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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026화 (1,026/1,329)

12화

긴장을 풀 시기도 아니었다.

거부 반응 못지않은 치명적 합병증 역시 수일 내 발생한다. 완전할 수 없는 간 기능에 혈관을 세 개나 연결한 만큼 출혈과 혈전 발생의 위험이 컸다.

위안이라면 수술로 간을 살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최대한 조기에 잡아내 빠르게 대처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대안은 간단했다.

소중한 일 년 차에게 귀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미라가 중환자실에서 벗어날 때까지 킵해. 이준영 선생님과 오창도 선생님에겐 미리 말씀드렸으니까 넌 장미라만 봐. 죽을 것처럼 힘들면 펠로우 선생들에게 도움 청하고.”

“알겠습니다.”

깔끔한 대답이었다.

고경철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김지훈이 어제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어떤 의미인지 똑똑하게 알아들어야 했다.

전담 킵이라 함은 모든 면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는 야간에 환자 곁을 철저히 지키라는 말이었다. 다른 교수들에게 양해를 구했다는 말 또한 주간 근무 중 불가피한 상황에 국한된 경우였다.

기본 중의 기본인 입원 환자 치료와 수술 참가를 포함해 일 년 차가 해야 할 일이 사라질 리 만무했다. 전공의 막내에게 주어진 여유를 다 짜내 밀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모를 김지훈이 아니었다.

굳이 죽을 만큼이란 단서를 단 이유였다.

전설의 일복은 이미 현실로 변했다.

더욱이 장미라 상태를 한시도 놓쳐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잠도 요령껏 청해야 하는 이상 결국 침대에 누울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피할 수 없다면 도리어 덤벼야 한다.

강철 체력 또한 김지훈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매형, 설마 처남을 죽일 생각은 아니시겠죠? 절 믿기 때문에 킵을 시키시는 것이라 생각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러실 것이라 믿고 들어갑니다. 미라 확실하게 보겠습니다.’

각오를 다지는 순간!

“이혁원 선생, 이번 주에 미라 올라갈 수 있을까?”

“일주일은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다음 주에 정재복 환자 수술 있잖아. 중환자실에 간 이식 환자 두 명 두고 싶진 않은데 걱정이네.”

허억! 너무 과한 믿음이었다.

고경철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가가 까맣게 죽어 갔다.

최소 이 주 동안 킵 확정이었다.

고경철이 다급하게 물었다.

“선생님, 당직 때는 어떻게 하죠?”

김지훈이 전공의 때 어떻게 살았는지 숱하게 들었다. 부교수인 지금도 출근은 빠르고, 퇴근은 늦었다. 오직 환자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에 차마 오프 여부까지 물을 수 없었다.

부당한 요구가 절대 아닌데도 말이다.

“흐음! 다른 파트 전공의 선생들이 킵을 할 수는 없지. 이혁원 선생, 힘들겠지만 펠로우 선생들과 함께 오프까지 알아서 잘 조절해 줘. 시원찮으면 아예 킵도 시키지 마. 차라리 내가 설게.”

마지막 말이 더 무서웠다.

이혁원의 미소도 왠지 으스스했다.

“어떻게 선생님께 킵을 말씀드리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경철이 대신 킵을 세울 전공의도 없습니다. 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칭찬인지, 채찍인지 모를 일이었다.

설마 전공의 인원이 너무 적다는 소리일까?

‘어차피 서야 한다면 내가 먼저 치고 나가자. 오프 그까짓 거……. 어후! 내가 왜 이러지?’

표정 관리에 실패한 고경철이 우물쭈물 머뭇거리는 순간 장미라가 파이팅을 시작했다.

안정제 효과가 사라졌다.

점점 격렬하게 반응했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자발 호흡과 인공호흡이 충돌하며 산소 포화도가 널뛰었다.

삐익! 삐익! 삐익!

요란한 경고음이 중환자실을 울렸다.

“고경철 선생, 튜브 빼자.”

“예. 제거하겠습니다.”

튜브 내부와 입 안을 석션해 가래 등 호흡을 방해할 만한 요소를 모두 제거한 고경철이 튜브를 뺐다. 오더를 내기도 전에 동공반사를 확인한 후 동맥피를 뽑아 비지에이(동맥혈 가스 분석)를 내보냈다.

“한 시간 후 흉부 촬영 예약해 주세요. 미라야, 나 알아보겠니? 여기가 어딘지 알아?”

잠시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중환… 자실…….”

탁한 목소리가 터졌다.

몇 가지 질문을 던져 의식 상태를 확인한 고경철이 김지훈을 보았다.

“선생님, 멘탈 명료합니다. 결박 풀어도 될 것 같습니다. 한 시간 후 비지에이 다시 내보내겠습니다.”

