했다.

‘따라와.’

김지훈이 이준영 교수와 함께 신현수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갔다.

“선생님, 어떻게 된 겁니까?”

“애뉴리즘(Aneurysm)이 터졌어.”

섬뜩했다.

“뇌출혈이 발생한 겁니까? 평소 정밀 검진을 하셨을 텐데 왜 몰랐죠?”

“예전에 CT, MRI가 포함된 건강 검진을 받아 이미 알고 있었던 질환이야. 위치가 좋지 않았지만 평소 건강하신 데다 혈압도 없고, 크기가 크지 않아 별 걱정 하지 않았는데 그게 결국 말썽을 부렸어.”

뇌 꽈리라 부르는 질환이었다.

무증상으로 사는 경우도 많지만 일단 터지면 부위와 크기에 따라 예후가 크게 달랐다. 최악의 경우 사망할 가능성도 무척 높은 질환이었다.

김지훈이 희망을 걸었다.

“수술만 잘되면 괜찮지 않을까요?”

“부위가 좋지 않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일단 기다려 보자. 현수에게 네가 필요할 거야. 가 봐.”

이준영 교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무뚝뚝한 성격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돌아서자 송재덕 교수와 이준영 교수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었다. 불길한 느낌을 지우지 못한 김지훈이 연신 한숨만 내뱉었다.

신현수의 두려움이 보였다.

손일석, 이경석과 눈을 마주친 김지훈이 조용히 옆에 앉았다. 사인방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묵묵히 친구의 곁만 지켰다.

새벽 두 시가 넘었다.

드디어 수술 방 문이 열렸다.

신경외과 과장이 나와 신현수를 찾자 많은 이들이 촉각을 곤두세웠다. 어떤 이유로든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신현수 선생!”

“선생님, 어떻게 됐습니까?”

“미안하네. 출혈만 간신히 잡았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신 거죠?”

“동공반사가 없어. 지켜봐야 해. 미안하네.”

신현수가 털썩 주저앉았다.

윤서연이 나직한 울음을 터트렸다.

잠시 후, 이사장이 누운 침대가 중환자실로 향했다.

수술 후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신경외과 과장은 원칙대로 직계가족에게조차 일절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아들인 신현수에게마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만 남겼다.

한 사람만 예외였다.

“김지훈 선생, 뇌출혈 문제는 우리가 맡지만 전체적인 상태를 살필 의사가 필요해. 할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김지훈이 중환자실로 향했다.

아직도 자리를 떠나지 못했던 간 절제 환자의 아내가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위중한 상태가 아니면 수술한 의사가 한밤에 나타날 리 없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다른 환자분 때문에 나왔습니다. 남편분은 괜찮으실 겁니다.”

“고맙습니다.”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무엇이 고마울까?

새삼 보호자의 애끓는 마음이 다가왔다.

신현수와 윤서연의 마음도 다를 수 없었다.

사소한 문제도 놓치지 말고 확실하고도 철저하게 대처하는 것만이 희망을 주는 길이었다. 친구 아버지이자 이사장이라는 사실, 간 센터 설립의 최종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깨끗이 잊어야 했다.

김지훈이 신동철 이사장 앞에 섰다.

혼수상태였다.

동공반사를 보이지 않았다.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못했다.

수술 직전 찍은 CT를 확인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송재덕 교수의 말을 들으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출혈 부위가 너무 크고 깊숙한 데다 절대 건드릴 수 없는 부위와 맞닿아 있었다.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무섭게 뇌부종이 진행될 것이다.

딱딱한 두개골에 가로막혀 압력을 해소할 통로가 없다. 뼈 일부를 제거한다고 해도 부종이 심해지면 뇌 전체가 강하게 압박을 받게 된다. 결국 광범위하게 기능을 잃을 테고,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뇌사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후우! 그럴 리 없어. 뇌출혈은 신경외과에게 맡기고, 난 전체 상태를 책임져야 한다. 정신 바짝 차리자.’

초반 며칠이 가장 중요했다.

특히 오늘 밤은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김지훈이 고경철과 함께 킵을 시작했다.

연락을 받고 소스라치게 놀란 고경아의 목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면회를 허락받은 신현수와 윤서연의 눈빛이 안타깝기만 했다.

힘든 하루하루가 흘렀다.

간을 절제한 환자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회복되고 있었다. 하지만 신동철 이사장은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뇌가 살아 있다는 기본적 징후인 동공반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수많은 검사가 시행됐다.

CT와 MRI는 심각한 부종 양상을 보였다.

뇌파 검사 그래프는 평평하기만 했다.

절망적이었다.

병원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대부분의 의료진과 직원들은 걱정을 할 뿐이었지만 일부는 그 이상을 우려했다. 일정 지위 이상을 가진 이, 보다 높은 자리를 원하는 이에겐 누가 인사권자인지가 가장 중요했다.

만약 신동철 이사장이 깨어나지 못하거나 생을 달리한다면 신임 이사장을 선출해야 한다. 의료와 행정직을 막론하고 누구든 자신과 뜻이 맞는 이들을 중용할 것이다.

젊은 나이의 신현수가 이사장이 될까?

재단 이사 중 또 다른 이가 될 가능성은?

전자라면 큰 변화가 없겠지만 후자라면 상당한 변동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신규 병원 공사가 전면 중단되고, 간 센터 설립 결정을 위한 이사회 개최마저 보류됐다는 사실을 두고도 해석이 분분했다.

병원을 떠나지 못한 채 아버지의 곁을 지키는 신현수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자식 된 도리를 넘어 내색하지 못했던 존경과 사랑이었다.

현실에 대응할 정신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병원은 돌아가야 했다. 이겨 내는 것 또한 자식의 의무였다.

