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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029화 (1,029/1,329)

15화

김지훈이 환자 가족을 만났다.

장미라 엄마처럼 가족 모두 안절부절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들의 간을 받은 아버지, 아버지의 간을 받은 딸 무엇 하나 다를 바 없었다.

충분히 상황을 설명했다.

“앞으로 일주일 초급성 간 거부 반응 발생이 문제지만 수술은 잘됐습니다. 오늘은 환자분 상태를 지켜본 후 내일 아침에 면회 여부를 결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공여자 병실을 찾았다.

상당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최고의 써전에게 수술을 받았고, 평소 건장했던 아들이기에 무사히 회복될 것이라 확신했다. 한동안 환자를 살핀 후에야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도 역시 단 하나의 수술이 시작된 지 열세 시간 만에 퇴근할 수 있었다.

뻐근한 어깨를 돌리던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또 한 사람의 목숨과 삶을 되찾아 줄 첫 번째 단계를 무사히 넘었다. 스승과의 협조, 모든 의료진이 쏟은 땀이 가져온 값진 결과였다. 간 이식을 기다리는 수많은 환자에게 빛이 될 것이다.

성급하다 해도 이 순간만은 외쳐도 좋았다.

카르페 디엠!

상반된 감정이 교차하는 나날이 흘렀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회복되는 장미라와 아슬아슬한 상황을 이어 가는 정재복 환자를 볼 때마다 마치 온탕 냉탕을 오가는 것 같았다.

다행히 공여자 상황은 무척 좋았다.

마침내 장미라 아빠의 퇴원 날이 결정됐다. 당분간 몸을 추슬러야 하겠지만 절제된 간은 곧 정상 크기를 되찾을 것이다. 정재복 환자의 아들 역시 젊고 건강하기에 무난한 회복 과정을 밟고 있었다.

소중하지 않은 환자 없다지만 때론 유난히 눈이 가는 경우가 있다. 우여곡절 끝에 수술해 이젠 제법 밝은 웃음을 머금는 장미라가 그랬다. 개인적으로 큰 인연이 이어졌다는 생각 때문인지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봐야 마음 편한 것이 사실이었다.

“미라야, 퇴원하면 무엇을 제일 먼저 하고 싶어? 가장 하고 싶은 거 하나만 꼽아 봐.”

먹고 싶은 것도 많을 테고, 다른 아이처럼 뛰어놀고도 싶을 테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인생의 소중한 시기를 무려 사 년이나 잃은 아이였다.

평범하진 않을 것이라 여겼다.

능력이 닿는다면 도움을 주고 싶었다.

“엄마, 아빠랑 짜장면 먹고 싶어요.”

장미라가 해맑게 웃었다.

고작 짜장면?

김지훈이 순간 말을 잃었다.

수많은 사람이 누리는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말 짜장면이면 되냐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다.

“나도 짜장면 좋아하는데.”

“선생님도요?”

“그럼.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잖아.”

미라 엄마의 눈가가 붉어졌다.

김지훈이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장미라와 가족이 원하는 소소한 희망이 이루어지길 바랄 뿐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모인 따스한 정이 닿는다면 그리 먼 일은 아닐 것이다.

정훈철의 노력이 있기에.

드디어 결실의 첫 단추를 꿰었다.

장미라 상황을 중심으로 한 희귀 질환 환아들의 특집 방송 첫 편이 방영됐다. 다큐 형식과 시청률을 중요시하는 방송 특성상 다소 늦은 시간이었지만 김지훈에게는 오히려 편안한 시간이었다.

고경아와 함께 티브이 앞에 앉았다.

뒹굴뒹굴 방바닥 청소에 여념이 없는 희연이도 엄마의 특별 배려 속에 침대를 면했다.

“시작하네요.”

담담한 목소리를 따라 어려운 처지에 빠진 환아와 부모들의 고통이 파노라마처럼 소개됐다. 머리가 다 빠진 아이, 고개조차 가누지 못하는 아이, 앙상한 팔다리로 통증을 호소하는 아이까지 얼마나 많은 질병이 우리의 미래를 아프게 하는지 여실하게 보여 주었다.

‘미라다!’

선천성 담도 폐쇄로 간경화까지 발생해 간 이식을 필요로 하는 미라의 힘없는 눈빛이 가슴에 박혔다. 새벽에 일터로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아빠, 맞벌이로도 부족하지만 하루 종일 아이 뒷바라지에 매달려야 하는 엄마의 힘들고 빈한한 삶에 마음이 시렸다.

