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다음 날.
행정처에 지난 일 년 동안의 외과 수술 건수와 수입을 요청했다. 간 이식, 췌장 복강경 시행 이후 변화를 객관적 수치로 구체적으로 증명한다면 충분한 근거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실적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었다.
갈수록 차이가 뚜렷해져야 했다.
병원 곳곳에 홍보 포스터를 부착했다.
환자와 의료진은 물론 병원 경영과 무관한 직원들까지 일 년에 한 번 벌어지기도 힘들었던 간 이식 수술이 세 번이나 시행됐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도 짧은 기간 내에 말이다.
이준영 교수와 김지훈 자신을 포함한 수술 팀 면면을 일일이 자세하게 명시했다. 최고 의료진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홍보하는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었다.
쑥스러운 일이었지만 당당해도 좋았다.
수술만 잘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결과로 말해야 했다.
때마침 장미라 가족이 진료를 위해 내원했다.
“아버님까지 경과가 아주 좋네요. 별일 없으셨죠? 미라야, 약속 지켰어?”
“키는 안 크는데 몸무게는 2킬로그램 늘었어요.”
“오! 좋았어. 우리 미라한테 무슨 상을 줘야 할까?”
“초콜릿 사 주세요.”
“어? 그건 준비 못했는데. 사탕이라도 줄까? 송진우 선생, 혹시 감춰 둔 사탕 있어?”
뒤적뒤적 진료실이 다소 소란스러워졌다.
미라가 더없이 밝게 웃었다.
행복한 웃음이었다.
아빠는 눈물짓고, 엄마는 사랑 가득한 눈으로 가족을 지켜보았다. 건강한 것만으로도 그저 고마운지 조용히 자리만 지켰다.
송진우의 발간 얼굴조차 즐거웠다.
급기야 김지훈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어머니, 부탁 하나 드릴게요.”
“말씀만 하세요.”
“오늘 마침 간 이식이 필요한 환자 모임이 있습니다. 집에 가시기 전에 들러 병원 생활에 대해 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가족이 어떻게 수술을 견뎠는지 말씀해 주시면 더 좋고요.”
“말주변이 없어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말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겨 낸 사람이 필요합니다. 환자들과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면역 억제제를 복용해야 하는 한, 지속적인 검사가 필요로 하는 한 장미라와 가족의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하기에 같은 처지에 빠진 이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원하는 도움이었다.
재잘재잘 환하게 웃으며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진료실을 나서는 장미라를 보던 김지훈이 어깨를 활짝 폈다.
왠지 홍보와 실적 제시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진짜 희망을 보았는지도 몰랐다.
현실은 여전히 아량조차 보이지 않았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입안서를 앞에 둔 김지훈이 관자놀이를 주무르다 말고 쩝쩝 입맛을 다셨다.
‘현수 얼굴을 일주일에 몇 번을 보는지 모르겠네. 이러다 없던 정도 들겠어.’
있는 정 없는 정 다 들어도 좋았다.
추상적인 목표와 당위성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해 구체적인 사안까지 보강했다. 송재덕 교수, 이준영 교수, 박승준 교수도 꼼꼼한 검토 끝에 승인했다.
이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더 이상 첨부할 사안도 없어 그동안 계속 반려되던 입안서가 통과되기만을 빌었다.
“이 정도면 될까?”
“모르지.”
“이사장님도 참 대단하시네. 혹시 장래를 위해 너 훈련시키는 거 아닐까?”
“워낙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시는 분이야. 아마 이사회에 부칠 때는 더 보강돼 있을 거야.”
“여기서 또 뭘 보강할 수 있지? 과장님이나 원장님도 서류 때문에 이렇게 골치를 썩으시나?”
“명예와 권위 이상의 책임이 뒤따르는 자리야. 부담이 없다면 굳이 직책까지 만들어 대우를 더 해 줄 이유가 없겠지.”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손일석이 떠올랐다.
‘일석이라면 훌륭하게 해내겠지. 꼭 과장 자리 꿰차서 신규 병원 잘 이끌어라.’
잠깐 생각에 빠진 사이 신현수가 이사장과의 면담 약속을 잡았다. 비록 연거푸 퇴짜를 맞고 있지만 이사장 아들이라는 사실이 왜 그리 고마운지 모를 일이었다.
‘누가 이런 힘을 발휘하겠어?’
“외부 행사가 있으셔서 내일 저녁 일곱 시로 잡았어. 다음 주에 바로 이사회를 연다고 하시니까 받아 주실 모양이야.”
“오케이!”
사실상 최종적으로 마무리해야 하는 자리였다.
의사의 능력으로는 더 이상 보강할 수 없어 이번에도 반려된다면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 할지도 몰랐다. 한편으로 서류 작업조차 이토록 힘든데 실제 설립에 들어가면 얼마나 힘들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손 안 대고 코 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죽으나 사나 있는 능력 모두 짜내 간 이식 센터 간판이 걸릴 때까지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슬슬 걱정하기 시작하는 후배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이사장이라는 거대한 산을 반드시 넘어야 했다.
