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025화 (1,025/1,329)

11화

김진호 교수가 최종 결정을 내렸다.

“김 교수, 마취에서 잘 깨긴 했는데 시간이 너무 늦어 불안하다. 내일 아침까지 기관 내 삽관 유지하고 오늘 밤은 재우는 게 좋겠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모두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노련한 마취과 교수의 판단이었다. 원칙을 따른 진행인 데다 마취에서 무사히 깼다는 소리만으로도 기뻤다.

장미라의 고통 호소가 점점 격해졌다.

김지훈을 보며 손까지 떨었다.

“미라야, 잘했다.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송진우 선생, 다른 문제는 없지?”

“예. 안정적입니다.”

소량의 안정제가 투입됐다.

이내 잠잠해진 장미라가 고른 숨을 내쉬었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가슴이 안정적이었다.

약간의 여유를 찾았다.

“잠결에 튜브를 뺄 수 있으니까 팔다리 묶자. 엄마는 튜브와 결박 모두 제거한 후에 미라 볼 수 있도록 조치해. 아이 아빠 상태는 어떤지 모르겠네.”

그때 아주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수술 팀 모두 일제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심지어 김진호 교수까지 말이다.

“어? 스승……. 선생님, 아직 퇴근 안 하셨습니까?”

“일이 있어서 아직 못했다. 아이 아버님 상태는 괜찮아. 이혁원 선생, 미라는 어때?”

이혁원이 현재 상태를 상세히 설명했다.

이준영 교수가 윤석진과도 대화를 나누며 한동안 자리를 지켰다. 수술 팀 전원이 열두 시간 넘도록 제대로 앉지도 못했다.

피로가 극에 달할 시간이었다.

장미라 상태를 다시 한 번 확인한 김진호 교수가 씨익 웃으며 다가갔다.

“선생님, 벌써 아홉 시가 넘었습니다. 요새 흉부외과 수술이 뜸해서 간만에 열두 시간짜리 수술 마취했더니 저도 몹시 피곤하네요.”

“교대는 왜 안 했어? 고생했어.”

“마취도 간단한 것만 하다 보면 감이 떨어집니다. 가끔 이런 날도 있어야죠. 수술 정말 잘됐고, 아이 상태도 좋습니다. 여긴 김 교수에게 맡기고 퇴근하시죠. 다들 쟁쟁한 써전인데 윗사람 많아야 좋을 일 없지 않습니까?”

말투가 묘했다.

있어야 부담만 된다는 소리였다.

“나도?”

“수술 중에 몇 번이나 오셔서 보는 건 좋은데, 왜 창밖에서 보셨습니까? 부담 주기 싫어서 그러신 것 아니에요? 저하고 함께 가시죠.”

능글능글 김진호 교수 공력 무척 세졌다.

이준영 교수가 헛기침을 하며 돌아섰다.

“수술 팀 모두 수고했고, 잘했다. 김 교수, 고생했어.”

칭찬에 정말 인색한 사람의 말이었다.

중간중간 들여다봤다는 소리는 장미라와 수술 팀에게 얼마나 관심을 두고 있는지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퇴근을 미뤘을 것이다.

다들 입이 쭉 찢어졌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준영 교수와 김진호 교수가 나가자 윤석진이 하루 종일 매고 있던 넥타이를 풀었다. 뒤늦게 들어온 손일석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석아, 이준영 선생님은 아무리 봐도 긴장을 풀 수가 없어. 매일 봐야 하는 너희들은 어떻게 사냐?”

“적응하기 힘들긴 해. 그보다 김진호 선생님! 멋지네. 오늘 다시 봤어. 남들 다 하는 교대도 안 하시고, 천하의 이준영 선생님 앞에서 조금도 주눅 들지 않다니 존경할 선생님 목록에 한 명 추가해야겠다. 송재덕 선생님이 안 보이시니까 왜 이리 섭섭하냐? 잘했다 소리 열 번 이상 반복하셔도 되는데.”

다들 수술 내내 지속됐던 긴장에서 벗어났다.

김지훈이 이제야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준영 교수, 손일석, 이혁원, 송진우, 김진호 교수와 마취과, 고경아와 또 한 명의 간호사, 윤석진, 지금도 부산하게 움직이는 중환자실 간호사까지 그들이 있어 장미라를 앞에 두고 웃을 수 있었다.

수술은 결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다. 최고의 수술 팀을 비롯해 이들을 지원하고, 협력하는 의료진 전체의 힘이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오늘 함께 수술하며 도와준 분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온몸이 슬슬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린 탓일 것이다.

파김치가 되기 전에 아이 엄마를 찾았다.

카메라 불빛이 유난히 눈부셨다.

낯익은 얼굴을 지나칠 수 없었다.

