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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034화 (1,034/1,329)

20화

꽉 찬 1박 2일이라 해도 일요일에는 휴식이 필요했다. 결국 온전한 하루는 토요일밖에 없어 도로에서 시간을 허비한다면 그만큼 여유가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연휴 첫날이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할 고속도로는 곧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특히 경부고속도로를 탈 때는 출발 시간이 생명이었다.

아침 여섯 시.

잠에 빠진 희연이를 안고 출발했다.

김지훈이 초조한 눈으로 도로를 주시했다.

서초, 반포가 첫 번째 고비였다.

여기서부터 차 꼬리에 막히면 답이 안 보인다.

밀리기 전에 반드시 빠져나가야 했다.

고경아와 고경희는 처음 가는 부부 동반 가족 여행으로 들떠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었지만 눈을 돌릴 상황이 아니었다.

“일석아, 긴장하자. 밟아.”

손일석의 발에 힘이 실렸다.

부아아아앙!

창밖 풍경이 휙휙 스쳤다.

규정 속도가 빠르게 넘어가는 순간 문득 홍재순 선배가 떠올랐다. 범접하지 못할 속도를 구사했던 선배였다. 파트가 다른 탓에 그간 직접 연락을 주고받지 못했지만 간간이 환자 의뢰를 받는 이경석을 통해 소식은 들었다.

‘레이서 선생님, 잘 계시죠? 케이스 많이 쌓아서 항문 쪽 대가가 되길 바랍니다. 일석이에게 힘도 좀 주시고요.’

마음속이든 말이든 해코지보다 응원이 훨씬 복 많이 받는 모양이었다. 빠르게 IC를 빠져나오는 차량 행렬을 살짝살짝 뒤로해 우려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무난하게 톨게이트에 도착했다.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다.

고비는 수없이 남았다.

안성 휴게소 부근.

천안 휴게소 부근.

독립 기념관에서 청주까지.

악명이 자자한 곳을 통과해야 했다.

슬슬 배 속이 허해지기 시작했지만 길바닥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는 신념 하나로 미리 준비한 음료수를 마시며 그대로 달렸다.

희연이가 깨지 않았다.

와이프들도 화장실을 외치지 않았다.

마침내 아슬아슬 연휴를 맞아 밀려 나오는 차를 뒤로하고 호남 분기점에 다다랐다. 호남고속도로로 빠지는 차량이 얼마 없었다.

“좋았어. 역시 사람은 부지런하고 봐야 해.”

웬만하면 밀리지 않는 길에 들어섰기에 쾌재를 부르며 한숨 돌렸지만 이내 설전을 벌여야 했다.

익산 IC와 김제 IC.

선택의 기로였다.

어머니, 아내의 말과 더불어 반드시 들어야 할 친절한 여성의 목소리가 있었으면 번거로운 일이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문명의 이기 대신 순간의 감과 판단을 따라야 했다.

이겼다.

익산에서 빠져나왔다.

기대와 달리 변산반도까지 예상외로 먼 데다 국도를 따라 달린 탓에 시간이 꽤 걸렸다.

“내가 김제로 나가자고 했지?”

“그게 그거야. 더 빠를 수는 없어.”

“어허! 끝까지 고집을 부리시네.”

티격태격, 서로를 보는 눈초리가 가늘어지는 순간 고경아가 쏙 끼어들었다.

“여기까지 잘 왔는데 왜 싸우고 그래요. 배고파요. 화장실도 가야 해요.”

김지훈의 고개가 홱 돌았다.

변산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봤다.

이제 맛 좋은 식당을 찾아야 했다.

첫 식사가 만족스럽지 못하면 여행의 즐거움이 반감되기 마련이었다. 휴게실 한 번 안 들렀지만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을 믿을 때가 아니었다.

매의 눈으로 식당 간판과 주차장을 주시했다.

“여긴 아니야. 저기도 아니야.”

“이러다 내소사까지 가겠다. 도대체 뭘 먹고 싶은 거야?”

“변산 가면 바지락 죽과 대합 죽을 꼭 먹어 봐야 한다고 그러더라. 봐. 식당마다 죽 먹으라고 하잖아.”

눈길조차 주지 않던 김지훈이 다급하게 외쳤다.

“스톱! 저기다.”

허름한 식당이었지만 아침 열 시 무렵인데도 차 세 대가 주차돼 있었다. 화장실이 조금 걱정됐지만 주문받은 할머니에게서 풍기는 포스까지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바지락 둘, 대합 둘 시켰다.

제대로 골랐다.

역시 비싼 게 맛있는 법이다.

다소 익숙한 맛인 바지락과 달리 몇천 원 더 비싼 대합 죽은 냄새와 풍미가 달랐다. 조개 넉넉히 넣고, 육수 제대로 뽑은 것이 분명했다.

또래 어린아이 특유의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희연이가 넙죽넙죽 받아먹는 것 자체로 성공이었다.

한 그릇 뚝딱 해치운 김지훈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손일석도 인정의 눈길을 보냈다.

포만감이 전하는 풍족한 마음으로 첫 번째 여행 장소에 도착했다.

내소사다!

