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035화 (1,035/1,329)

1화

같은 파트 교수라는 사실은 여러 의미를 내포했다.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일을 두고 당사자에게 말을 들은 것과 전해 들은 것의 차이도 어마어마했다.

김지훈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바빠도 어떻게든 시간을 냈어야 했어. 누구에게 들으셨을까?’

사인방의 입 중 하나가 분명했다.

입장 곤란해졌다고 탓할 이유가 없었다.

오창도 교수가 먼저 물었다면 입 꾹 다물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비밀을 요하는 일이 아닌 이상 상당 부분 말했을 가능성도 높았다. 경위야 어찌 됐든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디까지 알고 계신 거지? 설마 스승님도?’

안 좋은 예감은 대부분 현실이 되곤 했다.

똑! 똑! 똑!

왠지 노크 소리가 묵직했다.

등줄기를 따라 냉기가 흐르는 순간.

“선생님!”

김지훈이 엉거주춤 일어서지도, 앉지도 못했다.

힐끗 눈길을 준 이준영 교수가 의자에 앉으며 살벌한 한마디를 날렸다.

“듣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허둥지둥 커피 두 잔을 대령한 김지훈이 공손한 자세로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동안 은연중 간 이식 문제를 상의하긴 했지만 사인방과 나눈 대화 내용을 가장 먼저 알았어야 할 스승이었다.

한 방울의 땀이 귓가를 따라 흘렀다.

서로가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졌는지 잘 알고 있기에 오히려 서운할지도 몰랐다. 상당히 난감해하는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오창도 교수가 먼저 물었다.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들었습니다. 나 역시 우리 병원에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머릿속에만 있는 계획입니다. 가장 먼저 말씀드려야 했는데 이번 주 내내 유독 바빠서 자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이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서로의 생각을 알면 되지 않을까요? 현재 인원으로는 간 이식 센터를 만들 수 없을 텐데 만나 본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물꼬를 터 주었다.

입장만 꼬일 변명 대신 머뭇거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것이야말로 현 상황을 가장 빠르게 수습하는 길이었다.

“동기들 말고는 이 자리가 처음입니다.”

난처하다고 거짓말할 김지훈이 아니었다.

사람 관계라는 것이 묘해 사소한 일로 틀어지기도 하지만 솔직한 한마디 말로 쉽게 풀리기도 하는 법이었다. 내심 서운했던 오창도 교수 역시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오해를 풀었다. 물론 서로의 성격과 인성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이준영 교수는 입 한번 벙긋하지 않았다.

제자를 더없이 신뢰하는 스승이었고, 평소와 하등 다르지 않은 태도였지만 발 저린 놈에게는 그런 모습이 더 무서운 법이었다.

‘말씀 좀 하시지.’

수동적으로 임할 자리가 아니었다.

대화를 주도해야 할 사람도 명확했다.

김지훈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유학 때부터 고민해 온 문제였습니다.”

사인방과 논의한 사항을 빠짐없이 상세하게 설명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에 다소 놀란 오창도 교수가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생각하는 인원 충원 규모가 상당하군요. 병원 차원의 결정이 아니라 결코 쉽지 않을 겁니다.”

“저도 인정합니다. 그래서 더욱 센터 구성에 필요한 의료진의 의향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일정 이상 인원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내야 재단과 병원을 설득할 명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준영 교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오늘따라 의중을 알기 힘들었다.

슬쩍 눈치를 본 김지훈이 목소리를 낮췄다.

“간 이식과 췌장 파트에 추가로 여덟 명이 필요한 이유는 아시다시피 이식의 경우 공여자, 수혜자 수술이 동시에 이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어떤 변동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선생님이 그중 한 파트를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요?”

이준영 교수에게 눈길이 가 있었다.

김지훈과 역할 분담을 할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사실 간담도의 대가가 공여자 분야를 맡고, 췌장 복강경을 개척하는 김지훈이 수혜자 이식과 췌장 파트를 동시에 맡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긴 했다.

누구나 그렇게 예측할 것이다.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며 고개를 저었다.

가장 어려운 존재인 스승과 관련된 사안이었다.