“아직 퇴근 안 하셨네요. 저녁은 드셨습니까?”

“먹어야죠. 수술이 언제 끝나는지 정확하게 몰라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수술 후 보호자분도 만나야 하고요. 수고하셨습니다.”

‘방송국 사람들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묘하네. 후우! 방송국도 결코 편한 직장이 아니구나.’

아이 엄마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선생님! 미라는요?”

“안정을 위해 일단 재웠습니다. 수술 잘됐고, 아이 상태도 좋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선생님들이 오늘 밤 내내 지켜볼 겁니다.”

“우리 딸 살 수 있는 거죠?”

왜 이리 마음이 아플까?

김지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넘어야 할 고비가 수없이 남았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다. 아빠의 간이 자식의 목숨을 지켜 주기를, 엄마의 눈물이 자식의 웃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의학의 한계는 명확했다.

의료진의 노력이 기적까지 만들지 못한다.

어쩌면 신의 배려가 필요한지도 몰랐다.

살 수 있다는 단순한 고갯짓일 뿐이었다.

온몸에 맥이 풀린 아이 엄마가 털썩 주저앉았다.

“우리 딸!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서럽게 울었다.

십사 년간 응어리진 아픔이었다.

딸자식 하나 제대로 보살필 수 없었던 가난과 돌덩이처럼 가슴을 짓눌렀던 자책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천 마디의 말로도 위로가 되지 못할 것이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 지나서야 눈물이 멈췄다.

“어머님, 지금은 아버님 곁을 지켜 주세요. 많이 힘드실 겁니다.”

눈가를 훔친 아이 엄마가 신음과도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엄마이자 아내이자 이젠 가장이기에 어깨에 짊어져야 할 무게를 느낀 것 같았다.

병실을 찾았다.

밀린 일을 해결하던 고경철이 다급히 달려와 앞장섰다. 하루 종일 수술 방에서 산 김지훈과 별반 다른 모습이 아니었다.

사아아아!

분무기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물방울 사이로 코에 산소 줄을 꽂은 아이 아빠가 보였다. 결코 작지 않은 절개 창이 전하는 고통이 상당할 것이다.

다행히 무통 치료와 추가된 진통제 덕에 잠에 빠져 있었다. 어쩌면 손 하나 까딱일 힘이 없어 눈조차 뜨지 못하는지도 몰랐다.

“고경철 선생, 환자분 어때?”

“바이탈 안정적이고, 드레인도 괜찮습니다.”

병실을 나왔다.

아이 엄마와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소리 내 흘린 눈물 덕분인지 두려움에서 벗어나 상당히 침착하게 들었다. 할 일 많은 고경철이 옆에 서 있건만 김지훈은 일 보라는 소리조차 하지 않았다.

‘치료만이 아니라 환자, 보호자와 나누는 말에도 배울 것이 정말 많아. 잘 들어.’

“어머님이 힘을 내셔야 합니다.”

“고맙습니다.”

어느새 열 시가 넘었다.

스테이션으로 돌아온 김지훈이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살벌한 한마디를 던졌다.

“고경철, 미라가 중환자실 벗어날 때까지 잘 봐.”

“예.”

고경철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매일매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이는 상황에서 최소 사오 일 이상 킵(Keep)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교수인 김지훈도 단 하나의 수술 때문에 출근 후 무려 열네 시간이 지나도록 퇴근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써전이 넷이었다.

아니, 이준영 교수까지 다섯이었다.

정교수, 부교수, 조교수, 펠로우까지 이렇게 사는데 전공의 일 년 차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남들이 다 기피하는 과를 택한 결과였지만 그런 모습에 반해 일반외과를 선택했다.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 절대 쉽고 가벼울 리 없었다.

고경철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아무리 열악하고, 심지어 부당하다 해도 환자가 있는 이상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러나 지속될 수 없는 근무 방식임은 분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폐해가 눈에 보일 것이다.

이미 절감하고 있었다.

개선되지 않는다면 언젠가 행동해야 할 것이다.

‘내 권리는 누구도 대신 찾아 주지 않는다. 전공의 협의회 일도 열심히 하자.’

돌연 찾아온 생각의 비약에 몸을 떨던 고경철이 화들짝 놀라 잰 발걸음을 놀렸다.

중환자실!

응급실과 더불어 절대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더구나 까마득한 선배인 이혁원과 송진우가 아직도 환자 곁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삐끗하는 순간 활활 타 죽을 수밖에 없었다.

터벅! 터벅!

밤공기가 제법 상쾌했다.

귀국 후 첫 간 이식 수술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이 나른하게 전해졌다. 아이 엄마의 눈물은 그 이상의 슬픔이기도 했다.

기쁜 듯 가슴 아린 듯!

