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재단에 대한 생각이 후배들의 처우까지 이어졌다.
도처에 시한폭탄 같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선배로서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미안하기만 했다.
‘어쩌면 내 열정이 이런 문제들이 점점 더 심각해지는 데 일조할지도 모른다. 환자를 버리고 기계적으로 일할 수도 없고, 의사를 기계처럼 부리는 현실을 부정할 수도 없고 난감하네.’
상황을 보는 시각이 같지도 않았다.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피부로 느끼는 한계와 밖에서 보는 피상적 관점의 차이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사실 의사 이외에 관심을 두는 사람마저 거의 없었다.
해결책은 결국 재정 투입, 적절한 분배, 기피 과에 대한 지원이었지만, 팍팍한 삶에 의료 보험료까지 오르는 것을 반길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김지훈이 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누군가에게는 현실이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딱딱하고 불편한 얘기였다. 당사자 중 한 명으로서 개선의 노력과 책임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시대와 세대가 변하는 이상 언젠가 크게 터지겠지만 당장 급한 일은 장미라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없는 걸까?’
전전긍긍 재단의 결정을 기다렸다.
원장단에서 안건을 올렸을 텐데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신현수도 답답한지 여기저기 전화를 넣었지만 신통한 소식이 없었다.
아버지의 후광을 채 벗지 못한 젊은 재단 이사의 한계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재단 내의 역학 관계가 만만치 않다는 방증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간신히 끌어 올린 장미라의 상태가 언제 악화될지 알 수 없었다. 수술받을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됐을 때를 놓치면 절대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미 공여자도 아이 아빠로 결정됐다.
수술 팀의 준비도 상당 부분 진행된 마당이었다.
김지훈의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스케줄부터 잡아야 하는 걸까? 재단에서 거부하면 어떻게 하지? 일석이 말대로 야반도주하게 만들어?’
별생각이 다 들었다.
갑갑한 시간이 무심하게 흘렀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생각만이 남았다.
그때 신현수가 급히 찾아왔다.
손일석, 이경석과 함께였다.
“지훈아, 지금 시간 있지? 이사장님께서 찾으신다.”
“우리를?”
“솔직히 말해 그간 다소 부정적이셨는데 생각이 바뀌신 것 같아. 이사회에 정식 제안하기 전에 먼저 만나 보고 싶으신 모양이야. 정확하게 상황 설명하고, 우리 의사를 전하면 기대할 수 있겠어.”
열한 명으로 구성된 이사회지만 현재의 병원을 만들어 낸 신동철 이사장의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있었다. 동의를 받아 낸다면 사실상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인방 모두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말 한마디 삐끗하면 미라 수술 물 건너간다는 각오로 다들 정신 바짝 차리자구. 산전수전 다 겪었을 이사장님 같은 분이 절대 허술할 리 없잖아. 현수가 누구 닮았겠어?”
긴장 풀 사람 아무도 없었다.
사인방이 이사장실로 향했다.
똑똑똑!
“들어와요.”
자리를 권하는 신동철 이사장의 눈빛이 유난히 매서웠다. 소파에 앉던 김지훈이 문득 든 한 가지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액수가 적지 않다지만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었다.
전체 이사회가 아닌 약식 회의를 통해서 충분히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이사장 개인의 권한만으로도 가능한 일일지 몰랐다.
내심 의문스러웠다.
직접 자리를 만들어야 할 정도로 이사장에게 중요한 문제일 리 없었다. 단순히 돈 문제라 여기는 생각 자체가 무리였다.
‘무척 드물긴 해도 이런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네. 나보다 내부 사정을 훨씬 잘 아는 현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혹시 신규 병원 건립 때문에 여력이 없는 걸까?’
때때로 사소한 문제가 발단이 돼 대단히 심각한 일을 일으키듯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일일 수도 있었다.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신동철 이사장의 눈이 김지훈에게 향했다.
“원장단을 통해 대략 내용을 들었습니다만 직접 듣고 싶군요. 희귀 질환을 앓는 아이가 한둘이 아닌 상황에서 장미라라는 아이를 무료로 치료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특별한 대우를 해야 하는 이유가 궁금하군요.”
대답은 이번 일을 주도한 사람의 몫이었다.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객관적인 당위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개인적인 감정을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두 건의 수술이 간 이식이라는 사실, 특히 생체 이식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원 포트 복강경 수술 및 복강경을 이용한 췌장 수술에 이어 간 이식이 귀국 직후 말씀드린 외과 발전 계획이었습니다.”