아직 배가 고플 때가 아니었지만 입구에 즐비한 식당들은 지나치는 것이 정석이었다. 오히려 가벼운 간식거리가 여행을 즐겁게 만든다.

오래된 절답게 일주문을 지나자 고즈넉한 전나무 길이 나왔다. 절의 규모도 크지 않아 삼십 분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 데다 의외로 관광객이 적어 도리어 마음의 평안을 찾기 쉬웠다.

‘시간이 빨라서 한가한가? 좋네.’

불교 신자가 아니었지만 억겁의 인연을 강조하는 장소 한가운데 섰다. 뿐만 아니라 가끔은 낯선 사람과 아무 이유 없이 대화를 나누는 일이 생기곤 한다.

한때 하오문 문주를 외쳤던 손일석의 가리지 않는 친밀함도 죽지 않았다. 누군가와 한참 말을 섞다 말고 달려와 내소산을 가리켰다.

“지훈아, 저 산만 넘으면 바로 직소폭포라네.”

“그래서 희연이도 있는데 저 산을 넘자고? 가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올 때는 또 어떻게 와?”

“이 동네 잘 아시는 분한테 정보 뺐어. 산길도 험하지 않고, 지름길이 있어서 금방이래. 게다가 관음봉인지 뭔지 오르면 서해까지 보인대. 희연이 힘들어하면 업어 주지, 뭐.”

확신에 찼다.

김지훈도 내심 혹했다.

산에서 보는 바다라는 소리에 고민스러웠다.

산봉우리도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였다.

이럴 때는 와이프 결정에 따르는 것이 마땅했다. 주저하는 모습에 손일석이 열변을 토하며 설득해 결국 예정에 없던 산행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다.

“왕복 한 시간이 말이 되나? 차로 가야 하는 직소폭포가 그렇게 가까울 수가 있어?”

“뺑 돌아서 그렇지, 내소사하고 직소폭포는 산을 중심으로 마주 보고 있어. 지름길까지 있으면 얼마나 가깝겠어? 동네 사람 믿자. 우린 안내판만 잘 보면 돼.”

손일석의 확신과 달리 왠지 가팔랐다.

평범한 산길이 아니라 암벽까지 나타났다.

내소사에서 본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분명했다.

이미 온몸이 힘들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 그때 돌아서야 했건만 늦었다. 급기야 웬만한 성인도 오르기 힘든 가파른 길이 앞을 가로막았다. 아직도 산 정상은 멀었고, 지름길의 존재는 갈수록 의문에 휩싸였다.

“길을 잘못 들었나? 조금만 더 가 보자.”

헉! 헉! 헉!

결국 희연이를 업은 채 사투를 벌이던 김지훈이 선두에 선 손일석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등을 치기도 힘들 만큼 급경사로 이루어진 산길이었다. 여기까지 따라온 고경아와 고경희가 용할 지경이었다.

‘등산 채비도 아니고, 여자 둘에 희연이까지 있는데 내가 왜 저 자식 말에 넘어갔지? 미쳤다. 미쳤어.’

“손일석, 너 누구한테 들었어? 헉헉!”

“이 동네 사람이라니까. 헉헉!”

“나이 많이 드셨지? 헉헉!”

“요즘 시골에 젊은 사람이 있겠어? 헉헉!”

우워워워워! 바보가 따로 없었다.

쩌기만 돌아가면 금방이여.

가까우니까 걱정 말어.

평생 시골에 살며 웬만한 거리는 다 걸어 다닌 노인의 표현이었다. 가깝다는 소리 절대 믿지 말아야 했고, 걸리는 시간은 대중없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모든 분노가 손일석을 꿰뚫었다.

“서해 바다는 개뿔! 내려가.”

헉! 헉! 헉!

무슨 이유인지 오르는 길보다 내려오는 길이 더 힘들었다. 네 명 모두 혀를 빼물었고, 희연이를 업은 손일석은 아예 숨도 못 쉬었다.

운동 부족 탓만은 아니었다.

한 시간 반이나 산행을 했다.

암벽까지 탔으면 아무도 살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일정 바꿔야 했다.

직소폭포를 들렀다 점심을 먹기로 했지만 죽 한 그릇이 주는 열량 모두 소진했다. 허기가 몰려와 근방에서 해결해야 했다. 다들 지쳐 눈에 보이는 식당에서 간단히 먹자는 둥 설왕설래 의견이 분분했지만 김지훈은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단호하게 외쳤다.

“곰소로 가자. 밥까지 실망할 수는 없어.”

손일석이 입을 꾹 닫았다.

내소사 지근거리에 있는 곰소는 작은 항구였다.

젓갈이 유명하지만 김장할 일 없었다.

목표는 꽃게장이나 돌게장이었다.

“돌보다 꽃이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젓갈이 호불호였지만 꽃게장은 모든 것을 용서했다. 와이프들은 물론 희연이까지 재촉할 정도로 밥 한 그릇 뚝딱이었다.

김지훈이 이연승을 구가했다.

손일석은 치명적 일패를 안고 머리를 숙였다.

역시 배가 불러야 여유가 생긴다.

