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027화 (1,027/1,329)

13화

하루가 지났다.

중간에 방송국 인터뷰까지 잡혀 눈코 뜰 사이 없었다. 이젠 입원 환자도 상당하건만 오후 회진을 돌며 도리어 한가하고 여유롭다고 느낄 지경이었다.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장미라와 아이 아빠를 만났다. 수술 팀 전체가 주치의라는 생각으로 예의주시해 상당한 부담을 덜었다.

스스로 방심을 허락하지 않았고, 의료진 누구에게도 절대 금물이었다. 특히 경험이 부족한 의사에게는 적절한 주의와 경고를 잊지 말아야 했다.

“고경철, 네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점 잊지 마. 사소해 보여도 혼자 해결할 생각 하지 말고 즉시 노티해.”

마지막으로 정재복 환자를 찾았다.

상당한 긴장이 느껴졌다.

“다음 주 월요일에 수술하겠습니다. 아드님은 금요일에 입원하면 되고, 그때까지 몸 관리 철저히 하셔야 합니다.”

“죄송한데, 어제 수술한 아이와 아버지는 괜찮습니까?”

“다행히 별 탈 없지만 수술로 끝이 아닙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평생 이식한 간과 싸우셔야 합니다. 그런 각오로 수술받으셔야 합니다.”

“윤석진 선생님께 들었습니다.”

장미라보다 한결 수월한 수술이 될 테지만 간 이식 자체가 고도의 숙련도를 요구했다. 무엇보다 혈액형이 다르다는 점이 무척 마음에 걸렸지만 미국 의료계의 임상 경험과 판단이 허술할 리 없었다.

지금은 준비에 집중하는 것이 마땅했다.

“나종진 선생, 수요일, 금요일 오후에 정재복 환자 수술 논의할 거니까 수술 팀에게 알려. 이후 수혜자 수술에서 누가 퍼스트를 설지 모르니까 다들 간 이식 수술의 핵심을 차근차근 습득했으면 좋겠다.”

“혈관 수술까지 착실하게 들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수술보다 전문성을 요구하는 수술이 간 이식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다방면에 걸친 실력을 요구하기도 해.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전문의가 돼서야 펠로우 과정을 밟는 이치와 다르지 않았다. 세부 분야 간의 연계성이 높은 의학 자체의 특성상 더더욱 전반적인 이해와 지식을 요구했다.

나종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 수술만 해도 기존 수술 부위를 제거하고 소장을 다시 연결했다. 간담도 수술은 간 이식의 기본 중의 기본일 뿐이다.’

그간 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았지만 가면 갈수록 도리어 더 많은 노력과 인내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를 극복해야만 삶의 목표에 한 발짝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은 진행형이다.

씨줄 날줄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의학 또한 다르지 않아 어떤 환자의 수술과 치료도 단순히 써전 혹은 질환과 관련된 의사들의 손과 지식만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장미라에겐 의사와 가족의 격려 이상으로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다.

김지훈이 퇴근 후 정훈철을 만났다.

장미라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할 의무와 책임이 있었다. 진지하게 귀 기울여 설명을 듣던 정훈철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좋았어. 내 가족 일도 아닌데 이렇게 기쁜 소식을 듣기도 어려울 거야. 김 교수, 고맙다.”

“아직 안심하기 이릅니다.”

“무조건 잘된다고 본다. 두 번째 간 이식 수술 이후에도 한동안 취재하겠지만 다음 주에 첫 방송이 시작될 거야. 삼 부 작으로 결정됐고, 방송 내내 후원을 요청하기로 했어.”

“미라 가족 후원인가요?”

“희귀 질환 환아 후원까지 같이 진행할 생각이야. 많은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철저히 준비했으니까 좋은 결과가 있겠지. 김 교수도 인터뷰 때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마. 친근한 의사가 더 좋지 않겠어?”

“설마 인터뷰가 또 있나요?”

“췌장하고 원 포트인지 뭔지 하는 수술 홍보까지 우리가 합의한 조건 아니었나? 찍는 건 우리가 알아서 해도 표정 관리는 못해 준다. 그런 건 손일석 선생에게 배워라. 배워.”

‘나름 최선을 다해 웃은 건데.’

얼굴 벌게진 김지훈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정훈철을 보았다. 어느 분야에서나 성공의 발판이 되는 성실함과 노력으로 나이보다 빠르게 승진했을 것이다.

그뿐일까?

당연히 다른 사람보다 훨씬 강한 욕망과 야망을 가졌을 테고, 때론 비난과 욕까지 얻어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능 기부 아무나 하지 못한다.

타인을 위해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의 능력과 힘을 사용한다는 것만으로도 정훈철은 선한 사람이자 인생의 스승이었다.

“형님, 고맙습니다.”

