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부족한 실력을 하루아침에 쌓을 수는 없었다. 논리와 웃음 속에 이해와 정이 싹 트기는 개뿔, 머리를 싸매야 할 괴로움만 남았다.
엎친 데 덮친다고, 원 포트 수술을 늘려 가며 확실하게 움켜쥐려는 오창도 교수의 눈빛마저 변했다. 김지훈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나면 후배 교육하는 선배 전공의로 변신하기 일쑤였다.
이준영 교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쓰윽 눈길 한 번 주는 빈도가 늘어났다.
가장 고강한 공력을 지녔다.
“똑바로 하자.”
이 한마디 들은 날은 온몸으로 저항해도 한 줌 재를 면치 못했다. 말로 사람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고도 남았다.
이 모든 사달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빤했다.
수술 때마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온갖 필살기를 다 동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수시로 열리는 휴게실 문은 확실히 지옥으로 향하는 통로였다.
펠로우들의 눈빛은 죽지 않았다.
아주 바람직한 일이었다.
구체적인 이유를 직접 말해 줄 때가 됐다.
“이혁원, 나종진, 송진우, 잘 들어. 현재 구조로 간 이식과 췌장 라파로를 지속할 수는 없어. 두 분야를 전담하는 센터 건립 추진이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섰다는 소리 들었지? 이사회만 통과하면 끝이야.”
동요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어지는 췌장 복강경과 간 이식 논의가 활발해질 때 이미 각자 각오를 다졌을 것이다. 김지훈의 계획대로 된다면 대학 병원에 남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점도 간과하지 않았다.
오창도 교수가 양성 질환 파트를 전담하기로 한 결정이 의외이긴 했다. 그러나 필수불가결한 부분이었고, 그 이상의 적임자는 없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본이 부족하면 합류할 수 없어. 오창도 선생님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깊게 고민해 보고, 기존 업무와 혈관 수술, 라파로에 최선을 다해. 믿는다.”
치열한 일상이 하루하루 지났다.
염증이 심하지 않은 단순 양성 질환은 원 포트가 주 수술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투 포트 이상이 필요한 수술에까지 긍정적 영향을 미쳐 모든 면에서 좋은 성과를 보였다.
췌장 질환을 가진 환자가 확연하게 늘었다.
보다 드문 담도 질환까지 늘었다.
기존에도 지방에서 올라오는 환자가 제법 많았지만 주로 이준영 교수를 찾는 환자였다. 방송, 홍보, 소문의 여파인지 이젠 김지훈 앞으로도 지역을 가리지 않고 문의와 진료가 이어졌다.
덩달아 간 질환 수술마저 더 늘었다.
가뜩이나 대가에게 수술받으려는 환자가 밀린 상황인 탓에 김지훈까지 간암 수술을 집도해야 했다. 빤한 구조와 수술이라지만 경험은 의사의 가장 큰 자산이었다. 간 이식은 물론 췌장 쪽에도 큰 도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준영 교수의 배려이자 양성 질환 쪽을 대부분 담당하는 오창도 교수 덕분이었다.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감사합니다.”
받은 만큼 베풀어야 했다.
김지훈의 손에서 채찍과 당근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혁원 선생, 확실하게 하자. 고경철, 잘하자는 소리 이제 그만 들을 때도 되지 않았어? 나종진 선생, 송진우 선생은 내일 수술 준비해. 얼마나 늘었는지 손 좀 보자.”
오늘의 웃음이 내일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
펠로우 표정이 수시로 변했다.
와중에 의외의 소득을 얻었다.
항상 공평하려 애쓰는 이준영 교수의 마음이 본심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주 살짝 공개적으로 엿보았다.
“김 교수, 오늘 수술 잘 끝났어?”
“예. 왜 그러십니까?”
“수술 팀 모두 잘했는지 해서.”
“두말하면 잔소리죠. 혁원이가 퍼스트를 섰는데 수술이 잘못될 리가……. 어? 스승님, 설마 지금 웃으신 겁니까?”
“무슨 소리야? 퇴근하자.”
