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김지훈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확고한 비전! 간담췌 최고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실현 가능한 희망, 최고의 동료들과 한 팀이 돼 수술한다는 자부심을 주고자 해. 스승님들과 우리 자신을 믿고 달린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야.”
순간 침묵이 흘렀다.
허황된 말만은 아니었다.
이준영 교수라는 간담도 최고의 의사와 각 분야의 대가라 할 수 있는 교수들이 있다. 또한 췌장 분야에서 독보적이라 할 정도로 두각을 드러낸 김지훈이 중심에 섰다. 여기에 서울 근무라는 약간의 이득이 더해진다면 충분히 관심을 끌고도 남았다.
‘비전이라!’
다름 아닌 최고의 써전이다.
스승, 동료들과 함께 이루고자 한 꿈이었다.
중견 의사의 위치에 섰지만 갈수록 강렬해지는 젊은 시절의 욕망이자 희망이었다. 써전이라면 누구나 최고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터무니없이 미비한 간 이식 분야,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새로운 수술로 접근해 가는 췌장 분야였다. 비록 저마다 파트가 다르지만 생각만으로도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시대가 요구하는 바도 달라졌다.
대가의 개념마저 변했다.
지금 이 순간 다양한 분야에 능수능란한 써전을 넘어 한 분야의 최고 전문가, 즉 대가로 향하는 중대한 분기점에 선 것이다.
이제야 진정한 한 걸음을 떼는지도 몰랐다.
김지훈만의 생각과 몫이 아니었다.
신현수가 훅 숨을 내쉬었다.
“가슴속 생각을 말로 듣는 것도 나쁘지 않네. 시작하자.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더라도 최소 후회는 하지 말자.”
“병원 규모가 더 커지고, 명성까지 높아져야 최연소 원장의 값어치도 커지겠지? 오케이! 이게 바로 내 주가를 높이는 길이네. 가자.”
“간만에 가슴이 좀 떨린다.”
김지훈이 눈가를 문질렀다.
간담췌 파트는 자신뿐이었다.
신현수와 손일석은 신규 병원 발령이 확정적이었고, 이경석 역시 앞으로 서울 병원에서 근무할지 장담하기 이른 시기였다.
어쩌면 모든 명예나 성과가 김지훈에게 집중될 수 있건만 뜻을 같이해 주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친구와 동료였다.
“현수야, 일석아, 고맙다. 경석이 형, 고맙습니다.”
“센터 만들고 난 후에 듣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어. 다른 과 사람들에겐 우리가 공유하는 비전이 통할 수가 없어. 만들지도 못한 틀에 합류할 사람은 없단 말이지.”
“일단 우리 과부터 만나 보며 고민해야죠.”
“골치 많이 아플 거다. 생각 깊게 해.”
역시 이경석이었다.
반드시 고민해야 할 문제였고, 단단히 준비해야 했지만 당장은 사인방의 뜻이 모인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환한 미소를 머금던 김지훈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 그 전에 챙겨야 할 일이 있지.’
“일석아, 이번 주 토요일 집도식부터 잘 치러 주자.”
“두말하면 잔소리지. 하나뿐인 일 년 차 집도식을 우리가 안 챙겨 주면 누가 챙겨 주겠어? 이제 술 먹이고 뻗는 시대는 지났어.”
“응? 무슨 말이야? 그럼 어떻게 할 건데?”
“미국을 갔다 오면 뭐 해? 촌스러운 놈! 이태원에 있는 이탈리아식 고급 레스토랑이 집도식 할 장소야. 고상한 음악 들으면서 고기 좀 썰어 보자. 과장님과 치프하고 다 얘기 됐다.”
시대 확실하게 변했다.
하긴 인기가 없어서 그렇지, 외과 내부적으로는 전공의 모두 금값 이상의 상한가를 치고도 남았다. 더욱이 일 년 차가 술 먹고 뻗으면 대체할 인력이 아예 없으니 전공의들부터 나서서 반대할 상황이긴 했다.
“그럼 집도식 날도 근무하나?”
“에헤! 김 교수 고지식함의 끝은 도대체 어디지? 일 아니면 술이냐? 술 먹고 뻗으면 1박 2일이잖아. 그 시간 딱 반으로 잘라서 오프 주면 얼마나 좋아하겠어?”
“일석아, 너무 뭐라고 하지 마라. 한때 술 귀신이었던 사람이 소주 한 병 먹기도 힘드니 얼마나 갈증 나겠어? 합법적으로 술 마시고 싶다는 의사를 보인 것뿐이잖아.”
“쯧쯧! 하필이면 일 년 차를. 그것도 처남을 이용하려 했단 말이지? 나쁜 놈!”
집도식 꺼냈다 별 소리 다 들었다.
어려운 일 함께한다고 했는데 받아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일부 그런 마음이 있었고, 고경철에게 술을 얼마나 먹일지 고민했던 김지훈이 쩝쩝 입맛을 다시다 말고 흠칫 놀랐다.
신현수의 말 때문이었다.
김지훈이 슬그머니 눈치를 보았다.
