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신동철 이사장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확실히 변했어. 현수와 함께 병원을 이끌어 나갈 재목으로 성장하는 건가?’
“김 교수, 장미라를 포함해 만날 때마다 나를 곤란하게 하는군요. 귀국 후 올린 실적을 생각하면 내 말을 잊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번 사안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알고 있습니다.”
“오늘까지 간 이식 두 건, 췌장 복강경 수술 세 건을 했고, 예정된 수술도 몇 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췌장암 수술도 두 건을 했군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까?”
김지훈이 센터 설립의 근거로 내밀 환자의 병명과 수술법까지 거론했다는 것은 그동안 쌓은 수술 실적까지 모두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역시 철두철미한 이사장이었다.
“시작에 불과합니다.”
“자신감이 모든 것을 해결하지 않아요. 막대한 돈을 투자해도 병원 운영에 지장이 없을 것이란 보장이 필요합니다. 어떤 일이든 서로가 만족해야 진행된 법이지만 이번 경우는 달라요. 그동안 만난 의료진이 아니라 반드시 나부터 납득시켜야 할 겁니다.”
명분과 비전이었다.
이미 많은 동료를 만나며 수없이 되풀이한 말이었다. 거듭할수록 논리까지 정밀해진 이상 정리한답시고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김지훈이 열변을 토했다.
막상 입을 열자 긴장과 초조함이 사라지며 냉철함을 잃지 않은 열정만이 남았다. 신동철 이사장은 깍지를 낀 채 김지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말씀드린 이유로 간 이식 센터는 우리 병원에 꼭 필요합니다. 실력과 능력을 갖춘 의료진은 우리가 확보하겠습니다. 적절한 지원만 있다면 성공을 확신합니다.”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간절한지가 문제겠죠. 김 교수는 무엇을 걸고 있습니까?”
“제 평생의 꿈, 의사가 된 이후 단 하루도 잊지 않은 목표가 달린 일입니다. 인생을 걸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신동철 이사장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자신의 말에 실린 무게를 생각할 때 눈에 보일 정도로 머뭇거릴 줄 알았건만, 이미 질문할 줄 알았다는 것처럼 거침없었다.
과장일까?
욕심을 이루기 위한 거짓일까?
한 명 한 명 사인방을 보았다.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람은 김지훈뿐이었지만 가장 부담스러울 자리까지 함께했다. 순간 아들인 신현수가 왜 자신의 일처럼 뛰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피할 수 없는 일인가?’
“어머니 생각이 나네요.”
뜬금없는 말이었다.
“현수는 어릴 적이라 잘 모르겠지만 간이 나빠 돌아가셨습니다. 유일한 치료가 간 이식이었는데, 그 많은 재산으로도 어머님을 살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돌아가신 초대 이사장님도 항상 안타까워하셨죠. 나 역시 마찬가지고요.”
갑작스러운 말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간 이식, 췌장 센터 설립을 적극 지지합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이사장 개인의 힘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반드시 이사회를 통과해야 합니다. 신현수 선생은 의사가 아닌 이사의 능력을 보여야 합니다. 김 교수와 두 분은 의사로서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
신동철 이사장의 얼굴이 숙연했다.
나이를 먹어도 어머니란 존재는 결코 잊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딱히 비밀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을 두고 아들에게조차 말하지 못한 평생의 짐이 분명했다.
애끓는 한일지도 몰랐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중간한 센터는 바라지 않습니다. 설립보다 더 어렵다 해도 폐쇄를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반드시 인생을 걸었다는 말을 지켜야 합니다.”
신동철 이사장이 돌연 자신의 서명이 담긴 한 장의 서류를 내보였다.
<장기 기증 서약서.>
신현수가 깜짝 놀랐다.
사인방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더 이상 강력한 의지는 없었다.
속수무책 어머니를 잃은 아픔의 표현이었다.
지금껏 능동적으로 나서 간 이식을 주도할 의사를 기다렸을지도 몰랐다. 이사장의 마음까지 짊어진 이상 끝까지 노력하는 것만이 답이었다.
면담이 끝났다.
김지훈이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강력한 지원을 얻었건만 웃을 수가 없었다.
질병은 빈부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환자와 가족의 가슴에 영원한 생채기를 남긴다지만,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았다.
의사라면 늘 보는 일이었다.
‘상황이 특수할 뿐 매일 보는 일이다. 이런 감정을 끌고 다니면 단 하루도 못 버틴다.’
김지훈이 신현수를 보며 힘차게 말했다.
‘카르페 디엠!’
“힘내자. 기분 좋은 날이잖아.”
맞다.
마음껏 웃어도 좋은 날이었다.
구부 능선을 넘었다.
안심하기엔 너무 일렀다.