미리 말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무엇보다 스승의 건강과 나이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 가슴 아팠다. 그러나 스승을 걱정하는 제자의 생각일 따름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반드시 이 자리에서 해결해야 했다.

“간담췌 파트와 센터 관리를 모두 맡으셔야 하는 상황에서 간 이식과 간암 부분을 동시에 맡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내과와 더불어 선생님께 간 이식 대상 환자 확보를 부탁드릴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간암 환자 수술을 대신할 수 있는 써전이 없습니다.”

“그렇긴 하네요.”

김지훈이 슬쩍 눈치를 보았다.

아무리 무뚝뚝한 사람이라도 이쯤이면 한마디 해야 할 상황이었다. 듣기만 할 작정인지 살짝 고갯짓을 하며 대화를 재촉했다.

찜찜하지만 내친걸음이었다.

“계속하시죠.”

“무엇보다 간 이식을 위해 간암 수술에서 손 놓으시면 환자가 정말 많이 줄겠죠. 환자에게 불행한 일이기도 하고요.”

“그럼 김지훈 선생님은 어느 부분을 맡을 생각이십니까?”

“간담췌 파트 교수 중 남은 사람은 둘뿐입니다. 어느 파트를 맡든 문제 될 일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상의할 문제가 아닐까요?”

오창도 교수의 표정이 묘해졌다.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걸린 것 같기는 했지만 의중을 알 수는 없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간담도에 암, 이식, 췌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성 질환 역시 충분히 위협적인 질환입니다. 특히 원 포트 수술은 선생님 외에 숙달된 써전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간 이식 센터가 자리 잡으려면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기존 간담도 전공 선생 중에 그 분야를 확실하게 대신할 써전을 키우면 되지 않을까요? 실력과 의욕을 가진 써전이라면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교육까지 새로 해야 한다면 선생님에게 가해지는 부담이 결코 적지 않을 텐데요? 더구나 누구보다 깐깐한 기준을 가진 분이 앞에 계십니다. 눈에 들기 쉽지 않을 겁니다.”

본인을 빼고 센터를 말할 수 없건만 이준영 교수는 여전히 자리만 지켰다. 짧고 강한 특유의 말을 한마디라도 던지면 대화가 더욱 매끄러워질 텐데 말이다. 듣기만 해도 충분하다는 뜻인지도 모르지만 김지훈조차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오창도 교수를 빼고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선생님과 함께…….”

고민하는 기색이라도 보일 줄 알았는데, 단 몇 초도 머뭇거리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난 내 자리에 있겠습니다.”

깜짝 놀랄 말이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공여자, 수혜자, 췌장까지 최소 세 개의 전담 수술 팀이 필요합니다. 선생님이 안 계시면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췌장 라파로에 이어 두 건의 생체 간 이식 과정을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실력 하나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짜내야만 성공할 수 있는 수술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적임자는 한 사람뿐입니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하는 일 또한 선생님 몫입니다.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할 겁니다. 하기에 기초가 굳건하게 받쳐 주지 못하면 센터 존립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 역할을 맡고자 합니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눈가를 찡그렸다.

현재 이상으로 업무 범위를 확장시키지만 센터가 맡는 분야를 제외한 남은 부분을 모두 맡겠다는 말이었다. 두 팔 벌려 환영할 수만은 없었다.

욕심 없는 써전이 있을까?

간 이식과 췌장 복강경은 선도적으로 외과를 이끌 수 있는 분명한 기회였다. 이를 알고도 빛이 나지 않는 분야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만 수행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와이프가 수술받았을 때부터 고민해 온 일입니다. 원 포트의 중요성과 전문성도 새삼 깨달았고요. 남은 분야는 내게 맡기고 센터 건립에만 전념하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생각…….”

“가볍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원 포트 수술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할 줄 아는 것과 가르치는 문제는 별개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습니까? 그 부분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오창도 교수가 웃었다.

선배 교수가 후배 교수에게 가르쳐 달라는 말을 하면서도 창피해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단호한 눈빛이었다.

김지훈이 오창도 교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진심이실까?’

전체적으로 보면 잘못된 판단이 아니었다.

누군가 반드시 맡아야 할 일이기도 했다.