“무료 치료와 무관한 문제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는 발전을 도모할 수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국내 간 이식 실태를 감안할 때 병원 전체로 봐도 좋은 기회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원 포트, 췌장 라파로, 생체 간 이식이라는 세 종류의 수술이 방송까지 타게 되면 우리 병원의 위상은 물론 재정적인 면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신동철 이사장이 입술을 모았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새로운 시도라는 점은 차치하고, 간 이식과 췌장 수술이 활성화되면 외과를 넘어 관련된 모든 임상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치료비가 엄청나지만 그만큼 투입 시설과 인원이 많아야 한다면 비용 자체가 적지 않게 들겠죠. 적자를 면할 수 있다고 봅니까?”
동일한 노력, 동일한 비용을 전제한다면 전적으로 수술 건수에 달린 일이었다. 일 년에 몇 건 정도로는 적자를 피할 길이 없었다. 보면 볼수록 손해가 쌓이는 중증 외상 파트와 다른 상황이라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간담췌 파트의 역량을 모두 동원하고, 꾸준히 좋은 결과를 낸다면 병원에 손해를 끼치지 않을 겁니다.”
“자신 있습니까?”
“간 이식 대기 환자만 수천 명에 달합니다. 활성화되면 신장 이식까지 크게 늘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복강경 수술 확대로 추가되는 수입까지 고려해 주십시오.”
“간담췌 파트 전체 수입으로 따져 달라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김지훈은 당당했다.
수입이 얼마나 늘지 알 수 없지만 자신과 외과의 역량을 굳게 믿고 있었다. 신동철 이사장도 잘 알고 있는 주지의 사실이기도 했다.
‘일억 남짓을 투자해 병원과 아들의 장래에 도움이 된다면 무척 많이 남는 장사군.’
내부적 시각과 개인적 이해에 국한된 문제였다. 최신 의료를 도입한다고 해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으면 효과는 반감되기 마련이었다.
이를 해결한 방안을 신현수가 가져왔다.
“신현수 선생, 내게 해야 할 말이 있을 텐데.”
“다큐 형식으로 장미라와 희귀 질환에 대해 방송할 예정입니다. 촬영 장소가 본원인 만큼 상당한 홍보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확실해?”
“이미 정훈철 국장님과 방송국의 결정이 났습니다. 장미라 수술이 결정되는 즉시 촬영을 시작하기로 했고, 원 포트와 췌장 복강경 구체적 소개까지 약속받았습니다.”
“홍보를 해 주는 대신 무료로 치료해 달라? 돈 안 되는 일을 두고 환자와 상관도 없는 사람이 이런 기획을 하다니 살짝 감탄이 나오기는 해.”
“저도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시청자 입장에서는 방송국보다 우리 병원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원 포트 수술은 상당히 알려졌고, 췌장 라파로 문의가 들어오는 상황까지 무척 고무적입니다.”
신동철 이사장이 깍지를 꼈다.
눈가를 좁힌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의중을 알 수 없었다.
대화 내내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매서운 눈빛도 여전했다.
제법 시간이 지나 사인방에게 일일이 눈길을 주었다.
드디어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내일 열리는 이사회 안건으로 정식 상정하겠습니다. 원하는 결과를 기대해도 좋습니다.”
사인방 모두 뛸 듯이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그 전에 나도 개인적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신동철 이사장의 목소리가 나직해졌다.
왠지 같은 듯 전혀 다른 분위기가 감돌았다.
사인방 모두 귀를 쫑긋 세웠다.
“교수님들 모두 신규 병원 건립에 대해 들었을 겁니다.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역시 인력 충원이 가장 관건입니다. 경험 많고, 능력 있는 의료진이 핵심이겠죠.”
신현수는 물론 김지훈까지 바짝 긴장했다.
자리를 만든 진짜 이유일 수 있었다.
‘설마 이 자리에서?’
이미 누가 갈지를 두고 오고 간 말이 있었다.
외과 내부적으로 거의 윤곽을 잡았다. 하지만 기정사실화된 손일석에게 언급조차 하지 못했다. 경우에 따라 이경석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부담이 가실 상황이 아니었다.
“일단 신현수 선생이 가게 될 겁니다. 곧 서울은 물론 천안과 구미의 기존 외과 교수님들에게 합류를 요청하고, 동의한 분 중 한 분을 과장으로 선임할 예정입니다.”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더구나 이사장이 직접 언급해 상당한 의미가 있건만 손일석과 이경석은 의외로 담담했다. 신규 병원 건립이 이미 진행 중인 데다 기존 외과 구성원의 이동이 필연적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었다.
사실 누구보다 상황 판단이 빠른 손일석과 가장 침착한 이경석이라면 지나가는 말일지언정 이미 대화를 나누고도 남았다.
손일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서울 병원에서는 누구에게 요청할 생각이십니까?”
