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누구보다 속이 상할 테지만 내색할 손일석이 아니었다. 차라리 말이 없거나 웃지 않았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을지도 몰랐다.
더구나 가족이었다.
까닭 모를 화가 났다.
김지훈이 버럭 소리 질렀다.
“일석아, 그냥 솔직하게 말해. 너도 불편하잖아.”
“어이쿠!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김지훈, 우리 머리에 피 마른 지 오래다. 감정만 갖고 살 수 없어. 그리고 이게 꼭 나쁜 일이라고 단정할 수 있어? 네 좌우명은 또 어디다 팔아먹은 거야?”
카르페 디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중간한 일이든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해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김지훈이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에이! 서울 병원 인력 보충도 제대로 안 되는데 신규 병원은 또 뭐야? 그래. 가게 되거든 최연소 과장, 최연소 병원장 다 해 먹어라.”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었어. 신현수, 내 말 잘 알아들었지? 날 스카우트하려면 이인자 자리에 만족하며 감수해야 할 거야.”
끝까지 농담이었다.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상황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어. 일단 지금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주길 바라.”
“그게 다야?”
“경석이 형,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요. 일석아, 네 조건 잊지 않을게. 고맙다.”
“쩝! 변할 수 있다는 소리가 왜 이렇게 공허하냐.”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자리였다.
어쨌든 입 밖에 나온 이상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상황이 만들어졌다. 사인방이 각자 자신의 미래를 선택한다 해서 목표와 꿈까지 달라질 수는 없었다. 설혹 몸이 멀어진다 해도 같은 꿈을 꾸는 이상 항상 함께하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자자! 오늘 일과 마무리합시다. 장미라 일 잘 해결된 것으로 믿고 즐겁게 퇴근합시다.”
손일석의 너스레가 편치만은 않았다.
회진을 마친 김지훈이 장미라 수술 준비에 필요한 일정만 잡고 곧바로 퇴근했다.
이런 날은 가족의 품이 필요했다.
고경아에게도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고경희에게 연락했다.
저녁 식사 자리를 잡았다.
“경희야, 알고 있었어? 왜 말 안 했어?”
“꽤 됐어. 우리 신랑이 워낙 여기저기에서 듣고 다니는 걸 좋아하잖아. 가게 되면 갈 생각이야. 일석 씨 말대로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고.”
“이사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출퇴근 방향이 반대라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대. 더 오래 걸리는 사람도 많잖아.”
고경희의 목소리가 담담했다.
어떤 결정이 나도 괜찮다는 얼굴이었다.
김지훈이 술잔을 비웠다.
‘휴우! 처제 속마음일까?’
“지훈아, 한 잔 받아. 인생 뭐 있어? 자신의 상황에 맞춰 최선을 다하면 돼. 신규 병원 간다고 망한 외과 의사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아까 말했지? 최연소 과장, 최연소 원장, 얼마나 멋있어. 하하하!”
“내가 같이 웃을 기분이 아니다. 확정된 것도 아닌데 너무 앞서 나가지 마.”
“병원 건립이 중단된다면 모를까, 투석 필요로 하는 환자 수술 누가 맡겠어?”
“혈관 파트가 생긴다는 보장이 있어?”
“없으면 또 어때? 만들면 되고, 기본적으로 다재다능한 사람은 파트를 가리지 않는 법이다. 그냥 간다는 전제하에 살란다.”
“에이!”
기분 좋은 술이 아니었다.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알딸딸해진 김지훈과 손일석의 혀가 꼬였다. 어릴 적이라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어깨동무를 해서라도 마음을 풀었을 테지만 그럴 나이가 아니었다.
술잔만 기울였다.
결국 취했다.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일석아, 가지 마라.”
“김지훈, 내가 먼저 과장 되는 게 싫다는 거야?”
“여기서 먼저 해, 인마.”
“호랑이 두 마리가 같은 산에 살 수 없는 게 세상이야. 확정되진 않았지만 긴장 타라. 이사장님이 우리 모아 놓고 괜히 말을 꺼냈겠어?”
남편이 심하게 취하면 아내의 잔소리는 필수 코스다.
고경아, 고경희의 매서운 눈빛과 엄마, 이모 편 드는 희연이에게 밀려 집으로 향했다. 비틀거릴 때마다 고경아의 눈이 번쩍였다.
‘정신 차려야 되는데 빙빙 도네. 정말 가야 하는 건가? 난 누구하고 간 이식 수술을 하지? 그나저나 일석이도 처제도 건강한데, 왜 애는 안 생기는 거야?’
술기운에 별생각이 다 들었다.
간만에 마신 술이 여러모로 상당히 썼다.