“우리 사이에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수험생 둔 아빠는 늦게 들어가는 게 도와주는 거지만, 김 교수는 아니니까 빨리 먹고 가자.”

“집에서 눈치 많이 보이시나 봐요.”

“승희 얼굴 어두워지면 그냥 살얼음판으로 변해. 아주 상전이에요, 상전. 이제 초등학교 보내니까 남 일 같지? 김 교수도 머지않았다.”

투덜투덜 고3 수험생 아버지의 불평조차 유쾌한 자리였다.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여기저기 잔뜩 묻어 있기 때문이었다.

소주 한 병 탈탈 털어 비우고 집으로 향했다.

과자 한 아름, 과일 한 보따리 들고 들어갔다.

야단맞았다.

“당신, 술 취했죠?”

“딱 한 병 마셨는데.”

“취했네. 취했어. 가뜩이나 밥도 잘 안 먹는데 과자를 이렇게 많이 사 오면 어떻게 해요. 과일은 또 왜 이렇게 많아요? 이거 다 썩는단 말이에요.”

“매일 몇 개씩 먹으면 되죠.”

“저녁이나 꼬박꼬박 드세요. 안 되겠네. 제부가 과일 좋아하는데, 경희네 과일 좀 있나?”

“이걸 반으로 나누면 얼마나 된다고 그걸 줘요?”

“더 사야죠, 더. 버리는 것보다 낫잖아요.”

김지훈이 고개를 푹 숙였다.

다음에는 과일을 더 많이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취하면 술버릇 나오고, 대개 바보 된다.

빠듯한 용돈 잊었다.

쓸 돈 아껴 넌지시 쥐여 주며 화장품이라도 사라는 남편 싫어할 아내 없고, 굳이 손에 뭔가 들어야 한다면 거꾸로 적게 사면 될 것을 두고 말이다.

이런 맛에 산다.

남편은 실수 아닌 실수 되풀이하고, 아내는 잔소리하며 티격태격 사랑하는 것이 부부일 것이다. 그래서 미운 몇 살이라 불리다 상전으로 변하는 자식을 선물로 받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온전히 누리기에는 병원 상황이 엄중했다. 모든 직장이 다 그렇겠지만 뜻대로 되는 일도 많지 않다.

사람 몸은 기계가 아니다.

어떤 경과도 딱딱 맞아떨어질 수가 없었다.

장미라 역시 무수한 불안감을 안겼다.

특히 장기 이식 후 초급성 거부 반응의 발생 시점이 수술 직후부터 수일까지라는 사실이 피를 말렸다. 수일이 의미하는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었고, 그만큼 환자에 따라 다르다는 말이었다.

수시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간 기능 검사 괜찮지?”

“예. 황달 수치 정상적이고, 간 효소 수치도 점점 더 안정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드레인은?”

“약간씩 피가 묻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거부 반응의 징후는 물론 출혈과 혈전 발생 등 수술 후 합병증도 보이지 않았지만 초조하기만 한 하루하루가 지났다.

누구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일요일까지 별다른 증상을 보이지 않아야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다.’

정재복 환자의 수술을 일주일 후로 잡은 주요한 이유였다. 인원마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간 이식 수술을 연이어 벌였다간 문제만 초래할 수 있었다.

대처 불가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현재 외과 전체 역량을 따져 볼 때 일주일 간격도 무리일지 몰랐다. 장미라의 수술과 오래전 시행했던 수술을 두고 경험이라 할 수도 없었다. 하기에 정재복 환자 수술 준비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두 번의 수술 점검이 끝났다.

정재복 환자의 전신 상태는 나빠지지 않았고, 간을 공여하기로 한 아들도 입원했다. 이제 주말이 지나면 또 한 번의 긴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그 전에 첫 번째 간 이식 수술 환자들의 진행 경과를 확인하고, 미흡한 점이 있는지 빠짐없이 살펴야 했다.

김지훈이 장미라 아빠의 병실을 찾았다.

순조로운 경과를 보여 퇴원까지 바라보았다.

“퇴원 말씀은 없으셨나요?”

“다음 주에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미라는 언제 중환자실에서 올라올 수 있습니까?”

“그제 소변 줄 뺐고, 오늘 코 줄까지 뺄 생각입니다. 별다른 문제는 없지만, 초급성 거부 반응 여부를 확실하게 판정할 수 있는 이번 주말이 지나야 할 것 같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미라가 워낙 씩씩하게 잘 버텨 줘서 예정대로 올라올 수 있을 겁니다. 다른 걱정 마시고 아버님은 회복에만 신경 써 주세요.”

아이 아빠의 눈가가 붉어졌다.

수술 전에도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았건만 툭하면 보이는 눈물이었다. 이제야 딸의 건강한 모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절망했었을까?’

