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김지훈이 행여 눈을 어둡게 할지도 모르는 사적 인연을 배제하고자 결심을 다졌다.
‘함께할 동료를 찾는 일이다. 서로 이해하고 협조하지 않으면 많은 수술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뛰어나도 불화를 일으킬 조짐이 보이면 단호하게 배척해야 한다.’
문득 진충기 교수까지 생각났다.
김지훈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실력과 인성을 가진 써전으로 변신했다. 이미 다른 병원 소속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간 이식과 췌장 중 어느 부분을 맡아도 손색없는 선생님인데 아깝다.’
건전한 경쟁이라면 굳이 안과 밖을 가릴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매일 얼굴 맞대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각오를 일깨워 줄지도 몰랐다.
인연과 변화라는 놈이 참 묘했다.
어떤 이는 끝까지 싫지만 어떤 이는 단 몇 차례의 일로 평생 같이한 사람처럼 친근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H 병원에서 놔줄 리가 없지.’
당장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때였다.
토요일 오후.
김지훈이 천안으로 향했다.
엎드려 빌며 사정사정 하늘같은 마님에게 1박 2일을 허락받았다. 젯밥에 마음이 뺏긴 것은 아니었지만 술 이상의 윤활유도 없었다.
물론 건전하게 마실 것이다.
낯익은 풍경 속 여기저기 변화의 흔적이 묻은 거리가 보였다. 제자리에 머물지 않은 것은 세상이나 사람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천안 병원이 가까워질수록 전공의 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무지막지했던 응급실 상황,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벌어진 수술, 친근했던 교수들까지 모두 다 추억으로 남았다.
병원 앞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이 식당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네. 그때는 삼겹살 하나에 목숨을 걸었었는데.’
식당 안을 두리번거리던 김지훈이 환하게 웃었다.
반가운 얼굴이 다섯이나 보였다.
“여어! 다들 와 있었네. 늦어서 미안해. 유석재 선생님, 잘 지내셨죠?”
“어서 와. 앉아.”
유석재가 자신의 옆을 가리켰다.
김지훈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청평에서 거사를 방해했던 놈들!
음성 병원 파견 때 인턴으로 와 함께 웃고 떠들며 열정적으로 고생했던 놈들!
뛰어난 실력을 바탕으로 확실한 교수 자리 넘보며 타 대학 병원을 과감하게 선택한 놈!
서도진, 서도훈, 안호석에 강병옥까지 모두 벌떡 일어나 반겨 주었다. 여러 이유로 함께 근무하지 못하지만 이젠 어엿한 전문의로서 대학 병원의 한 축을 담당하니, 놈이 아니라 선생이라 불러야 마땅했다.
친한 후배들이니 이름을 불러도 좋을까?
“형, 오래간만이에요.”
넉살 좋은 서도진의 첫마디에 전공의 시절도 아닌 학창 시절로 돌아가고 말았다.
어색함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반가웠다.
“도진아, 도훈아, 호석아, 병옥아, 너희들 얼굴 좋다. 하는 일 다 잘되는구나. 석재 형도 별일 없으시죠.”
“형 온다고 씻고 나와서 그래요. 외래 환자가 많이 늘은 데다 천안 응급실 아시잖아요. 예전보다 더해요.”
“힘들겠네.”
“구미도 인원이 적어 다르지 않다.”
‘다들 열심히 살고 있네.’
친한 선후배가 만났다.
술은 당연한 코스였다.
하지만 반드시 맨정신으로 풀어낼 이야기였다.
김지훈이 식사를 시키며 소주를 외치지 않자 유석재까지 놀란 토끼 눈을 떴다. 한때 술 귀신이라 불렸고, 지금도 술 좋아한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말이다.
“얼마나 심각한 얘기를 하려고 술 한 잔도 안 시켜? 간담도 파트와 관련된 일이라고 하지 않았어?”
“석재 형, 걱정 마세요. 오늘 와이프가 외박 허락했습니다. 술은 일단 제 말부터 들으시고 난 후 그다음에 달리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가벼운 식사가 끝났다.
김지훈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유석재 말대로 심각한 얘기를 꺼낼 때였다.
김지훈의 요청은 단 하나였다.
“비록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한 걸음이라도 떼려면 의료진 확보가 가장 먼저야. 합류 의사가 있는지 알려 줬으면 해.”
다들 다소 놀란 눈치였다.
간 이식과 췌장 센터 건립은 간담췌 파트라면 누구나 원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엄청난 설립 비용 때문에 강력한 추진력과 병원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한 사업이었다.
더구나 김지훈은 예상을 벗어난 규모로 시작하고자 해 스스로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꼴이었다. 반면 상당히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어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도 않았다.