마냥 행복할 수 없는 것이 세상살이인 모양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손일석과 이경석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교수들과 기분 좋게 웃고 떠들었다.
잠자코 그 모습을 보던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며 힘차게 일과를 시작했다.
‘안달복달한다고 변할 일이 아니다. 좋게 생각하자.’
걱정할 일은 따로 있었다.
이사장의 재가가 떨어진 이상 통과는 문제없을 테지만 이사회 결정이 남았다. 그렇다 해도 걱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구부 능선을 넘었다고 생각해야 했다.
의료진에게 주어진 일은 철저한 준비였다.
손일석, 펠로우들과 함께 모였다.
장미라의 전신 상태를 철저히 점검했다.
긴경화로 인한 간 기능 저하로 마취부터 수술까지 많은 위험이 예견됐지만 목적 자체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하는 수술이었다. 수술 전까지 최대한 개선시키는 것 이외에 답은 없었다.
손일석이 손가락을 꼽았다.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신규 병원 일을 싹 잊은 것 같았다.
“수술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여덟아홉 시간?”
“더 잡아야 할 것 같아. 일단 공장과 담도를 연결한 기존 수술 부위를 제거하는 데 두세 시간은 걸릴 거야. 이후 간을 제거하고 건강한 혈관과 담도를 모두 노출시키는 데도 두세 시간 이상 걸리지 않을까?”
“그러고 나서야 혈관과 담도를 이어야 한다면 최소 열 시간은 잡아야 하겠네.”
“어른과 아이의 혈관 굵기 차이를 감안해야 돼. 루뻬(수술용 돋보기)를 사용해야 하니까 더 걸릴 수도 있어.”
“후아! 기약이 없구나.”
이혁원이 눈가를 찡그렸다.
“간 절제는 서너 시간 이내에 끝나는데, 말씀대로라면 공여자 수술보다 장미라 수술을 먼저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통상 공여자 수술을 먼저 시작해 간이 절제되는 시간에 맞춰 수혜자 수술을 진행해야 하지만, 장미라는 이식 준비만도 시간이 너무 걸리는 경우라 반대일 수밖에 없어.”
“간을 절제하자마자 바로 옮겨 줘야 하니까 수술 시작 시간까지 철저하게 계산해 준비해야겠습니다.”
“이준영 선생님이 집도의야. 이식될 간이 나오기까지 세 시간 이상 걸리지 않을 테니까 기존 수술 부위가 제거될 때쯤 공여자 간 절제를 시작하면 맞을 것 같다.”
김지훈의 첫 간 이식 수술이었다.
통상의 경우라도 결코 쉽지 않은 수술이었다.
무엇보다 이식될 간의 건강성이 중요했다.
여기에 기존 수술 부위 제거로 인해 공여자와 수혜자 수술 순서마저 바꿔야 하는 까닭에 어려움이 더욱 가중되고 있었다.
더구나 생체 간 이식이었다.
변수가 더욱 많아지는 것이다.
김지훈이 나종진을 보았다.
“미라 아버님 상태는 어때?”
“현재까지 별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장미라 체중이 이십 킬로그램에 불과한 데다 공여자의 간 상태가 좋아 좌측 간 부분 절제만으로 충분한 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인의 간을 아이에게 주기 때문에 간을 많이 절제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장미라의 발육 부진으로 좌측 간마저 모두 절제할 이유가 없었다.
공여자 회복에 무척 유리한 점이었다.
“체중의 0.8퍼센트 정도만 확보하면 되니까 160그램만 넘으면 되겠네요. 다행입니다.”
유일한 위안에 불과했다.
이준영 교수가 주관하는 공여자 수술 팀의 부담만 줄었을 뿐, 김지훈의 수혜자 수술 팀에게는 거의 영향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공여자 수술이 쉬워진다는 말은 아니었다.
김지훈이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준영 선생님이 집도의지만 퍼스트가 제대로 보조하지 못하면 제일 중요한 혈관과 담도 처리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어. 공여자 간이 적당하지 못하면 수혜자 수술은 이미 실패한 것과 마찬가지란 사실을 잊지 마.”
“명심하겠습니다.”
“서운해도 신기동 선생님과 손일석 선생에게 혈관 수술 교육을 부탁하고, 퍼스트 선발을 맡긴 이유야. 정재복 환자 수술까지 있는 만큼 기회를 잡기 바란다.”
펠로우들의 눈이 번쩍였다.
퍼스트 기회는 단 두 명에게만 주어진다. 최악의 경우 두 건의 수술 모두 한 사람이 퍼스트로 참가할 수도 있었다. 아차 하는 순간 귀중한 기회를 날리는 것이다.