묘한 감정에 휩싸인 김지훈이 돌연 웃었다.

최악의 상황에 처한 환자와 가족을 만났다.

의료진과 정훈철이 최선을 다했다.

비록 마지막 결과를 장담할 수 없지만 극도로 어려운 수술을 무사히 마쳤다.

스승의 칭찬까지 받았다.

기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불끈 쥔 주먹을 휘두르던 김지훈이 갑자기 멈칫거렸다.

빤히 중환자실 앞에서 카메라를 보았으면서도 정훈철을 잊었다. 허겁지겁 휴대폰을 확인하다 말고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부재중 전화(7)!

으아악! 형님!

(야! 김 교수, 수술 아까 끝났다며…….)

“형님, 그게 아니고 간 이식 수술 특성상…….”

주절주절! 안절부절!

휘리릭! 카르페 디엠이 멀리 사라졌다.

그래도 좋았다.

수술은 성공했고, 지대한 공헌을 한 정훈철은 대접받고도 남을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

***

새날이 밝았다.

김지훈이 아침 일찍 중환자실을 찾았다.

인위적 잠에 빠진 장미라의 호흡이 안정적이었고, 바이탈도 흔들리지 않았다. 밤새 곁을 지켰을 고경철이 이미 검사 결과를 챙기고 있었다.

졸음기를 간신히 지운 이혁원이 당직실에서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이혁원 선생, 잠은 가급적 집에서 자. 쪽잠은 아무리 자도 피곤하잖아. 당직 인턴이 욕하겠다.”

“베드가 두 개라서 괜찮습니다. 일찍 나오셨네요.”

“그렇게 됐네. 일 년 차 킵이라 불안하겠지만 확실하게 가르쳐서 앞으로는 일찍 퇴근해.”

멋쩍게 웃는 이혁원을 보는 김지훈의 눈빛이 좋지만은 않았다. 윗사람 입장에서야 더없이 든든한 일이었지만 전공의를 포함한 외과 요원 부족이 점점 피부로 와닿고 있었다.

‘뇌사자 간 이식도 최소 여섯 명 이상이 있어야 수술 후 치료까지 감당할 수 있는데 앞으로가 걱정이네. 올해 안에 충분한 인원 확보를 요청해야겠다.’

외과의 인원 부족은 이미 고질적인 문제였다.

단 두 건의 간 이식 수술로 당장 활성화되진 않겠지만 췌장 복강경까지 생각하면 더 늦기 전에 준비해야 했다. 정원을 크게 밑도는 전공의부터 점점 과중한 일에 시달리는 펠로우까지 특단의 대책이 요구됐다.

‘어떻게 하면 우리 과를 원하게 할 수 있을까?’

최근 들어 부쩍 잦아지는 생각이자 불안이었다.

고민하기 적절한 때와 장소가 아니었다.

장미라의 싸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집중해야 했다.

무엇보다 혈액 검사 결과가 궁금했다.

가장 두려운 합병증은 초급성 거부 반응이었다.

수술 직후부터 수일 내에 발생하며, 일단 시작되면 면역억제제를 충격에 가까울 정도로 대량 투여해도 멈추지 않는다. 혈장 치환술 등 몇몇 방법을 시도하긴 하지만 어떤 치료 방법도 효과가 없었다.

이식된 간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기 자신의 간이 모두 제거된 장미라의 남은 생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첫 번째 객관적 징후는 황달과 간 효소의 치솟는 수치였다. 열, 구역, 구토 등을 호소하지만, 큰 수술을 받은 환자에겐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기에 확실한 감별이 필요했다.

“경철아, 검사 결과 보자.”

흉부 사진은 깨끗했다.

혈액 검사 수치를 확인했다.

간 효소와 황달 수치가 살짝 증가했지만 다른 환자에게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급격히 증가하는 수치의 변화가 훨씬 더 중요했다.

김지훈이 전공의 환자 기록을 뒤적이며 물었다.

‘자식! 핵심적인 부분을 잘 짚어서 깔끔하게 정리했네. 이제 일 년 차 티가 팍팍 나는구나.’

“오후에 다시 검사 내보내. 밤새 어땠어?”

“중간에 파이팅을 해 안정제 한 번 더 투여했습니다. 소변 잘 나왔고, 드레인에 살짝 피가 섞이는 정도입니다.”

“튜브가 불편하다고 싸웠단 말이지. 괜찮네. 잠에서 깨는 대로 멘탈 확인하고, 튜브 빼자.”

수술이 끝난 후 의료진에게 주어진 일은 환자의 싸움을 같이하는 것이다. 장미라는 결코 자신의 생과 삶을 포기하지 않을 아이였다.

김지훈의 긴장이 오히려 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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