손일석을 용서할 정도로 분위기 전환에 성공한 후 직소폭포로 향했다. 내심 밥 먹는 내내 남편을 옹호한 고경희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비밀이었다.

평탄한 길이 이어졌다.

중간에 잠깐 작은 저수지를 따라 도는 길이 다소 험했지만 희연이만 힘들 정도였다. 오히려 바닥까지 보이는 맑은 물과 작은 물고기 떼가 주는 흥취까지 가는 길 내내 무척 즐거웠다.

운도 좋았다.

며칠 전 비가 왔는지 수량이 풍부해 폭포 보는 맛, 떨어지는 물소리를 듣는 맛이 상당했다. 변산에 오면 꼭 들러야 하는 장소로 부족함이 없었다. 왕복 시간까지 한 시간 반 언저리에 불과해 금상첨화였다.

이제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남았다.

격포 해수욕장이었다.

아이에겐 모래 장난과 물장난이 최고다.

희연이가 제일 신났다.

개인적으로 여타 해수욕장보다 훨씬 낫다고 본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채석강을 낀 풍광과 몇 번을 보아도 질리지 않을 서해의 낙조였다.

빨갛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끝없이 펼쳐진 잔잔한 바다는 감동 그 자체였다. 맥주 한 잔 나눠 먹으며 도란도란 나누는 아내와의 대화는 행복이었다. 지치지 않고 뛰노는 희연이의 건강은 감사함이었다.

여행의 하루는 유난히 짧다는 말처럼 감상에 빠진 사이 마무리를 지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짜자잔!

맛있는 회와 소주다.

손일석이 패배를 만회하고자 부지런히 귀를 열었다. 관광지에서 식당 주인들 빼고 현지 주민 찾기 어렵지만 시도할 가치가 충분했다.

물론 약간은 젊은 양반의 견해를 요했다.

성공했다.

숙소에 짐 풀고 토요일 밤을 즐겼다.

양식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편견을 버려야 마땅했다. 회 무게를 속이지 않고, 다양한 밑반찬에 서비스까지 좋다면 자연산이나 다름없다.

지역 소주를 맛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보배라는 소주가 전북을 대표하는 술이었다. 주당을 자처하는 자라면 응당 미묘한 알코올 농도와 맛 차이 정도는 잡아채야 했다.

“크으! 조금 세게 느껴지는데.”

“이슬이와는 목 넘김도 다르네.”

허가받은 술자리였다.

각 이 병으로 깔끔하게 합의 보고 이행했다.

달빛 받은 잔잔한 파도를 보며 기울이는 한 잔의 소주와 잔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또 다른 감흥을 전해 주었다.

그렇게 웃고 떠드는 사이 밤이 깊었다.

이제 아침이면 다시 서울로 가야 한다.

하루 종일 놀았어도 가장 아쉬운 시간이었다. 와이프들에게 애걸복걸 입가심 맥주 간신히 허락받고 달빛 벗 삼아 깊어 가는 밤을 즐겼다.

밀린 숙제는?

아직 아이가 없는 손일석과 고경희였다.

희연이 자리는 당연히 엄마 아빠 사이였다.

남편과 아내가 나누는 나직한 대화를 따라 가족 여행의 끝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잘 놀고 갑니다.”

“다음에 한 번 더 와요.”

아쉬움을 달래며 귀갓길을 서둘렀다.

여행 비용 대부분을 먹고 마시는 데 썼지만 무시하면 더 즐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 마련이었다. 올라오는 길에 수원에 들러 먹은 왕갈비가 진한 허전함을 달래 주었다.

만족스러운 즐거움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일요일 밤, 곧 다가올 휴가를 기약하며 김지훈과 가족 모두 깊은 잠에 빠졌다.

***

월요일 일과가 시작됐다.

매번 다를 바 없는 한 주가 되겠지만 김지훈에겐 특별히 많은 일이 주어졌다. 특집 방송 마지막 편도 봐야 했고, 간 이식과 췌장 센터를 구성할 인력 확보에 나서야 할 시간이었다. 동시에 이준영 교수와 오창도 교수에게 계획을 설명할 자리도 마련해야 했다.

김지훈이 틈만 보았다.

‘낮에는 말씀드릴 시간이 없는데 일과 끝나자마자 칼퇴근을 하시네. 혁원이는 별일 없다지만 혹시 무슨 일 있으신가?’

서로가 바빠 여유라고는 저녁때뿐이건만 마주칠 기회 자체가 없었다. 결국 금요일 오후가 돼서야 적당한 짬을 낼 수 있었다. 간만에 수술을 일찍 끝낸 김지훈이 일과가 끝나길 기다렸다.

‘얼추 끝날 시간이 다 됐네. 외래 간호사가 연락은 잘 드렸겠지?’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한 김지훈이 시계를 보았다. 연락이 오길 기다리다 자칫 엇갈릴 수도 있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문을 열려는 순간 나직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오창도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연락받으셨죠? 안 그래도 지금 막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그래요? 나도 할 말이 있었는데 잘됐네요.”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연락을 못 받은 모양이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간 이식 센터를 계획하신다죠?”

순간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확실히 지켜야 할 순서가 어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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