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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032화 (1,032/1,329)

18화

고경철의 눈이 빨갰다.

장미라에 이어 정재복 환자까지 거의 이 주 내내 킵을 했다. 펠로우 선배들이 수시로 교대해 주었지만 주어진 일을 해결하기에도 부족했다.

여유를 느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오프 날은 자기 바빴다.

그토록 힘들었던 대신 많이 배웠다.

중환자를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무엇을 가장 중점적으로 봐야 하는지 머릿속에 단단히 박았다. 무작정 환자 곁을 지켰던 초반과 달리 킵을 서는 요령까지 습득했다. 호랑이 눈으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선배들 모두 별다른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올바른 방향이 분명했다.

정재복 환자의 경과도 좋았다.

덕분에 오늘로 킵이 끝났다.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뿌듯했다.

일과가 끝나면 이어질 입국식을 겸한 집도식에 생각이 미치자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설레기까지 했다. 비록 관례이자 요식적 절차였지만 일반외과 의국원으로 정식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누구보다 일찍 출근한 김지훈 교수와 중환자실부터 시작해 이른 회진을 돌았다.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선배들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또 한 번 절감했다.

‘어떻게 보면 매일 킵을 서는 내가 환자를 가장 잘 알 수밖에 없는데 왜 맨날 놓치는 것투성이일까? 저렇게 바쁜 와중에 언제 환자 파악을 하시는 거지?’

펠로우 세 명이 환자 많기로 소문난 교수 세 명의 파트를 교대로 맡았다. 파트 세 개를 모두 맡은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어 전공의만큼 바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중환자실 환자는 물론 병실 환자까지 파트를 가리지 않고 철저하게 주시했다.

정말 부러운 능력이었다.

이유는 멀리 있지 않았다.

오랜 기간 근무한 간호사를 통해 들은 펠로우 세 명의 전공의 생활은 가히 전설이었다. 분명 나쁜 일도 있었을 텐데 좋은 기억만 남았다.

“세 분 모두 열심히 하셨고, 수술도 정말 잘하셨죠. 덕분에 우리도 편해서 사이가 좋았고요. 사실 내가 본 치프 중 가장 뛰어났던 김지훈 선생님 공을 빼놓을 수는 없어요. 남은 사인방 선생님들도 무시무시했고요.”

‘선생님들 얘기만 나오면 매형은 빠지질 않네. 결국 훌륭한 선배에게 배우며 제대로 따라가면 최소 실력 없는 의사가 되진 않는다는 말이겠지?’

쌓이고 쌓인 공력의 결과였다.

결국 답은 하나였다.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여서 그렇지 이보다 좋은 조건은 없었다. 악착같이 배워 선배들의 경험과 노하우를 쪽쪽 빼먹는 일만 남았다.

고경철이 풀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회진 내내 김지훈과 펠로우들이 나누는 말에 집중하고자 했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졸음과 사투를 벌여야 했지만 한마디라도 건지길 바랐다.

이 주 동안 이어진 킵의 여파 어마어마했다.

결코 쉽지 않았다.

문가에 기대 졸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힘든 회진이 끝났다.

이제 공포의 시간을 넘어야 했다.

인턴과 함께 주말 집담회에 필요한 자료를 부지런히 책상 위에 올려놓고 교수들이 모두 들어오길 기다렸다.

일주일 동안 들어간 수술을 점검했다.

벌써부터 식은땀이 났다.

시작도 하기 전에 느껴지는 살벌함과 차가운 긴장에 몽롱했던 머릿속마저 명료해졌다. 여기저기에서 펑펑 터져 나오는 무지에 급히 위 연차를 찾았지만 다들 제 코가 석 자였다.

심지어 펠로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죽었다!’

집담회가 시작됐다.

전공의 중 가장 강력한 치프가 무너졌다.

남은 연차가 차례차례 너무도 손쉽게 불탔고, 제발 불리지 않길 바랐던 이름이 들렸다.

“고경철 선생, 어제 한 수술 말이야.”

아! 이혁민 교수님이다!

곧바로 도마 위에 올려졌고, 조곤조곤 다져졌다.

이것이 끝이면 좋으련만 이번 주에는 메이저 수술을 다수 들어갔다. 칠지도가 날고, 살 떨리는 너털웃음을 따라 반복이 이어졌다.

에어컨 팡팡 돌아가는데 온몸이 축축해졌다.

“고경철 선생.”

으아악! 이준영 교수님마저!

“고경철 선생.”

왜? 왜? 하나도 아닌 둘인 매형들은 왜?

너무 긴 시간이었다.

열심히 머리 굴려 최선을 다해 대답해도 교수들은 결코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가장 심하게 탄다는 생각을 넘어 아버지 탓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선생님들 모두 아버지 후배라고 했는데 설마 더 태워 달라고 부탁하셨나? 매형은 왜 유독 눈에 불을 켠 것 같지?’

절대 그럴 리 없었지만 집담회 때마다 드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동기 한 명 없이 홀로 모든 불길을 받아 내야 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집도식을 축하하는 호된 관문일 수도 있었다.