“지훈아, 내게 이사의 능력을 보이라는 이사장님 말씀을 간단하게 생각하면 안 돼. 통과 여부를 떠나 과반이 아니라 절대다수의 동의를 얻으라는 의미야.”
신동철 이사장이 한 말을 단순하게 지나치지 않은 신현수의 판단은 적절했다. 이사회 승인과 관련이 있는 문제라 뒷맛이 더더욱 개운치 않았다.
“그건 알겠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버님이 이사장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해도 모든 안건이 통과되는 것은 아니야. 재정적 부담이 너무 큰 경우에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어.”
“병원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반대 의견을 제기할 수 있는 상황이잖아. 우리가 열심히 하는 수밖에 더 있어?”
“문제는 과연 병원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는지야. 전에 이사회는 작은 정치판이라고 한 말씀이 마음에 걸려. 상황을 이용해 개인적 이득을 취할 수도 있거든.”
손일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마 진평호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말이야?”
“깊은 사정은 자세히 모르지만 재단을 공격하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니야. 명예와 실리를 동시에 얻을 수 있거든. 게다가 우리와 서연이네 지분이 절반을 넘지 못해. 처가 쪽 사정 때문에 일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버님 말씀을 들으니까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네.”
“표 싸움 나면 질 수도 있다는 말이야?”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돌아서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야. 지금은 아버님이 철저히 통제하지만 누군가 눈에 보이는 경제적 이득을 제시한다면 쉽게 포기가 되겠어?”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현실적 능력이 부족해 추진하지 못하는 것은 수긍해야 하지만 이사들의 이해관계 때문이라면 억울해 잠도 못 이룰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미 이사장이 동의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도 안 됐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고 너무 걱정하지 말자. 신규 병원이든 센터든 병원 발전시키자고 하는 일인데 설마 반대하겠어? 우린 해야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돼.”
“지훈이 말이 맞아. 현수하고 지훈이 몫이 거의 전부라는 게 문제지만 열심히 하는 수밖에 더 있겠어?”
“형, 혈관은 왜 빼요?”
“그래. 너도 한몫하네. 됐지? 늦었다. 가자.”
김지훈이 집으로 가는 내내 생각에 잠겼다.
추상적일 때는 보이지 않던 일이 산더미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기존 업무를 강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신현수가 담당한 센터 설립 계획서도 함께 고민하는 것이 마땅했다.
‘이사회에서도 직접 설명해야 할지 모른다. 제반 상황을 꿰뚫고 있어야 관철시킬 수 있다.’
오늘 하나를 미루면 내일 할 일은 두 개가 아니라 세 개, 네 개로 늘어나는 법이었다.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생각을 당장 행동으로 옮겨야 했다.
***
다음 날 아침.
김지훈의 눈빛이 유난히 매서웠다.
‘다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가자!’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내부 정비가 가장 핵심적이자 시급한 문제였다. 외과 자체 역량을 높이는 것만이 발언권을 강화하는 길이었다.
무엇보다 원 포트 수술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오창도 교수는 이미 검증되고도 남은 써전이었지만 전문의를 가르칠 수 있을 정도의 숙련도는 추가로 획득해야 할 일이었다.
시간까지 단축해야 했다.
기본적으로 둘 모두 업무가 많은 상황에서 수술하는 날까지 겹쳤다. 대부분 함께 수술할 수 없어 수시로 찾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 부분은 방향을 더 틀어 주셔야 안전합니다.”
가끔 퍼스트를 설 기회가 있었다.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기회였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런 실수가 반복되면 개복해야 합니다. 기존 습관 중 버려야 할 것은 확실하게 버리셨으면 좋겠습니다. 더 트세요. 더. 좋습니다.”
말은 공손했지만 이상스레 오창도 교수의 가슴을 후벼 팠다. 묘하게도 부교수가 부교수를 태우는 분위기가 연출되곤 했다.
이미 상당한 실력을 가진 오창도 교수였다.
후배의 조용한 태움에 굴하지 않는 열의까지 더해졌다. 내심 자존심을 건드릴까 걱정했던 김지훈도 갈수록 과감해져 수술 전 검토와 수술 후 휴게실행까지 감행했다.
오창도 교수가 가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수술 하나 두고 등짝 축축하게 적실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그것도 후배 앞에서 말이다.
‘상당히 논리적인 데다 결과까지 좋아 반박할 수가 없네. 이혁민 교수님에게 별걸 다 배웠어.’
흘린 땀의 대가는 명확했다.
모두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속도로 손안에 넣기 시작했다. 곧 원 포트와 관련된 외래 진료와 예약을 모두 넘겨도 하등 문제가 되지 않을 수준으로 올라설 것이다.
상대가 누구라 해도 안심은 금물이었다.
김지훈이 매서운 눈빛을 풀지 않았다.
‘한 번 더 밀어붙여야 하나?’
말이 필요 없었다.
