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다.
사인방 모두 없는 시간을 쪼개 부지런히 자신이 맡은 일에 매진했다. 누구보다 큰 중압감을 가진 김지훈은 단 일 초도 허비할 수 없다는 듯 외래와 수술에 집중하면서도 병원 곳곳에서 얼굴을 보였다.
‘시도하지 않으면 원하는 일은 절대 이룰 수 없다. 지치지 말자. 결과를 떠나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자.’
마침내 반드시 올라서야 할 첫 번째 계단을 앞에 두었다. 박승준 교수 주재하에 일반외과 교수 전체 회의가 소집됐다.
계획을 설명하는 김지훈을 보던 교수들 모두 불현듯 다가온 한 가지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송재덕 교수는 아예 한숨을 쉬고 있었다.
‘지훈아, 다 좋은데 돈은 어디서 구하니? 재단 비상금 다 털겠다는 소리잖아. 될까? 정말 될까?’
‘일 년에 한 번 열리기도 힘든 전체 회의가 올해만 벌써 장미라에 이어 두 번이나 벌어지네. 김지훈이 사인방과 함께 주도한단 말이지. 이준영 선생님은 그렇다 쳐도 박 과장이 무척 힘들겠네.’
“이상이 현재까지 진행된 상황입니다.”
잠시 말이 없었다.
모든 면에서 장미라 건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한 일이었다. 이미 들어 알고 있지만 교수들 모두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희망을 주고 싶지만 현실을 무시하면 톡톡히 대가를 치르는 법이었다. 워낙 중대한 사안인 만큼 모든 것을 바쳐야 할 것이다.
반면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설립이 무산된다면 실망이 이만저만 아닐 것이다. 제자들이 극복하기 힘든 후유증을 겪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혁민 교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김 교수, 한 가지만 묻자.”
김지훈은 물론 사인방까지 바짝 긴장했다.
가장 논리적이자 상당한 의료 행정 경험을 가진 교수였다. 누구보다 날카롭고 핵심적인 질문이 예상됐다. 통과하지 못하면 이사장실 문도 두드리지 못할 것이다.
짧은 침묵이 깨졌다.
“돈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계획만으로 될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결과는 잊어라. 우리를 설득할 수 있는 향후 실적을 제시할 수 있나? 없다면 재단과 이사장님을 만날 필요도 없다.”
“의사는 무엇으로 말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지?”
신기동 교수까지 가세했다.
김지훈의 일이 가장 많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동일 시간 내에 시행하는 수술 역시 절대적으로 많아 병원에서 원하는 수입을 기대 이상으로 훌쩍 뛰어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교수들 말의 핵심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였다. 지금 없는 간 이식과 췌장 수술이 센터 하나 만든다고 단기간에 급증할 리도 없었다.
김지훈이 나직한 헛기침을 터트렸다.
‘석진이와 훈철이 형님 덕분에 할 말이 있어 정말 다행이다. 예정된 수술 모두 무사히 끝난다면 앞으로 결코 줄진 않을 것이다.’
“미래를 확신하기 힘들지만 현재 이번 달 수술로 췌장암 환자 두 케이스, 췌장 라파로 두 케이스를 확실하게 확보했습니다. 생체 간 이식 역시 두 건을 상의 중입니다.”
“상의?”
“아쉽지만 가족 내 문제라 공여자 선정과 동의가 지연되고 있습니다. 무산되더라도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발생할 일이기 때문에 좋은 경험이 될 것입니다.”
순탄하게 진행된다면 최고 난이도를 가진 수술이 한 달 내에 무려 여섯 건이나 벌어지는 것이다. 이전과 비교할 때 놀랍다고 할 정도로 많은 건수였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이미 대단한 성과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반외과 의사로서 더없이 환영할 일이었고, 센터 설립에 제동을 걸 상황이 아니었다.
교수들은 물론 사인방까지 상당히 놀랐다.
김지훈을 적극적으로 미는 이준영 교수와 오창도 교수만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확인할 사항이 하나 더 남았다.
“신현수 선생, 할 일을 하고 있나?”
“만나야 할 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현재 입장은 긍정적이라고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설득할 수 있습니다. 병원과 외과 발전에 이보다 좋은 방안은 없지 않습니까? 미루는 순간 뒤처지게 될 겁니다. 더 늦기 전에 반드시 추진해야 할 일입니다.”
이혁민 교수가 웃으며 두 손을 들었다.
“손일석 선생이나 이경석 선생이나 다르지 않겠구나. 난 더 할 말이 없다. 따라가마.”
신기동 교수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었다.