화르륵! 화르륵!

고경철이 한 줌 재로 변했다.

아직 집담회 끝나려면 멀었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두 귀 활짝 열어 배워야 하는 고경철의 눈꺼풀이 점점 내려앉았다. 뒤에서 환히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떨어지는 고개를 막지 못했다.

끝날 때까지 방아를 찧었다.

누군가 툭툭 치는 느낌에 고경철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치프가 보였다. 입가에 묻은 침을 닦으며 급히 일어났다.

“경철아, 빨리 가서 샤워하고 깨울 때까지 자.”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지금 네 꼴로 집도식 보냈다간 내가 죽어, 인마. 잔말 말고 뛰어.”

후다닥 병동 당직실로 향하던 고경철이 히죽 웃었다. 비록 단 하루의 행복이지만 정식으로 인정받는 날이 확실하게 시작된 것이다.

눕자마자 꿈나라에 빠졌다.

아무도 깨우지 않았다면 주말 내내 잤을 것이다. 몸은 여전히 잠이 필요하다고 호소했지만 집도식의 주인공은 일 년 차인 고경철 자신이었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 머릿속이 맑아지며 어디에선가 강한 활력이 다가왔다. 깔끔하게 면도하고, 깨끗한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경철아, 뭐 해? 가자.”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집도식을 맞이했다.

고경철의 숨이 약간 가빠졌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토요일 오후였다.

집도식에 참석하지 않아도 뭐라고 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교수들이 대부분 자리했다. 박승준 과장 이하 명성 자자한 사인방과 펠로우들까지 자신의 자리를 축하해 주기 위해 모였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었다.

전통에 따라 치프가 사회를 맡았다.

송재덕 교수와 박승준 과장이 짤막한 인사말을 전하고, 곧 가장 중요한 행사가 이어졌다.

“메스는 첫 수술을 주신 김지훈 교수님이 전달하시겠습니다. 케이스를 직접 주문하셨을 정도로 공을 들이셨지만 제 경험상 메스에만 눈이 갔었습니다. 케이스보단 역시 메스가 소중하죠. 고경철 선생 역시 반짝이는 케이스보다 메스에 담긴 의미와 마음이 핵심이라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약간의 유머에 웃음이 터졌다.

김지훈이 메스가 담긴 케이스를 보이자 여기저기에서 환호성이 이어졌다. 교수들은 흐뭇한 웃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대신했다.

메스를 전달했다.

고경철이 입술을 꾹 물었다.

주는 사람에게도, 받는 사람에게도 특별한 순간이었다.

고성문, 이준영, 김지훈, 고경철로 이어진 인연의 끈이 결코 예사롭진 않았다. 누군가는 스승이 되고, 누군가는 제자가 되고 있었다.

“앞으로도 잘해 주길 바란다. 고생했다.”

“감사합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가장 힘든 시기를 홀로 가야 하는 일 년 차가 잘 버티고 버텨 예년보다 훨씬 늦게 열린 집도식까지 왔으니 축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교수님들께 인사드려.”

송재덕 교수를 향해 걸어가는 고경철을 보던 김지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 오늘은 인사와 차분한 식사로 끝나겠지만 원래 죽음의 길이었다.

교수들마다 권하는 폭탄주.

술기운이 진해지기도 전에 시작하는 노래.

시끌벅적 요란스러운 시간 속에 일 년 차는 하나둘 장렬히 쓰러졌고, 입맛 다시며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던 선배들은 떡이 된 일 년 차를 부지런히 응급실로 옮겼었다.

누군가에게는 기억하기 싫은 일일 수도 있었다.

김지훈에게는 복잡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금경태 과장의 폭력에 가까운 횡포와 압박, 이혁민 교수의 진심 어린 걱정과 따스한 말까지 즐거웠지만 분명 좌절감을 느꼈던 자리였다. 시간이 지난 후 스승에게 받은 두 개의 메스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멍에처럼 남았을 것이다.

‘그 또한 추억이고, 오늘도 추억이 되겠지. 아! 그래도 적응하기 힘드네.’

짤그락! 짤그락!

고기 써는 소리.

소주 대신 놓인 와인 한 잔.

떠들썩함을 허용하지 않는 클래식 음악.

손일석의 유쾌한 입담마저 어색하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고, 새로운 세대의 집도식이자 입국식이었다. 하루빨리 적응할 일이었다.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두 시간도 안 돼 집도식이 끝났다. 문가에 선 고경철은 인사하기 바빴고, 교수들은 막내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사인방, 펠로우, 전공의만 남았다.

오창도 교수와 잠시 대화를 나누던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리며 마지막으로 합류했다.

“같이 가신대?”

“일이 있으신가 봐. 오늘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다음 주 주중에 시간을 내야겠어. 어떻게 하기로 했어?”

손일석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자식들! 선배 지갑 털 작정을 하고 나온 것 같아. 당직까지 모두 이 차 따라온단다. 스테이크하고 한우는 다르다는데 할 말이 없네. 경석이 형까지 당직들 고기만이라도 먹고 들어가게 하겠대.”