기본에 충실하지 못한 병원에 자신의 생명을 맡길 환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가장 많이 시행되는 수술을 확실하게 책임질 써전이 없다면 센터 운영 자체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무척 힘든 결정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준영 교수 앞이었다.

한 번 내뱉으면 번복하기 쉽지 않은 약속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파트 지형이 바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상황에서 별다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김지훈이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사전에 이미 교감하며 동의를 구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급격한 확장과 변화가 초래할 부작용을 감안하면 현실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대처였다.

내심 힘들게 결정했을 오창도 교수의 입장도 고려해야 했다. 미안한 마음에 여러 번 권유하는 것은 오히려 예의가 아니었다.

‘스승님과 함께 결정하신 것이 분명해.’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스승과 선배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 마땅했다.

“고맙습니다.”

“대가의 길이 하나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양성 질환의 대가 소리 역시 아무나 듣지 못할 명예입니다. 간암에 이준영 선생님이 계시듯 선생님도 간 이식과 췌장 수술의 대가가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가장 믿을 수 있는 써전의 선택이자 자신을 향한 기대였다. 막중한 책임감과 더불어 강한 의지가 타올랐다.

“간 이식과 췌장 질환을 치료하는 굴지의 센터를 반드시 만들겠습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대신 한두 달 내에 원 포트는 반드시 내 수술이 돼야 합니다. 후배 양성까지 확실하게 약속할 테니 넘보면 안 됩니다. 하하하!”

농담 속 기분 좋은 각오였다.

또한 이준영 교수 앞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간담췌 파트 이인자 자리를 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을 펼쳤던 두 명의 써전이 각자 자신의 길을 가게 됐다. 누군가의 희생이나 포기가 아니기에 더욱 값진 결정이었다.

이제 간 이식과 췌장 센터에 관한 이준영 교수의 의중만 남았다. 그간 제자로서 자신의 생각을 자주 토로했고, 스승은 항상 긍정적이었다. 반대할 리 만무했지만 외과 내부의 최종 결정권은 간담췌 파트 주임 교수와 과장에게 있었다. 허락한다면 책임과 부담을 함께 짊어지겠다는 의미기도 했다.

김지훈이 물었다.

“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진저리를 칠 정도로 말이 없었던 이준영 교수가 대답 대신 품에서 두툼한 서류 봉투를 꺼냈다.

“이게 뭡니까?”

“얼마 전 부산에 있는 대학 병원이 분원식으로 간 이식 센터를 만들었다. 그때 작성한 자료니까 참조해. 도움이 될 거야.”

김지훈이 순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간 제자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후원을 아끼지 않은 스승이었다. 제자의 최종 목표가 될지 모르는 계획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까지 아끼지 않았다.

이번 주 내내 얼굴을 보기 힘들었던 이유였다.

전폭적인 신뢰의 다른 말이었다.

머릿속이 멍해지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어떤 말로도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다.

김지훈이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 한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이준영 교수가 헛기침을 했다.

오창도 교수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다들 퇴근까지 미룬 상황에서 마냥 감정에 빠져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김 교수, 구체적으로 정리해 봅시다.”

한동안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합류할 인재가 맞다.”

이준영 교수는 여전히 제자와 아끼는 써전의 말을 들으며 필요한 말만 툭 던졌다.

조금도 예상할 수 없었던 스승의 도움과 오창도 교수의 결심으로 흐릿했던 앞날이 다소 밝아졌다. 김지훈의 허리가 몇 번이나 굽은 후에야 자리가 끝났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센터 설립을 추진하겠습니다. 원치 않으신다는 것 잘 알지만 원장님 소리까지 들으셔야죠.’

홀로 남은 김지훈이 창밖을 보았다.

이제 간 이식 센터에 합류 의사를 타진할 써전을 만나는 일이 남았다. 기억 속 많은 얼굴이 스쳤지만 실력만이 기준은 아니었다.

원칙은 명확했다.

단순히 직장과 하는 일이 같은 동료가 아닌 환자와 의료진에게 진짜 애정을 가진 써전을 찾아야 했다. 성공을 함께 기뻐하고, 동료에게 실패의 책임을 미루지 않는 써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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