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차근차근 준비에 몰두하는 사이 오매불망 기다리던 소식이 전해졌다.
드디어 이사회 결정이 떨어졌다.
돈 문제라는 의료진에게 하등 필요하지 않은 고민을 지우고 장미라를 수술할 수 있게 됐다.
최종 결정을 기다리는 사람이 또 있었다.
연락을 받은 정훈철이 크게 기뻐했다.
(오늘 바로 촬영 팀 보낼 거야. 최대한 주의하겠지만 촬영 장소가 많아서 병원 진료에 불편을 끼칠 수도 있으니까 미리 잘 말해 줘.)
“걱정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기 무섭게 달려왔다고 느낄 정도로 촬영 팀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장미라의 가족.
정재복 환자.
원 포트 수술이 벌어지는 수술실.
췌장 복강경 수술을 받은 최인선 환자에 이미 퇴원한 허진아 환자까지 모두 취재 대상이었다.
“야! 이거 부담되네.”
“TV에 처음 얼굴 비치는 것도 아닌 사람이 무슨 엄살이야? 이참에 나도 얼굴 좀 알려 보자. 자연스럽게 행동해. 그래야 클로즈업 될 거 아니야?”
손일석은 카메라가 보일 때마다 신이 났고, 신현수는 의료진과 환자들의 불편을 최소화할 촬영 팀의 동선을 짜느라 골치를 썩었다. 의사에게도 끼와 다재다능한 능력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수시로 촬영하겠지만 24시간 상주할 리 없었다. 눈을 부시게 하는 불빛, 불쑥불쑥 나타나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들이 사라지며 다소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진정됐다.
마침 일과도 끝났다.
문 사이로 비치는 불빛에 공동 연구실을 찾은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장 바쁘게 움직여 이젠 한시름 놓았어야 할 신현수의 표정 어딘가 그늘이 보였다.
“다 해결됐는데 얼굴이 왜 그래? 내가 모르는 걱정거리라도 있어?”
“별일 아니긴 한데 이상하게 신경 쓰이네.”
“뭐가?”
“이사장님이 이사회를 정식으로 연 것도 의외지만 열한 명 모두 동의했다는 게 더 이상해. 신기할 정도야.”
의아한 일이었다.
“좋은 일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데 이사회 내부 사정이 복잡해. 장인어른 돌아가시고 나서 처갓집 지분 대부분이 다른 사람한테 넘어갔거든. 교육자 집안도 아니고, 중견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이야.”
유학 중 일이었다.
위암으로 위를 모두 절제했던 고인이 큰 고통 없이 생을 마무리했기를 바랄 뿐이었다.
“서연이 가족이 물려받은 게 아니고?”
“신규 병원 건립에 꽤 많은 돈이 필요해. 은행 대출로 부족한 데다 법적으로 투자 자체가 불법이야. 지분 조정으로 상당 부분 조달할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비영리 법인이라고 해도 이사들에게 경제적 이득이 없다는 소리는 아니야. 돈에 민감한 사람이 분명히 있고, 이해관계에 따라 편이 갈릴 수밖에 없어. 이번 일 역시 최소 다섯 명은 반대해 간신히 통과될 줄 알았는데 의외야.”
“이사장님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잖아. 우리 병원을 이만큼 키우셨는데 함부로 반대하기 힘들지 않겠어? 그리고 재단 지분을 가진 이상 병원이 어떤 시설인지 생각하겠지.”
신현수가 얼굴을 펴지 못했다.
공익 성격을 가진 재단 모두 본래의 의미대로 운영되길 바라는 것 자체가 이상일지도 몰랐다. 많은 사람이 소신을 갖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만 편법과 불법 또한 적지 않았다. 심지어 재산 상속 수단으로 악용하는 사례가 종종 보일 정도였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연못을 온통 흙탕물로 만든다는 속담은 어디에나 통용되는 말이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우리 과 업무에 재단 일까지 너도 참 힘들겠다. 도와주고 싶은데 능력이 없어 미안하다.”
“병원도 사회적 책임감만으로는 운영할 수 없는 세상이야. 신규 병원 건립 비용도 어마어마한데 기존 병원까지 적자가 발생하면 나도 자리 잡기 힘들고, 이사장님 입지마저 흔들릴 수밖에 없어. 넌 간담췌 파트에만 집중해. 그게 도와주는 거야.”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억대에 달하는 치료 비용 때문에 많은 사실을 알고 깨달았다. 비록 도울 방법은 없었지만 신현수처럼 행정적인 일까지 신경 쓰는 의료진이 있어 남은 의료진 모두 마음 놓고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고맙다.”