아버지로서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처남인 고경철을 생각하면 간단한 일이었다. 그동안 김지훈 역시 내 눈에 콩깍지가 아닌지, 혹시 손이 안으로 굽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닌지 신현수에게 은근슬쩍 수시로 확인했으니 말이다.
써전들의 노력이 쌓이고 쌓였다.
마침내 소중한 기회를 또 잡았다.
세 번째 생체 간 이식이 잡혔다.
김지훈이 동분서주 바삐 움직였다.
수술 팀은 물론 내과 윤석진과 공정식, 방사선과 조진형, 마취과 윤서연, 고경아를 포함한 간담췌 수술 전담 간호사를 비롯해 관련된 간호사까지 모두 모여 수술을 준비했다.
일종의 간 이식 센터의 시험 가동이었다.
역시 각기 소속이 다른 데다 규모까지 커 한자리에 모이는 일조차 힘들었다. 우여곡절 속 시간을 냈지만 모든 의료진의 입장과 의견이 미묘하게 달랐다.
어느 조직이든 리더가 필요하다.
김지훈이 중심을 잘 잡았다.
때론 조정을 시도하고, 때론 단호하게 의견을 관철시키며 미세한 차이를 극복해 나갔다. 이전 수술에서 느꼈던 혼란은 여전했지만 첫 시도치고는 무난하게 진행됐다.
스스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합류 여부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공식화되기 전에 각자 확실하게 마음을 잡아야만 순조로운 출발을 보장할 수 있었다.
가장 큰 소득은 환자와 가족의 반응이었다.
엄청난 치료비, 두 명의 가족이 동시에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 기약하지 못할 치료 기간이 주는 두려움의 근원은 결국 성공 여부였다.
갖가지 걱정에 대한 대답을 줄 수많은 의료진과 면담했다. 불확실한 면조차 환자와 의사의 유대감을 강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신뢰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환자에게나 의료진에게나 이전과는 다소 다른 분위기 속에서 세 번째 생체 간 이식 수술이 시작됐다.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보다 강한 긍정과 확신 속에 의료진 모두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수술을 시작한 지 세 시간 반이 지났다.
두 개의 수술실에서 두 개의 수술이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진행되고 있었다.
슈우욱! 슈우욱!
똑! 똑! 똑!
나직한 인공호흡기 소리를 따라 빨간 피가 한 방울씩 환자의 혈관을 타고 들어갔다. 누구도 이식 환자가 갖는 기본적인 위험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특히 저하될 대로 저하된 혈액 응고 기능과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측부 혈관에서 기인하는 출혈을 조심해야 했다. 노련하고 경험 많은 써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였다.
“모스키토! 수처! 타이!”
김지훈은 침착했다.
수술 팀은 집중을 잃지 않았다.
곧 수혜자의 간을 들어내고 공여자의 간을 이식할 것이다. 최후의 보루로 남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수혜자의 간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전 수술이 그랬듯 다음 수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른 어떤 수술보다 환자의 목숨이 의료진의 손에 달렸다는 의미였다.
잠시 후, 공여자의 간이 이송됐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한다.’
“준비됐으면 시작합시다.”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수술이 다시 진행됐다.
간정맥, 간문맥, 간동맥, 담도 순으로 이어 주는 과정은 동일했지만 환자마다 상황이 모두 달랐다. 어느 한 부분이 수월하면 다른 부분이 그 이상 어려워져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수술 내내 방심을 허락하지 않았다.
빠른 손보다 정확한 손을 요구했다.
마침내 수술의 성패가 달린 세 개의 혈관이 모두 연결됐다. 혈류가 부족하거나 연결부에서 출혈이 발생하고 있다면 반드시 해결해야 했다.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은 금물이었다.
“도플러 준비해 주세요.”
김지훈이 빨갛고 파랗게 표시되는 혈류를 신중하게 살폈다. 수술 팀 모두 숨을 죽인 채 김지훈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됐어. 모든 혈관의 흐름이 원활하고 충분하다.’
“담도 연결합시다.”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여덟 시간이 훌쩍 넘은 땀과 노력의 보상을 받았다.
담도를 연결했다.
안전한 수술을 위해 간암 수술 때보다도 더 큰 절개 창을 봉합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컷!”
두 시간이 더 흘러서야 수술이 끝났다.