“지훈아, 주말밖에 만날 시간이 없잖아? 이번 주는 집도식 때문에 안 되고, 천안 구미가 가까운 곳도 아니니까 다음 주부터 바로 만나 봐. 네 제안이 너무 엄청나서 하루가 아깝다.”
결코 자연스럽게 넘길 수 없었다.
‘어후! 나도 잘 알지.’
“그… 그래. 근데 그게 말이야.”
“왜, 무슨 일 있어?”
“삼 일 연휴라서 와이프하고 여행 가자고 약속을 했거든. 그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했고……. 음! 희연이하고 놀아 주지도 못했네. 개인적으로 재충전할 시간이…….”
왜 더듬더듬 말이 꼬일까?
한두 달 안에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일을 벌인 놈의 업보였다.
신현수와 손일석이 크게 웃었다.
이경석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지훈아, 너 주말에 쉰다고 뭐라고 할 사람 하나도 없는데 뭘 그리 쩔쩔매? 즐겁게 놀다 와.”
“하! 하! 경석이 형, 그래도 되겠죠?”
“네가 안 되면 우린 일 년 내내 당직 서야 돼. 어떤 때 보면 꼭 전공의 같다니까.”
“그게 우리 김 교수 매력 아닙니까? 김 교수, 어디 가는데? 나도 연휴 때 오프다.”
“설마 같이 가자고?”
“왜? 무슨 은밀한 일이라도 하실 생각인가? 푸하하하! 아직 혈기왕성한데 밤마다 자기 바빴을 테니 애가 탔긴 했겠다. 희연이가 우리 와이프 잘 따르니까 맡기고 못다 한 숙제나 하셔. 하하하!”
“숙제 많이 밀렸겠다.”
신현수까지 농담을?
김지훈이 주루룩 눈물을 흘렸다.
“일석아, 현수야, 고맙다.”
심각한 대화로 시작해 무척 중요하고, 더 심각한 대화로 자리가 끝났다. 직장에서 아무리 인정받고 살아도 가정이 평안하지 않으면 다 헛된 일일 뿐이었다.
할 일은 해야 한다.
그것도 때가 있는 법이다.
명심하자!
***
한 주의 끝이 다가왔다.
진료를 끝낸 김지훈이 깍지를 낀 채 깊은 고민에 잠겼다. 심각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가 입가에 아주 살짝 걸려 있었다.
‘췌장암 환자가 둘이나 왔단 말이지? 라파로가 가능한지 묻는 것으로 봐선 방송 효과인 게 분명해. 이런 식으로 가면 간 이식도 활성화될 수 있을 거야.’
김칫국 마시는 꼴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기회가 왔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 없었다. 다만 환자의 불행이 의사의 기쁨이 되는 상황이 찜찜하긴 했다.
어쨌든 환자는 췌장암의 경우 복강경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소리에도 확실한 신뢰를 보였다. 필요한 검사를 모두 마친 후 일주일 간격으로 수술하게 될 것이다. 예후가 가장 나쁜 암이지만 수술만이라도 깔끔하게 끝난다면 그 이상의 치료가 없었다.
김지훈이 수술 일정을 확인했다.
예약 수술이 빽빽했다.
췌장암처럼 큰 수술이 걸린 날은 다른 수술을 거의 할 수 없어 새로운 수술 예약을 줄줄이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의사 입장에서야 자랑이 될 수 있지만 환자에겐 최악의 상황이었다.
바라는 바도 아니었다.
‘지금도 일이 개월 이상 밀리는 것이 예사지만 급하지 않은 환자는 없다. 원 포트를 포함해 양성 질환으로 오는 환자까지 족족 수술하다간 나도 문제가 생긴다.’
수술에도 연속성이 있다.
전문적으로 한 분야를 추구해 유사한 수술을 지속적으로 하게 되면 그만큼 실수가 줄어들고, 결과도 좋아지는 법이었다.
하다못해 누구나 기본으로 배웠던 탈장에서도 세부 전공을 강조하는 세상이었다. 전공의 때 직간접적으로 모든 수술을 경험하고, 펠로우를 거쳐 정한 자신의 분야에 모든 열정과 능력을 쏟아붓는 것이 마땅했다.
‘오창도 선생님과의 자리부터 빨리 만들어야겠어. 간 이식에 합류하고자 하시면 후배들 중 누구에게 오창도 선생님 파트를 맡겨야 하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부딪치는 것 이외에는 답이 없었다.
답답했지만 기쁜 일은 항상 벌어졌다.
장미라 아빠가 퇴원했다.
누군가 요양을 도와줘야 할 시기였지만 유일한 간병인인 엄마는 병원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무사히 회복된 것만으로도 기쁜 일임이 분명했다.
관건은 무조건 장미라와 정재복 환자였다.
수술을 제외한 모든 과정에서 지대한 역할을 맡아야 하는 내과는 간 이식의 분명한 주축이었다. 수술로 끝나는 공여자와 달리 수혜자는 퇴원 일정까지 반드시 상의해야 했다.
윤석진과 만났다.
“정재복 환자 아들은 언제 퇴원시킬 거야?”