누구도 꺾이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확실하게 인정했다. 의욕을 갖고 추진한 간 이식이 유야무야됐던 지난날의 아쉬움을 제자들에게 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 그래. 우리가 항상 원했던 일을 지훈이, 현수, 일석이, 경석이가 추진하는 것뿐이야. 잘될 거야. 잘. 안 되면 또 어떠니? 계속 노력하면서 시도하고 또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있어. 그래야 발전하지 않겠어? 지훈아, 그치. 내 말이 맞지?”
“감사합니다.”
송재덕 교수가 사인방 이름을 불렀다.
원장으로서 가장 큰 짐을 지어야 할지도 모르건만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말이었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박승준 교수의 동의까지 이끌어 냈다.
“박 과장까지 동의한 이상 우리 과 의견은 하나네. 하나. 그럼 우리는 뭘 해야 하니? 뭘? 내게 특별히 원하는 것이 있겠지? 아암! 그렇겠지. 힘든 일은 다 나 시켜요. 다. 나쁜 놈들.”
오랜 시간 회의가 진행됐다.
센터 설립 추진이 외과 공식 제안으로 최종 결정됐다. 센터장의 막강한 위상 때문에 과장의 힘이 분산될지도 모르건만 박승준 교수 역시 전폭적 지원을 약속했다.
사인방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공식적 소식을 전해 들은 펠로우들의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김지훈이 한계까지 밀어붙인 이유, 남은 사인방이 피도 눈물도 없이 혈관을 비롯한 자신의 분야 수술을 가르친 이유가 피부로 와닿았다.
간절히 원했던 기회의 장이 열리는 것이다.
김지훈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신현수가 신동철 이사장과 재단을 설득하기 위한 사전 작업을 맡은 이상 주어진 일은 단 하나였다. 능동적으로 참여할 의료진 확보였다.
내과 소속 윤석진과 공정식.
수술 전후 환자를 관리해야 하는 만큼 외과 이상으로 센터의 핵심이 될 것이다. 당장은 두 명에 불과하지만 활성화 정도에 따라 증원이 필요했다.
마취과 윤서연.
적어도 세 명의 마취과 전문의가 필요하지만 가장 먼저 만나야 할 의사였다. 누구를 합류시키든 윤서연의 의사를 십분 존중하는 것이 마땅했다.
방사선과 조교수인 조진형.
간과 췌장은 병을 가장 잘 숨기는 장기였다. 검사 결과 판독을 전문적으로 수행해야 할 의료진은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었다.
우연찮게 모두 동기였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능력과 실력을 인정받는 출중한 의사였다. 개인적 인연이나 친분 관계를 완전히 배제하지 못했다 해도 시빗거리가 될 수 없었다. 사실 미래가 불투명한 간 이식 센터에 합류 의사를 밝힌다면 그 이상 고마울 일이 없는 상황이었다.
일일이 만나 계획을 설명했다.
“센터가 설립되면 합류해 달라고? 아예 과를 옮기는 것과 다르지 않은 상황이야. 확실하게 끌어갈 수 있어? 센터 내에서 마이너가 되는 것도 원치 않아.”
“함께하게 되면 한 팀이야. 주도권은 실력에 따른 일이지 절대 전공을 기준 삼을 수는 없어. 단순히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 역시 원하지 않아. 환자가 우리를 믿고 자신의 생명을 맡길 수 있는 최고의 센터로 만들고 싶어.”
“목표가 대단하네. 우리 실력을 인정했다는 말로 들어도 되겠지?”
“당연하지.”
“말만으로도 고맙다. 다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고려는 해 보겠지만 너무 기대하지 마.”
공통된 반응이었다.
‘서연이도 만만치 않네. 현수에게 부탁해야겠어.’
간호과 역시 무척 중요했다.
기존 간담췌 파트를 포함해 인력을 추가 확보할 의향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기존 인원의 배치 여부는 자유였지만 선발권이 없기는 의사와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재단 결정을 우선해 현실적 제약을 가장 뼈저리게 느꼈다.
반드시 돌파해야 할 난관이었다.
사인방이 다시 모였다.
“현수야, 내가 맡은 쪽은 일단 긍정 반 부정 반이야.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긍정적으로 변할 가능성을 봤어. 이사장님과 재단 반응은 어때?”
“일일이 만나 계획과 목표를 설명했는데 예상대로 부정적 시각이 우세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재정 문제가 가장 크지만 아직 판단하기 일러. 이사 개개인의 성향을 떠나 의료 재단의 목적을 무조건 배제하지 못할 거야. 참! 췌장암 수술은 잘됐어?”