김지훈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세 번째 수술에 불과해 경험이 많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간 이식이 어떤 수술인지 판단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아무리 숙련된 써전이라도 전체 시간을 단축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
‘실력도 중요하지만 환자 상태에 따라 좌우될 수밖에 없다. 지금보다 더 빨라야 여덟 시간이고, 오래 걸리면 열두 시간 정도 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수술 팀의 체력까지 신경 써야겠어.’
드르르륵!
육중한 중환자실 침대의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열 시간 가까이 수술을 받은 환자는 여전히 마취 중이었다. 얼굴 볼 시간조차 주지 않고 중환자실로 이송되자 기나긴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가족들이 눈물만 흘렸다.
수술 팀은 녹초가 됐다.
그럼에도 단 몇 분의 여유조차 없었다.
앞으로 한두 시간은 더 지나야 의자에 엉덩이를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공여자를 포함해 수혜자 모두 안전하다고 확신하기 전에는 누구도 쉴 수 없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문질렀다.
‘단 하나의 수술로 출근에서 퇴근까지 열네 시간 이상 걸렸다. 췌장 쪽도 개복이든 복강경이든 만만치 않다. 이러다 현재 인력까지 갉아먹겠어. 나도 문제네. 환자를 위해 가족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도 결코 옳지 않다.’
두 개의 수술 팀이 있어도 하루에 단 하나의 수술만 가능했다. 개개인에게 가해지는 체력적, 정신적 부담, 수술 후 집중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 상태를 고려하면 같은 수술 팀이 연이어 이식 수술을 벌일 수도 없었다.
더구나 췌장 쪽도 수술해야 한다.
결국 간 이식은 일주일에 하나가 최대치였다.
센터를 설립한다 해도 충분한 규모가 아니면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무리가 뒤따른다면 후폭풍과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다들 가족이 있잖아.’
아빠의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희연이, 서로의 인생을 함께 꾸려 나가야 할 고경아에게까지 생각이 미쳤다.
피붙이 하나 남아 있지 않은 김지훈이었다.
가족만큼 소중한 존재는 없었다.
지금도 미안할 지경인데 더 큰 가족의 양보와 희생을 요구한다면 남편이자 아빠의 자격 자체가 없을 것이다. 적정한 규모를 가진 센터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아니, 지금은 센터 그 자체가 필요했다.
‘이런 식으로는 지속 불가능한데 왜 통과가 안 되지?’
센터 설립 입안서가 계속 반려됐다.
숱하게 기안을 작성한 경험이 있는 송재덕 교수와 이혁민 교수도 충분하다고 인정한 이상, 김지훈과 신현수의 능력 부족이라 할 수도 없었다.
설상가상 재단 이사회에 상정했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다. 신동철 이사장이 장기 기증 서약서까지 보이며 강력한 관철 의지를 표명했기에 도무지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때문에 최근 이사장의 잦은 서류 반려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 탓인지 신현수의 걱정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혹시 이사들 사이에 파벌 싸움이라도 벌어진 걸까? 조금이라도 미진한 부분이 있으면 반대에 걸려 통과가 힘들다는 걸까?’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현실에 안주하기에는 의료진의 도전과 손길을 기다리는 환자가 너무 많았다. 인생을 걸었다고 했지만 최고의 써전이 되고자 하는 목표는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우려가 현실이 되기 전에 막아야 했다.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적이라 해도 병원 내에서만은 때때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찻잔 속 태풍을 반드시 밖으로 끄집어내야 했다.
낯짝 두껍다는 소리 두렵지 않았다.
퇴근 후 더욱 강한 자극을 받았다.
자식은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아빠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잠든 희연이가 너무 안쓰러웠다. 자신의 성공과 꿈을 위해 가족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보다 불행한 일은 없었다.
“경아 씨, 힘들게 해서 미안해요.”
고경아가 미소를 머금으며 김지훈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아내이자 엄마로서 힘든 것은 사실이었지만 의료인이란 사실 또한 명백한 현실이었다.
“당신 혼자 잘살자고 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난 지훈 씨가 한눈팔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주말에라도 희연이와 많이 놀아 줘요.”
아내의 마음이었다.
고맙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