병간호를 위해 일시 휴가를 냈던 신현수와 윤서연이 업무에 복귀했다.

김지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일과 중에는 오직 환자와 일에만 집중하는 모습에 도리어 가슴이 아팠다. 지켜볼 수밖에 없는 외과 분위기도 납덩어리가 달린 것처럼 무거워졌다. 손일석과 송재덕 교수의 웃음소리마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김지훈이 답답한 한숨만 내쉬었다.

다행히 산산이 깨진 간을 제거했던 환자가 삼 주 만에 무사히 퇴원했다. 마음이 무거운 탓에 축하조차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두 발로 걸어 나가는 환자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신동철 이사장을 떠올릴 정도로 신경이 쏠려 있었다.

오늘도 하루 일과를 마치고 중환자실에 들러 신경외과 교수로 재직 중인 후배와 만났다.

“어때?”

“변화가 없습니다.”

“벌써 삼 주가 지났어.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거야?”

“오늘 다시 검사한 모든 결과 역시 뇌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돌아가시지 않는 것이 다행입니다만, 이 상태로 얼마나 버티실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가장 우려했던 말을 듣고 말았다.

하루 종일 뒤통수에 들러붙어 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았던 답답함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깨어나실 희망은 없어?”

“기적이 필요하겠죠.”

“신현수 선생은 알아?”

“결과를 들으셨으니까 짐작하셨을 겁니다.”

맥이 탁 풀렸다.

신현수의 절망과 두려움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김지훈 역시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삼 주라는 시간은 때로 중한 환자의 보호자에게도 감정보다 이성을 앞세우게 했다. 단순히 친구 아버지가 아니라 이사장이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감정에만 휘말릴 때가 아니었다.

현실적 문제가 첩첩이 쌓였다.

자신의 주도하에 벌인 일로 수많은 이들의 미래가 좌우될 수 있었다. 이젠 무언가 답을 해야 하건만 앞이 깜깜할 정도로 생각을 풀어 갈 수조차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불현듯 눈에 들어온 신동철 이사장의 얼굴에 김지훈이 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안구 건조를 막기 위해 덮어 놓은 거즈.

목을 뚫고 들어가 있는 호흡기와 튜브.

퉁퉁 부은 팔다리.

주렁주렁 매달린 생명 유지 장치.

희망을 품기 어려운 모습이었지만 신현수에게 뇌사를 언급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 말해야 한다면 신경외과 과장이 해야 할 일이었다.

공과 사 역시 구분해야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병원은 발전해야 했다.

아무런 기약 없이 시간에 맡기다간 모든 일이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설령 신현수가 화를 내고 서운해할지라도 그것이 바로 신동철 이사장이 바라는 바일 것이다.

김지훈이 이준영 교수를 비롯한 모든 교수들은 물론 손일석, 이경석과도 상의했다.

결론은 하나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미처 열리지 못한 이사회를 열어 신규 병원 공사를 재개하고, 간 센터 설립을 최종 승인 받아야 했다.

문제는 현실적 방안이었다.

이사회의 동정을 알 길이 없었다.

재단 이사인 신현수만이 추진할 수 있었다.

이를 일깨우는 일은 김지훈만이 가능했다.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실제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뇌사를 인정해야 한다는 말은 더더욱 할 수 없었다. 신현수와 쌓은 인간적 유대까지 상당히 강해 누구도 채근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간만 흘렀다.

주저하는 사이 일주일이 더 지났다.

혼수상태에 빠진 지 한 달째에 접어들었다.

모든 상황이 악화일로에 빠져들었다.

위태로운 시기에 중심을 단단히 잡아 주어야 할 재단 이사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물밑에서 어떤 대책을 강구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신현수도 다르지 않았다.

환자 진료와 수술에 차질을 빚지 않았지만 자신의 또 다른 위치를 잊은 것 같았다. 더 늦기 전에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야 했다.

누군가 반드시 나서야 할 때였다.

김지훈이 이를 악물었다.

‘욕을 먹더라도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어떤 사람보다 병원에 애착이 컸던 이사장님도 결코 이런 상황을 원치 않으실 거야.’

결심을 굳힌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신현수와 윤서연이었다.

다른 사람 없이 이렇게 마주한 자리는 한 달 만에 처음이었다. 필히 만나야 할 사람이 앞에 있었지만 안색이 너무 어두웠다.

김지훈이 입을 열지 못했다.

그간 위로의 말은 충분히 했다.

사실 도움이 됐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고작 커피 한 잔 내오는 것이 다였다.

“지훈아, 아버지가 깨어나실까?”

신현수가 웃고 있었다.

씁쓸하고 처연하기 짝이 없었다.

“희망을 버리지 말자.”

“한 달이 지났어. 나도 알고, 너도 아는 사실이잖아.”

“후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입가에 걸렸던 슬픈 미소가 사라졌다.

“방금 신경외과 과장님을 만나고 왔어. 뇌사 상태에서 회복될 길이 없다고 하셨어. 눈물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눈물 한 방울 안 나오더라. 내가 나쁜 놈인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 한 달이란 시간이 짧지도 않아. 그동안 그런 보호자들 많이 봤잖아.”

“내 일이 되니까 그런 일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네. 넌 훨씬 어려서 부모님을 잃었는데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다. 넋두리하러 온 게 아닌데 미안하다.”

“왜 그런 소리를 해?”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신현수의 눈가가 시뻘게졌다. 부모 잃은 아픔을 잘 아는 윤서연은 신현수의 손을 잡은 채 울음을 참으려 애썼다.

“뇌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해.”

말도 못하게 아픈 결정이었다.

부모와 자식 간은 더욱 그럴 것이다.

김지훈이 얼굴을 감쌌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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