‘기본을 아주 잘 배웠네.’

정확하게 대처하는 고경철과 힘차게 반응하는 장미라 모두 표현하기 힘든 기쁨이었다. 김지훈이 절로 입가에 걸리는 흡족한 미소를 감추며 장미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작은 뺨을 따라 주루룩 눈물이 흘렀다.

통증인지, 무서움인지, 익숙한 얼굴이 주는 안도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장미라의 눈동자에 김지훈이 비쳤다.

조그만 입술이 열렸다.

“선생님!”

단지 불러 주었을 뿐인데 가슴이 턱 막혔다.

열네 살 아이의 생명력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할 수 있는 말은 단 한 가지였다.

“미라야, 잘 버텨 줘서 고맙다.”

김지훈이 앙상한 팔을 잡으며 천천히 대화를 이어 나갔다. 견디기 힘들 복통을 해결하고, 의식이 완전히 명료해지길 기다렸다.

마음의 안정만큼 회복에 필요한 요소도 없었다.

“엄마 봐야지?”

특별 면회를 허락했다.

엉엉 서러운 울음이 터지고도 남았지만 배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제대로 울지도 못했다.

“엄마! 엄마!”

“우리 딸, 괜찮아. 미라야, 괜찮아. 엄마 여기 있어.”

붉어진 눈가가 촉촉이 젖어 갔다.

조용히 지켜보던 김지훈이 엄마와 딸의 시간을 이혁원에게 맡겼다. 추가로 시행된 비지에이와 흉부 촬영까지 확인하고 회진을 돌았다.

날이 밝았다.

당연히 고경철이 앞장섰다.

미처 환자를 파악하지 못해 회진 내내 김지훈의 살벌한 눈초리를 감수해야 했다. 킵은 업무 중 하나일 뿐이라는 눈빛이었다.

“똑바로 하자.”

준엄한 경고에 식은땀을 쭉쭉 흘렸다.

미라 아빠를 찾았다.

마침 이준영 교수가 송진우와 회진 중이었다.

평소 말투, 얼굴과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환자와 대화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미라 상태를 물었다. 마치 전공의처럼 자세하게 보고하는 김지훈을 본 고경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노티하시네. 환자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알려 주시는 걸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간이 아니라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는 아빠의 눈빛은 누구도 외면할 수 없다. 자신보다 더 소중한 딸의 상태를 들려주기 위함이었다.

물론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다.

더욱이 각각 공여자, 수혜자 수술을 했다. 적어도 이번 수술에 있어서는 한 팀이기에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마땅했다.

“킵은 누가 하기로 했어?”

“고경철 선생이 맡았습니다.”

이준영 교수의 눈길이 스윽 고경철을 스쳤다.

화끈!

김지훈보다 더 무서운 이준영 교수까지 관심을 두다니 이제 어디에도 도망갈 구멍이 없었다. 아직도 외과 의사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와 함께 수련했다는 특별한 의미까지 다가왔다.

“환자분 상태가 좋아 다행입니다.”

“기본적인 체력이 강한 분이야. 안심하기 이르지만 아빠와 딸 모두 문제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이마에 땀까지 맺힌 고경철은 본체만체 아름답고 부드러운 대화가 스테이션까지 이어졌다.

손일석이 송재덕 교수, 신기동 교수와 함께 미소를 머금은 채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몸이 뻐근한지 연거푸 목을 돌리긴 했다.

“열 시 넘어 퇴근했다고? 어제 병원에서 살았구나. 살았어. 힘들었겠다. 혈관 어땠니? 혈관.”

“스승님께서 친히 그간의 노하우를 전해 주신 덕분에 도리어 제일 무난했습니다. 유착이 심해서 김 교수가 제일 고생했습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스승이란 말을 천연덕스럽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손일석이 유일할 것이다. 그런데 정색하고도 남을 신기동 교수 역시 별다른 말이 없었다.

김지훈의 한쪽 눈이 찌그러졌다.

‘언제부터 대놓고 스승님이라고 불렀지? 이상할 정도로 어색하지가 않아. 나도 해 볼까? 아니야. 낯간지럽다. 참자.’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이 무뚝뚝하게 듣고 있는 이준영 교수의 눈치를 슬쩍 보긴 했다.

“그랬구나. 그랬어. 현수는 간 옮기고, 경석이는 대신 당직 서 주고 다들 수고했다. 수고했어. 아이하고 아빠는 괜찮겠지? 그치?”

“불가피한 합병증이 걱정되지만, 이혁원 선생이 경철이와 밤새 킵했는데 다른 문제가 있겠습니까? 아이 아빠도 나종진 선생이 수시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생이 많구나. 많아. 사람이 더 필요해. 김 교수하고 너희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니까 이젠 감당할 수가 없어. 더 뽑아야겠지? 그치? 내 말이 맞지?”