“다음 주 초반이면 가능해.”
“역시 젊고 건강한 게 최고네. 미라는 외과 치료도 거의 다 끝나 가니까 일주일 정도 더 지켜보고 별문제 없으면 퇴원시키자.”
“그래도 되겠어?”
“첫 수술이라 너도 불안하구나? 어차피 면역 억제제야 평생 복용하는 거고, 정기 검진과 추적 관찰만 제대로 하면 더 이상 할 일도 없잖아? 교과서대로 퇴원시키자.”
“병원 감염만큼 무서운 일도 없는데 입원 기간 늘어서 좋을 일이 없지. 미라가 무척 좋아하겠어. 그렇게 하자.”
결정을 내린 김지훈이 홀가분한 표정을 짓다 말고 윤석진을 보았다. 이경석의 말이 떠올랐지만 어떤 생각과 반응을 보이는지 정도는 알아야 했다.
“석진아, 간 이식이 활성화될 것 같아?”
“외과 하기 나름이지만 요즘 상황을 보면 불가능할 것 같진 않아. 다만 충분한 규모와 시설이 따라 줘야 환자가 먼저 찾지 않겠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래서 말인데, 이식 수술이 연이어지면 내과 협조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 알지? 수술 전후 항상 함께할 전담 의사가 반드시 필요해.”
김지훈의 눈이 번쩍였다.
“그 눈빛은 뭐야?”
“간 이식 센터 건립을 밀어붙일 생각이야. 아직 틀도 잡히지 않았지만 일단 인적 구성이 어느 정도 확보되면 재단에 건의할 수 있을 것 같아.”
“인적 구성이라면 설마 나도?”
“공정식까지.”
윤석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열의는 느껴지는데 뭔가 애매모호하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잖아. 병원에서 공식적으로 센터 설립을 표방한 것도 아닌 상태에서 누가 선뜻 함께한다고 할 수 있겠어? 우리 과 내부적으로도 상의가 필요한 일이야.”
“이제 시작하는 마당이고, 지금은 의향을 타진하는 단계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지. 그래도 긍정과 부정 중 어느 쪽인지는 말해 줄 수 있지 않아?”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긍정 쪽으로 약간 기울긴 하지만 장래가 걸린 문제야. 지금까지 쌓아 온 경력 다 팽개치고 새로 시작하는 꼴이잖아. 병원이나 재단의 확실한 결정이 없다면 합류한다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 진짜 센터 건립을 시도할 거야? 몇몇이 나선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미래를 보는 다른 시각과 더불어 도리어 실행 의지를 반문했다. 외과 인원도 만나 보지 못한 상태에서 너무 성급하게 접근했다.
이경석의 우려가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은 절대 답이 아니었다. 스스로 확신을 갖고 움직이지 않으면 누구도 설득하지 못할 것이다.
“시설, 장비를 떠나 어느 경우든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일단 간 이식 센터에 필요한 의료 인력부터 모두 만날 거야. 나 하나로는 어림없지만 뜻이 모이면 길이 생기지 않을까?”
“정말 시도할 생각이구나. 나도 내심 바라던 일이라 가만히 있을 수가 없네.”
“도와줄 거야?”
“의사가 도울 일이 뭐가 있겠어? 췌장은 물론 간 이식이 필요한 환자와 적극적으로 얘기해 보는 거지. 김지훈 교수에게 생체 이식 수술을 받으라고 말이야. 케이스가 많아야 병원과 재단을 상대로 센터 건립을 주장할 수 있지 않겠어?”
맞는 말이었다.
의사의 힘은 결국 환자에게서 나오는 법이었다. 췌장 복강경과 간 이식 수술의 결과와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면 그보다 강한 압박 수단은 없었다.
김지훈이 주먹을 흔들었다.
“부탁한다. 다음번에는 지금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을 거야.”
“직접적으로 돕진 못하겠지만 열심히 응원할게.”
짧은 대화였지만 많은 것을 깨달았다.
평소 원하던 일이라 해서 모두가 적극적일 수는 없었고, 감정 호소에 휘둘리지도 않을 것이다. 유석재와 후배들이 비전이라는 말 하나에 동의할 것이란 생각 자체가 안이했다. 앞에 나선 사람에겐 그들을 설득할 구체적인 계획과 방안이 필요했다.
대화를 끝낸 김지훈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예산 문제는 몰라도 현수와 함께 필요한 인원, 장비, 시설 등의 초안부터 잡아야겠다. 스승님은 물론 이사장님까지 가급적 빨리 만나 센터 설립의 당위성을 말씀드리고 설득해야 한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지만 금요일 저녁이었다.
하루 후면 주말 집담회를 마치고 집도식을 연다. 해마다 치르는 행사지만 각별한 의미가 담겼다. 올해는 유일한 일 년 차이자 하나뿐인 처남의 집도식이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골치 아픈 일은 잠깐 뒤로 미뤘다.
다음 날 아침.
김지훈이 연거푸 헛기침을 했다.
‘왜 내가 두근거리지?’
주머니에 든 케이스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