빤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제는 건강해져 퇴원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까닭 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마도 간 이식을 위해 도움이 필요하다는 내레이터의 절절한 호소 때문일 것이다.

‘한 통의 전화가 모이고 모여 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장미라의 수술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환우회 사람들에 이어 수술 준비에 몰두하는 의료진의 얼굴이 하나둘 비쳤다. 병원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무료 치료를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이 감동적으로 소개됐다.

약간의 과장도 없었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하는 인위적 연출도 보이지 않아 더욱 가슴에 와닿았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엄마와 아빠를 걱정하는 장미라의 말에 무너지고 말았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나죠?”

“경아 씨도 수술 팀이었으니까요.”

부부의 눈가가 모두 촉촉해졌다.

“엄마, 왜 울어?”

덩달아 울먹이며 고경아의 손을 잡아 주던 희연이가 갑자기 큰 소리를 질렀다.

“아빠다! 아빠!”

수술의 필요성과 위험성을 설명하는 김지훈의 얼굴이 아주 또렷하게 화면을 탔다. 간 이식을 언급하며 걱정 가득했던 내레이터의 목소리가 변했다.

『생후 두 달 만에 배를 열어 수술해야 했던 아기가 십사 년이 흐른 지금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과 싸워야 합니다. 미라에게 희망이 있을까요?』

수술실 전경이 펼쳐졌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여 오후 늦게 수술실을 나오는 써전들의 고달픈 생활과 그 이상의 보람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리고.

『불행히도 간 이식을 실패하거나 거부 반응이 나타나면 미라의 앞날은 없습니다. 어쩌면 돈보다 최선을 다해 줄 실력 있는 의료진이 더 간절할지도 모릅니다. 미라를 수술할 분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품어 봅니다.』

간암 전문인 이준영 교수의 공여자 수술 설명에 이어 김지훈의 분야가 소개됐다. 간담췌 파트 전문의로서 원 포트 수술 도입과 췌장 복강경 수술 성공 사례까지 언급됐다. 말미에 혈관 전문의라 소개된 손일석이 잠깐 등장했다.

‘역시 일석이야.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 귀에 착착 감기네.’

병원과 의료진 홍보를 아주 자연스럽고도 절묘하게 엮었다. 곧이어 미라가 수술 방으로 향하는 장면과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말로 일 부가 끝났다.

김지훈의 얼굴이 벌게졌다.

“내 분야 소개 시간이 너무 길지 않았어요? 나 혼자 한 수술도 아닌데 너무 치켜 줬네요.”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고, 기분 나빠할 선생님 단 한 분도 없을 거예요.”

“그럴까요? 미라가 순조롭게 회복돼서 정말 다행이에요. 하마터면 희망을 뺏은 놈이 될 뻔했네요.”

“난 지훈 씨 스스로 자책할 일이 안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불가항력이란 말을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모든 환자를 살릴 수 있는 의사는 없어요.”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사람 목숨이 걸린 수술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남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부모를 잃은 사건이 일종의 트라우마로 작용하는지도 몰랐다.

‘어떤 수술이든 실패하지 않길 바라지만, 그만큼 충격이 클 텐데 의사의 한계를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나직한 숨을 내쉬며 김지훈을 보던 고경아가 갑자기 환하게 웃었다.

“호호호! 남편 자랑해야지.”

김지훈이 다급히 막았지만 늦었다.

장인어른, 장모님이 좋아 죽었다.

(김 서방, 이번 수술 잘됐지? 송 원장하고 이 교수 통해 들었다. 열심히 해 줘서 고맙다. 손 서방과 함께 경철이 확실하게 써전 만들어야 돼. 믿는다.)

고경희와 통화하며 중간에 얼굴을 비친 손일석까지 입방아에 올랐다. 화면이 낫다는 둥, 우리 남편이 더 잘생겼다는 둥 엉뚱한 곳으로 번진 말싸움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래. 제부가 말은 더 멋있게 잘하더라.”

김지훈이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이미 장미라 수술 결과를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앞으로 다가올 상황 때문이었다.

티브이가 가진 엄청난 파급력과 건강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고려할 때 지금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질 수도 있었다.

밀려드는 환자.

고도의 실력을 요구하는 수술.