“뭐가?”
“이것저것 다 네 덕분이잖아.”
“알면 잘해.”
피식 둘 다 웃고 말았다.
어떤 일을 하든 본분은 의사다.
개인적 시간을 소모하면서까지 동분서주했던 이유도 환자 때문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 건강을 되찾아 주고, 생을 영위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의사라는 직업에 강한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결과를 확신하기 힘든 새로운 시도, 환자의 목숨을 장담하기 어려운 수술까지 마다하지 않은 이유 역시 멀리 있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는 일만 남았다.
매일매일 밀려오는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면 된다.
***
장미라 수술 날짜가 일주일 후로 잡혔다.
정재복 환자는 일주일 간격을 두고 수술하게 될 것이다. 초조할 수 있지만 두 번째 수술이라는 점이 주는 이득을 생각하면 불리한 일도 아니었다.
퍼스트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펠로우들과 이미 확정된 수술 팀원 모두 최선을 다해 수술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김지훈은 눈코 뜰 새도 없었다.
최소 열 시간 이상 걸리는 수술을 앞뒀다고 기존 진료와 수술이 줄어들 리 없었다. 원 포트 교육과 맞물려 어느 하나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다행이라면 장미라 수술 날에 맞춰 무리 없이 수술 예약을 조절했다는 사실이었다. 하루 전 진료 인원도 줄여 넉넉한 시간마저 확보했다.
‘일단 마지막 점검을 더욱 철저히 할 수 있겠어.’
생체 간 이식은 절대 단순한 수술이 아니었다.
수술을 받아야 하는 사람만 넷이다.
전후로 점검해야 할 부분도 상당해 내과와의 협진이 필수적이었고, 장미라는 소아과와도 협의를 거듭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윤석진이 아니었으면 온갖 어려움에 봉착했을 것이다.
의미까지 남달라 최대한 마음 편한 상태에서 집중해야 했다. 기존 입원 환자 문제부터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대표적으로 최인선 환자 치료가 시급했다.
수술 부위는 기대한 대로 순조로운 회복을 보였다. 밥을 먹은 지 여러 날이 지나도록 복통의 정도와 빈도는 늘지 않았고, 드레인도 깨끗해 며칠 전 제거할 수 있었다.
놀라운 경과였다.
복강경 수술의 이점을 또 한 번 증명했다.
엄청난 위험 부담을 안고 시행한 수술인 만큼 수술 팀의 기쁨도 남달랐다. 다른 환자 같았으면 축하의 말을 들으며 벌써 퇴원이 결정됐을 것이다. 그러나 의료진의 발목을 잡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수술을 통해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만성 췌장염의 통증과 마약성 진통제가 아니면 통증을 조절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투여하는 양이 하루 한두 차례로 줄었다 해도 데메롤을 맞아야 한다면 병원을 벗어날 수가 없다. 결국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하긴 매한가지였다.
대안이 필요했다.
정맥 투여보다 진통 작용이 현저하게 떨어지지만 옥시코돈 등의 경구용 마약성 진통제가 효과가 있기만을 바랐다. 무엇보다 환자의 의지가 그 이상으로 필요했다.
데메롤 주사를 금지한 지 오 일째 되는 날, 김지훈이 최인선 환자를 찾았다.
이를 악문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신음 소리가 이빨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창백한 손이 달달 떨렸다.
전형적인 금단증상이었다.
김지훈이 답답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환자분, 이겨 낼 수 있겠습니까?”
“끄으으! 이겨 내겠습니다.”
의지를 잃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머릿속이 온통 데메롤 생각으로 꽉 차 있을 환자의 관심을 돌려야 했다.
“어제오늘 몇 차례나 이런 증상을 보였습니까?”
“두 번으로 줄었습니다.”
“빈도가 줄어 정말 다행이네요. 옥시코돈의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까?”
“도움이 됩니다. 지금도 약이 아니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이 와중에 또박또박 말을 했다.
참을 수 없는 갈망과 유혹으로 가득 찬 눈 깊숙한 곳에 강한 의지의 빛이 반짝였다. 금단증상에서 벗어날 길이 요원해 보였지만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어차피 더 이상 할 수 있는 치료가 없고, 이 정도 의지면 곧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순간 퇴원이 머릿속을 스쳤다.
반면 마약의 무서움 역시 절대 간과할 수 없었다. 동료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 의사였던 정갑수의 끝이 어땠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했다.
‘스스로 데메롤을 찾은 사람과 조절되지 않은 통증 때문에 맞아야만 한 사람의 차이가 있을까? 중독 증상을 보인다면 어차피 마찬가지겠지? 후우! 그렇다고 마냥 붙잡고 있는 것이 해결책도 아니잖아.’