“젊은 교수님들이 주축이 되길 바라고, 부족하나마 신현수 선생이 해당 교수님들을 먼저 만나 볼 겁니다. 최종 결정은 그 후에 내릴 예정이고요. 여기 계신 교수님들도 대상자가 될 수 있습니다만,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은 그 때문만이 아니에요.”
“우리와 관련된 더 중요한 일이 있으십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 난 이사장 이전에 자식을 둔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서로 어떤 사이인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해서 앞으로 신현수 선생이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는 한, 우리 병원에 근무하는 한 전적으로 도와주길 바랍니다.”
이경석이 곧바로 대답했다.
“이사장님, 그 부분은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신현수 선생과 같은 병원에 근무하든, 다른 병원에 근무하게 되든 일반외과 식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일반외과의 이런 모습이 참 좋습니다. 마음이 놓이네요. 하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틀리지 않더군요. 행여 서운한 일이 있더라도 슬기롭게 헤쳐 나가길 바랍니다. 부탁합니다.”
신동철 이사장의 말이 의미심장했다.
신규 병원으로의 인사 발령 후 있을지 모를 불평과 불만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하는 의도만은 아니었다. 신현수에 대한 전폭적 지지와 신뢰를 부탁하는 모습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우리 사이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 굳이 강조하신 이유가 단지 걱정 때문일까? 후우! 일석이 눈치가 빤할 텐데 발령 문제는 또 어떻게 풀어 나가지?’
당부의 말이 이어진 후에야 자리가 끝났다.
김지훈의 표정이 밝지 못했다.
장미라 문제는 거의 해결된 반면 신규 병원을 생각할 때마다 느껴지던 부담이 도리어 가중됐다. 최종 결정권을 가진 이사장의 입을 통해 거론됐다는 사실이 더욱 껄끄러운 상황을 유발했다.
신현수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안정적으로 굴러가는 병원을 두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 수밖에 없는 신규 병원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가족의 생활까지 걸린 마당이었다.
손일석이 피식 웃었다.
“얼굴이 왜 이래? 누구 죽었어? 현수야, 커피나 한잔하자. 경석이 형, 어때요?”
“좋지.”
교수실에서 마주 앉았다.
커피가 꽤 썼다.
이경석이 커피 잔을 빙빙 돌리며 입을 열었다.
“현수가 먼저 꺼내길 바랐는데 이사장님이 치고 나오셨네. 현수야, 일석이하고 내 눈치 볼 이유가 없어.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 위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아직 누가 갈지 결정된 것은 없어요.”
“다른 과에서 말 나오는 거 보니까 직급을 맡아야 하는 몇몇 선생님을 빼고는 거의 다 조교수급이더라. 결국 우리 과도 여기 모인 네 명이 일차 대상이겠지. 안 그래?”
“부인하기 어렵네요.”
“그럼 거의 답이 나왔네.”
이경석이 손일석을 보았다.
이미 서로 상의했을 것이란 짐작이 맞았다.
크게 동요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무척 아쉽지만 대안이 없다는 사실 우리도 잘 알아. 간담췌는 이준영 선생님과 지훈이 빼면 굴러갈 수가 없으니까 논외로 하고, 우리만 봤을 때 딱 답이 나오잖아. 현수 너까지 간다니까 빼도 박도 못하겠네.”
“나와는 무관한 문제야.”
“자식! 정색하기는. 신규 병원 외과 팍팍 돌아가려면 누가 필요하겠어? 세 개 병원 통틀어 선두 주자인 경석이 형하고 내가 빠지면 말이 되냐? 최소 둘 중의 한 명은 가야 우왕좌왕할 신현수를 잡아 주지.”
“도움이 필요하기는 해.”
손일석이 크게 웃었다.
“솔직하게 말하니까 좋잖아. 투석실 운영도 고려한다며? 스승님이 가실 수는 없고, 혈관은 서울 병원만 활성화된 상태니까 당연히 내가 가야겠네. 대장 파트는 대안이 많아서 경석이 형은 유동적이고 말이야. 맞지?”
“어느 정도는 맞아.”
“냉정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놈이 왜 이렇게 말을 빙빙 돌려? 세상은 강호야. 순탄하기만 할 리가 없잖아? 귀양 가는 것도 아니고, 신규 병원이 팍팍 크면 도리어 우리 입김이 세지는 거 아냐? 이참에 과장이 아니라 최연소 병원장을 목표로 삼아야겠다. 송재덕 선생님하고 동급이 되는 거지. 지훈아, 어때?”
“제길! 간 이식 멤버로 일석이 네가 꼭 필요한데,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펠로우 세 명을 우리 파트에 보내 놓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아주 그냥 피투성이를 만들어서라도 가기 전에 확실하게 만들어 놓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미안하다 못해 화가 날 정도로 너무 태연했다.