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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028화 (1,028/1,329)

14화

손일석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간만에 타서 그런지 내상이 심해. 경석이 형하고 현수까지 눈에 불을 켤 줄은 몰랐어. 내 야성을 일깨우다니 실수한 거야. 복수의 칼 좀 갈아야겠다. 휴우! 내 이럴 줄 알고 혁원이에게 다음 수술 퍼스트 넘겼지. 자식들! 다음 집담회 때 볼만하겠어.”

“나도 탈 줄 몰랐다. 부교수고 뭐고 없으시네.”

“그래서 덜 탔다는 생각은 안 하시나? 내가 최소 두 배는 더 탔어. 이건 차별이야. 우리 사회에 있어서는 절대 안 될 차별, 강호를 어지럽히는 차별이 분명해.”

“일석아, 너 언제 철들래?”

“왜 이래? 내 나름의 방식으로 젊게 사는 거야. 그나저나 미라 상태도 좋고, 운동도 해야 되는데 월요일에 확실히 병실로 옮길 거지?”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주말까지 무사히 넘어간다면 거부 반응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

“일주일 내내 조마조마했는데, 정재복 환자 수술 때문에 우리 김 교수는 일주일 연장이네. 힘들겠어.”

“누구 때문에 경철이하고 펠로우들이 훨씬 더 힘들었겠지. 수시로 중환자실 들락날락했다며? 소문 다 났다. 이번에도 그럴 거야?”

“적어도 혈관 수술이 뭔지는 알려 줘야지. 그리고 매형이 처남 사랑해 주지 않으면 누가 사랑해 주겠어? 다 경철이를 위한 길이야.”

속닥속닥!

여전히 집담회는 진행 중이었다.

토론 내용이 바뀌면 목표도 바뀐다.

매형들의 소리 죽인 사랑을 듬뿍 받은 고경철의 고개가 방아질을 시작했다. 주변이 온통 피바람과 불길로 휩싸였는데 꿋꿋하게 졸고 있었다.

보통 피곤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나마 장미라 상태가 좋아 주말에는 다소 여유가 생길 것이다. 물론 채 하루 남짓에 불과할 테고, 월요일에는 새로운 킵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도 저런 때가 있었지. 다시 하라면 절대 못할 것 같은데 왜 그립다는 생각이 들지?’

추억 때문일까?

아니면 젊은 시절의 아련함일까?

김지훈이 고개를 강하게 흔들었다.

‘아직도 쌩쌩한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매도 먼저 맞는 놈이 편한 법이다.

외과 전체를 휘감는 불길을 느긋하게 감상하며 미력하나마 힘을 조금 보탰다. 전공의와 펠로우들의 신음이 하늘을 찔렀다.

이경석과 신현수가 때늦게 땅을 쳤다.

‘지훈아, 제발 살살 넘어가자. 일석이 너!’

응당 거쳐야 할 길을 모두 건넌 후에야 주말 집담회가 끝났다. 비 온 뒤 햇살처럼 주말이 주는 나른함과 기대가 빠르게 험했던 분위기를 대체했다.

김지훈도 다르지 않았다.

피로가 누적된 만큼 재충전을 해야 다음 주 수술을 무난히 할 수 있었다. 적절한 잠과 휴식이 필요했다. 다만 장미라가 중환자실에 있는 이상 멀리 나갈 수는 없었다.

토요일 내내 잠을 청했다.

일요일 아침,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한강 공원으로 향했다.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곳이었지만 승희로 인해 정훈철과의 인연이 이어진 특별한 장소였다.

희연이와 네발자전거.

오래간만에 아빠 노릇 제대로 했다.

땀투성이인 딸이 그렇게 예쁠 수 없었다.

맥주 한 잔을 곁들인 대화.

고경아의 미소가 참 화사했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까만 눈동자가 여전히 숨 막힐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연애 시절 청평에서 느낀 설렘, 그 느낌 그대로였다.

‘놀러 나오길 정말 잘했네. 도진이, 도훈이, 호석이 모두 잘 지내겠지? 얼굴 못 본 지 오래됐어도 다시 만날 인연임은 분명하네.’

불현듯 후배들의 방해로 이루지 못했던 한밤의 꿈이 떠올랐다. 왜 그리 애가 탔는지 모르지만 혈기왕성한 총각 시절의 로망이 아니었을까?

그때 이미 고경아가 평생 곁에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코 하룻밤의 불장난일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때부터 행복했었구나. 난 참 행운아야.’

아련한 추억과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다.

순간 지난 시절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야 한다는 갈망에 휩싸였다.