서도진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생체 간 이식과 췌장 라파로 얘기는 들었습니다. 방송도 봤고요. 하지만 센터가 유지될 정도로 환자가 뒷받침될까요?”
“내과 소화기 파트 윤석진 알지? 서울 병원에 간 이식을 필요로 하는 환자 모임에 함께 참가하고 있어. 당장 수술까지 가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지만 대기자가 꽤 많다고 봐도 돼. 췌장 쪽은 슬슬 환자가 느는 추세야.”
“간 이식은 그렇다 쳐도, 췌장은 라파로 때문일 텐데 모든 질환을 라파로로 할 수는 없잖아요?”
“최종 목표는 휘플을 라파로로 하는 거야.”
헉! 소리 터졌다.
“췌장암을요?”
일반외과에서 가장 큰 수술이자, 여러 장기를 자르고 이어야 해 최고 난이도를 가진 휘플을 복강경으로 하겠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써전으로서 무모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을 것이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가능하다고 생각해. 최소 그 정도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췌장 수술을 좀 더 발전시킬 수 있지 않겠어?”
“역시 형답네요. 난 더 이상 물어볼 일이 없네. 언제까지 연락하면 돼요?”
“진행 상황을 공유하기 위해서라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개인적으로 센터 건립 무산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아. 확신을 갖고 밀어붙일 거야.”
“병원 허락이 안 떨어지면요?”
당연한 의문이었다.
“나한테 든 비용 벌어 주는 대로 다른 병원 알아보겠다고 현수에게 말했어.”
“정말이에요?”
“협박을 해서라도 추진할 일이잖아? 솔직히 다른 병원에서 센터 만드는 조건으로 부른다면 파트 책임자가 아닌 구성원 중 한 명이라 해도 갈등할 것 같아.”
열정을 넘어선 집념이었다.
김지훈이 서울 병원에 얼마나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준영 교수를 필두로 사인방이라 불리는 동기들까지 소중한 이들이 있기 때문이기에 절대 변할 마음이 아니었다.
그만큼 각오를 다졌다는 말이었다.
써전의 인생을 걸었는지도 몰랐다.
조용히 생각에 빠졌던 강병옥이 물었다.
“우리가 합류 의사를 가졌다고 실제 센터에 근무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인사권은 재단에 있잖아요?”
‘역시 제일 현실적이네.’
“재단은 빠진 자리를 채워 넣는 일을 맡아야 할 거야. 같은 재단 산하 병원이라고 해도 이건 일종의 스카우트다. 이준영 선생님도 우리가 만나는 사실을 알고 계셔.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센터가 설립되면 함께 간다.”
“재단과 관련된 사람이라고는 신현수 선생님 단 한 명만 알고 있는 일인데, 너무 확신을 갖고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물론 구체적인 약속을 하기엔 일러. 하지만 내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는 일을 너희에게 말할 수는 없어. 각자 판단이 달라도 간담췌 파트를 넘어 우리 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분명하기 때문에 안주할 생각도 없어. 내 자리를 걸 거야.”
강병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지훈 선생님에 신현수 선생님과 이준영 선생님이 모두 같은 뜻이라면 병원도 영향력과 파급력을 무시하지 못하겠지. 이게 도리어 현실적으로 보이네. 합류한 후 센터가 활성화된다면 어마어마한 기회가 될 수도 있겠어.’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후배들의 우려를 가급적 불식시켜야 했다.
나름의 진척 상황을 모두 설명했다.
사인방과 함께 시작해 이준영 교수와 공유한 사안까지 모두 말했다. 짧은 시간에 담기 힘든 꽤 구체적인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도진을 비롯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버리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희망보다 난관이 더 많은 탓이었다.
병원의 승인하에 진행하는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처음 만난 자리였다.
지나치게 성급하면 도리어 부담만 줄 수 있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살짝 욕심을 부렸지만, 애초 목적도 합류 의사 타진 이전에 센터 설립 추진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 더 컸다. 전폭적으로 동의하는 써전의 존재만으로도 큰 힘이 되기 때문이었다.
김지훈이 가볍게 박수를 쳤다.
‘반반만 돼도 괜찮다. 센터 아니더라도 얼굴 본 지 너무 오래됐어.’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다음번에는 좀 더 구체적인 안을 들고 올 테니까 센터에 대해 고민만 해 줘도 고맙겠습니다. 도진아, 형 알지?”
손가락 튕겼다.
몇 년 떨어졌다고 해서 의미를 모를 사람 없었다.
합법적으로 허락받은 김지훈이 한 명의 선배, 네 명의 후배와 함께 달렸다. 가끔, 아주 가끔 이런 일이 있어야 유부남만이 느끼는 속박 또는 압박감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안줏거리도 훌륭했다.