‘간 이식 수술에 참가하지 못하면 자칫 췌장 라파로에서도 밀릴 수 있다. 절대 놓쳐서는 안 돼.’
긴장이 눈에 보였다.
한동안 수술 논의가 이어졌다.
실패는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했다.
몇 번을 반복해도 부족했다.
제법 어둠이 짙어지고 나서야 자리를 끝냈다.
김지훈이 손일석과 함께 장미라를 찾았다.
엄마와 함께였다.
아버지는 아직도 일터를 지키고 있었다.
“어머님, 사정은 알지만 곧 수술 날짜가 잡힐 겁니다. 감기도 걸리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죠? 절대 무리하면 안 되니까 아버님 퇴근을 앞당겼으면 합니다.”
“이번 주까지 일하고 그만둘 거예요.”
장미라 엄마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출퇴근 시간마저 일정하지 않은 불안한 직장이었다. 그마저 그만둬야 한다면 생계 자체가 막막할 것이다. 그래도 장미라를 볼 때면 손을 잡으며 웃었다.
엄마의 눈물이자 마음이었다.
김지훈이 애써 한 가족의 현실을 외면했다.
모든 것을 책임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라야, 내 말 들었지? 곧 수술받아야 하니까 우리 말, 어머니 말 잘 들어야 돼. 아픈 데 있으면 감추지 말고 꼭 얘기해야 된다.”
“예, 선생님. 수술받으면 건강해지는 거 맞죠? 우리 엄마, 아빠 그만 울어도 되죠?”
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한 아이가 부모 걱정부터 했다. 처음보다 목소리에 실린 힘은 좋아졌지만 가슴 아린 말이었다.
‘네 걱정을 먼저 해야지. 아프면 아프다고, 무서우면 무섭다고 말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크면 엄마, 아빠가 더 슬플 거야.’
김지훈이 장미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키도 크고, 살도 많이 쪄서 퇴원하게 될 거야.”
“정말요?”
손일석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너무 씩씩해서 걱정거리가 한 개도 없네. 꼬마 아가씨! 우리만 믿어.”
장미라가 환하게 웃었다.
김지훈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는 손일석이었다.
아마도 수술이 시작될 때쯤이면 훨씬 더 친해져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임신 소식조차 없다는 사실이 유난히 신경 쓰였다.
‘곧 발령 난다는 것 때문에 그런가?’
자식의 병은 부모의 눈물이지만 불임 역시 분명한 아픔이었다. 대부분의 부부에겐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아이를 간절히 바라는 부부일수록 더욱 아플 것이다.
말 꺼내 봐야 처제와 친구 가슴을 후벼 파는 일밖에 되지 않았다. 김지훈이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검사 결과를 또 한 번 확인했다.
당연히 퍼스트를 서는 손일석과 함께였다.
아이 아빠의 간은 건강했다.
좌측 간의 부분 절제로도 필요한 간을 얻기 충분해 보였다. 좌측 간 크기가 우측 간보다 훨씬 작은 이상 수술 후 문제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역시 장미라의 혈관과 담도였다.
“기존 수술 부위를 제거하면 간 적출에 어려울 일은 없는데, 몇 번을 봐도 혈관과 담도 확보가 쉽지 않아 보여.”
“췌장관과 합류하는 부분 바로 위에서 정상적으로 자란 담도가 관찰되는 이상 이 부분이 관건이겠어.”
고개를 끄덕인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간경화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커진 혈관이 상당히 많아. 처리 과정 중 발생할 수밖에 없는 출혈에 바짝 신경 써야 돼.”
“그렇게 혈관 수술을 했는데 사진만 봐도 겁나네. 정맥과 문맥은 그나마 굵은데 동맥이 얼마나 가늘지 모르겠다. 루뻬를 써도 연결이 쉽지 않겠어.”
“공여자 간 혈관과 사이즈 차이가 상당하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돼. 아이 혈관을 사선으로 자른다 해도 단면 크기가 맞을지 모르겠다.”
끙 소리가 절로 터졌다.
첫 간 이식 수술로 너무 어려운 케이스가 잡혔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상대적으로 쉬울 정재복 환자를 먼저 수술했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혈액형이 달라 면역과 관련된 약제를 추가로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더욱이 장미라의 상태가 훨씬 불안해 순서를 바꿀 여지도 없었다.
김지훈이 힐끗 손일석을 보았다.
‘내 자신과 일석이를 믿자. 최고의 수술 팀을 꾸리는 이상 실패는 없다.’
각오가 전해진 걸까?
“최고의 퍼스트가 무엇인지 보여 줄게. 나만 믿어.”
눈매가 매서워진 손일석이 씨익 웃었다.
김지훈도 웃었다.
부족한 자신감을 채워 줄 최고의 위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