“스테이크가 너무 작긴 했어. 그래도 환자 오면 당직은 들어가야 할 텐데 먹어야 얼마나 먹겠어? 과장님이 주신 회식비에 넷이 나눠 내면 부담도 없잖아. 가자.”

김지훈이 호기롭게 외쳤다.

고경철의 집도식을 축하하는 자리이자 드물 수밖에 없는 전체 회식을 겸하는 자리였다. 명색이 교수인 사인방까지 모두 참석한 이상 한우 등심 정도는 깔아야 했다.

“아주머니, 등심 좋은 걸로 삼 인분씩 주시고, 소주는 처음 같은 이슬, 맥주는 카아아아 쏘는 걸로 주세요. 밑반찬보다 고기에 신경 써야 하는 거 아시죠?”

“경철아, 구석에 있지 말고 이리 와라. 오프 안 가고 여기 왔다는 것은 죽어도 좋다는 말이지? 일단 한 잔 말자.”

“치프는 내 옆으로. 이제 얼마 안 남았네. 시험 준비하기 전에 자리 또 있겠지만 지금 이 자리부터 확실하게 마무리하자. 고생했다.”

“당직 모여. 맥주 한 잔도 안 된다.”

왁자지껄 자리가 시작됐다.

“고경철을 위하여!”

“위하여!”

건배를 시작으로 술과 고기가 빠르게 사라졌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송진우와 고경철 같은 놈이 한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간만에 먹는 한우 등심, 그것도 살살 녹는 투 플러스에 기름기를 밀어내며 입 안에서 회오리치는 소맥까지 곁들였다.

다들 허리띠 풀고, 위장의 긴장을 풀었다.

불행히도 이경석이 당직이었다.

환자가 많고 적음은 복불복에 달린 데다 일복까지 하위권을 맴도는 써전이었다. 전원이라도 꺼진 것처럼 휴대폰이 침묵을 고수했다. 대범해진 당직들이 점점 느끼해지는 입과 속을 탄산음료로 씻어 가며 배를 채웠다.

이경석의 얼굴이 가장 먼저 까맣게 죽었다.

맨정신의 폐해였다.

평소 술과 다소 거리를 두는 데다 박승준 교수에게 회식비를 받은 신현수도 뻔질나게 들리는 아주머니 소리에 서서히 심각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래도 때 되면 고기를 먹였는데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 한우가 아니라 삼겹살이었어야 했나?’

다 같은 마음일 수 없었다.

김지훈과 손일석은 완전히 옛날로 돌아가 있었다. 쌓여 가는 소주병은 아랑곳하지 않고 건배를 외쳤고, 꿋꿋하게 버티는 고경철을 보며 좋아 죽었다.

예산을 훌쩍 초과한 회식 비용도 안중에 없었다.

현실 감각 완전히 사라졌다.

한마디로 술 취한 애늙은이였다.

어느새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외과 회식의 유일한 장점은 속도였다.

평소 식사까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빠르게 하는 습관 탓에 술과 고기도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그나마 시간은 아끼는 것이다.

신현수와 이경석이 시선을 교환했다.

“자! 이제 마무리합시다.”

“벌써!”

“이 정도면 충분히 먹었어. 경철이 오프 보내고, 쉬어야 할 사람은 쉬어야지.”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김지훈과 손일석이 아쉬워 죽었지만 몰려오는 술기운을 버틸 용자는 없었다. 펠로우들까지 두 손 들었고, 전공의들도 이제 휴식과 잠을 원했다.

찌이이이익!

카드 용지가 빠져나왔다.

“과장님이 주신 회식비 제하고 나머지는 N분의 1이다. 얼만지 알겠지? 월요일에 내 계좌로 보내.”

이경석이 헛기침을 터트렸다.

교수 체면 다 팽개치고 끝까지 삼 차를 외치다 등 떠밀려 집으로 향하던 손일석이 이경석의 귓속말에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지훈아, 우리가 이렇게 많이 먹었나?”

“사분의 일인데 얼마나 되……. 어? 얼마라고…….”

얼마 전 송진우와 고경철에게 겪었던 악몽은 악몽도 아니었다. 불의의 일격을 당해 달랑거리던 지갑에 마지막 치명타가 가해졌다.

땡그랑! 때구르르르!

탈탈 털어도 동전만 떨어질 상황이었다.

한동안 손가락만 빨아야 할 것이다.

하얗게 질렸던 김지훈이 돌연 웃었다.

“나쁜 일에 쓴 것도 아니고 처남 먹인 거잖아. 인생 뭐 있어? 우리도 선배들처럼 이렇게 사는 거지.”

“맞다. 매형으로서 네 돈 내 돈 모아 경철이한테 용돈도 줬고, 덕분에 술도 잘 먹었네.”

지갑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졌지만 웃자!

집으로 돌아간 후 보아야 할 아내들의 반응은 운명에 맡기면 된다. 월급 받는 동생에게 용돈 줬다고 타박하진 않을 것이다.

카르페 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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