군필들 모이면 으레 군대 이야기 하듯, 함께 수련한 전문의들이 모이면 전공의 시절이 접시에 오르기 마련이었다. 누구 때문에 힘들었다는 둥 자신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만으로도 술잔을 비울 수 있었다.
단, 너무 달리면 역효과 난다.
좋은 선배이자 후배였다면 모르지만 반대라면 목소리 높아지기 마련이었다. 하긴 싫어하는 사람이었으면 애초 자리가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부남임을 잊어서도 안 됐다.
적어도 휴대폰은 받아야 한다.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다들 잘 지내시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내일 일찍 올라와요.)
“예, 마님.”
남편에게 애정을 가진 아내라면 빤히 알겠지만 꼬부라지는 혀에 최대한 긴장을 불어넣으면 더욱 좋다.
일요일 오후.
김지훈의 요청으로 사인방이 모였다.
득달같이 달려온 손일석이 곧바로 물었다.
“반응이 어때? 긍정적이야?”
“부정적일 이유가 없잖아.”
“누가 합류할 것 같아?”
김지훈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애매모호하긴 해도 후배들은 의향이 있는 것 같은데, 유석재 선생님은 힘들 것 같아.”
“정말 뜻밖이네. 이유가 뭐야?”
“가족과의 관계도 걱정하시고, 개인적인 시간을 충분히 원한다는 느낌을 받았어. 설립 전이라 해도 센터에 합류하려면 준비할 것이 많잖아.”
아무리 아쉬워도 절대 비난하거나 부담을 줄 일이 아니었다. 전공의 때, 혹은 전문의 직후 가졌던 열정이 무조건 지속되길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지 못할 일이 있거나 인생을 보는 가치관이 변했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꼭 필요한 써전을 설득하지 못했다.
“나머지는 관심이 있다는 정도야, 뭐야?”
“술자리 내내 안달을 낸 도진이와 가장 현실적인 병옥이까지 네 명 모두 조건을 걸었으니까 관심 이상이라는 말이겠지? 후임을 구하는 문제가 없어야 하고, 올해 안에 재단 결정이 확실하게 떨어지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하더라.”
“다행이긴 한데, 센터가 눈에 보일 때까지 안고 가야 하는 문제잖아. 현수야, 부속 병원까지 알게 된 이상 우리끼리 모여 논의만 할 때가 아닌 것 같다.”
신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상황이 변했는데 이런 식으로 추진하다간 재단은 물론 이사장님까지 거슬려 할 거야. 건방지다고 느끼는 순간 될 일도 안 되겠지. 그쪽은 내가 맡을 테니까, 교수님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일은 일석이 네가 경석이 형과 맡아 줘. 지훈이 넌 우리 과 동의가 떨어지는 대로 다른 과 교수들을 만나 봐.”
“오케이!”
손일석이 이경석을 보았다.
“경석이 형, 형 어깨가 제일 무겁네.”
“왜?”
“제일 중요한 원장님, 과장님 라인이잖아. 야야야 소리 들리지 않게 확실히 설득해 주세요. 난 이혁민 선생님과 신기동 선생님을 맡을게요. 논리적으로 접근해야 하니까 내가 딱 안성맞춤이잖아요.”
“에휴! 칭찬을 하는 건지 욕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만, 강호 소리는 절대 하지 마라.”
“내가 애예요?”
“그렇게 보인다.”
김지훈이 미소를 머금었다.
‘다들 센터 근무와 관련도 없는데 힘든 일까지 맡겨서 미안하네. 내겐 너무 과분한 친구들이다.’
이로써 한 발 더 나갔다.
여유 부릴 틈조차 사라졌다.
여기저기 소문 다 내 놓고 지지부진 진척이 없다면 역풍을 맞고도 남았다. 관련됐던 모든 이들에게 실망만 주게 될 것이다.
김지훈이 미소를 삼켰다.
무거운 짐을 나눴지만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이 남았다. 바로 센터 설립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확인시켜 줄 추가 간 이식과 췌장 수술이었다.
전과 확연히 다른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면 재단은 결코 투자를 단행하지 않을 것이다. 국내 전체적으로 활성화되지 않은 간 이식은 물론 췌장 질환까지 선도적으로 치고 나가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보여야 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췌장 질환 환자부터 확실히 잡아야 해. 제길! 진충기 선생님에게 췌장 라파로를 보인 일이 은근히 후회되네.’
온몸으로 부딪칠 일이었다.
적어도 찾아오는 환자는 단 한 명도 놓치지 않아야 목표가 가시권 내에 들어올 것이다. 모든 수술을 성공할 수 없지만 지금 이 시기만큼은 실패라는 말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워야 했다.
‘할 수 있다. 가자!’
김지훈의 눈이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