뚝딱 하루가 지났다.
신동철 이사장과 마주했다.
센터 설립을 제안한 당사자인 김지훈과 행정적 문제를 전담한 신현수만 참석했다. 막상 얼굴을 맞대니 최종적으로 마무리할 자리라는 사실마저 싹 사라졌다.
한동안 서류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수차례 반려됐을 때와 분위기가 하등 다르지 않아 안절부절 입 안만 바짝 말랐다. 질문조차 없어 그저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였다.
마지막 장이 넘어갔다.
신동철 이사장이 나직한 숨을 내뱉었다.
김지훈이 바짝 긴장했다.
서서히 눈길을 주었다.
“잘 다듬었군요. 이제야 이사님들에게 동의를 구할 수 있겠습니다. 수고했어요.”
기다리고 기다렸던 말이었다.
김지훈의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감사합니다.”
“아직 이릅니다. 이사회는 이사장을 견제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막대한 재정 투여가 걸린 이상 센터가 가져올 이해득실을 철저히 따질 겁니다. 김 교수, 오늘 이후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환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좋습니다. 일주일 안에 결정하겠습니다.”
김지훈과 신현수에게 모든 일을 맡긴 채 뒷짐 지고 있었을 신동철 이사장이 아니었다. 당연히 물밑 작업을 했을 테고, 통과를 확신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사장실을 나온 김지훈의 어깨가 춤을 췄다.
신현수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신중해야 했다.
“지훈아, 섣부른 말은 하지 말자. 도진이에게도 상황은 설명하되 최종 결정이 아니니까 긴장 늦추지 말라고 해 줘.”
“알았어. 그래도 일주일 후면 결판이 난다고 생각하니까 후련하다. 이사장님 반응을 생각하면 안 될 이유가 없잖아.”
일주일이란 날이 짧다면 짧지만 수없는 수술이 벌어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침 예약된 수술 하나하나가 센터 설립에 부합해 불상사만 피하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연락해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궁금해 죽기 직전인 손일석과 이경석, 가족까지 걸린 후배들이 있지만 누구보다 응원을 아끼지 않은 고경아가 가장 먼저 알 자격이 있었다.
김지훈이 퇴근길을 바람처럼 달렸다.
입이 근질근질했다.
“경아 씨!”
고경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편의 웃음과 목소리가 너무 환했다.
이렇게 좋아할 일은 단 하나뿐이었다.
“어머! 잘된 모양이네요. 잘된 거죠?”
“일주일 후에 최종 결정 납니다. 이사장님 반응으로 봐선 통과가 거의 확실해요.”
기한이 남았다는 사실에 약간 서운한 표정을 지었지만 김지훈 이상으로 기뻐했다. 그동안 마음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똑같이 후련할 것이다.
모처럼 일찍 퇴근한 아빠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엄마의 입가에 웃음꽃이 활짝 피자 희연이가 덩달아 방방 뛰었다.
“아빠! 아빠! 안아 줘.”
“오! 우리 딸! 먹고 싶은 거 없어? 아빠가 다 사 줄게.”
“아이스크림!”
고경아의 눈이 찢어졌다.
한참 커야 할 때 밥보다 군것질에 더 열심인 딸과 헤벌쭉 웃으며 신발부터 신는 남편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가끔은 예외를 두어도 좋았다.
드넓은 아량을 베풀 때였다.
미처 말도 꺼내기 전에 남편과 딸이 사라졌다.
“내가 못 살아.”
여느 집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출근길, 김지훈의 힘이 넘쳤다.
이사회라는 벽이 남아 있지만 이사장이 결정을 내렸다. 행여 발생할지 모를 돌발 변수를 걱정해 지레 겁먹을 일이 아니었다.
착실하게 준비하는 일만 남았다.
최초로 합류할 의료진의 규모와 필요 공간을 다시 확인하고, 기존에 해 오던 대로 내실을 다지면서 통과 즉시 전광석화처럼 움직일 채비를 해야 했다.
사인방이 머리를 맞댔다.
교수들에게 충분한 지원을 요청했다.
후배들을 비롯해 접촉했던 모든 의료진에게 수시로 연락했다. 가장 보수적으로 반응했던 간호과까지 호의적으로 돌아섰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했던 불안과 우려가 사라지며 긍정적인 기운만이 남았다. 간 센터 설립이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이사회를 앞뒀다.
승인만 떨어지면 끝이었다.
지난 수개월의 노력이 결실을 보기 직전이었다.
신현수가 이사장 직인이 찍힌 서류 복사본을 들고 와 후련하면서도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남은 하나의 빈 칸만 차면 된다.
“결정이 빨리 날까?”
“난 어차피 당직이야. 벌써 환자 한 명 왔어. 이사장님 외부 행사 가셨다 아직 안 오셨지? 응급실 환자 해결하기 전에 결정 났으면 좋겠다.”