“원장님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관철하셔야죠. 힘들어서가 아니라 저희 넷은 언제 어디에서나 무조건 원장님 뜻을 따라갑니다. 감사합니다.”

‘어후! 점점 더 뻔뻔해지네. 아부야? 완벽한 동의야?’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던 김지훈이 이내 콧등을 찡그렸다. 최근 들어 유난히 아부성 발언을 마구 날리는 손일석과 신규 병원 발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송재덕 교수, 신기동 교수의 마음이 어떨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가슴이 시렸다.

한 사람 보내는 일도 이렇게 힘든데 신현수와 또 다른 누군가까지 간다면 한동안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릴 것 같았다.

‘후우!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자. 손일석, 최연소 과장 자리 꿰찬 거 미리 축하한다.’

“김 교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니? 나도 좀 알자. 뭐야? 뭐?”

김지훈이 급히 표정을 바꿨다.

한두 살 먹은 아이도 아닌데 너무 민감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사자가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친구로서 최소한 웃음은 잃지 말아야 했다.

“인원 더 뽑아 주십시오. 저도 무조건 원장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래. 그래. 열심히 하는 사람 못 밀어주면 원장 자리가 무슨 소용이겠니? 너희들이 잘돼야 내 체면이 서는 거야. 내 체면이. 이 교수, 신 교수, 안 그래?”

이준영 교수가 휙 수술 방으로 향했다.

“원장님, 늦었습니다.”

“야야! 어디 가. 같이 가자. 같이 가. 나도 일 많아.”

김지훈과 손일석도 외래로 달렸다.

오늘도 바쁜 하루가 이어질 것이다.

외래 진료를 앞둔 김지훈이 크게 기지개를 폈다.

아무래도 잠이 부족했다.

열두 시간 가까운 수술의 여파가 만만치 않았다.

지난밤 이혁원이 장미라를 본 덕에 한결 피곤을 덜어야 했을 나종진과 송진우도 평소보다 말수가 줄어들었다. 하품이 터질 때마다 눈물 한 방울이 맺혔다.

건성건성 진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매 환자 최선을 다해야 했다.

어떤 수술이건 중요하지 않은 수술은 없었다. 원 포트의 기반이자 간 이식 수술 준비의 기본인 초음파 역시 마찬가지였다.

불행히도 의학에 지름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피땀 어린 노력을 통해 얻은 지식과 경험만이 실력을 보장했고, 그것이 환자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었다.

김지훈이 딱딱 손뼉을 쳤다.

“환자 봅시다.”

이번 주 함께할 펠로우는 나종진이었다.

두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김지훈만 한 롤 모델도 없었다.

비록 수혜자 수술에 참가는 못했지만 장미라 수술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누군가 멀찍이 앞서 있다는 사실이 불행하거나 불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런 차이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다면 오히려 도전과 성취라는 달콤한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써전으로서, 의사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과 원칙을 잊지 않고 오직 한 길만 꾸준히 달리셨기 때문이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진료가 시작됐다.

원 포트만으로도 수술 예약이 밀릴 정도였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했다.

보다 확실하고 안전한 치료를 원하는 환자들 사이의 입소문 무시하지 못했다. 연줄 연줄로 소식을 접한 의사들의 호응 또한 큰 도움이 됐다.

한편으로 걱정이 앞섰다.

‘원 포트 수술 환자가 예상외로 빠르게 늘고 있지만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 하지만 췌장과 간 이식은 다르다. 활성화되기도 전에 인원 부족이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

췌장 복강경이나 간 이식처럼 차원이 다른 수술은 통상적 수술보다 몇 배의 인력과 자원을 요구했다. 그렇다고 이준영 교수와 오창도 교수의 분야를 축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전담 파트를 만드는 것이 마땅했다.

단순히 이름 하나 내거는 일이 아니었다.

관건은 역시 교수를 포함해 의료진 전체 자원의 확충이었다. 신규 병원 의료진 확보와 겹쳐 결코 쉽지 않은 과제가 될 것이다.

결국 투자가 선행돼야 해결 가능했지만 병원의 여력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었다. 재단 또한 불확실한 미래에 선뜻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김지훈이 혀를 찼다.

‘환자 확보와 수술 팀 확보라!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도 아닌데 골치 아프네.’

바빠질수록 고민도 깊어졌다.

현실과 적절한 타협이 필요한지도 몰랐다.

이래저래 골치 아픈 나날이었다.

환자가 주는 보람이 아니었다면 의사라는 직업 자체가 그리 좋지만은 않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도 이만한 삶은 없었다.

어느 누가 배운 지식만으로 타인의 생을 되살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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