고경아가 땀에 젖은 희연이를 목욕시키자마자 김지훈이 샤워를 했다. 그사이 딸은 아빠 마음을 안 것처럼 곤히 잠들었다.

완벽한 기회였다.

우워워워워!

늑대가 나타났다!

마음속일 뿐 딸 깰까 포효하진 못했다.

***

월요일 아침.

장미라의 상태를 확인한 김지훈이 결정을 내렸다.

“병실로 올리자.”

무균실을 대체한 일인실로 올라간다.

비록 아빠와 한 병실을 쓰지 못하지만 드디어 남은 병원 생활을 엄마와 함께할 것이다. 마음의 안정만으로도 좋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아직은 병실 밖으로 나가지 못합니다만 운동이 필요합니다. 병실 안에서라도 자주 움직일 수 있게 해 주세요.”

“예, 선생님. 감사합니다.”

엄마의 눈이 촉촉이 젖어 들어갔다.

안타까움도, 슬픔도 아닌 기쁨이었다.

아이 아빠도 무난한 회복을 보였다.

퇴원이 머지않았다.

김지훈이 밝게 웃었다.

장미라 덕에 정재복 환자의 수술도 자신 있게 임할 수 있었다. 혈액형 상이를 제외한 모든 조건이 훨씬 유리한 이상 무난하게 회복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곧 두 번째 간 이식 수술이 시작된다.

공여자 수술을 먼저 시작한다.

이후 아들의 부분 간 절제 시간에 맞춰 아버지의 간을 제거하고 이식하면 된다. 사이 시간이 채 한 시간도 안 되지만 상당한 여유를 얻었다.

김지훈이 수술 방을 찾았다.

이준영 교수와 함께 아들의 긴장을 덜어 주었다.

수혜자 수술 주관을 윤서연이 맡아 김진호 교수 주재하에 마취가 시작됐다. 젊고 건장한 성인도 마취제 앞에서는 무력했다.

“수술 시작하셔도 됩니다.”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이준영 교수의 집도 아래 송진우와 고경철이 한 팀을 이뤘다. 김지훈은 복부를 여는 과정부터 단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참 노련하시네. 한두 번 본 것이 아닌데 어떻게 볼 때마다 배울 게 남았는지 모르겠네.’

아들의 간은 건강했다.

이식에 어떤 문제도 없었다.

사각! 사각!

간 절제가 시작됐다.

자르기만 한다면 벌써 수혜자 수술을 준비해야 했지만 혈관 세 개와 담도를 이식하기 좋게 확보해야 했다. 적어도 두 시간 이상 더 걸릴 상황이었다.

진지한 눈으로 참관하던 김지훈이 시간을 가늠했다.

‘지금이 적당하겠어.’

정재복 환자를 내리라는 오더를 내렸다.

잠시 참관을 이어 가다 한창 준비 중인 수혜자 수술실로 향했다. 수술실 창문 너머로 느껴지는 써전들의 열의에 자신감이 치솟았다.

띠! 띠! 띠! 띠!

만성 간염에서 비롯된 간경화에 시달려 온 정재복 환자의 까만 얼굴도 왠지 두렵지 않았다. 퍼스트를 서야 하는 이혁원이 보이는 각오와 긴장, 세컨을 자청한 나종진의 열정이 전하는 힘 때문이었다.

김지훈은 CT를 보며 간 제거와 이식 과정을 차분히 정리했다. 장미라에 비하면 성인이 주는 시야부터 난이도까지 한결 유리했지만 수술에 국한된 사항이었다.

‘수술 후 합병증은 단 하나도 다르지 않다. 거부 반응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출혈과 혈전 발생은 수술장에서 최대한 막아야 한다.’

“마취 시작합니다.”

윤서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해진 순서와 그간 쌓은 경험을 따라 차분하게 마취를 진행했다. 이내 환자가 자신의 심장과 숨을 마취과에 완전히 맡겼다.

수술 팀이 각자 자신의 자리에 섰다.

“수술 시작하셔도 됩니다.”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었다.

생체 간 이식에 혈액형 상이라는 위험 요소를 안고 가야 하는 두 번째 간 이식 수술이었다. 실패는 병가지상사라 하지만 환자에게 통하는 말이 아니었다.

‘반드시 성공한다.’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수술이 시작됐다.

나직한 목소리를 따라 배가 열렸다.

“보비! 석션! 수처! 타이!”

간경화로 돌처럼 딱딱해진 간이 제거됐다.

우상복부가 휑하니 비었다.

대정맥과 연결된 간정맥, 대동맥에서 갈라져 나온 간동맥, 소장의 혈관들이 모여 간으로 주행하는 간문맥, 췌장관과 합류되기 직전의 담도만 남았다.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수술을 시작했지만 스승과 제자의 호흡은 완벽했다. 적당한 시점에 손일석이 이식할 간을 들고 들어왔다.