복잡해지는 생각에 잠시 머뭇거리자 최인선 환자가 나직한 신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선생님, 만약 데메롤 중독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퇴원이 가능한 상태입니까?”
“예. 가능합니다.”
“그럼 퇴원시켜 주십시오.”
“이 상태로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퇴원하고자 하는 의도마저 의심스러웠다.
수술 전 만성 췌장염으로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데메롤을 맞았을 것이다. 병원 간 정보 공유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각 병원의 투여 횟수가 많지 않았다면 의료진의 경각심도 희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의지가 무너지는 순간 몸이 원하는 욕구를 채우고도 남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기억과 갈망을 따라 엄격하게 통제된 상황을 벗어나 다른 병원에서 데메롤을 맞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췌장염의 고통이 어떤지 잘 아는 의료진의 연민을 기대하며 말이다.
다시 물어야 했다.
“스스로 퇴원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데메롤이 있다는 사실이 저를 더욱 힘들게 만듭니다. 어차피 금단증상을 치료할 방법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지켜야 할 선을 단 한 번이라도 넘으면 그간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다른 병원도 결코 저를 반기지 않을 겁니다. 통증을 핑계로 대지만 데메롤 중독자의 행패가 말도 아니거든요. 제 얼굴을 보자마자 쫓아낼 겁니다.”
간혹 보는 일이었다.
추측과 전혀 다른 의도에 안도할 수 있었지만 전적으로 믿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었다. 반면 퇴원을 강제로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금단증상을 극복하지 못하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텐데 믿을 수 있을까?’
김지훈이 난감함에 입을 열지 못했다.
진퇴양난이란 말이 딱 어울렸다.
환자와 눈을 마주치며 묘한 침묵을 이어 나갔다.
그때 때마침 윤석진이 찾아왔다.
한 번 맡은 환자를 끝까지 책임지고자 하는 자세였다. 설령 다른 일 때문이라도 유일하게 상의할 수 있는 의사임이 분명했다.
상황을 설명했다.
윤석진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환자분, 정말 퇴원하고 싶으십니까?”
“예.”
“김 교수, 외과 치료가 다 끝났고, 우리 과도 할 수 있는 치료가 없는 이상 막을 이유가 없잖아?”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정도가 많이 달라서 그렇지, 데메롤 중독은 담배와 다를 게 없어. 끊는 게 아니라 참는 거야. 본인 이외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이야. 지난 오 일 동안 데메롤을 한 번도 맞지 않았다면 환자분 의사를 따르는 것이 맞아.”
경험이 훨씬 더 많은 의사의 판단이었다.
결정적으로 절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수차례 확인했다.
환자의 퇴원 의사는 확고했다.
“언제 퇴원하고 싶습니까?”
“내일이라도 가능하면 바로 퇴원하고 싶습니다.”
“윤석진 선생, 괜찮을까?”
“치료가 남았다면 주치의 결정을 따라야 하지만 지금은 환자 생각이 가장 중요할 것 같다. 옥시코돈 하나로 붙잡을 수는 없잖아?”
매몰차다고 생각될 정도로 냉정했다.
아마도 경험의 차이일 것이다.
김지훈이 최인선 환자를 보았다.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더 이상 외과 치료가 필요 없는 상태였다. 결코 완치되지 않을 만성 췌장염과 그에 수반되는 통증 역시 의료진이 전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남은 길은 하나였다.
의사의 한계이기도 했다.
“좋습니다. 퇴원시켜 드리죠. 단 하나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술 전 제게 했던 말, 그때 가졌던 마음과 의지를 절대 잃지 말아 주십시오.”
“이겨 낼 겁니다.”
“이 주 후 외래 진료를 잡겠습니다. 웃는 얼굴로 서로를 볼 수 있길 바랍니다.”
뜻밖의 시간, 의외의 결정이 내려졌다.
장미라 수술에 전념하라는 의미일지 모르지만 어느 한 명 소중하지 않은 환자가 없었다. 그날 오후부터 다음 날 오전까지 시간 날 때마다 최인선 환자를 찾은 김지훈이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환자분의 의지를 믿고 싶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야 지옥에서 벗어났는데 또다시 빠져들진 않을 겁니다.”
최인선 환자의 눈빛이 맑았다.
김지훈이 퇴원 지시서에 서명했다.
금단증상이 나타나면 급격히 달라지겠지만 의지를 잃지 않는 한 참아 낼 것이라 믿었다. 복강경 수술의 경이적인 결과가 지속되기를 바랐다.
현실이 지옥이었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