“잘됐어. 별문제 없을 거야.”
“널 믿지만 최선을 다해야 돼. 재단 이사들 정보망과 상황 파악 능력은 의사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야.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말도 못 붙일 가능성이 높아.”
결국 구체적으로 얻은 것은 거의 없었다. 온통 불확실한 상황 속에 의지대로 이룰 수 없는 일뿐이었지만 결코 실망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 시작일 따름이었다.
구체적으로 개개의 사안을 진행하며 점점 틀을 잡고 있었다. 부산 지역 대학 병원의 예를 참조하며 사인방이 머리를 맞댄 노력의 산물은 서서히 다가올 것이다.
남은 시간 또한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이제 부딪쳐야 할 관문으로 재단만 남았다.
병원 내 모든 의사들이 원하는 일을 단번에 무너트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 명분에서 밀리지 않는다면, 아니 조금이라도 명분이 있다면 그 이상의 일도 냉정하게 처리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사장의 의향이 가장 중요했다.
예상과 다른 전개가 이어졌다.
사인방으로서는 알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는지 신현수조차 약속을 잡지 못했다. 암초를 만났다 해도 이미 파다하게 소문이 났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말은 어떤 방향으로든 증폭되기 마련이었다. 김지훈 등이 훨씬 초조한 상태였지만 조기에 해결하지 않으면 병원 분위기까지 뒤숭숭해질 판이었다.
재단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면담 약속이 잡혔다.
손일석이 씨익 웃었다.
“김지훈, 작전 좋아.”
“뭐가?”
“신규 병원 문제로도 골치 아플 텐데, 서류 몇 장 달랑 들고 가면 이사장님이 만나 주기나 하셨을까?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면 꼼짝없이 만나는 봐야 하잖아. 너 처음부터 이걸 노렸지?”
“나 그렇게 머리 좋은 놈 아니다.”
“잔머리도 아무나 부릴 수 있는 게 아니야.”
“쯧!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돌아선 김지훈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굳이 의도한 일은 아니지만…….’
병원이 들썩거릴 정도로 사방팔방 들쑤시고 다녔으니, 신동철 이사장이 돌아가는 상황을 모른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각오 단단히 다지고 결전을 준비했다.
드디어 약속한 날이 왔다.
때맞춰 유리한 상황이 벌어졌다.
최소 빈손으로 만날 일은 없었다.
늦은 오후.
똑! 똑! 똑!
노크를 하는 김지훈이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이사장의 입에 간 이식 센터 설립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떤 명분을 들이밀어도 결국 장미라에 이어 연속으로 돈 얘기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더욱이 이번에는 재정적으로나 행정적으로 비교조차 하기 힘든 사안이었다.
“들어와요.”
신동철 이사장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편안한 자세를 유지한 채 커피를 권하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인방을 주시할 뿐이었다.
신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계획서 가져왔습니다.”
제법 두툼한 서류를 내밀었다.
신현수를 중심으로 네 명이 머리를 짜내고 짜내 작성한 최종 시안이었지만 의사 입장일 뿐이었다. 수십 년간 거대 병원을 운영해 온 이사장의 눈에는 한계가 명확해 보일 것이다.
단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서류를 쥔 손이 멈출 때마다 무엇인가 기록했다. 그때마다 잘못된 것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지막 장이 넘어갔다.
신동철 이사장이 신현수를 보았다.
“일목요연하게 잘 작성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예산 문제는 물론 내가 보아야 할 것이 많이 빠졌어. 아직 능력 밖인가?”
“대략적인 소요 비용은 추산할 수 있습니다만, 총무과의 도움이 없는 이상 정확하게 산출할 수가 없습니다. 이사장님의 긍정적인 답변이 있어야 협조를 요청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나 보고 말하는 거겠지?”
“들리는 말은 참조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 시안으로는 이사회를 절대 통과할 수는 없어. 재단과 관련되면 어떤 일이든 만만하지 않아.”
“다시 작성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기회를 다시 달라는 말이군.”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게 벽을 쳤다. 초안이 빨간색으로 물들 정도였다. 사적 관계가 작용할 자리가 아니라지만 너무 매몰찼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가장 잘 아는 신현수는 담담했지만 김지훈의 가슴은 덜컥 바닥까지 떨어졌다.
‘서류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걸까?’
말도 꺼내지 못할 것이란 걱정 속에 신동철 이사장의 시선이 김지훈에게 향했다.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기세에 밀려 움츠러들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자신감을 갖고 당당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모든 책임은 최초 제안자에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할 말은 해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김지훈이 어깨를 펴며 눈가에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