성인과 성인 간의 간 이식이다.

우측 간을 절제해 상당한 부피를 가졌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관류액을 채운 차가운 간을 잡았다. 세 개의 혈관과 한 개의 담도가 정확하고 안전하게 이어질 수 있도록 최적의 장소에 공여자 간을 위치시켰다.

“이 정도면 혈관에 압력이 가해지지 않겠지?”

“괜찮아 보입니다.”

“정맥 연결부터 시작하자. 루뻬!”

맨눈으로는 굵기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가느다란 실을 사용한다. 출혈을 방지하기 위해 치밀한 간격을 유지해야 하는 반면 혈전을 방지하기 위해 내부 통로가 좁아지면 안 된다.

수술 팀 전원에게 고도의 집중력과 인내력이 필요했다. 특히 타이를 담당하는 이혁원에겐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다.

김지훈의 눈이 번쩍였다.

손일석이 내내 예리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이혁원의 전신이 땀으로 젖었다.

시야를 확보하고, 거즈를 이용해 피를 제거해야 하는 나종진 역시 긴장을 풀지 못했다.

째깍! 째깍!

정맥에 이어 문맥이 이어졌다.

가장 가늘지만 가장 위험한 동맥이 연결됐다.

이혁원은 어떤 실수도 하지 않았다.

결과를 확인할 시점이었다.

“혈관 겸자 풀자.”

이혁원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동맥과 문맥의 혈류가 간으로 흘러 들어가 정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검붉었던 간이 차츰차츰 선홍색으로 물들었다.

심각한 출혈은 보이지 않았다.

원활한 혈류는 수술 후 혈전 발생의 위험을 상당 부분 줄였다는 의미였다.

이혁원이 김지훈을 보았다.

“담도 연결하자.”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째깍! 째깍!

“수처! 타이! 컷! 보비! 석션!”

시간은 쉼 없이 흘렀다.

수술 팀의 바쁜 손길도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담도까지 연결됐다.

마지막 확인만 남았다.

때론 수술 팀보다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진 참관 의사의 눈이 정확한 법이었다. 더욱이 이미 한 차례 값진 경험을 공유했다.

“손일석 선생, 어때 보여?”

“더 이상 손댈 부분은 없어 보인다.”

“오케이! 마무리하자.”

가뜩이나 마취 시간이 긴 수술이었다.

휴식을 취할 여유는 없었다.

“컷!”

드레인을 넣고 복부 봉합사를 모두 잘랐다.

두 번째 간 이식 수술이 끝났다.

이제야 김지훈이 허리를 폈다.

꼬박 열 시간 만이었다.

윤서연이 재빨리 이송 조치를 취했다.

“환자 옮겨도 됩니다.”

드르르륵!

둔중한 중환자실 베드가 거친 소리를 토했다.

중환자실이 부산해졌다.

“바이탈 체크하고, 흉부 엑스레이 연락합시다. 비지에이, 혈액 검사 빨리 내보냅시다.”

“김지훈 선생, 마취 깨워도 될까?”

“오케이!”

“컥! 컥!”

다행히 정재복 환자가 파이팅을 했다.

“환자분, 눈 떠 보세요. 환자분!”

이혁원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열한 시간째에 이른 시간은 환자에게 극심한 스트레스였다. 의식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후 안정할 수 있도록 즉시 조치를 취했다.

반면 의료진 누구도 긴장을 풀 때가 아니었다.

다급히 달려온 고경철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검사 결과 보자.”

“비지에이 정상적이고, 황달과 간 효소 수치는 약간 증가한 상태입니다.”

“흉부 사진은?”

“특별한 이상 없습니다.”

“드레인은?”

“약간 피가 섞이는 정도입니다.”

“공여자는 어때?”

“안정적입니다.”

“오늘 밤이 가장 중요하니까 킵 잘 서.”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다.

김지훈의 눈초리가 도리어 매서워졌다.

장미라 때와 모든 과정이 동일했지만 혼란스러운 감이 없지 않았다. 완벽하길 바라는 김지훈의 시각이라 해도 분명 만족스러운 대처도 아니었다.

때론 조그만 불씨가 큰 불길로 변할 수 있었다.

‘매번 담당 인력이 바뀐다면 실수가 나올 수밖에 없다. 마취과, 간호과, 수술 팀만이 아니라 방사선과까지 포함한 전담 파트가 필요해.’

그때그때 여건에 따라 시행하기에 간 이식은 너무 위험한 수술이었다. 두 번째 간 이식이 무사히 끝난 날, 확실한 체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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