턱없이 부족한 인원.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장점보다 단점이 먼저 떠올랐고, 그 모두 스스로 지고 가야 할 일이었다. 단 하나의 어려움이라도 맞서지 못하고 물러서는 순간 꿈과 목표가 동시에 사라질 것이다. 원하는 바에 한 발 더 가까워졌다는 기쁨 이상으로 책임이 커졌다.

‘지금이 바로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다.’

손가락을 꼽으며 준비해야 할 일을 생각하던 김지훈이 돌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간담췌 센터 보강과 활성화에 가장 필요한 요소는 기계나 장비가 아닌 사람이었다. 의료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면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일차적으로 함께 일할 의사가 필요했다.

문제는 평일에 가장 만나기 힘든 사람이 같은 의사라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김지훈도, 만나야 할 사람도 짧은 시간에 간단한 대화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었다.

주어진 여유는 주말이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결국 없는 시간을 짜내 주말 일정을 줄줄이 잡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총각이면 문제 될 일이 아니었다.

아내에게 약속한 가족 여행!

토요일로 예정된 처남의 집도식!

가족에게 희생을 요구하거나, 전공의 일 년 차에게 강한 자부심을 줄 공식적인 행사를 등한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아무리 강철 체력이라 해도 몸은 하나였다.

‘곤란하네.’

김지훈이 반짝반짝 빛나는 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처남이자 후배인 고경철이 받아야 할 첫 번째 집도에서 사용한 메스였다. 문득 스승에게 받은 두 개의 메스가 떠올랐다. 새삼스러운 감동과 동시에 스승과 제자 모두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었는지까지 기억났다.

‘스승님도, 나도 어렵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시간이 없다 뿐이지 해결하지 못한 난관은 없었다. 차근차근,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자.’

일단 장미라와 정재복 환자의 회복에 모든 힘을 쏟아야 했다. 이후 편안한 마음으로 처남의 집도식을 뜻 깊게 치러 주면 된다. 그것이 또한 가족 여행을 갈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할 것이다.

앞으로 이 주 안에 해결 가능했다.

이미 간담췌 파트에 합류했으면 하는 구체적인 대상까지 점찍어 두었다. 고경아에게 허락을 구하고 함께할 의사를 만나는 일을 진행하면 무리가 따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모든 일이 뜻대로 될 리 없었다.

사람 구하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 없으니 말이다.

반면 정갑수를 비롯해 몇몇을 제외하면 척을 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했고, 여전히 각자의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상황에 따라 근무 병원이 다를 따름이었다.

그래서 더 쉬울 수도 있었다.

‘진행만 되면…….’

입가를 말며 회심의 미소를 짓던 김지훈이 돌연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결정적인 문제를 잊었다.

주말이라고 마냥 시간이 날까?

일복!

그놈의 일복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티브이를 보고 중한 환자가 급격하게 몰려들거나 당직 때 폭풍을 만난다면 주말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머릿속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질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원 포트 교육은 또 어떻게 하지?’

난관이 다시 하나둘 늘어 갔다.

돌파구가 필요했지만 환자와 관련된 일은 절대 뒤로 미루지 못할 의무였다. 주어진 업무를 해 나가며 간담췌 보강에 나서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울 수도 있었다.

어후! 어후!

한숨만 나왔다.

정녕 해결할 방법이 없는 걸까?

김지훈이 돌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최근 들어 즐거운 일이 연이어져도 결국 마지막에는 간담췌 문제로 생각이 귀결됐다. 극심한 스트레스까지 동반돼 스스로 기분을 망치는 꼴이었다.

오늘만 해도 피하지 못했다.

‘즐겨야 할 때는 마음 놓고 즐기자. 웃자.’

“하하하! 티브이에 내가 나왔네. 희연아, 아무나 못 나온다. 아빠 멋있지?”

잘 시간이 훌쩍 지났다.

희연이가 눈만 깜빡거렸다.

고경아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막 자려고 하는 애를 왜 깨워요? 조용히 해요.”

‘그냥 웃으며 한마디 했을 뿐인데?’

솔직히 말해 김지훈 탓이 아니었다.

밤늦은 시간에 이모와 통화를 하게 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상상도 못할 시간 동안 전화기를 붙들고 수다를 떨었다.

절대 고경아에게 들을 핀잔이 아니었다.

때론 이런 사소한 말 한마디가 마음을 상하게 한다. 부부이기에 더욱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무릇 모든 일은 타이밍이 중요한 법이었다. 이럴 때 고개 치켜들어 봐야 밥상만 초라해질 뿐이었다.

“예, 마님.”

잘했다, 김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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