김지훈도 상당히 긴장된 얼굴을 보이며 응급실로 향했다. 일복 때문인지, 하필이면 그런 날이 걸렸는지 응급실이 아수라장이었다.
단체 교통사고니 당연한 일이었다.
고경철이 검사 결과를 들고 부리나케 달려왔다.
김지훈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큰 사고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였지만 음주 운전은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다. 일단 사고가 나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제길! 술 먹고 운전은 왜 하는 거야? 다발성 늑골 골절과 기흉에 간까지 깨졌네. 살인과 뭐가 달라? 고경철, 바로 흉부 도관 박고 수술 준비해.”
초응급을 다투는 상황이었다.
오만석을 포함한 응급실 의료진이 모두 매달렸다.
음주 운전이 원인이라는 사실에 화가 치민 데다 환자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이사회를 싹 잊었다.
띠띠띠띠띠!
심박동 측정 기기가 헐떡였다.
혈압이 뚝 떨어진 환자의 얼굴이 창백했다.
똑똑똑!
빨간 피가 빠르게 혈관을 타고 흘렀다.
슈우욱! 슈우욱!
인공호흡기가 정확하게 움직였지만 혈류가 부족한 환자의 산소 포화도는 정상에 못 미쳤다. 저혈량성 쇼크가 이미 심폐 기능에까지 영향을 끼친 것이다.
마취과가 마취를 서둘렀다.
“테이블 데스 설명하셨습니까?”
당직 마취과 전문의의 물음에 김지훈이 고개만 끄덕였다. 결코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일이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수술에 참가한 모든 의료진이 상당한 부담과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의료 과실과 상관없이 수술 중 사망만으로도 소송에 휘말리는 경우가 제법 많기 때문이었다. 물론 환자가 약자임은 분명했고, 억울한 경우도 많을 것이다. 반면 의료진에게도 치료에 따른 적절한 보상은커녕 책임만 강조하는 경우가 절대 적지 않았다.
기피 과가 발생하는 주요 이유이기도 했다.
김지훈도 유난한 부담을 느꼈다.
‘요즘 같은 상황에서 테이블 데스가 발생하면 센터 설립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환자와 우리를 위해 무조건 살려야 한다.’
마취가 끝났다.
띠띠띠띠띠!
환자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었다.
혈압을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 의아할 지경이었다.
“수술 시작하셔도 됩니다.”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정중앙을 단번에 크게 열었다.
복막을 절개하자마자 복강을 가득 채운 피가 보였다. 간이 깨진 이상 수혈 속도를 넘는 출혈이 지속될 것이다. 복강 내 압력까지 떨어져 더 위험한 상태가 됐다.
무조건 출혈 부위부터 잡아야 했다.
피부터 제거해야 정확한 부위를 찾을 수 있다.
거즈로는 어림도 없었다.
“탭(수술용 천)! 셀라인! 석션!”
손으로 퍼내다시피 피를 제거했다.
장기 사이에 고인 피가 상당했다.
다발성 장기 손상을 놓치면 우선순위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대량의 셀라인으로 씻어 낸 후에야 복강 내 장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위, 비장, 소장, 대장 다 깨끗해. 간 확인하자.”
끙!
고경철이 강하게 리트랙터를 끌었다.
김지훈과 이혁원이 동시에 신음을 터트렸다.
손상 정도가 예상을 뛰어넘었다.
우측 간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담낭까지 터졌다.
천운처럼 기흉만 발생했을 뿐 혈흉을 면했지만, 복합 늑골 골절이 다발성으로 동반된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몰랐다.
주어진 시간이 없었다.
김지훈이 간 후면에 고인 피와 이미 떨어져 나온 간 조각을 거칠게 제거했다. 혈관과 담도로 아슬아슬 연결된 조각들을 살릴 수는 없었다.
우측 간 대부분이 사라졌다.
깨져 떨어져 나간 곳곳에서 심각한 출혈이 보였다.
“모스키토! 수처! 타이! 보비!”
정신없이 지혈을 시도했다.
눈에 보이는 출혈을 모두 잡았다.
띠띠띠띠띠!
심박동 수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혈압 괜찮습니까?”
“70에서 잡힙니다. 서두르세요.”
분명 어딘가를 놓쳤다.
혈압은 올라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소변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불과 몇 분 내에 환자가 사망할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소리쳤다.
“이혁원, 출혈 부위가 더 있다. 찾아.”
집도의와 퍼스트가 눈을 부릅떴다.
분명 깨져 잘린 면이 아니었다.
숨겨져 보이지 않는 부분이 분명했다.
수술실이 극도의 긴장에 사로잡혔다.
마취과 당직의가 벌떡 일어났다.
수액과 혈액을 풀(Full)로 투여하며 소리쳤다.
띠띠띠띠띠띠!
“혈압 더 떨어지고 있습니다.”
김지훈이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