가슴이 먹먹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앞으로 수개월간 무리한 활동을 금해야 하겠지만 일상생활은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정훈철의 노력이 현실화된다면 경제적 부담도 한결 덜 것이다. 가난은 여전할지 몰라도 똑같은 아픔을 겪을 이유가 없었다.

김지훈이 병실을 나오자 아이 아빠가 따라나왔다.

“우리 미라 잘 부탁드립니다.”

목소리와 걸음에 힘이 실려 있었다.

환자의 의지만은 아니었다.

스승의 깔끔한 수술 솜씨에 감탄이 나올 뿐이었다. 그 탓에 해결 방안이 요원하기만 한 간 이식 수술 팀 문제가 또 떠올랐다.

수혜자 수술은 김지훈 자신이 전담하면 된다.

한동안 이준영 교수가 공여자 수술을 맡아 주겠지만 지속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체력 때문에라도 언젠가 일선에서 물러나야 할 때가 올 테고, 그 이후가 불투명했다. 여기에 췌장 복강경까지 병행해야 한다면 다른 수술에도 여파가 미칠 것이다.

외과 전체 균형이 어그러질 수도 있었다.

‘간을 절제하고 일주일에서 열흘 사이에 퇴원시킬 수 있다면 최상의 진행이다. 간암 분야와 공여자 수술을 동시에 맡을 사람이 필요한데 스승님은 누구를 생각하고 계실까? 일이 년으로 이런 실력을 쌓기가 불가능한 이상 지금부터 뒤를 이어야 할 써전을 키워야 한다. 후우! 원 포트와 췌장 라파로는 또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하지?’

펠로우들이 뇌리를 스쳤다.

기존 인력인 이상 세 명 모두 각자의 자리를 잡는다 해서 현재 상황이 극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신규 병원 인력 수급과 별도의 충원도 필요했다.

가급적 검증된 써전이어야 했다.

방안이 없지는 않았다.

본인은 물론 소속 병원의 동의가 필수였지만, 그 이상으로 세 개 병원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했다. 자칫 아랫돌 빼 윗돌 괴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어렵다, 어려워. 그래도 본인 의사 정도는 타진해 봐야겠지? 어후! 이러다 눈앞에 닥친 수술도 제대로 못하겠다. 고민은 다음 주로 미뤄 두자.’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털어 낸 김지훈이 중환자실로 향했다. 그토록 무서워했던 장미라가 열네 살 아이에 어울리지 않는 의젓함을 보였다.

한결 마음이 놓였다.

“미라야, 배 좀 볼까?”

커다란 절개 창은 평생 갖고 살아야겠지만 배 속은 잘 아물고 있었다. 장 소리는 정상적이었고, 드레인마저 깨끗해졌다.

먹은 게 없어 비록 소량이었지만 결정적으로 두 차례나 변을 보았다. 약간 푸르스름한 빛을 띠었던 첫 변과 달리 두 번째는 황금색으로 빛났다.

황금색 변!

건강한 사람은 당연하게 여기지만 간과 담도의 정상 기능을 의미하는 중요한 소견이었다. 담즙이 원활하게 배출돼 소장에서 잘 소화됐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차마 냄새까지 맡을 수 없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었다. 똥 보고 좋아할 의사는 아마도 일반외과 의사뿐일 것이다.

예정대로 코 줄을 뺐다.

캑캑 사레질을 하며 꽤 힘차게 진저리를 치는 모습에 도리어 웃음이 나왔다. 이제 주말만 잘 넘기면 물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먹을 수 있어요?”

“그럼.”

‘장을 안 잘랐으면 벌써 시작했지. 울지 않아 고맙다. 무사히 병실로 올라갈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게 해 줘서 정말 고맙다.’

쓰담쓰담!

장미라의 얼굴에 웃음이 감돌았다.

상당히 가벼운 마음으로 주말을 맞았다.

회의실로 향하던 김지훈이 눈가를 비볐다.

이번 집담회는 부교수라 해서 무사히 넘어갈 수 없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기분이 좋지 않네. 왠지 불길해.’

역시 남 일이 아니었다.

몇 년 만에 벌어진 수술인 데다 수혜자 수술의 특별함 때문인지 교수들 모두 피아를 가리지 않았다. 송곳 같은 질문에 펠로우에 이어 김지훈과 손일석마저 한 줌 재로 변했다.

앗, 뜨거!

앗, 따거!

써드를 섰다고 너털웃음이 귓가를 울리지 않을 리 없었다. 구석에 숨어 화살을 피하려던 송진우와 고경철까지 넉넉한 웃음 속에 활활 타들어 갔다.

김지훈이 납작 엎드렸다.

‘후배들 탈 때 너무 좋아했어.’

톡톡히 대가 치렀다.

간만에 등짝이 축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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