직접 원 포트 수술을 보여 주는 것으로 갈음했다. 우연찮은 일까지 겹쳐 상당한 자신감에 넘쳤던 오창도 교수가 후끈 달아올랐다.
“나종진 선생, 이 환자 원 포트 가능하겠어?”
“김지훈 선생님은 시도하실 것 같습니다.”
“으음! 원 포트로 잡아.”
선배의 자존심을 은근슬쩍 예리하게 건드렸다.
김지훈의 발바닥에 불이 났다.
신경 쓸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네 명의 후배는 정말 탐나는 인재였다.
시간 나는 대로 통화하며 진행 상황과 근황을 주고받았다. 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어떤 수술을 시도했는지 듣는 것만으로도 센터 합류에 긍정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서도진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도진아, 곧 이사회가 열릴 거야. 안건이 통과되면 바로 의료진 섭외에 들어간다는 사실 잊지 마.”
(걱정 마세요. 도훈이, 호석이, 병옥이하고 수시로 연락하고 있어요. 통으로 한꺼번에 가는 게 좋지 않아요?)
“나야 환영이지. 부탁한다. 고맙다.”
(우리 빠진 자리 채우지 못하면 아예 못 갑니다. 뒷일만 잘 해결해 주세요.)
전공의 시절부터 정말 힘이 되는 후배였다.
시선이 외부로 향했다고 해서 내부 일에 소홀해지면 필히 망하기 마련이었다. 세 명의 펠로우는 다른 후배 못지않은 강력한 기대이자 희망이기도 했다.
합류 여부는 각자 개인의 결정을 따라야 하지만 어떤 써전을 만들어야 하는지는 명확했다. 간담췌 파트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숙달시켜야 했다.
김지훈이 가뜩이나 힘든 펠로우 셋을 혹독하게 밀어붙였다. 수술마다 곡소리가 터졌지만 선배의 의도와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했다.
불행하게도 고경철은 깍두기였다.
수술에 참가했단 죄 하나로 휴게실만 보면 허옇게 질렸다. 갈수록 망가지는 외모에 메주처럼 누렇게 뜨는 얼굴까지 눈물만 글썽거렸다.
설상가상 김지훈이 칼바람을 더욱 세차게 날렸다.
큰 수술이 연이어졌다.
“췌장암 환자 상태는 어때?”
“담도암 환자 수술했다고? 빈도가 어떻게 되지? 이젠 휘플이란 수술이 뭔지 알겠지? 설명해 봐라. 설명.”
주말 집담회는 아예 지옥으로 변했다.
이론이 절로 귀에 박혀 마치 집도를 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찍소리 한마디 하지 못했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선배가 셋이나 있어 마음의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
펠로우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사람은 김지훈만이 아니었다. 사인방 모두 마치 짠 것처럼 기회만 되면 자신의 수술에 후배 셋을 초대했다.
혈관 수술은 모든 수술의 기본 중의 기본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손일석이 선봉에 섰다.
과연 신기동 교수의 제자로서 손색이 없었다.
김지훈은 그마저도 만족하지 않았다.
‘일석이가 의외로 마음이 제일 여리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돼. 아프고, 미안하더라도 간 이식과 췌장 라파로에 어중간한 써전은 필요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된다.’
“일석아, 피바람 불고 있는 거지?”
“우리 펠로우들 얼굴 못 봤어? 죽음 직전이라고 절규하는 것처럼 안 보여? 내가 조금 미진한 부분은 신기동 선생님께 부탁드렸으니까 곧 원하는 결과를 얻을 거야. 그래야 센터의 주축이 될 기회라도 잡지 않겠어?”
손일석의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해였던 모양이다.
안심했다.
“살려는 줘.”
“딱히 죽일 생각은 없다만 농땡이 치는 놈을 살려 줄 생각도 없어. 내 가르침을 받는데 적어도 수술실에서 뼈를 묻겠다는 각오 정도는 보여야 체면이 서지 않겠어?”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혈관 수술에 참가한 이혁원이 거의 사색이 돼 비틀거렸다. 남은 둘도 다르지 않아 손일석과 그렇게 친했건만 얼굴만 봐도 슬금슬금 피할 지경이었다.
신현수와 이경석은 복강경의 또 다른 스승이었다.
“췌장암과 담도암만 해도 해마다 각각 수백 명씩 발생해. 세부 전공으로 절대 부족한 분야가 아니야. 도전할 가치가 차고도 넘쳐. 단, 먼저 나서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돼.”
“우리에게 배워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어. 췌장과 담도 관련 질환을 라파로로 수술하려면 위와 장을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어야 돼. 김 교수 혼자 목표를 달성할 수는 없겠지? 어쩌면 노력 여하에 따라 너희들이 먼저 밟을지도 몰라.”
결과는?
온 동네에 동시다발적으로 불길이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